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0화.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156/301)

300화.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정맥으로 투여된 주사액이 혈관을 돈다.

에이젠바이오의 피폭 치료 시술.

유니버셜 T 세포는 특이적인 저직적합성이 없다. 그들은 면역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

수명이 짧은 T 세포들이 혈관 내를 돌면서 괴사하는 조직으로 유도된다.

방사선에 파괴된 DNA와, 그로부터 발생한 세포 자살 기작 (Programmed Cell Death)에서 나오는 싸이토카인 (Cytokine)을 추적한다.

표적 위치에 도달하면 고농도로 축적된 싸이토카인에 의해서 T 세포의 세포막이 무너지고, 거기서부터 DNA 재구성 물질들이 흘러나온다.

본래는 데이노코쿠스 래디오듀런스의 친척뻘 되는 박테리아가 생산하는 물질들이지만, 첨단의 끝을 달리는 생물학의 마법이 이것을 T세포에 실어 사람의 몸에서 기능하게 만들었다.

농도 구배에 따른 단순 확산의 원리로 퍼져나가는 물질들은 피폭 세포들의 내부로 흘러들어간다.

이 세포들은 에이팝토시스 과정에 있으므로 세포막이 불안정해 투과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DNA 재구성 물질들은 클로닝으로 삽입된 NLS (Nuclear Locating Signal)에 의해 핵 내부로 이동한 다음, 남아있는 정상 DNA 서열들을 인식하고 드 노보 어셈블리 (De novo assembly)작업을 시작한다.

30억 자에 해당하는 DNA 전체를 통째로 짜 맞추는 것이다.

본래 단세포 생물체인 박테리아의 체내에서 작용하는 물질들인만큼, 그들은 세포 단위에서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개별 세포 하나하나의 사멸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에이팝토시스는 멈추었고, 조직 괴사도 중지되었다.

그것은 약간 더 거시적인 시야로 보았을 때 환자의 출혈이 멎거나, 시커멓게 물들어 썩어가던 조직이 다시 살아나는 과정이었다.

불타는 듯한 통증, 파열한 식도에서 피가 끓는 고통이 멎었다.

"......."

방호과장 히데오는 그제야 눈앞이 깨끗하게 보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도 온몸이 아팠지만 이젠 알 수 있다.

‘살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생존을 직감했다.

무려 22 그레이의 피폭과 함께 전신에서 염증 반응이 일어난 후, 온 몸의 피부가 벗겨지고 갈라져서 피가 콸콸 쏟아졌던 환자다.

이런 상태까지 간 후에 회복된 인간으로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첫 번째일 것이다.

히데오는 원전 폭발 이후로 지금까지 뭐가 어떻게 굴러간 것인지 제대로 인식조차 못했지만, 이제야 비로소 분명해진 게 하나 있었다.

‘에이젠바이오가 왔다.’

눈앞에서 환자들을 진료하는 의사와 간호사들은 대부분 일본인이 아니었다.

마치 국경없는의사회라도 되는 것처럼 인종이 다양하다.

그가 알기로 이런 조직은 지구상에 딱 하나밖에 없다.

방사선 보호복과 마스크를 착용한 의사가 다가와서 히데오의 바이탈을 체크했다.

“아, 아노……."

히데오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을 걸었지만, 의사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영국 억양으로 답했다.

“I don't speak Japanese well."

히데오는 침을 꼴깍 삼키고 자신 없는 영어로 뜨문뜨문 묻기 시작했다.

“에이젠바이오가, 피폭을 치료한 겁니까?”

“네. 환자분은 의식이 없으셨기 때문에 보호자의 임상 동의를 받았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류영준 대표님은 어디에 계신가요?”

***

“감사합니다. 계속 환자들 경과 모니터링하고 알려주세요.”

류영준은 차세대 병원의 의료진과의 전화를 끊고 다시 미팅 테이블로 고개를 들었다.

“정신없이 바쁘시군요.”

히시지마가 말했다.

“바쁘다는 말 할 틈도 없습니다. 한시가 급하니 계속하시죠.”

