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챙!
나는 다시 한번 날아오는 화살을 불굴의 검으로 쳐 냈다.
첫 번째 공격보다는 화살의 위력이 더 배가 된 느낌.
[절대 감각이 발휘됩니다.]
나는 울창한 숲속에 엄폐해 있는 녀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역시 예상했던 그 녀석이다.
이런 위력을 낼 수 있는 궁수 타입의 플레이어라면 딱 한 명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나를 상대로?
내게 무력시위를 펼친다는 것은 무모한 일. 녀석도 그것을 알고 있을 텐데 참 의아했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겠지.”
나는 녀석의 상태창을 열람해 보았다.
<김준성>
직업: 궁수
레벨: 9
HP: 100%
MP: 30
체력: 21 근력: 24 민첩: 20 감각: 13
스킬
<초급 궁술 Lv.2>
※ 살성의 길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효과가 적용됩니다.
1. 능력치 버프 효과를 받습니다.
2. 도플갱어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역시 그랬군.”
자신감 있게 나를 상대로 화살을 발사할 수 있었던 이유.
녀석은 두 명의 플레이어를 죽이며 스탯 포인트와 골드를 얻어 자신의 능력치를 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살성.
녀석은 공략집이 내게 권했던 살성의 길을 걸으며 능력치 버프 효과를 받고 있었다.
“게다가 도플갱어의 지원이라.”
2층 스테이지에서 제대로 날뛸 조건은 다 가지고 있는 셈이다.
어떤 과정을 통해 살성에 도전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김준성이 이렇게 된 건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는 우리 그룹에서 암묵적으로 리더 역할을 자처하며 가장 모범적인 이미지를 심어 준 플레이어였으니까.
이미 희생된 두 명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이라도 저 녀석을 발견해서 다행이다.
“넌 뒤졌어.”
나는 가슴 높이로 검을 기울여 든 채 추격을 시작했다.
일단 내 시야에 들어온 이상 완전히 도망칠 수는 없을 것이다.
김준성은 바로 방향을 바꾸어 나를 등지고 달리기 시작했다.
강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존재하는 전력 차를 녀석도 알고 있을 테니까.
휘익!
휘익!
이번에는 화살이 두 발이나 날아온다.
원거리에서 이렇게 공격을 퍼부으며 나의 추격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심산이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챙! 챙!
내 검에 막혀 맥없이 추락하는 화살 두 발.
도망치면서 쏘는 화살은 그리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스킬의 보정 효과로 정확히 나에게 날아오는 건 대단하지만.
“그렇게 도망쳐 봐야 소용없다니깐.”
체력 스탯의 차이로 우리 둘 간의 거리는 갈수록 좁혀질 것이다.
게다가 녀석의 이동 궤적은 갈수록 비효율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30분마다 1건 이상의 살인이 벌어져야만 한다는 제약 때문일 터.
“도망치면서도 다른 사냥감을 추적하겠다는 건가?”
제한 시간의 압박에서도 벗어나고, 스탯을 비약적으로 올릴 수 있으니 녀석으로선 일석이조의 전략일 것이다.
미니맵을 보고 있으니 녀석이 접근하고 있는 타깃이 명확해졌다.
부디 플레이어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녀석의 화살은 원거리에서도 충분히 위협적이니까.
휘이잉!
휘이이잉!
김준성이 또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이번엔 내 쪽이 아니다.
김준성이 새로운 타깃을 향해 사냥을 시작한 것.
세 사람의 술래잡기가 시작된 것이다.
* * *
김준성은 살성도 아닌 살성 도전자일 뿐.
그럼에도 버프의 효과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저 미친 새끼!”
또 한 명의 인물이 김준성의 앞에 쓰러져 있었다.
김준성은 지금 사냥감을 죽이지 않고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만약 바로 죽였다면 바로 메시지 알림음이 있었을 테니까.
거리를 좁혀 갈수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익숙하면서도 친근한 실루엣.
그나마 우리 구역에서는 내가 가장 많은 감정의 교감을 나누었던 인물이었다.
“이설 씨!”
쓰러져 있는 사람은 채이설이었다.
