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드디어 시작된 난전.
칼과 칼이 부딪치는 쇳소리가 진동했고,
타아앙!
때로는 총성이 울려 퍼졌다.
선혈이 낭자하고 우리 편의 일부는 이미 죽음을 맞았다.
하지만 우리는 굳이 상대편 플레이어들을 죽이지 않았다.
우리의 1차 목표는 명확했다.
내가 저 제단 위에 성공적으로 안착하여 손서연과 일대일 상황을 만드는 것.
우리는 그저 이들을 뚫고 돌파해 나가면 될 뿐이었다.
“뒈져 버렷!”
퍼어어억!
김세용의 무자비한 펀치가 쏟아졌다.
<돌주먹 스킬>이 제대로 적중할 때면 누군가는 그대로 떡이 되어 쓰러졌다.
이놈은 레벨이 무색할 만큼 확실히 강했다.
나와 손서연을 제외하면 여기선 넉넉하게 최고일 정도로.
타앙!
하지만 저 총 앞에선 모두가 평등했다.
“아아악!”
김세용은 오늘 벌써 네 방째.
마력탄에 대한 면역이 생기면 좋겠지만, 김세용의 피통은 곧바로 바닥을 보였다.
다행히 채이설이 곧바로 힐 지원을 해 주었다.
김세용은 우리의 핵심 전력인지라 채이설이 레이더를 세우고 있었던 것.
“하아. 살았네.”
손서연은 여전히 제단 위에 꼿꼿이 서 있었다.
그녀는 이 난전에 끼어들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마치 여왕의 표정으로 우리를 내려다볼 뿐.
그러다 문득 손서연의 시선이 채이설을 향한다.
사실, 언제까지고 그녀가 힐러인 것을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채이설이 지금부터는 본인도 잘 돌보아야 할 텐데.
하지만 손서연의 총구는 다른 곳을 향했다.
타아앙!
젠장, 욕이 절로 나온다.
이번엔 또 나냐?
“웁!”
가까이서 맞는 총은 느낌이 또 달랐다.
채이설의 힐을 받고 바로 살아났지만, 가슴에 박힌 충격의 잔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손서연의 얼굴을 보니 뭔가 소름이 돋는다.
미친년.
마치 VR 게임이라도 하는 것처럼 무심하게 방아쇠를 당기는 모양이다.
어쨌든 이젠 승부수를 띄워야 할 때.
[초급 검술 Lv.3이 발휘됩니다.]
눈앞의 상대들이 이제는 죽어도 상관없다.
제단과의 거리를 많이 좁혔으니, 손서연에게 빠르게 접근하는 것이 급선무.
휘이익!
휘이이익!
내 검술에 거침이 없어지자, 전세는 순식간에 기울었다.
애당초 우리 쪽이 우세한 전력이었다.
제단 위의 손서연만 제외한다면.
눈앞의 장애물들이 사라지자, 나는 재빠르게 전진하며 제단으로 뛰어들었다.
타아앙!
저, 저, 망할 놈의 총.
가슴이 뜨끈해지며 엄청난 충격이 올라왔다.
속이 뒤집어지는 기분이다.
“후우.”
채이설을 키워 놓길 잘했다.
거리가 벌어져도 곧바로 힐 지원이 들어오는 게 진짜 유능한 힐러가 되었다.
타아악!
나는 몸을 띄우며 제단 위로 올라섰다.
[제단을 점거하였습니다. (1/3)]
[상대방 플레이어를 제단에서 제거해야 합니다.]
이런 거였구나.
미션의 내용이 명확해졌다.
제단을 완전히 점거하기 위해선 우리 편 세 명의 플레이어가 필요했다.
일단은 손서연의 처리가 우선.
휘익!
나는 그녀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물론 그녀의 총구가 향하고 있는 것도 바로 나.
“이미 알고 있겠지만, 한 방에는 안 죽어.”
내가 한 것은 일종의 협박이었다.
여기서 방아쇠를 당긴다면 나 역시 검을 너의 목에 꽂아 버리겠다는.
“내가 연사로 갈겨도?”
“연사 같은 스킬은 없을 텐데?”
연사가 가능했다면 진즉 했을 것이다.
“있다면?”
저건 분명 뻥카다.
난 그렇게 확신했다.
그녀의 상태창에 변화가 생기기 전까지는.
잠시 후 16000이던 그녀의 골드가 8000으로 감소했다.
어느새 그녀의 저격 스킬 레벨은 4가 되었다.
젠장.
“그래 뭐, 연사 같은 거 있을 수도 있겠지.”
이건 예상치 못한 변수.
이런 지척의 거리에서 연사가 터져 나오면 나로서도 방법이 없다.