“……네. 지금 피폭자는 400여 명 남짓이지만, 원전 내부에서 피폭된 엔지니어나, 인근 마을에서 피폭된 주민들로 국한된 얘기입니다. 그들은 피폭선량이 높아서 당장 치유가 시급한 케이스고, 장기적으로 도호쿠 지방 전역에서 소규모 피폭자가 수만 명은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히시지마가 시뮬레이션 자료를 설명했다.

“그 사람들은 장기간 추적하면서 관찰할 겁니다. 그보다 지금 시급한 문제는 독성이 가장 높은 플루토늄의 확산을 막는 겁니다.”

타케루가 말했다.

“이미 상당히 많이 퍼졌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아직은 그래도 절망적으로 늦진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플루토늄은 아직 원전 근처에 머물러있습니다. 그게 이동하기 전에 잡아야 합니다.”

“네. 그래서 송 박사님이 그걸 중간에서 차단할 방법을 준비해오셨을 겁니다.”

류영준이 송지현을 쳐다보았다.

송지현은 긴장한 표정으로 노트북에 USB를 연결하고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볼케니움이라는 박테리아는 공기 중을 비행할 수 있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이 박테리아에 셀리제너사가 동정한 박테리아, ‘래디오이터 (Radio-eater)’의 유전자를 클로닝했습니다.”

류영준은 옆에서 빙긋 웃었다.

‘작명 센스 참…….'

어쩐지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송지현은 시선을 피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재조합 볼케니움은 방사능을 추적해서 제거할 수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실험 방법은 류영준이 과거에 GSC 테러를 막을 때 했던 기술을 모방한 것이다.

송지현은 류영준처럼 천재가 아니다.

그녀 스스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평범한 과학자에겐 평범한 방식이 있다.

아이작 뉴턴이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남들보다 더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갔기 때문’이라고.

거인은 지금껏 과학자들이 만들어온 과학 그 자체다.

송지현은 류영준이 쌓아놓은 연구들을 답습하면서, 과학의 거대한 어깨 위에 올라갔다.

그 시야에서는 보통의 과학자에게도 보이는 것들이 있게 마련이다.

볼케니움에 래디오이터를 클로닝하는 아이디어와 구체적인 방법 같은 것.

어쩐지 그 기술의 본래 주인인 류영준 앞에서 발표하려니 좀 민망한 모양새가 되었지만 괜찮다.

과학이라는 게 원래 이런 것이 아닌가.

“효과는 있던가요?”

류영준이 물었다.

“네? 네! 시뮬레이션 결과, 박테리아를 분사했을 때 그로부터 약 10미터 이내의 방사능을 추적해서 제거할 수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좋습니다. 박테리아가 지금 얼마나 있죠?”

“펠렛 상태로 30킬로그램 정도입니다. 물에 서스펜션해서 에어로졸 형태로 분사할 겁니다.”

송지현이 말했다.

“그렇게 하면 방사능을 전부 제염할 수 있을까요? 800만 베크렐까지 된다고 하셨죠?”

히시지마가 물었다.

“800만 베크렐은 이론적인 값이에요. 실제로는 그 절반 이하가 될 거예요. 급하게 생산한 거라서 박테리아의 양이 너무 부족하거든요.”

"으음......."

히시지마와 타케루, 켄토는 작게 신음했다.

“그럼 원전에서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가는 것은 포기하고 도쿄 방면으로 가는 것만이라도 막는 건 어떻습니까?”

켄토가 물었다.

“그쪽에 지금 국민들이 가장 많이 있으니까, 다른 지역은 소개령을 내리고……."

“아니요. 다 잡을 수 있습니다.”

류영준이 끼어들었다.

“다 잡아요? 어떻게요?”

송지현이 물었다.

“박테리아 한 개의 무게는 피코그램 수준이니까, 30킬로그램의 펠렛에는 박테리아가 ‘경’ 단위로 있을 겁니다. 충분할 듯 싶은데요.”

“그래서 이론적으로는 800만 베트렐이 가능하다고 했던 거예요. 하지만 박테리아 하나를 방사능 물질 하나에 할당할 수는 없잖아요? 우리가 분자 단위에서 농도를 추적하고 컨트롤할 수가 있나요?”

