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나의 ‘3000 업’이라는 말에 다들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서준호도 더는 집요하게 물어보지 않았다.
사실 정확한 액수는 모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알면 의욕을 상실해 버릴지도 모르니까.
“이호영 씨는 충분히 그 정도 받을 자격이 있죠.”
안세창이 나를 두둔했다.
그는 이제 충격에서 조금은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믿었던 김준성에게 배신을 당해 상심이 크겠지만, 그런 감정은 빨리 털어 버려야만 했다.
우리가 지금 처해 있는 현실은 냉혹한 아포칼립스이니까.
“다들 고생 많으셨어요. 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이호영 씨 덕분에 2층 미션도 잘 막아 낸 거 같습니다. 김준성 그놈만 아니었다면!”
그 부분은 나도 아쉽다.
아무런 희생자 없이 2층을 돌파해 내 가는 것이 내 계획이었기에.
어쨌든 이젠 쇼핑의 시간이다.
주머니가 두둑해져 상점창을 여는 마음이 가볍기만 했다.
[만 골드 이상의 보유자가 되어 상점창의 이용 등급이 올라갑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
골드가 많아지니 상점창에도 변화가 생겼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아이템들이 판매 목록으로 올라와 있다.
일반, 고급, 레어까지.
레어급 이상의 아이템도 존재하겠지만, 현재 내 상점창에서는 볼 수가 없다는 게 좀 아쉬웠다.
어차피 그림의 떡이겠지만.
내 ‘불굴의 검’ 등급이 레어급인데, 이 등급 물건들의 시세가 대충 8만 이상에서 형성되어 있으니, 현시점에서 내가 얼마나 사기적인 걸 들고 있는지 실감이 났다.
가시권에 있는 물건 중에선 ‘스킬업 상품’이 내 시선을 가장 끈다.
5000골드만 지불하면 나의 <초급 검술>을 레벨3으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레벨3의 경지라.”
사실 경험한 적이 한 번 있는 것도 같다.
꼬맹이 트롤과 싸울 때 나도 모르게 Lv.3의 초급 검술이 잠깐 발휘된 것 같은데, 아주 신세계였다.
무의식이 아닌 의식의 세계에서도 그런 경지의 검술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
고작 5000골드로 가능한 것이라면 이건 고민할 필요가 없다.
[스킬업(Lv.3) 상품을 구입하였습니다.]
[초급 검술의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보유 골드가 만 골드 아래로 내려가며 상점창의 등급도 함께 하락하였지만, 크게 상관이 없다.
아직은 아이템을 구입할 때가 아니니까.
내 상태창을 보니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났다.
“호영이 형.”
김세용이었다.
그런데 이놈 말투가 원래 이랬던가?
이 덩치에 콧소리를 내는 게 영 적응이 안 된다.
“왜 인마.”
“2층에서 고생 많았어. 역시 형이야!”
“미친놈.”
“형. 우리 끝까지 같이 가는 거 맞지?”
아주 형 소리가 입에 붙었다.
꺼지라고 말을 해도 영 들어먹지를 않고, 내 주변에서 서성거린다.
나한테 줘 터지고 나서도 이렇지 않았는데, 이놈이 나름대로 머릿속에서 서열 정리를 끝냈나 보다.
“야. 세용아.”
“어. 형!”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너 뒤통수치면 죽는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사람 뒤통수나 칠 놈으로 보여?”
“어.”
“무슨 그런 섭한 소리를! 형, 내가 조직에 있었을 때 말이야…….”
그러면서 이놈이 일장연설을 시작하는데, 원래 이렇게 말이 많은 놈이었나?
궁금하지도 않은 조직 생활 얘기를 막 나에게 늘어놓았다.
생각을 좀 정리해 보자.
일단 김세용은 꽤 유능한 인재인 것은 분명했다.
초기 능력치 자체도 훌륭했고, 이 탑에서도 잘 적응하며 차근차근 레벨업을 하고 있었다.
김준성이 죽은 지금은 이 구역의 이인자 격인 존재.
내 오른팔 후보로서의 자격은 충분하다.
믿을 만한 놈인지는 차차 알아보면 될 테고.
“세용아.”
“왜, 형!”
“얘기는 거기까지만 하고. 옛다!”
“응?”
[김세용에게 200골드 양도를 요청합니다.]
