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 보통의 과학자 (8) >
도쿄의 웨스틴 도쿄 호텔.
류영준은 귀국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가 출국했던 모든 일정 중에서 젤 가벼운 여행이었어요.”
로잘린이 말했다.
“태양 전지 발전소 준설 미팅하는 게 전부였으니까.”
류영준이 가방을 싸면서 말했다.
“그래도 나는 여태 일하면서 출국한 것 중에서 이번에 제일 식겁했다. 너 쓰러져서 진짜 깜짝 놀랐어.”
“헤."
로잘린은 침대에 앉아서 민망한 듯 웃었다.
“저도 그렇게 쓰러질 줄은 몰랐어요.”
“로잘린이 모르는 게 있다니.”
“미안해요.”
“아냐. 무슨 소리야. 네가 왜 미안해.”
류영준은 가방 지퍼를 채우고 로잘린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괜찮아. 네가 잘못한 거 아무것도 없어.”
류영준은 로잘린의 어깨를 당겨서 가볍게 안아주었다.
“류영준.”
로잘린이 말했다.
“옛날에 제가 얘기했던 거 기억해요? 공룡이 멸종하면서 포유류의 시대가 온 것처럼, 저는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대체할 수 있는 차세대 생물이라고.”
“응. 지금 생각하면 처음에 네 유전자가 쪼개졌던 게 좀 다행이다 싶어.”
“사람들이 다 무사해서요?”
“아니. 덕분에 이렇게 너랑 만났으니까.”
로잘린은 류영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저는 사람이 돼서 좋아요.”
로잘린이 말했다. 그녀는 손을 펴서 자기 손을 가만히 관찰했다.
“사람은 신비한 동물이에요. 저조차도 이해 못하는 것들이 있죠. 이 생물은 산소, 탄소, 질소, 수소, 칼슘, 인, 포타슘의 복합체 이상의 가치를 갖고 있는 존재예요. 당신이 혼자 일본에 갔을 때, 류지원이 저한테 우울해보인다고 했어요.”
“그래?”
“네. 그리고 생각해보니 저는 정말 우울감을 느끼고 있었어요. 그런 감정은 정말 신기합니다. 세로토닌을 조금 더 과분비할까 하다가 관두었죠.”
“지금은 괜찮아?”
“네. 이제 당신이 있으니까요.”
“이제 혼자 어디 안 갈게. 미안.”
류영준은 로잘린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지이잉!
휴대폰이 울렸다.
비서실이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류 대표님. 유송미입니다. 일본 도호쿠 제1 원전이라는 곳에서 류 박사님을 찾는 연락이 왔습니다.
“도호쿠 제1 원전이요?”
-무슨 일인지 물어보니 류 대표님이 원전에 방문했을 때 가압기 파손을 알아채고 알려주셨다고 하더라고요. 그 원전이 지금 폭발 위험성이 있는데, 가동 중지와 관련해서 류 대표님한테 상담하고 싶다고 합니다.
“제가 원전 전문가가 아니고 생물학자인데 어떻게 상담을 해요?”
-그렇게 답변드렸는데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고 류 대표님 도움이 필요하다면서 꼭 좀 부탁드린답니다. 원전 폭발이라니 사안도 큰 것 같고 간절해보여서 일단 대표님한테 한번 확인받은 후에 답변하려고 전화드렸습니다.
사실 방호과장에게 가압기의 파손을 알려준 것만으로도 류영준은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이 이상은 니혼 전력의 일이지, 류영준이 거기까지 끼어들어서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도 이유도 없었다.
“연락한 사람이 누군가요?”
-방호과장 히데오라는 사람입니다.
“오늘 제가 있는 호텔로 찾아오면 만날 수 있다고 전해주세요. 오후에는 시간 비니까.”
-네. 알겠습니다.
***
케이캅스의 백준태는 호텔에 방문한 손님을 안내하면서 이게 맞는 일인지 어리둥절했다.
류영준을 찾아오는 사람은 몹시 다양했지만 병원, 학회, 호텔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그룹은 서로 다 달랐다.
병원에선 주로 환자나 의사들, 학회에선 과학자들, 호텔에선 기업가나 정치인들을 주로 만났다.
하지만 지금 호텔에 들어온 남자 히데오는 누가 봐도 순진하고 평범한 기술자처럼 보였다.
정장 대신 후줄근한 잠바와 목이 늘어난 티셔츠. 향수 대신 잠바에 밴 기름 냄새.
