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레벨은 1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잔여 포인트를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아주 혜자스러운 설정이었다.
경험치가 가장 팍팍 쌓이는 구간은 당연히 레벨 1이니까 말이다.
레벨업이 더디게 진행될수록 다른 플레이어들보다 훨씬 빠르게 포인트를 모을 수 있는 것이다.
자, 그럼 이제 포인트를 어느 스탯에 찍을지가 문제.
나는 다시 한번 내 상태창을 점검하였다.
<이호영>
직업: 검투사
레벨: 1
HP: 100%
MP: 10
체력: 14 근력: 11 민첩: 7 감각: 8
스킬
<초급 검술 Lv.1> <현자의 상태창>
가장 올리고 싶은 것은 MP였지만, 포인트를 이용해서 올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체, 근, 민, 감 네 가지였다.
이런 류의 게임에서 가장 매력적인 선택지는 근력이나 민첩인 경우가 많다.
근력은 강력한 공격력을 보장해 줄 것이고,
민첩은 신속함과 회피력을 증가시켜 줄 테니까.
직업이 검투사라면 더욱더 근력이나 민첩이 중요할 것이다.
전면에 나서서 딜러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고민의 순간에 문득 <현자의 상태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공략집: 튜토리얼의 60분을 모두 소모하며 최대한 많은 몬스터를 잡으십시오.]
오직 나만 볼 수 있는 공략집.
“최대한 많은 몬스터를 잡으려면…….”
이런 상황에서 고민을 길게 해서는 곤란했다.
나는 신속하게 잔여 포인트를 배분했다.
[감각이 2 상승하였습니다.]
결국 내 선택은 ‘감각’이었다.
튜토리얼에서 최대한 많은 몬스터를 잡으려면, 일단 몬스터를 많이 발견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판단이었다.
탐색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스탯은 아마도 감각일 터.
튜토리얼에 등장하는 몬스터는 그리 강력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스탯을 상승시키지 않더라도 충분히 잡을 수 있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물론 내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다음번엔 근력이나 민첩을 찍으면 될 일이다.
어차피 레벨 1이라 포인트는 금세 모을 수 있을 테니까.
절묘한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10시 방향 50미터 부근에서 어슬렁대고 있는 외뿔라쿤 한 마리가 보인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시력이 조금은 좋아진 것 같기도 하다.
* * *
[플레이어의 레벨을 재조정합니다.]
[레벨이 1이 되었습니다.]
벌써 네 번의 레벨업.
하지만 나의 레벨은 여전히 1이었다.
포인트가 모이는 족족 감각에 찍었더니 어느새 나의 감각 스탯은 16이 되었다.
+8의 효과이니 어느새 향상된 감각은 확실히 체감이 될 정도였다.
눈이 좋아지고 귀가 밝아졌으며, 어렴풋이 기감 같은 것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실제로 나는 가는 곳마다 어렵지 않게 외뿔라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케에엑!
또다시 나의 검에 외뿔라쿤 한 마리가 절명했다.
굳이 근력이나 민첩을 올리지 않아도 몬스터를 사냥하는 일은 점점 더 쉬워졌다.
스탯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명백히 쌓이고 있는 전투의 경험. 그 경험의 효과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 * *
[남은 시간: 26분]
튜토리얼을 계속 진행하다 보니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남은 시간은 여전히 많은데, 외뿔라쿤은 이제 씨가 말라 버린 것인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대폭 확장된 감각으로도 발견할 수 없다면 정말로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쯤 되니 튜토리얼을 클리어할 수 있는 또 다른 선택지에 눈이 돌아갔다.
“숲길의 끝까지 도달하는 것.”
무의미하게 이곳에 머무는 것보다 지금 바로 끝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든 순간.
[공략집: 튜토리얼의 60분을 모두 소모하여 최대한 많은 몬스터를 잡으십시오.]
똑같은 내용의 공략집이 다시 한번 내게 전송되었다.
아직 끝내지 말라고?
나는 공략집 문구의 의미를 다시 곱씹어 보았다.
‘최대한 많은 몬스터라…….’
분명, 이유 없이 내게 푸시 알람이 뜨진 않았을 것이다.
아직 이 숲에는 몬스터가 존재한다는 의미일 터.
일단 공략집의 조언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이 말을 들어 손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사실, 남은 26분을 의미 없이 배회하더라도 크게 잃을 것은 없다.
