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결계 너머, 반대편 로비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손서연.
혼자가 되는 건 그녀에게 두 번째 경험일 것이다.
처음 살성이 되었을 때에도 그녀의 손에 모든 동료들이 죽었을 테니까.
“이제 저 여자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채이설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손서연은 최초의 동료들을 모두 죽인 후 새로운 그룹에 합류한 바 있다.
어쩌면 이번에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
아, 뭔가 싸한 기분이 든다.
내 예감이 빗나가면 좋으련만.
스르르르.
“무슨 소리지?”
저쪽 로비와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결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내 불안한 예감이 적중했음을 확인시켜 주는 메시지와 함께.
[새로운 그룹이 만들어졌습니다.]
역시 그랬다.
“이제부터 저 여자랑 한 편이라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치고받고 싸웠는데!”
순진하게도 우리 쪽 사람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총을 가진 고레벨의 플레이어.
일반적인 경우라면 무조건 환영할 만한 일이다.
손서연이 일반적인 캐릭터가 아니어서 문제지만.
[공략집이 전송되었습니다.]
그리고 순간 현자의 상태창이 내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는 천천히 메시지의 내용을 살폈다.
[공략집: 살성은 <피의 날>이 찾아올 때마다 본인의 특성을 완벽하게 개화합니다. 그날을 대비하여 당신은 레벨업에 만전을 기울이십시오.]
이렇게 현자의 상태창이 공략집을 바로 보내올 정도면, 살성이 이 게임 시스템에서 가진 역할이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피의 날이라.
이름만 들어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대충 상상이 된다.
하필 살성과 같은 그룹이 되다니,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끌어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미션 도중에 저 요물이 제발 좀 죽을 수 있도록 고사라도 지내야겠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료가 되었군요! 반갑습니다!”
안세창이 가장 먼저 그녀에게 다가가 반겼다.
이어서 서준호도 그녀에게 접근한다.
“손서연 씨. 동료를 잃어 상심이 크겠지만, 어쨌든 잘해 봅시다.”
그 모습들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들 아무것도 모르니 답답하기만 할 뿐이다.
뭔가 잘못된 느낌.
앞날이 심히 걱정되는 순간이었다.
“귀찮아.”
그녀는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벽 한쪽에 몸을 기댔다.
안세창과 서준호는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손서연. 역시 평범한 캐릭터가 아니었다.
“이런 싹바가지 없는 년을 봤나!”
손서연의 행동에 김세용이 흥분을 하며 나섰다.
아마 녀석은 그녀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을 것이다.
나를 제외하면 3층에서 손서연의 총을 가장 많이 맞았으니까.
“돼지. 그러다 죽는다.”
“뭐?”
김세용의 콧구멍에서 거친 분노가 새어 나오는 것만 같았다.
녀석은 손서연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지금 자신감이 한창 넘쳐 있을 때다.
3층 미션에서 보상으로 받은 골드를 전부 스탯에 투자를 했으니까.
그것도 모두 근력에.
누가 근력성애자가 아니랄까 봐.
“이 미친년이 지금 뭐라고 지껄인 거지?”
김세용이 그녀의 앞에 섰다.
일촉즉발의 상황.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지금은 <피의 날>이 아니니 큰 사고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김세용이 손서연을 제압할 수 있을 리도 없고.
“그 돼지 대가리 좀 내 눈앞에서 치워.”
이미 선은 넘은 지 오래.
김세용의 이성의 끈도 끊어져 있었다.
휘이이익!
곧바로 돌주먹 스킬이 펼쳐졌다.
김세용의 솥뚜껑만 한 주먹과 조그마한 손서연의 머리. 그 둘이 겹쳐진 순간,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아악!”
주저앉은 것은 김세용이었다.
순간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구둣발로 중요 부위를 채였으니 거의 미칠 것이다.
이후 손서연의 손속에는 자비가 없었다.
퍼어억!
퍼어어억!
김세용의 안면에 무릎 공격이 연이어 들어갔다.
두 방 만에 얼굴은 벌써 피떡이다.
그러기에 상대를 봐 가면서 덤볐어야지.
* * *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미션 도중 얻은 부상은 로비로 복귀하는 순간 완전 수복이 이루어지지만,
로비에서 얻은 부상은 자연적으로 치유되는 일이 없다.
채이설의 치유 스킬만 아니었다면 김세용은 지금도 퉁퉁 부은 얼굴로 있었을 것이다.