[상대방이 수락하였습니다.]
“나한테 이걸 준다고?”
나에게는 푼돈.
골드가 많이 풀리지 않은 지금은 이 정도로도 생색을 낼 수 있으니, 나름 효율적인 골드 소비라 할 수 있겠다.
아마 나중엔 골드가 어마어마하게 풀릴 것이다.
오늘 상점창에서 본 레어급 아이템들의 가격은 미쳐 날뛸 정도니까.
“앞으로 잘해라. 떨어지는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면.”
“호영이 형! 충성충성!”
김세용은 꼴랑 200 가지고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뻐했다.
이놈은 받은 골드 200을 그대로 근력에 투자했다.
진짜 근력성애자 같은 놈이다.
이 단순한 놈과 언제까지 함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다.
200골드를 투자했으니 난 최소 2000골드 이상은 빼 먹으리라는 것.
그리고 확실한 나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하는 또 다른 한 명이 있었다.
“이설 씨. 보상 받은 골드로는 뭐 좀 사셨어요?”
“아니요. 뭘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그냥 좀 더 모아 볼까도 싶고요.”
고민이 될 만도 하다.
채이설은 힐러라는 특성 외에는 부족한 게 너무 많았다.
기본적인 스탯도 낮고, 치유 스킬을 충분히 쓸 만큼의 마력도 없었다.
지금은 여유 자금이 있으니 한 번쯤 도와줘도 될 타이밍이다.
잘 키운 힐러는 나의 생명줄이 될 테니까.
[채이설에게 1200골드를 양도를 요청합니다.]
“네?”
“받으세요.”
“말도 안 돼요! 이런 큰 액수를 저에게 주신다고요?”
“조건 없이 주는 건 아닙니다. 나중에 천천히 갚으시면 됩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파티나 레이드에서 힐러는 귀하신 몸이니까. 사실 저를 위한 보험이니 부담 없이 받으세요.”
처음엔 난처한 기색을 보이던 채이설이었지만 결국은 승낙했다.
빌려준 걸 돌려받으려면 잘 키워야겠다.
“감사해요! 호영 씨!”
골드 사용은 채이설의 재량에 맡겼는데, 아주 현명하게 소비를 했다.
남은 골드를 탈탈 털어서 치유 스킬을 Lv.2로 상승시킨 것.
스킬을 좀 더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을 테니 마력에 대한 부담이 상당히 감소할 것이다.
2층 미션이 종료된 이후, 우리는 처음으로 긴 휴식 시간을 보장받았다.
벌써부터 다들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다.
정말 무서운 건 우리에겐 훨씬 더 길고 긴 여정이 남아 있으리란 것.
우리가 생존해 있는 한 말이다.
* * *
“제발 3층에선 전원 생존합시다.”
어떤 미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우리의 구호는 생존이었다.
“3층 미션은 혹시 레이드 종류가 아닐까요?”
“거대한 보스 몬스터를 잡는 그런 거 말입니까?”
튜토리얼이 솔플, 1층이 파티플, 2층이 서바이벌이었으니 3층은 혹시 레이드가 아닐까 추측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마다 뇌내망상으로 레이드에 대한 예측들을 하는데, 참 의미 없는 짓이다.
그런데 모두의 공통된 의견이 하나 있었다.
“이호영 씨가 우리를 좀 이끌어 주었으면 합니다.”
다들 심리적으로 나에게 기대는 모양새였다.
이번 2층 미션이 나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긴 했다.
1층까지만 하더라도 완전 고문관 취급이었는데.
“저도 부족하긴 하지만, 일단은 받아들이죠.”
어떤 미션이 주어질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리더를 맡는 것이 여러모로 옳긴 하다.
나에겐 공략집이 있고, 난 그걸 토대로 필승법을 찾아낼 테니까.
“단, 여러분들은 제 말을 전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전략을 효과적으로 실행하기 위해선 나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것은 지난 2층 미션에서도 여실히 증명되었다.
“형! 난 형이 죽으라면 죽는시늉이라도 할게. 크크크.”
김세용이 전혀 믿을 수 없는 공수표를 던졌다.
이놈은 두고두고 지켜봐야 한다.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니까.
그리고 그 순간 예고 없이 알림 메시지가 날아왔다.
[3층 미션이 시작됩니다.]