그나마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은 채이설 본인이 힐러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호영 씨! 이야기가 참 흥미롭게 돌아가네요?”
김준성의 분위기가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
영화에서나 보던 소시오패스의 실사판을 보는 느낌.
이것이 녀석의 추악한 본모습이었다.
“재밌어?”
“왜요. 이호영 씨는 재미있지 않나요? 저는 당신도 나랑 비슷한 부류일 거라 생각했는데.”
“미친 놈.”
“그동안 감쪽같이 본인의 능력을 숨겼다는 건, 나와 같은 짓을 벌이려 했던 것 아닌가요?”
“헛소리는 거기까지만!”
나는 불굴의 검을 세운 채 김준성에게로 한 걸음씩 걸어갔다.
“멈추시죠! 더 다가오면 이 여자는 죽습니다.”
김준성이 경고했다.
물론 저런 걸 다 들어줄 필요는 없다.
나는 그 말을 무시하고는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갔다.
“한편으론 다행이군. 네 녀석의 본모습을 늦지 않게 발견할 수 있어서.”
“그건 저도 사실 아쉽습니다. 좀 더 오래 묵혀 놔야 뒤통수를 치는 맛도 좋은 법인데, 타이밍이 좀 빨랐죠?”
미친 놈.
세상은 넓고 이런 미친놈도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설 씨를 인질로 잡아서 뭘 어쩔 셈이지?”
나는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그만요! 경고했습니다. 더 오면 이 여자는 정말로 죽습니다.”
김준성은 나를 플레이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살성 도전자는 도플갱어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으니, 당연히 플레이어와 도플갱어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채이설이 몸을 가누며 외쳤다.
“호영 씨! 저는 괜찮으니, 주저하지 마세요!”
다섯 걸음 정도의 거리.
나는 딱 그 앞에서 멈춰 섰다.
“김준성, 나는 너의 경고를 무시하고 여기까지 와 버렸어. 그래서 이젠 어쩔 셈이지?”
“글쎄요.”
김준성이 나를 향해 화살을 겨누었다.
지척의 거리.
나 역시 놈을 향해 필살의 검을 날릴 수 있다.
활이 유리한 건 원거리에서의 일이지, 지금은 서로 동등한 입장이다.
지금 김준성이 믿는 것은 채이설을 인질로 잡고 있는 것.
“이호영 씨. 혹시 당신은 내가 플레이어라고 확신하는 건가요?”
“그래. 의심의 여지 없이.”
“왜죠?”
“나에겐 그걸 확인할 수 있는 스킬이 있으니까.”
“호오! 당신처럼 음흉한 사람이 본인이 가진 패를 밝히는 경우도 있군요?”
나는 녀석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상관없어. 어차피 넌 죽을 테니까.”
“하하하. 뭐 제가 죽을 일도 없겠지만, 그럼 이 여자는요? 설마 채이설도 죽이시게요?”
김준성이 채이설을 가리킨다.
그 순간 오직 나만 감지할 수 있는 찰나의 빈틈이 보였다.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재빨리 낡은 장검을 꺼내어 채이설의 머리에 박아 넣었다.
채이설의 머리통에서는 피분수가 솟구쳤다.
“이런 미친!!”
[도플갱어가 사망하였습니다.]
[현재 인원 : 플레이어 14, 도플갱어 14]
[30분 내에 새로운 살인 1건을 발생시키십시오.]
“이걸로 대답이 됐나?”
김준성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녀석의 눈동자가 심하게 요동친다.
“아니! 어떻게!”
“도플갱어의 지원을 받아 날 상대하려고 했던 모양인데, 아쉽게 됐군.”
절대 후각.
채이설에게서는 도플갱어의 냄새가 났다.
아마 김준성과의 대치가 계속되었더라면 채이설의 도플갱어는 나를 공격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김준성에게 치유 지원을 펼치든가.
“이호영! 그렇다면 당신도 역시 살성의 길을 걷고 있는 건가?”
내가 ‘도플갱어의 지원’이라는 말을 언급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미안하지만 아니야. 네가 살성에 도전하는 건 알고 있지만.”
“뭐라고?”
