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이번 4층 미션은 얼핏 보면 쉽지만, 다소 복잡한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몬스터를 잡을 때마다 랜덤으로 열리는 탈출 포털은 단 스무 개.
플레이어는 비록 열세 명뿐이지만, 핵심은 포털이 양도 불가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이 여러 개의 탈출 포털을 여는 것은 타인의 생존 가능성을 갉아 먹는다는 것.
누군가 레벨업에 눈이 멀어 몬스터를 마구잡이로 사냥하게 된다면, 동료들을 잃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의미였다.
이번 미션의 키워드는 인간의 이기심이다.
[공략집이 전송되었습니다.]
역시 이번에도 공략집은 존재했다.
[공략집: 4층의 출현 몬스터는 레벨 10의 오크입니다. 오크는 “취이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지독한 악취를 풍기기 때문에 절대 청각과 절대 후각으로 쉽게 출현 장소를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탈출 포털을 남기는 오크는 색다른 냄새를 내니, 이 정보를 잘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레벨 10의 몬스터라.
손서연 때문에 레벨업이 절실한 내게는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현재 나의 레벨은 2. 오크와의 레벨 차를 고려한다면 이곳 4층은 빠른 레벨업의 무대가 될 것이다.
폐허가 된 도시에서 내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기차역이었다.
철길은 탁 트인 공간이었기에 오크를 발견하기가 쉬울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설령 떼거리로 출몰하더라도 상관없다.
그냥 나와 주기만 하면 땡큐.
스르르!
전방에서 오크가 생성되는 소리가 들렸다.
시작부터 운이 좋다.
“냄새 한번 죽이네.”
몬스터 생성과 동시에 지독한 악취가 풍겨 왔다.
절대 감각이 개방되어 있으니 남들보다 훨씬 더 괴로운 상황일 것이다.
[초급 검술 Lv.3이 발휘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최대한 빨리 해치워 이 악취에서 벗어나는 것.
레벨 10짜리 몬스터라고 해 봐야 별거 없다.
휘익!
휘이익!
베고 찌르고 썰어 주면 바로 5초 컷.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레벨이 3이 되었습니다.]
레벨 재조정이 되지 않는 걸 보니 오랜만에 찐 레벨업이 이루어진 모양이다.
이젠 스탯 포인트를 근력에 좀 찍어 봐야겠다.
나중에 손서연을 세게 때려야 하니까.
* * *
내가 사냥터로 철길을 고른 것은 결과적으로 아주 좋은 선택이었다.
먼 곳까지 시야가 확보되니 몬스터가 리젠 되는 것이 눈에 잘 들어왔다.
다행히 몬스터들도 나를 발견하면 도망치는 일이 결코 없었다.
내 레벨이 더 낮으니 오크들에겐 내가 먹잇감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플레이어가 포털을 열었습니다.]
[남은 탈출 포털: 17]
“벌써 세 개째?”
생각보다 포털이 열리는 속도가 빨랐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심경이 복잡할 것이다.
4층에서의 생존은 사실상 확보하였지만, 약속대로 바로 포털을 통과하면 더 이상 몬스터를 사냥할 수 없을 테니까.
“부디 손서연만 아니기를.”
다행히 방금 전엔 총성이 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오크 한 마리가 나에게 달려든다.
냄새도 냄새지만 생긴 게 진짜 최악이다.
못생긴 돼지를 한 번 더 빻아 놓은 듯한 느낌?
아마 4층 이후로는 못생긴 이들을 일컬어 ‘오크’라 놀리는 게 유행할 것도 같다.
쑤우우욱!
내 불굴의 검이 오크의 모가지를 관통했다.
한방 컷.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내 예상보다 레벨업은 더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다.
레벨 재조정으로 내 실제 레벨에 큰 변화는 없지만, 벌써 4층에서만 세 번의 레벨업을 달성했다.
물론 이번에도 포인트는 근력에 투자했다.
“목표 달성은 금방 하겠군.”
이번 4층에선 최대한 근력을 키워 두는 것을 목표로 해 두었다.
그나저나 이제는 나도 포털을 좀 확보해 놨으면 좋겠다.
제한 시간까지는 아직 많이 남았기에 크게 조급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안전빵 하나는 필요하니까.
물론 포털을 확보한 이후에도 나는 사냥을 계속 진행할 생각이었다.
어떤 몬스터가 포털을 남기는지 구별할 수 있는데, 굳이 포털을 통과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여기서 손서연이 활개를 치게 놔두면 안 되지.”
