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초급 검술이 발휘됩니다.]
굳이 뜸을 들일 것도 없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낡은 장검을 가볍게 한 번 휘둘렀고, 반투명한 토끼 녀석의 몸은 맥없이 소멸하였다.
애당초 녀석의 몸체는 홀로그램의 형태였으니 베는 느낌은 들지도 않았다.
“허얼!”
“……말도 안 돼!”
침묵을 지키던 주변 사람들이 순간 탄식을 뱉어 냈다.
고작 레벨 1이 레벨 55를 베어 내다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 녀석, 그냥 홀로그램이었잖아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래도 놀랍잖아요! 도대체 무슨 깡으로!”
몇몇 사람들은 나의 용기에 박수를 보냈다.
토끼 녀석이 있던 자리에는 <스탯 포인트 1>이라고 쓰여 있는 구슬 하나가 남아 있었다.
특별 보상치고는 너무 소소하지만 그래도 꽁으로 얻은 것이다.
“이거 제가 갖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나의 득템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내 물음에 사람들은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전부는 아니다.
사람이 스무 명 이상 모여 있다 보니 그 중엔 별의별 놈들이 다 있기 마련이었다.
“그걸 당신이 갖는 건 좀 낭비 같은데?”
김세용. 레벨은 4. 직업은 권법가에 근력 수치가 무식할 정도로 높은 녀석이다.
생김새나 풍기는 포스만 봐도 별로 질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냥 딱 조폭 느낌.
“낭비라니, 무슨 의미입니까?”
“튜토리얼을 끝냈는데도 당신 레벨은 고작 1이잖아. 그럼 어차피 금방 죽을 텐데,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게 낫지 않겠냐 이거지.”
이 자식 진짜 조폭인가?
말하는 게 딱 생긴 대로 노는 녀석이었다.
“양보는 취미가 아니라서.”
“그거 나한테 넘기면, 앞으로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ㅎ…….”
퍼엉!
나는 김세용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구슬을 터뜨렸다.
[스탯 포인트 1을 획득하였습니다.]
굳이 이런 녀석과 실랑이를 벌일 이유는 없다.
<잔여 포인트: 1> 이라는 문구는 바로 내 상태창에 추가되었다.
“와! 고문관 주제에 욕심은 있네? 그런 분이 왜 튜토리얼에선 사냥은 안 하고 도망만 다녔을까?”
김세용이란 녀석은 대놓고 날 비꼬았다.
내 레벨이 1이란 것을 보고 멋대로 짐작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굳이 해명하고 싶진 않았다.
내가 가진 특별한 스킬에 대해 말하는 건 더욱 싫었고.
그 순간 허공에서는 갑자기 메시지가 울려 퍼졌다.
[지금부터 초기 골드를 지급하겠습니다.]
[플레이어는 골드를 통해 상점창에서 다양한 것들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기본금으로는 모두에게 100골드를 지급하며 튜토리얼에서 사냥한 몬스터의 수에 따라 추가 정산이 이루어집니다.]
[그럼 정산을 시작하겠습니다.]
골드?
그렇다면 나는 대박 정산을 받을 확률이 높을 것이다.
튜토리얼에 존재하는 모든 몬스터를 해치웠고, 마지막에는 히든 퀘스트까지 성공하며 골드 보상을 약속받았으니까.
나는 김세용과 다시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내가 구슬을 가진 것이 여전히 불만인 모양이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한 번쯤 손봐 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정산이 완료되었습니다.]
[이 구역에서 가장 많은 골드를 지급받은 플레이어의 초기 골드는 7400입니다.]
“뭐?”
“7400?”
“그렇게 많이 받은 사람이 이 안에 있다고?”
충격적인 메시지에 장내는 소란스러워졌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사람들과 차이가 나도 너무 많이 났다.
지금 내 눈에는 보인다.
다른 사람들이 지금 어느 정도의 골드를 가지고 게임을 시작하는지를.
김준성 1500 골드.
서준호 1500 골드.
김세용 1300 골드.
....원정연 300 골드.
서은진 300 골드.
7400을 가지고 시작하는 플레이어는 물론 나.
물론 밝힐 생각은 없다.