송지현이 물었다.

“비슷하게는 할 수 있죠.”

류영준이 말했다.

“우리한텐 ABAI가 있으니까요.”

ABAI (AgenBio Artificial Intelligence).

에이젠바이오에서 광둥성 모기 재해를 예측할 때 개발한 인공지능 생태 예측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솔직히 진심은 아니었다. ABAI를 가동한다고 해도 방사능을 그 정도 정확도로 예측할 수는 없다.

류영준이 믿는 것은 ABAI가 아니라 로잘린이었다.

호텔 방의 소파에 앉아서 류영준과 대화하던 로잘린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저한테도 피트니스 소모가 꽤 큰 작업이에요. 도호쿠 전역의 방사능을 추적하고 볼케니움의 움직임을 잡아주는 건.

로잘린이 말했다.

‘부담가지 않는 선에서만 도와줘.’

류영준은 미국의 에이바이오 암 연구소의 서버에 있는 ABAI를 작동시킨 다음, 프로그램에서 방사능의 확산 위치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방사능의 확산 정도는 바람을 타고 실시간으로 바뀌니 소방 헬기를 먼저 띄운 다음에 정확한 위치를 다시 짚어드리겠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약 15대의 소방 헬기가 도호쿠 원전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그들은 지시받은 이동하면서 도합 약 40,000 리터에 달하는 볼케니움 에어로졸을 날랐다.

산불을 잡을 때처럼 한번에 왈칵 붓는 대신 물탱크를 조금씩 열어서 미량을 흘려야 한다.

류영준은 모니터를 읽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로잘린의 시뮬레이션 모드를 읽으며 지시를 내렸다.

“7번 헬기, 남서쪽으로 200미터만큼 이동하고 30미터 반경 원을 그리면서 45리터 방수해요.”

류영준은 아주 예민한 기계를 다루는 것처럼 섬세하게 지시를 내렸다.

“8번 헬기는 그 자리에 대기합니다. 곧 방사능이 더 많이 내려올 거예요. 제가 신호하면 정면으로 이동하면서 50리터 방수하세요.”

"......."

“1번 헬기, 2번 헬기가 있는 방향으로 40미터만큼 이동한 다음 북동쪽으로 10미터 이동해서 70리터 방수하세요. 2번 헬기의 움직임을 따라하면 됩니다.”

열 다섯 대의 헬기의 운행을 조율하면서 쉴 새 없이 지시를 내린다.

“9번부터 15번 헬기는 츄부 북동부에서 원전 방면으로 V자 대형을 유지하면서 100리터씩 방수하며 직진하세요.”

시뮬레이션 모드에서 얻은 지식을 설명하는 속도가 따라잡기는 버거웠다.

하지만 착실하게 효과가 누적되고 있었고, 곧이어 도호쿠 북동부에서 히시지마에게 무전이 왔다.

-방사능 수치가 급격히 내려가고 있습니다.

현장의 구조대원들이 보내는 리포트였다.

"......."

히시지마는 충격으로 할 말을 잃었다.

이게 지금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일인가?

“4번 헬기, 4미터만 강하하고 미자키 숲 위로 80리터를 골고루 분사하세요.”

류영준의 지시는 몇 시간이 지나도 멈추지 않았고, 도쿄의 하늘에는 소방 헬기가 꾸준히 날아다녔다.

잠시 후에는 인근 소방청들의 도움을 받아서 30대의 소방 헬기가 충원되었다.

그들이 쏟아 붓는 물 속에는 모래처럼 작은 먼지가 섞여서 떨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볼케니움이 사냥한 후 뱉어낸 방사능의 결석이었다.

안정한 금속으로 환원된 그 물질들은 더 이상 방사선을 내뿜지 않았고, 힘없이 땅으로 추락했다.

시민들은 우산을 썼다.

그 광경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어떤 엔지니어들이나 구급대원들은 여기저기서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실시간으로 떨어지는 방사능 수치를 지켜보고 있었다.

발빠른 언론들은 하나씩 나서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도하기 시작했다.

