소설리스트

나만 보는 탑 공략집-21화 (21/292)

21화

이런 순간에 웬 소설?

게다가 제목부터가 싼 티가 풀풀 났다.

SSS급 회귀자의 기연 싹쓸이라니.

안 읽어 봐도 전형적인 양판소라는 게 느껴졌다.

“하아!”

옆 칸의 검술 카테고리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해동검술, 오재검법, 무영검법…….

내가 필요로 하는 중급 검술이 이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은 더욱 컸다.

눈물을 머금고 공략집이 일러 준 대로 소설책을 책장에서 꺼냈다.

무슨 속셈으로 내게 소설을 추천해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까라면 까는 수밖에.

[SSS급 회귀자의 기연 싹쓸이를 선택하였습니다.]

[번복은 불가능하며, 책의 내용을 절대 발설할 수 없습니다.]

5층 미션까지 남은 시간은 약 24시간.

책이 좀 두껍긴 하지만, 서두른다면 세 번 정도는 정독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벽 한쪽 구석에 몸을 기대 책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프롤로그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등장인물들의 오글거리는 대사 하며, 말도 안 되는 설정들.

소설 내용은 진행될수록 가관이었다.

우주의 모든 운빨은 주인공에게 쏠렸으며, 개연성은 갈수록 개판이 되어 갔다.

위기감은 1도 느껴지지 않았고, 사이다만 추구하는 스토리 전개는 너무 뻔한 내용들뿐이었다.

“쓰레기 같은 양판소로군!”

이걸 에필로그까지 다 읽었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몰려왔다.

애초 계획대로 3회독을 하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항마력이 너무 딸린다.

“호영이 형, 뭐 봐?”

김세용이 나에게 다가 왔다.

녀석의 손에는 <권왕의 기술>이라는 무공서가 들려 있었다.

“왜 인마!”

“왠지 형은 좋은 거 골랐을 거 같아서.”

“바꿀래?”

김세용을 향해 책 표지를 들어 보였다.

녀석의 미간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설마 소설이야?”

“그럼 이런 제목으로 소설 아니면 뭐겠냐?”

“와! 씨! 제목 봐라. SSS급 기연 싹쓸이? 크크크크.”

뭔가 진 기분이었다.

공략집이 내게 이걸 추천해 준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책 내용 안에 숨겨진 비기가 있을지 몰라, 한 글자 한 글자 정독했지만 그런 것은 없는 것 같았다.

주인공은 검을 다루지도 않았으며, 그의 주 무기는 사기템이었기에 특별한 기술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결론적으로 책을 읽으며 얻은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세용아, 그건 좀 읽을 만하냐?”

궁금했다.

무공서를 고른 사람들은 만족하고 있는지.

독서와는 담쌓고 살았을 거 같은 김세용이라는 게 문제지만.

“이거? 완전 쩌는 거 같아!”

“책 내용을 이해할 수는 있고?”

“지금 그 말은 나 무시하는 거?”

정답.

이놈이 책을 읽는 모습은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책을 보며 얻는 게 있냐는 뜻이야.”

“당연히 있지! 이거대로 수련하면 스킬 레벨을 올릴 수 있을 거 같은 느낌?”

그 말을 듣고 나니, 2연패를 한 기분이 들었다.

김세용이 이럴 정도라면 다른 사람들은 습득하는 것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일단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 봐야겠다.

숨겨진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 * *

“아무리 봐도 쓰레기 소설인데.”

욕이 절로 나왔다.

공략집의 추천 때문에 이런 쓰레기 양판소를 무려 두 번이나 읽었다.

물론 숨겨진 비장의 기술 같은 것은 없었다.

현자의 상태창이 혹시 에러를 일으킨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이미 선택한 것을 뒤집을 순 없다.

문득 다른 사람들의 상황이 궁금해졌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리를 잡고 독서에 열중을 하고 있었다.

“뭐 읽냐?”

책장에 몸을 기대고 있던 손서연은 내가 근처에 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니지.

손서연의 감각 스탯을 고려한다면, 그럴 리가 없다.

분명 나를 피하고 있는 것이다.

“야, 손서연.”

그녀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방해하지 마라. 독서하고 있는 중이다.”

표지를 보니, 책 제목이 <살인의 기술>.

진짜 미친년이 틀림없었다.