손서연은 우리가 합의한 규칙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있을 공산이 컸다.
여기서 손서연을 견제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
일단 내 살길만 확보해 놓는다면, 그 이후에는 그녀를 찾을 생각이다.
머릿속으로 대충 전략도 구상해 놓았고.
취이이익!
저 멀리에서 또다시 오크가 리젠 되었다.
냄새도 별로 색다를 게 없으니, 그냥 일반 오크일 것이 분명하다.
혹시 포털을 남기는 놈은 여기서 안 나오는 건가?
사냥터를 좀 바꿔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일단 저놈까지만 잡고.
* * *
“형이 왜 거기서 나와?”
시가지 쪽으로 나와서 가장 먼저 만난 것은 김세용이었다.
나랑 눈이 마주치자 순간적으로 동공이 흔들리는 게 뭔가 수상하다.
“뭐 죄 진 거 있냐? 뭘 그리 놀라?”
“그게 아니라, 난 당연히 형이 진작 포털을 열었을 줄 알았지.”
나도 그럴 줄 알았다.
오크를 잡긴 많이 잡았는데, 포털을 남긴 녀석은 없었다.
그런 이유로 내가 사냥터를 바꾼 것이고.
“그러는 넌?”
“그…… 그게…….”
갑자기 말을 더듬는 걸 보니 확실해진 것 같다.
“새끼. 포털 열었구나.”
“젠장! 방금 잡은 놈한테서 나와 버렸어. 좀 더 늦게 나왔으면 했는데!”
김세용은 레벨업에 몸이 달아 있는 모습이었다.
손서연에게 개망신을 당했으니, 놈의 머릿속엔 복수에 관한 생각만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세용아?”
나지막이 김세용의 이름을 불렀다.
녀석도 무슨 의미인지는 알 것이다.
“내가 남아 있는 건, 호…… 혹시 다른 플레이어들을 도울 일은 없나 해서!”
“그건 좀 비겁한 변명이네.”
김세용이라면 합의된 규칙을 깰 가능성은 다분했다.
내 밑에서 길들여져 있다고는 하나 기본적인 천성이 야생마인 놈이니까.
현재 남아 있는 포털의 개수는 13개.
누군가 독식하지 않고 합의된 룰을 잘 지켰다면 일곱 명이 생존을 확보한 셈이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손서연이 내는 총성은 상당히 높은 빈도로 울려 퍼지고 있었기에.
“알았어! 알았다고! 바로 로비로 복귀한다고.”
“난 눈으로 본 것만 믿는 주의라서 말이야.”
나는 김세용에게 포털로 안내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녀석은 투덜대면서 앞장섰다.
우리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푸른빛 균열이 일렁이는 어느 폐건물의 1층.
“이게 그 탈출 포털이로군!”
“어.”
김세용은 포털 앞에서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아직 제한 시간이 여유 있었기에, 좀 더 사냥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것이다.
“들어가, 인마.”
나는 김세용을 재촉했다.
여전히 녀석은 발을 쉽게 떼지 못한다.
그리고 그 순간.
스르르르.
몬스터 리젠 현상이 일어났다.
오크가 나타난 곳은 불과 전방 5m.
그런데 냄새가 뭔가 좀 다르다.
내가 찾던 그놈.
포털을 남기는 몬스터였다.
“세용아, 들어가라. 좀.”
“형이 이거 어떻게 잡는지만 구경하고 가면 안 될까?”
“어, 안 돼.”
말로 해선 들어먹을 놈이 아니다.
타악.
결국 김세용을 포털 안으로 발로 밀어 넣었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취이이익!
리젠을 끝마친 오크가 나를 향해 돌격해 왔다.
반갑다. 자식아.
* * *
포털은 일단 확보.
그다음으로 중요한 손서연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녀가 간헐적으로 내는 총성과 내 절대 감각, 게다가 거리도 가까웠으니까.
저 멀리 골목을 돌아 나오는 손서연의 모습이 보인다.
한 손에는 총을, 한 손에는 다이어리를 들고 있었다.
총은 그렇다 쳐도 다이어리는 뭐에 쓰는 건데?
“아직 포털은 못 연 거냐?”
내가 먼저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걸 너에게 보고할 의무는 없지.”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애초에 우리에게 협조하지 않겠다고 당당하게 공언까지 했으니까.