일단 시간을 벌어야 한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
어쨌든 제단 밑의 상황은 시간이 지날수록 내 쪽으로 유리하게 흐를 테니까.
다행히 그녀는 내게 바로 공격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이건 자만이나 여유를 부린다기보다는, 아예 승부에 관심이 없는 느낌.
손서연은 처음부터 그랬었다.
“레벨 2에 이런 능력이라.”
“현시점에서 레벨을 13까지 올린 게 더 이상한 일 아닌가?”
나의 대꾸에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무표정한 얼굴에 생긴 첫 변화.
어쨌든 그녀는 나에게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그건 나도 피차 마찬가지였고.
그리고 내 착각이 아니라면 지금 손서연의 눈은 빛나고 있다.
혹시 이게 스킬창에 등록되어 있는 <살성의 눈>인가?
“넌 강하군. 어쩌면 나보다.”
손서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한 건 이 여자는 내 스탯을 읽을 수 없다.
그럼에도 막연히 나에 대해 무언가 느끼고 있다는 것.
“그게 느껴져?”
“하지만 중요한 건 아니야. 난 지금이라도 널 죽일 수 있으니까.”
손서연의 말은 절대 허세가 아니었다.
스탯은 내가 근소 우위.
하지만 저 폭력적인 무기와 보유 골드를 감안하면 밸런스는 한 방에 무너진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제단 밑의 상황은 거의 정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김세용과 서준호가 대활약 중이었다.
상대 플레이어들은 지금쯤 최초의 위치에서 부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저년 하나 남았네? 크크크.”
김세용을 필두로 나의 동료들이 제단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손서연의 총구가 향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나.
“네가 이겼다고 생각해?”
손서연은 여전히 태연한 음성으로 내게 물었다.
물론 아직 이긴 것은 아니다.
총을 가진 최종 보스는 건재한 포스를 풍기고 있으며, 죽은 그녀의 동료들은 부활하여 다시 이곳으로 달려올 것이다.
만약 이 상황을 도박사들이 지켜보고 있다면 여전히 우리에게 역배당을 매기겠지.
“글쎄다. 네 총과 내 검 중 뭐가 더 빠를까?”
나는 불굴의 검에 마력을 실었다.
방아쇠에 걸쳐진 그녀의 손가락에도 힘이 들어간다.
이제 남은 것은 건곤일척의 한 방뿐.
그리고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당연히 총이지.”
타아앙!
손서연의 총구가 연기를 뿜었다.
맞다.
내가 펼칠 수 있는 초급 검술은 방아쇠를 당기는 것보다 빠를 수 없다.
쭉 뻗어진 불굴의 검 끝보다 총구를 떠난 마력의 덩어리가 더 빨랐다.
기분 나쁘도록 충격적인 에너지가 내 몸에 거대한 파동을 일으켰다.
머리까지 흔들릴 정도의 고통.
하지만 그 전에 이미 채이설은 내게 힐 지원을 불어 넣고 있었다.
가득 차 있었던 내 피통에 들어온 그녀의 힐은 일종의 신호였다.
이제 승부를 걸어 보라는.
서로 합의되지 않은 작전이지만, 내가 그런 의도도 못 읽을 정도의 바보는 아니지.
[초급 검술 Lv.3이 발휘됩니다.]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검에 마력을 가득 실어 쭈욱 뻗었다.
손서연의 총구는 딜레이 없이 바로 또 연기를 뿜을 것이다.
이제 그녀의 저격 스킬엔 분명 연사 기능이 있을 테니까.
그 전까지의 찰나의 틈.
내 불굴의 검이 손서연의 목에 닿았다.
검 끝이 붉게 물든다.
타아앙!
이젠 노이로제에 걸릴 것만 같은 총성이 내 귀를 괴롭혔다.
아마도 난 죽은 것 같다.
* * *
[공성전에서 승리하였습니다.]
내가 최초의 위치에서 부활하는 동안 일어난 일들이 있었다.
불굴의 검에 목을 내준 손서연 역시 나와 같은 처지가 되었고,
김세용, 서준호, 채이설이 제단을 성공적으로 점거했다고 한다.
[3층 미션을 종료합니다.]
드디어 끝났다.
마지막 순간을 내가 장식하지 못한 건 아쉽지만, 이만하면 만족스러운 결과다.
[로비로 귀환하였습니다.]
승리의 가장 큰 보상은 열두 명 모두가 생존했다는 것.
우리는 서로 끌어안으며 환호성을 질렀다.
지난 1층과 2층의 결과가 너무 가혹했기에, 승리의 기쁨은 너무나도 달콤했다.
[3층에서의 활약도에 따라 골드가 정산됩니다.]
물론 골드 보상의 즐거움도 빼놓을 수는 없다.