김준성이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역시, 이호영 당신은 뭔가 수상한 구석이 많은 사람이야.”
“그럼 조심했어야지.”
“당신의 능력을 보고 나니 조바심이 나더군. 빨리 강해지지 않으면 곤란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2층 미션을 듣는 순간 아주 짜릿한 기분이라도 들었나?”
“맞아.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메시지가 나에게 거래를 해 오더군. 살성의 길을 걷지 않겠냐고. 난 당연히 수락을 했지.”
김준성의 굳이 속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녀석의 이야기가 흥미로워 나도 모르게 빠져드는 것 같다.
이래서는 위험하겠지. 놈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마지막 승부수를 띄울 타이밍을 재고 있을 테니까.
휘이이잉!
갑자기 활시위가 놓아지며 굉음이 울렸다.
김준성의 마지막 발악.
물론 만반의 대비는 하고 있었다.
나는 동시에 몸을 숙이며 김준성의 목을 향해 불굴의 검을 찔렀다.
왈칵!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핏물.
불굴의 검은 붉게 물들었다.
[플레이어가 사망하였습니다.]
[현재 인원 : 플레이어 13, 도플갱어 14]
[30분 내에 새로운 살인 1건을 발생시키십시오.]
벌써 죽어 버린 플레이어만 세 명.
내 예상보다 피해는 커지고 있었다.
“더 이상은 곤란해.”
이것이 플레이어의 마지막 죽음이 되길 바랄 뿐.
미니맵을 불러와 사람들의 위치를 확인하려 할 때였다.
[살성의 길에 도전하는 자를 죽였습니다.]
[당신이 죽은 자를 대신하여 살성의 길에 도전할 기회를 획득하였습니다.]
[최종적으로 살성이 될 경우 다음과 같은 혜택을 얻습니다.]
1. 전설 등급의 무구 획득
2. 전설 등급의 스킬 습득
3. 스탯 포인트의 비약적 증가
4. 살성 전용 특성 획득
[수락하시겠습니까?]
혜택이 지나치게 사기적이다.
게임의 밸런스를 무너뜨릴 정도로.
“뭐, 그건 현자의 상태창도 마찬가지지만.”
어쨌든 김준성이 악마의 유혹을 거절하지 못한 이유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옵션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70억 지구인 중 누군가는 2층 미션이 끝난 후 살성이 되어 있겠지.
아직 만나지 못한 미지의 존재이지만, 게임의 엔딩까지 만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놈은 완전 개또라이일 테니까.
“당연히 거절한다.”
나 자신이 또라이가 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 * *
미니맵 상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흩어져 있던 점들이 서서히 모이기 시작한 것.
이미 군집 형태가 된 곳도 있었다.
“다행히 사람들이 내 말을 따라 주었군.”
내가 원하는 그림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번 서바이벌 미션을 가장 적은 피해로 끝내기 위해선 반드시 모든 사람이 한군데 모여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개인의 일탈이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 살인은 오직 저만 할 것입니다!
- 만약 저 외에 살인을 시도하는 자가 있다면 그 녀석이 도플갱어입니다!
미션 시작 전 내가 해 놓은 엄포.
이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김준성이 죽은 이후 살인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다.
이제 나만 잘하면 된다.
30분마다 도플갱어를 하나씩 찾아 죽이며 우리 동료들이 한곳에 모일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야 할 것이다.
“이호영 씨!”
저 앞에서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이하는 서준호.
냄새가 난다.
도플갱어의 냄새가.
“당신도 무사했군요. 서준호 씨.”
“네. 같이 갑시다. 조금만 더 가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아!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한 가지가!”
“뭐죠?”
휘이이익!
불굴의 검은 방심하고 있던 서준호의 모가지를 댕강 잘라 놓았다.
몸통과 분리된 저놈의 얼굴 표정이 참 묘하다.
도플갱어 주제에 나에 대한 신뢰가 있었던 거야?
[도플갱어가 사망하였습니다.]
[현재 인원 : 플레이어 13, 도플갱어 13]
[30분 내에 새로운 살인 1건을 발생시키십시오.]
어느덧 13대 13.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까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 13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