고작 스탯 포인트 1 가지고 시기하는 놈이 있을 정도니까.
“누구죠? 튜토리얼에서 1등을 한 그 사람?”
다들 1등의 행방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주변에 갑자기 벼락부자가 된 사람이 있다는데, 그게 안 궁금하다면 더 이상한 일.
물론 그 1등의 행방이 드러날 일은 영영 없을 것이다.
“1등 하신 분은 결국 밝힐 생각이 없으신 모양이군요.”
“그 결정 존중해 줍시다. 조금 치사스럽긴 하지만.”
결국, 용의 선상에 오른 사람은 레벨 4를 달성한 남자 플레이어 네 명이었다.
김준성, 서준호, 김세용, 안세창.
미안하면서도 좀 재밌다.
레벨 1인 나는 자연스럽게 후보군에서 제외되었으니까.
“에이썅! 이럴 줄 알았으면, 튜토리얼에서 좀 더 열심히 하는 건데!”
김세용이 억울함을 토로하며 소리를 질렀다.
성질 한번 더러운 녀석이다.
* * *
[상점창이 열립니다.]
골드로 할 수 있는 것은 크게 세 가지였다.
아이템을 구매하거나,
스킬의 레벨을 높이거나,
스탯을 올리거나.
일단은 능력치 스탯을 좀 높여 볼 생각이었다.
종말 전에 열심히 운동을 했다지만 겨우 보름의 기간이었을 뿐.
태생적으로 강골은 아닌지라 내 스탯이 그리 높지는 않았다.
레벨 4의 다른 남자들과 비교해 보니 그 부분이 확실하게 드러난다.
저 성질 더러운 김세용만 해도 나보다 오버 롤이 훨씬 높을 정도니까.
<이호영>
직업: 검투사
레벨: 1
HP: 100%
MP: 10
체력: 14 근력: 11 민첩: 7 감각: 20
스킬
<초급 검술 Lv.1> <현자의 상태창>
보유 골드 : 7400
잔여 포인트: 1
<김세용>
직업: 권법가
레벨: 4
HP: 100%
MP: 15
체력: 16 근력: 24 민첩: 12 감각: 8
스킬
<돌주먹 Lv.1>
보유 골드: 1300
이렇게 비교해 보니 근력에서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남자의 자존심이 살짝 상한다.
[600 골드를 소모하여 체력을 6 상승시킵니다.]
[900 골드를 소모하여 근력을 9 상승시킵니다.]
[1300 골드를 소모하여 민첩을 13 상승시킵니다.]
하지만 이젠 다른 세상이 되었다.
현실 세계에선 만회하기 힘든 태생적인 능력치가 이렇게 쉽게 뒤집어진다.
나의 모든 스탯은 20으로 깔맞춤 되며 환상적인 밸런스를 갖추게 되었다.
“저기…… 이호영 씨.”
골드의 다음 투자처를 고민하는 순간 누군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채이설.
여자로서는 유일하게 레벨을 3을 찍었던 터라 바로 눈에 띈 인물이기도 했다.
외모도 가장 돋보였고.
“무슨 일이시죠?”
이곳에서는 통성명을 할 필요가 없어서 참 편하다.
묻지 않아도 바로 이름과 레벨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
“조언을 좀 구하고 싶어서요.”
채이설은 내게 골드의 활용법을 물어 왔다.
의외였다.
난 레벨 1의 고문관으로 비춰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왜 굳이 조언을 저에게?”
“토끼를 잡는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러면서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데, 참 낯선 경험이었다.
이런 종말 상황만 아니라면 분명 설레었을 일.
순간 이 여자에 대한 테스트를 해 보고 싶어졌다.
“소지하고 계신 골드가 어느 정도죠?”
“800골드요.”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이 바로 돌아왔다.
800골드라는 말은 진실이었다.
음흉한 속내 없이 화끈한 타입인 것 같다.
<채이설>
직업: 힐러
레벨: 3
HP: 100%
MP: 15
체력: 4 근력: 7 민첩: 7 감각: 15
스킬
<치유의 손 Lv.1>
보유 골드: 800
사실 난 처음부터 채이설에게 관심이 있었다.
이 구역의 유일한 힐러니까.