“책장의 배열들이 혹시 미로 같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

“무슨 말이냐?”

“도서관에서 길 잃지 말라고.”

내 말에 손서연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싸늘한 살기가 느껴졌다.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이 생겼다.

“혹시 그 책에 나온 대로 날 죽이려는 거냐?”

공략집에 따르면 살성은 <피의 날>에 살인을 저지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직접 설정한 주요 표적.

“……왜 그런 생각을 했지?”

그녀가 나에게 되물었다.

하긴 찔리는 구석이 있으니 움찔할 만도 하다.

“넌 사람 죽일 관상이니까.”

“뭐?”

그녀는 살성이 되기 위해 십수 명은 족히 죽였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사실.

“내가 관상을 좀 볼 줄 알거든. 넌 뭔가 불길한 살(煞)이 끼어 있어.”

일단 이렇게 선수를 쳐 놓았다.

그녀가 생각이 많아지도록.

“미친놈!”

순간 그녀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살짝 미안해지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미안해할 이유가 없었다.

손서연이 살성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며, 난 그녀의 살인 계획의 주요 표적이니까.

그러다 문득 그녀가 내 책에 눈길을 돌린다.

“SSS급 회귀자?”

손서연은 내 책의 제목을 보고 의문을 표했다.

순간 움찔했다.

내가 지은 제목도 아닌데 쪽팔림은 내 몫이 되어 버렸다.

“왜? 보고 싶냐?”

물론 그냥 해 본 말이다.

단 한 줄이라도 책의 내용을 발설해서는 안 되니까.

“궁금하긴 하군.”

“뭐? 궁금해?”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었다.

이런 거 안 좋아하게 생겼는데,

“그럼, 다음번에는 회귀해서 이거 고르든가.”

그렇게 나는 그녀의 옆을 지나쳐 걸어갔다.

잠시 후 멀리선가 손서연의 읊조림이 들린다.

- 회귀라…….

얜 또 뭐가 이렇게 진지하냐.

* * *

나는 의지의 한국인이었다.

결국 이 양판소를 목표했던 대로 3회독을 해 버리고 만 것이다.

혹시 나에게 의지와 끈기를 심어 주려고 이 책을 고르게 한 건가?

그런 생각이 들 만큼 나랑은 맞지 않는 책이었다.

이제 미션 시작까지는 앞으로 6시간.

사람들은 여전히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책을 읽는 사람이 반, 무언가 수련을 하는 사람 반이었다.

수련을 하고 있는 사람도 책 내용에 대한 실습일 것이다.

둘러본 바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이 자기 직업과 관련되어 있는 책을 선택했으니까.

나만 빼고 말이다.

나와 같은 검투사인 서준호는 검술 훈련에 한창이었다.

펼쳐지는 검술의 모습을 보아하니 초급 검술의 스킬 레벨이 2에 도달해 있었다.

현자의 상태창으로 확인해 보니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검술이 많이 좋아졌네요. 서준호 씨.”

내 말에 서준호가 검을 멈추고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런가요? 아직 호영 씨에 비하면 많이 부족한 거 같은데.”

사실 이게 조금은 어색한 대화이기는 했다.

내 검술이 강한 이유는 수련의 결과가 아니다.

그저 서준호보다 더 많은 골드를 때려 박았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수련하는 거, 효과는 있습니까?”

이제 5층 미션이 임박했고 지금쯤이면 효과가 있어야만 했다.

그것이 갑자기 도서관이 생성된 이유일 테니까.

“글쎄요. 아직은 잘…….”

아직도?

서준호라면 우리 그룹에서 가장 게임 시스템에 잘 적응해 나가는 한 명.

그런 그가 확신이 없을 정도라면, 다른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서준호는 잠시 머뭇거린 후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뭔가 검술의 이치를 깨닫는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김세용이 했던 말과 비슷했다.

깨달음 그리고 이치.

이런 깨달음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펼쳐질지는 아직은 알 수 없다.

5층에 가서 미션을 진행하다 보면 알게 될 거 같다는 막연한 생각만 들 뿐이다.

“그렇군요.”

검술의 이치.

난 그런 건 단 한 번도 깨달아 본 적 없이 레벨 3에 도달했다.

뭔가 부러운 느낌마저 들며 오늘 하루만 3패를 한 느낌이 들었다.