내 눈에 보이는 두 사람의 스탯으로 어렴풋이 예상한 결과였다.
그동안 김세용이 무식하게 근력에만 포인트를 몰빵한 것도 문제였고 말이다.
어쨌든 총을 사용하지 않는 손서연의 전략을 탐색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손서연은 지금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나를 찾아올 거라고 예상은 했다.
3층에서 그녀를 죽인 것은 나였으니까.
“할 말 있어?”
“하나만 묻자. 너희들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인가?”
손서연이 내게 묻는 것은 3층 미션에서 사용된 귀환석의 기능.
사실 이 정보의 차이가 승부에 결정적이었다.
“어. 알고 있었어.”
“역시 그랬군. 저 돼지가 세 번이나 등장했던 것부터 말도 안 됐으니까.”
“그러니까 귀환석을 얻었을 때 그게 뭔지 생각이란 걸 했었어야지. 안 그래?”
내 말에 손서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걸 알아낸 건, 역시 너인가?”
“그게 중요해?
“너라는 의미로군.”
말을 해석하는 방식이 아주 제멋대로이다.
결론적으로는 맞았지만.
그리고 순간 현자의 상태창이 나에게 또 한 번 메시지를 보내왔다.
[살성이 당신을 주요 표적으로 지정하길 원합니다.]
[당신의 가치가 인정되어, 주요 표적 지정이 승인되었습니다.]
[피의 날, 당신이 살성에게 죽을 경우 살성은 매우 높은 보상을 획득합니다.]
미친.
이건 또 뭐냐.
대놓고 물어보고 싶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나를 바라보는 손서연의 눈매가 갑자기 포식자처럼 느껴진다.
“손서연, 혹시 할 말 더 있냐?”
지금 이 상황에 대해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 줬으면 좋겠다.
“없다.”
손서연은 그렇게 돌아서 로비의 한쪽 구석으로 가 버렸다.
우리 그룹과 합류하자마자 김세용과 한바탕을 해 버렸으니, 아마도 내내 독고다이로 지내겠지.
그나저나 내가 주요 표적이라니,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지금 내가 손서연과 생사결을 펼친다면 어떻게 될까?
나에게는 중요한 의문이었다.
피의 날이라는 게 언제 찾아올지 알 수 없으니까.
당장 그게 내일이라도 찾아온다면,
……십중팔구는 내가 질 것이다.
스탯은 내가 살짝 우위라 해도 템빨에서 차이가 너무 난다.
불굴의 검도 물론 레어급의 좋은 무기지만, 일반적으로 검이 총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검술 관련 고급 스킬을 내가 가지고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흐음.”
레벨업에 대한 동기 부여가 제대로 된다.
[4층 미션까지 남은 시간은 12시간입니다. 휴식을 취하십시오.]
[수면 중에는 절대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딱딱한 로비 바닥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이 게임 시스템에서 수면이 정말로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눈을 좀 붙일 생각이다.
다른 기본적인 욕구들도 제한되어 있는 마당에, 억지라도 잠을 청하며 인간성을 회복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아.”
어디선가 새어 나온 아주 나지막한 한숨 소리.
청각이 예민한 나는 들을 수 있었다.
김세용이다.
저 멀리 누워 있는 김세용은 눈을 연신 꿈뻑꿈뻑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마도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본인으로선 역대급 골드 보상을 받아 자신감에 넘쳤을 텐데, 그렇게 발려 버렸으니까.
세용아, 나중에 형이 복수해 줄게.
일단 오늘은 잠부터 자고.
* * *
[이제 미션이 시작됩니다.]
[4층으로 이동합니다.]
몇 층까지 있는지만이라도 좀 알려 주지.
순식간에 배경이 바뀌었다.
이곳은 폐허가 되어 버린 어느 도시의 형상이었다.
저 멀리 돔형으로 되어 있는 반투명한 결계도 보이는 게 제한 구역을 나타내는 것 같다.
“호영이 형. 나 다짐한 게 있어.”
김세용이 다부진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말문을 열었다.
“뭔데 인마.”
“손서연, 저년은 내 손으로 죽일 거야. 그러니까 4층에서도 나에게 큰 임무를 맡겨 줘.”
골드 보상을 노리나 본데, 아직 4층 미션이 무엇인지는 공개도 안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시점에서 둘 사이의 격차는 넘사벽.
탑 미션을 한두 층 하드 캐리 한다고 뒤집을 수 있는 차이가 절대 아니다.