-에이젠바이오와 셀리제너가 방사능 제염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츄부 북동부 지역의 방사능 수치가 정상값을 회복했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것은 방사능 물질이 안정한 금속으로 환원된 것이라고 합니다.

-기쁜 소식입니다. 도쿄 북쪽으로 몰려오던 플루토늄의 90퍼센트가 제거되었습니다.

피난을 준비하던 시민들은 짐을 싸던 모습 그대로 이 기적을 지켜보고 있었다.

일찌감치 방사능 측정기를 구한 사람들이 흥분해서 날뛰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14번부터 37번 헬기, 남은 박테리아 용액을 그 지역에 전량 방수해요.”

류영준이 말했다.

헬기들로부터 남은 박테리아 용액이 와르르 쏟아졌다.

이제는 결석이 거의 만들어지지 않았다. 대부분이 물의 형태로 바닥에 떨어졌다.

방사능이 거의 다 제거됐기 때문이다.

“끝났습니다.”

탁.

류영준은 지친 표정으로 무전을 내려놓았다.

약 아홉 시간에 걸친 제염 작업.

도호쿠 일대를 중심으로 퍼져나오는 800만 베크렐의 방사능을 완전 제염하는 데 성공했다.

"......."

“뭐……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히시지마와 대신들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감사하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되는군요.”

켄토가 말했다.

“저희가 정말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류 박사님. 이건 어떻게든 갚겠습니다.”

“방사능 제염은 송 박사님 공이 크니 셀리제너에 갚아주세요.”

류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약간 빈혈이 와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저는 환자들 좀 보고 오겠습니다.”

류영준은 가운을 어깨에 걸치며 밖으로 나섰다.

***

로잘린은 몹시 지쳐서 침대에 누웠다.

인간 류영준이 아홉 시간 동안 쉴 새 없이 무전을 친 후, 환자들을 새벽까지 살피면서 체력을 소모한 것과 거의 같은 피로감이다.

생명의 모든 신비를 꿰찬, 우주에서 가장 고등한 로잘린도 아홉 시간 동안 시뮬레이션 모드를 돌리면서 막대한 피트니스를 급격히 소모하는 일은 힘에 부쳤던 것이다.

“아빠 보고 싶니?”

아무것도 모르는 백준태가 로잘린에게 물었다.

“그래도 조금만 참아. 네 아버지는 지금 많이 바쁘셔.”

“저도 바빴거든요?”

로잘린이 말했다.

“침대에서 계속 뒹굴거렸으면서 뭘……. 지겹겠지만 조금만 참아. 뭐 먹을 거 사다줄까?”

“아니요.”

로잘린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류영준 오면 같이 야식 먹을 거예요.”

백준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곧 오실 거야. 임상 환자들 좀 보고 퇴근하신댔거든. 여기로 오신다고 했어.”

“빨리 왔으면 좋겠다.”

로잘린이 말했다.

“야식 맛있는 거 사달라고 해.”

“먼저 안아달라고 하고요.”

로잘린은 류영준 대신 베개를 꽉 껴안았다.

“근데 로잘린. 나 궁금한 거 하나만 물어봐도 되니?”

백준태가 말했다.

“뭔데요?”

“송 박사님하고 친해?”

“그럼요.”

“전에 나 기절했을 때 갑자기 송 박사님이 와계셔서 깜짝 놀랐거든. 근데 류 대표님이 보내셨다고 하니까……. 이게 좀, 뭐라 해야 하나, 내가 못 미덥나 싶기도 하고……."

“풋.”

로잘린이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비웃냐? 그래, 뭐 기절도 했고 못미더워 하셔도 어쩔 수 없지만……."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로잘린은 괴로워하는 백준태를 보면서 말했다.

“송 박사님은 특별한 사람이니까요.”

“대표님한테?”

“그리고 저한테도요.”

“어……오, 왜?”

세 사람의 관계를 상상하면서 백준태가 말을 더듬었다.

로잘린은 빙긋 웃었다.

“송 박사는 평범한 과학자니까요.”

***

“대표님 들어간다. 클리어해.”