그런 마음으로 숲길을 정말로 계속해서 배회했다.
모든 감각을 확장하여 숲길 곳곳을 샅샅이 뒤졌다.
서억!
서억!
시간이 지날수록 오기가 생겨 애먼 풀들만 베어 냈다.
그렇지만 역시 외뿔라쿤은 발견할 수 없었다.
남은 시간이 1분이 되기 전까지도 말이다.
[남은 시간: 1분]
[몬스터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뭐야? 이미 없었던 거잖아!”
처음으로 공략집에게 속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억울한 마음은 잠시뿐, 메시지는 계속되었다.
[히든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60초 이내에 보스 몬스터를 처리하십시오.]
[성공 보상: 골드]
히든 퀘스트?
현실의 게임에선 결코 쉽게 뜨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략집만 아니었다면 나는 진즉에 튜토리얼을 클리어해 버렸을 테니까.
어지간해선 절대 발견할 수 없는 히든 피스.
진짜 컴퓨터 게임이라면 모를까. 갑자기 찾아온 종말 상황에, 몬스터를 더 잡겠다고 이 숲에서 60분을 버티는 또라이는 웬만해선 없을 것이다.
“보스 몬스터라…….”
이미 내 눈앞에는 거대한 외뿔라쿤 한 마리가 생성되어 있었다.
게임 시스템의 효과 때문인지 두려운 마음은 역시 들지 않았다.
오히려 저걸 잡은 후 받게 될 골드라는 것에 마음이 가 있었다.
보스라고 해 봤자 너구리는 너구리.
레벨도 겨우 2니까 60초면 충분하다.
[초급 검술이 발휘됩니다.]
서억!
서억!
허공에는 유려한 직선 몇 개가 그어졌다.
핏물이 튄다.
역시 공략집이 시키는 대로 해서 손해 보는 일은 없다.
골드가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 * *
[튜토리얼이 종료되었습니다.]
나는 튜토리얼의 60분을 꽤나 알차게 활용했다.
액면 레벨은 아직 1이지만 실제로는 여섯 번의 레벨업을 했으며, 마지막엔 히든 퀘스트까지도 성공해 버렸다.
사실상 내 레벨은 7.
튜토리얼이 끝나자마자 순식간에 배경은 바뀌어 버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튜토리얼을 성공적으로 종료한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이곳은 탑의 로비이며 여러분들은 C-2567 구역에 속해 있습니다.]
메시지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지껄여 댔다.
하지만 메시지의 내용보다 훨씬 더 혼란스러운 사실이 하나 있었다.
사람들.
나와 같은 처지로 보이는 낯선 사람들이 나와 같은 공간에 있었다.
나를 포함해서 남자 열셋에 여자 열하나.
지금 이 순간 스물네 명 모두의 표정은 비슷했다.
영혼 가출한 듯한 얼굴들.
누구도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서로가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을 뿐.
그렇게 잠시 동안 침묵의 시간이 이어졌다.
[지금부터 플레이어들은 항시 서로 간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
“이게 뭐야!”
갑자기 모든 사람들의 머리 위에 자막 정보가 생성되었다.
보이는 것은 이름과 레벨.
이를테면 <김준성 Lv.4>와 같이 말이다.
물론 나는 <현자의 상태창>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상세 정보까지도 볼 수 있었다.
“다들 튜토리얼이란 걸 마치신 겁니까?”
침묵을 깬 것은 김준성이었다.
레벨 4에 직업은 궁사.
능력치가 아주 훌륭한 데다가 밸런스도 고른 것이 인상적이다.
“모르겠어요!”
“솔직히 지금 이게 현실인지도 믿기지가 않아요.”
역시 다들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튜토리얼을 마치긴 했지만, 이런 상황이 바로 적응될 리가 없다.
그런 면에서 나 자신이 조금 이상하긴 하다.
종말이 올 것을 미리 알고는 있었다고는 해도, 지금의 나는 지나치게 침착하니까.
“집에 가고 싶어요!”
몇몇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제 겨우 튜토리얼만 끝났을 뿐.
이 게임은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곳은 <종말의 탑>입니다!”
갑자기 우리들 뒤에서는 웬 목소리가 들려 왔다.
무언가 이질적인 존재였다.
이족 보행을 하고 있되 사람이 아닌 것.
키는 130센티미터 정도에 얼굴에는 토끼 모양의 탈을 쓰고 있었다.