* * *

양판소를 3회 읽고 나서 남은 시간은 6시간.

차마 또 읽을 수는 없어서 그 이후론 수면을 취했다.

일어났을 땐 머리가 맑아지며 더없이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잠들기 전 읽었던 소설의 내용들이 머릿속에서 또렷이 재생될 만큼 두뇌 회전은 쌩쌩했다.

“역시 호영이 형!”

김세용이 옆에서 섀도복싱을 하며 말했다.

휙. 휙.

바람을 가르는 녀석의 주먹질이 경쾌했다.

“왜?”

“형만 여유가 넘치잖아.”

“혹시 설마……?”

모두가 밤을 새운 모양이었다.

다들 책의 구절구절을 반복해 읽으며 수련을 했다고 한다.

속 편하게 자고 있었던 것은 오직 나뿐이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선택한 것은 소설책.

수련의 여지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으니까.

“혹시 그 책에는 회귀하는 방법이라도 나와 있는 거야?”

김세용의 뚱딴지 같은 질문.

나도 처음에는 그런 게 아닐까도 싶었지만, 전혀 아니었다.

회귀의 방법에 대해서는 작가도 그냥 뭉뚱그려 넘어갔다.

설령 방법이 나와 있더라도 내가 실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겠지만.

“몰라, 인마!”

“그럼 내 주먹질 좀 한번 봐줄래?”

그러면서 김세용이 허공에 대고 돌주먹 스킬을 펼쳤다.

호쾌하다.

언제나처럼.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딱 그 정도일 뿐, 아직 달라진 것은 없다.

“잘하네.”

“정말? 크크크.”

김세용이 내 칭찬에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그리고 그 순간, 알림 메시지가 모두에게 들려 왔다.

[지금부터 5층 미션을 시작합니다.]

드디어 왔다.

내게 소설책을 추천한 이유, 그 의문이 밝혀지는 시간이.

[탑의 5층으로 이동합니다.]

우리 그룹의 열세 명은 순식간에 낯선 장소로 안내되었다.

응?

그런데 배경이 좀 이상하다.

평소랑은 달라도 많이 다르다.

“여기는 교실 아닌가요?”

우리는 어느 낯선 교실에 앉아 있었다.

이곳에 존재하는 사람은 우리들뿐만이 아니었다.

배경 속에 존재하는 많은 인물들. 느낌적으로 알 수 있다.

저들은 우리와 같은 플레이어가 아니라는 것을.

“뭔가 이상합니다!”

서준호가 외쳤다.

우리를 제외한 다른 배경들은 마치 정지된 화면처럼 멈춰 있었고, 배경으로 존재하는 인물들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당장이라도 활기를 되찾을 것만 같은 모습으로.

공기의 흐름마저 느껴지지 않는 이 낯선 장소에 우리들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미션이 시작되면 이 사람들도 살아 움직이는 걸까요?”

아직은 알 수 없다.

그저 메시지의 설명을 기다리는 수밖에.

[5층의 미션은 역할놀이입니다.]

탑은 또 이상한 수작을 부리려 하고 있었다.

뜬금없이 역할놀이라니.

침묵이 감돌았다.

다들 놀란 눈으로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메시지.

[여러분들은 다른 차원의 세상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인간과 몬스터가 공존하여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여러분은 몬스터 ‘헌터’를 양성하는 아카데미 생도입니다.]

[그럼 역할놀이에 필요한 새로운 기억을 주입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악!”

“아아악!”

곳곳에서 신음성이 들려왔다.

나 역시 머릿속이 터져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낯선 정보들이 내 뇌 속으로 몰아쳐 오는 이물감에 헛구역질마저 나올 정도다.

[기억의 주입이 완료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라 온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미션]

1. 앞으로 나흘간 수시로 생성되는 퀘스트를 완수하십시오.

2. 실패하는 플레이어는 즉시 로비로 소환되어 데스 미션을 치르게 됩니다.

메시지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뭐지?”

머릿속에 공존하는 두 개의 기억이 있었다.

원래의 나 이호영과, 낯선 세계에서 살아온 이호영.

내 안에는 두 명의 내가 존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이한 사실 하나 더.

“미쳤다.”

주입된 기억이 완전히 새롭지는 않았다.

이 기억들은 SSS급 기연 싹쓸이를 통해 미리 알고 있던 것이니까.

- 22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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