김세용의 입가가 계속 실룩거리는 게 꽤 기대를 하는 모양이었다.
마치 크리스마스이브 날에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세용아, 벌써부터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냐?”
“흐흐흐. 솔직히 이번 3층은 내가 캐리한 거나 마찬가지잖아.”
“설레발은 뭐다?”
“형, 그런 법칙은 아무 때나 통하는 게 아니라고!”
김세용이 나를 보며 손을 저었다.
그래 인정.
이번엔 저 녀석의 활약을 절대 빼놓을 수 없다.
정찰부터 시작해서 손서연의 총을 주구장창 맞으며 개고생을 했으니까.
[골드 정산을 시작합니다.]
[당신은 11,700 골드를 지급받습니다.]
오호라.
생각보다 훨씬 큰 액수다.
제단을 점거하는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지 못해 크게 기대를 안 했는데, 역시 손서연을 제거한 게 크긴 컸나 보다.
하긴 그녀는 상대편 전력의 9할 이상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으니까.
나는 다른 사람들의 보상 현황으로 눈을 돌렸다.
“와하하하!”
김세용이 뛸 듯이 기뻐했다.
녀석의 상태창에 찍힌 숫자는 무려 3700이 증가해 있었다.
“세용아, 많이 벌었나 보다?”
“대충 찍어 봐.”
이렇게 좋아하니 장단에 맞춰 주긴 해야겠다.
“3000보다 많이 벌었냐? 업이야, 다운이야?”
“업!”
짜식.
그게 해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부럽다 인마. 근데 내 덕인 건 알지?”
“뭐. 조금은 인정!”
서운하게 조금이라니.
내가 정찰을 보낸 덕에 그렇게 된 줄도 모르고.
다들 골드 보상에 만족하는 눈치였다.
심지어 채이설은 4700이나 받았다.
오히려 김세용보다 많은 액수.
사실 채이설은 이번 3층 미션의 마스터피스였다.
그녀가 없었다면 우리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저 꽤 많이 받았어요. 헤헤!”
“축하드려요. 민감한 문제이니 얼마 벌었냐고는 묻진 않을게요.”
“물어보시면 가르쳐 드릴 수도 있는데. 그리고 이거!”
[채이설이 1200골드 양도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녀는 빌려 간 골드를 갚겠다고 했다.
“사양하지 않고 받을게요.”
사실 채이설 덕분에 생명이 연장됐으니 안 받아도 상관은 없지만, 골드 관계는 깔끔한 것이 좋다.
마음의 빚은 나중에 천천히 갚으면 되니까.
“다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골드 보상으로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서로 간에 덕담들이 오고 갔다.
하지만 그런 환희의 순간도 아주 잠시뿐.
우리로 하여금 현실 자각을 일깨우는 이벤트가 일어났다.
지이이잉!
로비의 한쪽 벽이 투명하게 변하며 바로 옆 구역의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결계에 막혀 있지만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저 건너편은 방금 전까지 우리와 생사를 걸고 다투던 상대 플레이어들의 로비였다.
“저기! 저쪽을 보세요.”
저들은 3층 미션의 패배자들.
우리가 승리의 과실에 취해 있을 무렵 저들은 공포에 떨고 있었다.
잔인한 일이다.
지금 이 순간 저 모습을 보여 준다는 것은.
[데스 미션이 시작됩니다.]
심지어 알림 메시지도 들을 수 있었다.
[지금부터 재앙이 시작됩니다.]
[재앙의 타깃은 3층 미션에서 한 차례의 킬(Kill)도 성공하지 못한 플레이어입니다.]
저쪽 로비에선 균열이 생성되며, 트윈 헤드 트롤이 등장했다.
완벽한 성체.
예전에 우리가 상대했던 어린이 트롤과는 차원이 다른 놈이었다.
“저쪽 편에서는 킬(Kill)을 성공했던 사람이 몇이나 됐었죠?”
채이설의 물음에 우리는 기억을 더듬었다.
성문을 돌파한 후 펼쳐졌던 난전.
거기서 우리 쪽의 몇 명은 죽음을 당했었다.
“저는 총으로!”
모두의 죽음은 일관적이었다.
모두가 손서연의 총에 죽음을 당했다.
“그렇다면……!”
결과는 끔찍할 것이다.
저쪽에선 단 한 명을 제외하곤 몰살을 당할 것이 분명하다.
트윈 헤드 트롤은 현시점에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니까.
“젠장!”
우리는 고개를 돌렸다.
듣기 싫었던 처참한 비명 소리만이 울려 퍼져 왔다.
승리의 기쁨으로 잠시 잊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탑은 아포칼립스의 공간이었음을.
- 18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