심지어 형상은 마치 홀로그램처럼 반투명했다.
그런데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던 거지?
“뭡니까? 당신!”
우리 중의 누군가가 외쳤다.
서준호. 역시 레벨 4에 나와 같은 검투사다.
“저요? 이 탑의 하급 관리자라고 해 두죠.”
“그럼 여기가 정말로 탑 안이라는 말입니까?”
“귓구멍이 막힌 분들이 있는 거 같으니 다시 말씀드리죠. 종말의 탑에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토끼 녀석은 우리를 보며 씨익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절 너무 경계하실 건 없어요. 당신들을 해치지 않으니까. 전 그저 환영 인사를 하기 위해 여러분들 앞에 나타났을 뿐입니다. 크크큭!”
“그런데 왜 우리들이 갑자기 여기에 와 있는 겁니까? 전 분명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었고 말이다.
다들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게 당연하다.
종말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 전에 내가 여러분들에게 하나 물어보죠. 지금 이 상황이 종말이라는 거 믿으십니까?”
“네.”
토끼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대답을 한 것은 오직 나뿐이었다.
대부분은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들이다.
“호오! 이호영 씨. 아주 훌륭해요! 그럼 이제 당신에게 질문할 기회를 드리죠.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봐도 좋습니다.”
정말 이것이 종말이라면 궁금한 것이 있었다.
“모든 지구인들이 우리와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것입니까?”
아마도 그럴 거라 생각하지만 확인해 두고 싶었다.
“네. 맞아요.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든 지구인들은 지금 탑 안에 들어와 있답니다.”
역시 그랬다.
종말이 오기 전 세계 곳곳에 등장한 탑 모양의 구조물들.
그것들이 모든 지구인을 수용할 수 있느냐는 물리적인 의문은 가질 필요도 없다.
튜토리얼만 봐도 이곳은 자연법칙 따위는 무시되는 공간이니까.
“말씀드렸다시피 여긴 종말의 탑이며 지금 여러분들은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사냥을 하고, 레벨을 올리고, 탑을 오르며 살아남으세요. 참고로 튜토리얼에서 이미 많은 지구인들이 죽었답니다.”
그 말에 여러 얼굴들이 머릿속을 스치며 지나갔다.
비록 고아인 나에게 가족은 없지만, 소중한 사람들의 안위가 궁금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탑의 마지막까지 오르면요? 혹시 그것이 게임의 엔딩입니까?”
이번에 질문을 한 것도 역시 나였다.
토끼 녀석이 대답을 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비밀. 크크큭. 일단은 살아남으세요. 탑을 오르다 보면 알게 될지도 모르죠. 참고로 탑은 매 층마다 고유의 테마가 있답니다. 아! 탑이 몇 층까지 있는지도 물론 비밀!”
말투는 확실히 재수가 없었다.
탑의 관리자라고 하니 묵묵히 듣고만 있을 뿐이다.
“자! 그럼 여러분들에게 환영 인사도 드렸으니, 전 이만 사라지려고 하는데 혹시 도와주실 분 계십니까?”
사라지는 것을 도와준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아 참! 도와달라는 의미는 저를 죽여 달란 얘기였답니다. 그럼 빨리 사라질 수 있거든요. 크크큭. 혹시 또 알아요? 절 도와주면 특별 보상이 있을지.”
토끼 녀석은 비록 초등학생 정도의 사이즈이지만, 이 탑의 하급 관리자.
당연히 그 누구도 실행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하지만 내 눈엔 보인다.
저 녀석의 상태창과 능력치가.
<쿰쿰>
직업: 관리자(하급)
레벨: 55
HP: 100%
MP: 0
체력: 0 근력: 0 민첩: 0 감각: 0
※ 본체가 아닌 홀로그램의 형태로 현신하여 있어 전투력이 전무함.
“제가 합니다.”
토끼 녀석이 특별 보상까지 언급한 마당에 안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내 말에 다들 놀란 눈치다.
저들이 보고 있는 것은 오로지 토끼 녀석의 레벨.
55라는 폭력적인 숫자에 다들 기가 죽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토끼 녀석은 나를 보며 흥미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겨우 레벨 1인데요?”
이 말은 나를 시험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레벨과 상관없이 누구든지 이 녀석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선행을 하는데도 레벨이 중요합니까?”
“……그건 아니죠. 큭큭!”
역시 이 토끼 녀석의 말투는 재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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