* * *
공간이동 후 우리가 서 있는 곳.
3층의 무대 배경은 기암괴석이 즐비한 이름 모를 산이었다.
딱 봐도 산세가 험해 보이는.
“저 위에 보이는 것은 요새?”
좁고 외길인 이 비탈길을 따라 올라가면 저 요새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저것은 분명 이번 3층 미션의 핵심일 터. 저 위를 누가 지키고 있는지가 관건이라 할 수 있겠다.
[3층 미션은 공성전입니다.]
[이곳에서 여러분은 처음으로 다른 구역의 플레이어와 조우하게 될 것입니다.]
[클리어 조건: 당신의 그룹은 공성전에서 공격의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성을 함락시킨 후 제단을 점거하시오.]
[플레이어 전원은 기간제 아이템인 귀환석(3층 전용)을 획득하였습니다.]
[남은 시간: 24시간]
[미션 실패 시 페널티: 비공개]
“공성전?”
“그것도 다른 구역의 플레이어와?”
“그나저나 이 귀환석이라는 것은 뭘까요?”
다들 레이드를 예상하고 왔는데, 역시 의미 없는 짓이었다.
어쨌든 메시지의 내용대로라면 저 요새 위를 지키고 있는 것은 다른 구역의 플레이어란 의미.
“또 사람 죽이는 미션이야?”
서준호가 분노한 표정을 지었다.
공성전에서는 적군의 희생이 불가피한 일.
“젠장! 전원 생존이 목표였는데!”
게다가 이 전쟁은 우리가 자초한 일이 아니다.
이 빌어먹을 탑은 우리들에게 원치도 않은 역할을 배분했고, 우린 그저 꼭두각시처럼 미션이라는 대본에 따라야 하는 처지일 뿐이다.
[공략집이 전송되었습니다.]
나는 곧바로 현자의 상태창을 열람했다.
평소와 다르게 내용이 매우 심플하다.
[공략집: 플레이어들은 귀환석을 통해 사망 후 최초의 위치로 복귀하게 됩니다.]
이게 끝?
아쉽긴 하지만 어쨌든 좋은 정보를 얻었다.
3층에서는 죽은 뒤에도 부활하여 처음 위치로 회귀할 수 있다는 것.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곳은 게임 시스템이 지배하는 세상이니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전쟁을 하다 보면 모두가 알게 되겠지만, 이것을 미리 알고 진행하는 것은 큰 이점임이 분명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지울 수 있을뿐더러, 그에 맞는 전략을 세울 수 있으니까.
“이호영 씨, 우리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모두들 리더인 나의 얼굴을 바라본다.
공략집이 제시한 정보가 극히 제한적이었기에, 필승법까진 모르겠지만 확실히 해 두고 넘어갈 일이 생겼다.
“다들 저를 주목해 주세요. 그리고 세용아, 내 앞으로 컴온.”
“어. 형!”
“너, 내가 죽으라면 죽는시늉이라도 한다고 했던가?”
“물론이지! 난 절대 두말하는 성격이 아니야.”
“그럼 일단 한 번만 죽자.”
나는 불굴의 검을 들어 올렸다.
여기서 모두들에게 보여 줄 필요가 있다.
이곳 3층은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고.
“혀…… 형! 농담이지?”
김세용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웃는다.
설마 내가 이 검으로 자신을 벨 거라고는 아직 짐작도 못 할 것이다.
그래도 뭔가 싸한 분위기 정도는 느끼겠지.
“고통은 없을 거야. 순식간에 일어날 일이니까.”
“미…… 미친!”
휘이익!
불굴의 검이 바람을 갈랐다.
예상 외로 김세용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설마 했을 것이다.
김세용의 목이 날아가자 다들 경악성을 내뱉는다.
“뭡니까!!”
“당신 미쳤어?”
다들 김준성 시즌2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반쯤은 넋 나간 표정들.
김세용의 시체가 투명화되어 사라지는 것도 눈치를 못 채고 있다.
챙!
서준호가 나를 향해 검을 빼 들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용감한 캐릭터다.
“당신, 무슨 속셈이지?”
“서준호 씨. 내가 말했잖아요.”
“도대체 뭘!”
“전적으로 나를 믿어야 한다고.”
그 순간이었다.
“호영이 형!”
김세용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영문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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