만약 게임처럼 파티 플레이라도 해야 되는 상황이 온다면, 내 옆에 가장 두고 싶은 인물이었다.
“보아하니 평소에 운동을 많이 했을 거 같지는 않고. 맞나요?”
“네. 안타깝게도요.”
“그럼 체력 스탯이 저질일 확률이 높겠군요.”
“네. 맞아요! 그런데 혹시 게임에서 체력이 가장 중요한가요?”
가장 중요한 스탯은 플레이 스타일에 달려 있겠지만, 체력은 반드시 일정 수준 이상은 되어야 한다.
HP라는 피통과 높은 연관성을 가진 스탯이니까.
진즉부터 난 채이설의 체력이 아쉬웠었다.
직업이 힐러이다 보니 파티에선 자연스럽게 후방 지원 쪽으로 빠지겠지만, 초반에 살아남으려면 무조건 피통이 커야 한다.
이제부턴 튜토리얼보다 훨씬 어려워질 공산이 크기에.
“중요합니다. 만약 체력이 부족하다면 그쪽에 투자하세요.”
“그럼, 아이템은요?”
현시점에서 채이설이 구매할 수 있는 아이템이라고 해 봐야 싸구려 무기들뿐.
힐러인 그녀에겐 필요 없는 것들이다.
초기에 지급받은 낡은 장검이면 충분하다.
“그냥 스탯에 투자하세요. 지금 아이템을 사 봤자 어차피 오래 쓰지도 못할 겁니다. 반면에 스탯은 영원히 남는 것이죠.”
내 답변에 채이설은 바로 납득을 했다.
“그 조언 받아들일게요. 고마워요.”
채이설은 내게 살짝 묵례를 취했다.
솔직히 내가 해 준 조언이 대단한 건 없었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실시간으로 그녀의 체력 스탯이 올라가는 게 보인다.
“그런데 채이설 씨. 혹시 직업이 뭔가요? 여기 말고 밖에서요.”
그냥 궁금했다.
나는 검도 학원에서 며칠 죽도를 휘두른 이유로 검투사가 되었는데, 과연 이 여자는 뭘 했기에 힐러가 된 것인지.
“약사였어요. 그 이유 때문인지 여기서는 힐러가 되어 버렸네요. 히히.”
“힐러요?”
역시 거짓이 없는 성격.
만약 이 안에서 동료를 한 명만 구해야 한다면, 1순위는 채이설이다.
그러고 보면 참 불공평한 세상 아니었던가?
얼굴도 예쁜데 직업도 약사라니.
물론 과거의 직업은 더 이상 중요치 않은 세상이 되었지만 말이다.
* * *
사람들은 저마다 선택을 했다.
능력치를 올린 사람도 있었고, 싸구려 아이템을 구매한 사람도 있었으며, 전혀 소비를 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스킬 레벨 올려 주는 건 도대체 왜 이렇게 비싼 거야!”
김세용이 투덜댔다.
사실 현시점에서 이 선택지는 고려 대상은 아니었다.
너무 비쌌으니까.
물론 가능한 사람이 딱 한 명 있다.
바로 나.
나는 <초급 검술>의 레벨을 2로 올려 두었다.
무려 1500 골드를 소모하면서.
살짝 안타까운 건 100골드로 큰 의미 없는 지출을 했다는 것이다.
헬스장에서 바로 종말을 맞이했던 터라, 입고 있던 체육복이 살짝 거슬렸다.
하필 반바지가 너무 짧았고, 가슴팍에 크게 박혀 있는 <몸짱>이라는 글씨도 뭔가 민망했다.
결국 난 아무런 기능도 달리지 않은 평상복 하나를 100골드나 주고 구매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선 당연히 참견러들이 붙기 마련.
“이호영 씨는 혹시 전 재산 다 쓰신 거 아닌가요?”
“차라리 스탯 하나 더 높이시는 게 좋았을 텐데.”
좀 어이없었지만, 그냥 그러게 내버려 두었다.
“크크크크.”
김세용은 나를 보며 비웃음을 날렸다.
내가 스탯 포인트 1을 양보하지 않은 걸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모두에게 들려온 메시지.
[1층 미션이 곧 시작됩니다.]