“손서연을 죽이고 싶으면, 앞으로도 계속 내 말 잘 들어.”
“어. 알겠어.”
어쨌든 나로서는 좋은 고삐를 하나 얻은 셈.
그리고 드디어 이번 층의 미션이 공개되었다.
[저주받은 이 도시에 재앙이 내려질 예정입니다.]
[도시 곳곳에서 출몰하는 몬스터를 사냥하여 탈출 포털을 확보하십시오. 포털은 로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탈출 포털은 몬스터가 죽은 자리에 랜덤으로 생성되며, 해당 몬스터를 단독으로 잡은 플레이어만 통과할 수 있습니다.]
[포털은 단 스무 개만 생성됩니다.]
[제한 시간: 6시간]
“드디어 몬스터 사냥이다!”
“이제야 좀 할 맛이 나겠어!”
“사람이 열셋인데 포털이 스무 개면 경쟁할 필요도 없잖아!”
기뻐하는 목소리들이 들린다.
지난 2, 3층이 연속으로 플레이어끼리 싸워야 하는 미션이었기에 다들 정신적으로 지쳐 있었던 것.
게다가 몬스터 사냥은 정체되어 있던 우리의 레벨을 올려 줄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였다.
“호영 씨. 이번 4층은 쉽게 갈 수 있는 게 맞겠죠?”
채이설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이 똑똑한 여자도 아직 이번 4층의 잔혹함을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가 않아요. 이설 씨.”
불길한 생각들이 자꾸 머릿속에서 맴돈다.
이번 4층은 처절한 약육강식의 법칙을 유도하고 있었으니까.
“왜 그렇죠? 몬스터의 수준이 높다고 예상하시는 건가요?”
그런 것이 아니다.
몬스터의 수준이 문제였다면 차라리 수월했을 테지.
“아니요. 이번 4층은 인간의 이기심을 시험하는 곳입니다.”
이번 층의 핵심은 재앙을 피할 수 있는 탈출 포털.
문제는 그것이 양도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이해가 잘 안 가요! 설명 좀 부탁드려요.”
“좋습니다. 예를 들어 보죠. 채이설 씨가 처음 잡은 몬스터가 있던 자리에 포털이 나왔다고 합시다. 그럼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글쎄요. 그 즉시 사냥을 멈추고, 포털을 통과해서 로비로 가야 하지 않을까요?”
역시 정석적인 대답.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같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건 이설 씨니까 가능한 겁니다. 몬스터는 사냥할 때마다 우리에게 경험치를 주고 레벨업이 가능하게 만들어 주니까요.”
“계속 사냥을 진행하며 불필요한 포털을 여는 플레이어가 나올 거란 말씀이신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몬스터가 등장하지 않았던 2, 3층에선 레벨업이 없었기에 이것은 달콤한 유혹이 될 것이다.
게다가 포털의 개수는 20개. 애매하게 여유가 있는 수이기에 양심의 부담을 덜어 줄 수도 있다.
“호영 씨. 그럼 포털을 확보하는 순간 사냥을 중지하자고 지금 합의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시도는 해 봐야죠.”
하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살성 손서연. 그녀의 존재가 우리에겐 최대 불안 요소다.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합의된 약속을 지키고자 해도 손서연이 거부한다면 이곳 4층은 혼란의 도가니가 될 테니까.
그리고 그녀의 대답은 정확히 내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싫은데?”
이런 고구마 같은 년을 봤나.
생각 같아서는 다구리라도 치고 싶은데, 가오가 상하는 것을 떠나 예상되는 피해가 너무 컸다.
지금이 ‘피의 날’은 아니지만, 그녀가 마음을 먹은 순간, 몇 명은 그대로 총성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모두가 싸늘한 시선으로 손서연을 바라만 볼 뿐, 그 누구도 행동으로 실행하진 않았다.
김세용도 그저 주먹만 부들거리고 있었다.
“그럼 건투를!”
손서연은 그 말만을 남긴 채 자리를 떠났다.
다들 고구마로 얻어맞은 표정.
젠장. 우리가 여기서 죽치고 있어 봤자 포털을 확보할 확률만 낮아질 것이다.
“일단 우리도 사냥에 돌입합시다. 포털을 확보하고 나면, 다들 알죠?”
내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나도 서둘러야 한다.
레벨업과 포털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니깐.
이번에도 <절대 감각> 스킬이 열일 좀 해 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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