“그냥 적당히 하고 로비로 돌아갈 생각은?”
현재 그녀의 레벨은 14.
역시 고레벨이다 보니 레벨업이 더딜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없다.”
“기껏 경험치 몇 먹겠다고 그럴 거냐?”
“귀찮으니까 비켜.”
협상의 여지는 역시 없는 것 같고.
그럼 나도 별수 없다.
“이젠 나도 여기서 오크나 좀 잡아 보려고. 혹시 이 구역에 전세라도 내셨나?”
내 말에 손서연이 총을 들어 올렸다.
“여기서 네 몫은 없을 거다.”
그녀의 말투는 단호했다.
몬스터가 출몰하는 즉시 본인이 총으로 사냥을 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녀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총은 사냥에 더 특화된 아이템이니까.
“과연 그럴까?
나는 손서연을 보며 씨익 웃었다.
그녀는 내 몫을 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기꺼이, 자발적으로. 마음속으로는 애타도록 말이다.
그리고 나와 손서연의 동행은 다른 플레이어들에게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포털을 열어 로비로 탈출할 수 있는 기회.
이제 더 이상 손서연은 사냥을 하지 않을 테니까.
* * *
“이런 운빨좆망겜!”
나는 격하게 짜증을 냈다.
그녀의 눈앞에서 펼친 일곱 번의 사냥.
포털을 남긴 오크는 없었다.
정확하게는 포털을 남길 오크는 내가 다 피해 다녔지만.
“성가신 놈이군.”
손서연이 무미건조한 말투로 날 쏘아붙였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녀도 슬슬 조바심이 날 것이다.
혹시라도 제한 시간 안에 내가 포털을 확보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나는 짜증 섞인 말을 계속 이어 갔다.
“말했잖아. 난 이런 뽑기형 게임은 항상 좆망이라고!”
나에게 사냥감을 넘기지 않겠다는 손서연의 단호함은 초장부터 무너져 있었다.
그녀의 약점을 공략한 것이 주효한 것이다.
손서연은 <피의 날>에 나를 죽여야 하니, 지금 내가 죽는 것은 곤란한 일.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나에게 사냥감을 양보하고 있었다. 내가 포털을 확보할 수 있도록.
“성가신 놈.”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걸 보니 초조한 것이 분명했다.
나로선 다행인 일이지만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살성 손서연은 나를 표적으로 지정했다고 하는데, 그걸 취소하는 건 불가능한 일인가?
이런 성가심을 감수할 정도라면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표적 취소가 불가능하거나, 아니면 표적으로서의 내 가치가 엄청나게 높거나.
어느 쪽이든 손서연은 4층에서 더 이상 사냥을 진행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포털을 남기지 않을 오크만 공격할 예정이니까.
“그나저나 손서연, 네가 양보의 아이콘인 줄은 미처 몰랐는데?”
“세상엔 운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시켜 주고 싶을 뿐이다.”
언성까지 살짝 높아져 있다.
변명도 구차하고.
“혹시 나 좋아해서 양보하는 거냐?”
“미친놈!”
손서연이 내 머리통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지금 당장 못 쏠 것은 알지만 살벌한 기운만은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더 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다.
“저기 오크!”
때마침 건물 반대편에서 오크의 냄새가 느껴진다.
절대 감각이 있었기에, 항상 오크를 먼저 발견하는 것은 내 쪽이었다.
포털을 남길 놈이면 모른 척 패스. 일반 오크는 무조건 사냥.
이번에는 후자 쪽이었다.
“어차피 운빨좆망이겠지만, 잡으러 가야지 어쩌겠어.”
나는 투덜대며 오크를 향해 달려갔다.
사악!
사아악!
내 불굴의 검에 오크는 갈기갈기 썰려 나갔다.
폭발적으로 팽창한 나의 근력 수치가 확실히 체감이 됐다.
스탯이 거의 40에 육박할 정도이니 당연한 일이다.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손서연 앞에서 썰어 버린 여덟 번째 오크.
물론 오크가 죽은 자리에는 포털이 남지 않았다.
“또 없어!”
손서연의 얼굴을 보니 표정이 조금씩 썩어 간다.
미처 몰랐겠지.
나와의 동행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그리고 그 순간 오랜만의 메시지 알림이 있었다.
[어느 플레이어가 포털을 열었습니다.]
[남은 탈출 포털: 5]
동료들의 탈출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나는 손서연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짜증을 냈다.
“이런 운빨좆망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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