새벽 세 시.

케이캅스 경호팀장 김철권이 무전으로 말했다.

경호팀원들은 빠르게 움직이면서 호텔 로비부터 객실까지 안전 루트를 확보했다.

몹시 피곤에 절은 류영준이 리무진에서 내렸다.

송 박사도 함께였다. 그녀는 며칠 전부터 방사능 제거 작업을 위해 불나게 쏘다녔는데, 긴장이 풀리니 이제는 다리가 다 후들거렸다.

“씻고 좀 자야겠어요.”

송지현이 말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류 박사님이 고생하셨죠 뭐. 구금부터 시작해서 철창 신세도 지고. 계속 면도도 못하셔서 많이 초췌하신데요.”

“어쩔 수 없죠.”

“식사도 제대로 못했죠?”

“송 박사님도 아무것도 안 드시던데요 뭐.”

두 사람은 노곤한 대화를 나누며 호텔 엘리베이터를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로비 계단을 지나던 순간이었다.

“류영준!”

계단 위에서 누군가 불쑥 튀어나왔다.

류영준의 체포 이후 지금까지 한번도 만나지 못해서 줄곧 기다려온 로잘린이었다.

태어난 지 이제 2년.

삼라만상의 진리를 모두 꿰차고도, 화가 뭔지 모르고 눈물이 뭔지 모르는 이 기묘한 꼬마.

“다녀왔어.”

류영준이 웃으며 말했다.

로잘린은 다른 그 무엇도 없이, 순수하게 반가움 하나만을 얼굴 가득 머금었다.

새하얗게 피어오르는 배꽃 같은 표정으로 뛰어내려오기 시작했다.

순간 류영준은 정말로 피로가 싹 씻겨나가는 것을 느꼈다.

비로소 로잘린이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지 새삼 깨달았다.

그녀는 과학의 백과사전 같은 게 아니다.

누구보다 순수하고 누구보다 인간적인…….

‘내 머리에서 세로토닌 조작했니?’

류영준은 달려오는 로잘린과 눈을 맞추며 메시지를 보냈다.

-아니요.

로잘린은 다다닥 달려와서는 류영준을 왈칵 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이 발생했다.

류영준의 품속이 만들어내는 폭발적인 격정이 소용돌이치면서 뇌의 변연계를 중심으로 긴급 사태를 선언했다.

변연계는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처럼 두뇌 전체를 제압했고, 신피질에서는 이성적인 판단 능력을 상실했다.

어린 로잘린에게는 너무나 강한 자극이 머릿속에서 폭죽처럼 쏟아져 나왔다.

변연계의 흥분은 편도체와 자율 신경의 움직임을 촉진하면서 시상하부로 전기 신호를 전달했다.

누선의 조절이 느슨해졌다.

그에 따라 안구 위의 분비샘에서는 대량의 수분이 쏟아져 나왔다.

나트륨이 적고 엔돌핀이 충만한.

마치 양철 인형에 자리 잡은 심장처럼 로잘린의 눈에서 그것이 뚝 떨어졌다.

“이게 왜……."

로잘린은 빨개진 눈으로 울먹거렸다.

“이게 왜 이러지?”

그녀가 눈가를 닦아냈다.

눈물은 수도꼭지가 열린 것처럼 줄줄 흘러내렸다.

생명체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지만, 로잘린은 순간 자기 몸을 이해하지 못했다.

눈물샘의 통제력을 상실한 기분.

처음 느껴보는 그 감각에 그녀는 당황했지만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괜찮아.”

류영준은 웃으면서 로잘린을 꽉 안아주었다.

“울어도 돼. 많이 기다렸지? 미안해.”

류영준은 로잘린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아이스크림 사왔는데, 이제 올라가서 같이 먹을까?”

“……네……."

로잘린이 울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송지현이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류영준은 두 사람과 함께 계단 위로 걸음을 옮겼다.

***

피폭 치료는 완벽하게 성공했다.

응급 상황에 놓여 있었던 환자들을 전부 완치시켰다.