[파티 플레이가 예정되어 있으니 지금부터 3인 1조로 자유롭게 파티를 구성하십시오.]
[파티 구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플레이어는 랜덤으로 파티에 배정될 예정입니다.]
[남은 시간: 30분]
또다시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파티 플레이.
어쩌면 이런 미션도 있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서로 레벨은 볼 수 있으니, 돌아가면서 직업부터 공개하는 것이 어떨까요?”
김준성의 제안.
레벨도 4였고 확실히 오늘 리더십이 돋보이는 인물이었다.
“좋아요. 파티 플레이를 할 땐 상호 보완해 주는 게 필수니까.”
직업 공개가 끝난 후,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과 팀을 이룰 플레이어를 찾아 나섰다.
좋은 팀원을 만나기 위한 자기 어필의 외침이 들려온다.
이건 마치 동물들의 집단 짝짓기 현장을 보는 것만 같았다.
“저 좀 껴 주세요! 제가 레벨은 낮아도 능력치 총합은 35가 넘는다고요!”
레벨 4 김준성에게 추파를 날리는 여성 플레이어 서은진.
그런데 저 말은 거짓이었다.
자기 능력치를 무려 20퍼센트나 뻥튀기해 버렸을 정도로.
뭐, 살기 위한 몸부림이니 저 정도는 이해해 줘야겠지.
어쨌든 이곳의 스물네 명은 순식간에 인기 그룹과 소외 그룹으로 나뉘어져 버렸다.
레벨 4를 찍은 남자 플레이어들의 모습에선 여유마저 느껴진다.
가장 소외되는 부류는 역시 레벨 1.
사회의 축소판이 따로 없다.
나는 가만히 서서 이들의 모습을 관조했다.
“호영 씨는 팀원 안 구하세요?”
채이설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일단 좀 지켜보려고요.”
사실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레벨 1의 검투사에 남자 중에서는 유일한 레벨 1이니 제대로 고문관 취급이다.
반면 채이설은 이 구역의 상한가.
레벨 3 힐러에 예쁘장한 외모는 모든 레벨 4 남자들의 오퍼를 받기에 충분했다.
“혹시 호영 씨만 괜찮으시다면 저랑 같이하실래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파티에서 힐러의 존재는 여분의 목숨이 되어 주기도 하니까.
“좋습니다. 그런데 왜 저죠? 오퍼 많이 받으셨을 텐데.”
“가장 믿을 만해 보여서요!”
그러면서 싱긋 미소를 짓는다.
단언하건대 난 절대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다.
처음부터 모두를 속이고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또 단언하건대, 채이설이 운 하나는 최고인 것 같다.
그녀는 나와 함께하는 것이 가장 안전할 것이다.
“그럼 잘해 봅시다.”
“넵!”
이로써 자연스럽게 애초에 생각했던 조합이 완성되었다.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채이설 이후 또 한 명의 파티원은 쉽게 구할 수 없었다는 것.
물론 나 때문이었다.
“이호영 씨, 죄송합니다. 그쪽 파티에 들어가는 것은 좀 더 생각해 볼게요.”
한결같은 답변들이었다.
힐러인 채이설을 등에 업었는데도 나라는 존재가 훨씬 더 거슬렸나 보다.
어쩔 수 없다.
레벨 1의 검투사가 매력 없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니까.
“어쩌죠? 이러다가는 제한 시간 내에 못 구할 거 같은데.”
채이설은 발을 동동거렸고, 결국 우리는 파티를 완성하지 못한 채 제한 시간 30분을 보내 버렸다.
[30분이 모두 경과하였습니다.]
[미완성 파티에는 랜덤으로 구성원을 배정하겠습니다.]
그 순간 김세용과 눈이 마주쳤다.
저 녀석은 레벨이 4임에도 불구하고 나만큼이나 인기 없는 녀석이었다.
오히려 저놈이 모두를 따돌리는 느낌?
그냥 딱 봐도 조폭처럼 생긴 게 그럴 만도 했다.
[이호영, 채이설, 김세용. 세 사람은 한 팀입니다.]
왠지 싸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처음으로 사람을 팰 거 같은 그런 느낌.
- 5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