히시지마는 모든 것을 밝히는 내부 폭로와 함께 사임해버렸고, 아타베 총리는 최악의 정치 위기를 맞이했다.

55년 자민당 체제가 어쩌면 2009년 이후 처음으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전망이 뚜렷해졌다.

대승을 거둔 에이젠바이오와 류영준, 로잘린, 그리고 송지현은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뜻밖의 인물을 맞닥뜨렸다.

현재 일본 전역에서 수배중인 남자.

마쓰모토였다.

그는 비참한 몰골로 류영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

김철권과 경호팀원들이 앞을 막아섰다.

마쓰모토는 류영준을 한참 쏘아보았다.

“대표님 물러나십시오.”

김철권이 류영준을 뒤로 보내며 말했다.

“잠깐만요. 괜찮아요.”

류영준은 오히려 경호팀원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대화할 수 있다.

마쓰모토는 진정되어 있었다.

마쓰모토가 말했다.

“일본은 허가만 있으면 총기를 소지할 수 있다.”

“그렇습니까?”

“나는 그 허가가 있고.”

“그럼 총을 갖고 계십니까?”

"......."

마쓰모토는 대 답하지 않았다.

그는 오랫동안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로잘린이 흘린 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마쓰모토 사장님.”

류영준이 말했다.

“어머니 일은 정말 유감입니다.”

“네가……."

마쓰모토가 말했다.

“네가 치료해줬어야 했어……. 그럼 나도 원전을……. 나도 내가 잘못한 것 알아……. 하지만 그래도……."

“에이젠바이오가 노화까지 질병의 범주에 들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마쓰모토는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는 품에서 총을 꺼내어 옆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꼈다.

“경찰 불러서 모셔드려요.”

류영준이 김철권에게 말했다.

***

“……해서 야세르가 류영준을 버리고 자기한테 오랬어요.”

로잘린이 아이스크림을 빨면서 말했다.

“그리고 그때 송 박사님이 걸크러시 터지는 모습으로 나타나서 구해주신 거니?”

류영준이 물었다.

“네. 이랬어요. 어깨 딱 펴고, 굳은 표정으로, ‘안 돼.’, ‘너 뭐야? 유괴범이냐?’, ‘어린 애 꾀어내지 마. 내가 보호할 거니까.’ 이렇게. 아주 멋있었다고요.”

로잘린이 흉내내는 걸 보며 류영준은 피식 웃었다.

송지현은 옆에서 귀가 붉어져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부녀가 쿵짝이 아주 잘 맞으세요.”

그녀가 말했다.

로잘린은 송지현의 팔짱을 당겨서 품에 끼고는 류영준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근데 류영준. 저는 야세르가 무슨 소리 하나 궁금해서 들어봤는데, 별 것 없더라고요.”

“그래?”

“이사야 프랭클린도, 야세르도, 다른 많은 과학자들도 항상 이상적인 미래만 그려요. 하지만 정말 재밌지 않아요? 저마다 과학이 이거다, 저거다, 얘기하면서, 과학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하는데 정작 그건 과학적이지 않아요.”

그녀가 말했다.

“거기에 정답은 없으니까요.”

“그래?”

“그 사람들이 과학의 이상을 그리는 그곳에서, 과학 그 자체인 제 눈에는 인간적인 것들이 보입니다."

로잘린이 말했다.

“인간적인 것?”

“네. 어쩔 땐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인간적인 것들. 그게 더 소중한 거라고 생각해요.”

류영준은 빙긋 웃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류 박사님."

송지현이 시계를 보며 말했다.

“네?”

“노벨상 시상식 늦겠는데요. 얼른 가봐야 하지 않아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요?”

류영준이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얼른 가요.”

로잘린이 말했다.

“일부러 한국까지 와서 시상식 해주는데 주인공이 늦으면 안 되잖아요.”

류영준은 로잘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요?”

“아니. 고마워서.”

“새삼스럽게?”

류영준은 빙긋 웃으며 로잘린을 안아들었다.

한 손으로 사무실 문을 열었다.

그가 말했다.

“그럼 같이 갈까?”

거인의 발걸음이 밖을 향했다.

300화.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끝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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