번쩍거리는 호텔 전경에 약간 위축된 표정, 관리받지 못해서 푸석푸석한 피부와 머리카락.
“저, 저기, 제가 여기 온 게 혹시 기록 같은 게 남나요?”
히데오가 물었다.
“저희만 알고 있을 겁니다.”
백준태가 말했다.
“여기 미팅룸입니다.”
그는 미리 대실한 소형 비즈니스 회의실 문을 열어주었다.
안에는 이미 류영준이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추가로 원전에 같이 방문했던 그 조그만 여자애도 함께였다.
“안녕하세요.”
류영준이 인사했다.
히데오는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인사하고는 류영준의 맞은편에 앉았다.
“류 대표님한테 도움을 청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제 도움을요?”
“전에 물 소리만 듣고 가압기 이상을 알아채셨잖아요.”
오히려 원전에 대해 잘 몰랐기에 대충 아무거나 둘러댔던 건데.
류영준은 이 사람이 류영준을 원전 전문가로 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혹시 오해하실까봐 말씀드리는데, 그건 정말 우연일 뿐입니다. 노파심에 얘기한 게 맞아떨어진 거죠. 저는 원전에 대해 잘 모릅니다.”
류영준이 웃으면서 말했다.
“류 대표님. 도호쿠 제1 원전은 지금 심각한 상탭니다. 당장 가동 중지해야해요. 지금 주급수펌프가 멈췄습니다. 보조급수펌프를 쓰고 있는데 내부 기술자들 소견으로는 며칠만 더 돌아가도 폭발할 수도 있답니다.”
“그럼 중지하면 되잖아요?”
“그걸 저희 발전소에서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본사에서 기술자들이 파견을 왔어요.”
히데오가 말했다.
“그럼 그 분들이 중지시키는 거 아닌가요?”
“그럴 줄 알았는데 그렇게 안 합니다.”
히데오가 고개를 저었다.
“도호쿠 원전은 지금 탈원전 운동의 한가운데 있는 원전이에요. 제2의 후쿠시마가 될 거라는 평가들 속에서 이미 니혼전력은 문제없다는 공표를 한 적 있습니다. 지금 니혼 전력이 도호쿠 원전을 가동 중지하면 탈원전 운동에 불이 붙어요. 그럼 아타베 총리가 다른 발전소 건립을 막아줄 방법이 없어지고 태양 전지 발전소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 니혼 전력의 주가는 크게 떨어질 겁니다.”
“무슨 소리예요? 그래서 가동 중지하는 대신 터지게 내버려둔다는 겁니까?”
“당연히 그건 아니죠. 본사에서는 계속 가동을 하면서 어떻게든 수리하길 바라는 입장입니다.”
“그게 됩니까?”
“불가능한 건 아닌데, 굉장히 위험하고 시간이 너무 부족하죠. 수리되기 전에 터질지도 모르는 거니까요. 그 경우 기술자들이 제일 먼저 죽을 겁니다.”
“아니, 자기 직원들 목숨을 담보로 잡고 그런 식으로 수리를 한다는 거예요?”
“태양 전지로 교체되면 어차피 원전 기술자들도 밥그릇 작아지는 건 당연한 사실입니다. 이 위기를 우리가 다 같이 의지를 한 데 모아서 집중해서 헤쳐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
“근데 저는 그래도 중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상태 심각해요. 제가 원전의 폭발 위험성에 대한 내부 리포트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걸 제게 주시는 것은, 제가 고발해달라는 건가요?”
“제가 직접하고 싶은데 솔직히…… 저는 너무 무서워요.”
히데오가 말했다.
“저는 류 박사님 같이 대단한 인물이 아닙니다. 그냥 별 볼일 없는 원전 기술자고 핵물리학 전공자일 뿐이에요. 저는 그냥 겁 많은 평범한 과학자입니다.”
“그래서 이걸 제게 터뜨려달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부탁드립니다. 냉각수 흐르는 소리만 듣고도 문제를 알아내신 분이시잖습니까?”
“아뇨. 저는 원전 전문가가 아닌데……."
류영준은 약간 난처한 기분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방호과장이 고개를 숙였다.
“부탁드립니다. 이대로 가면 많은 사람들이 다칠 수 있습니다.”
“음......."
“그리고 이걸 발표해서 탈원전에 불이 붙으면 류 대표님한테도 좋은 일이잖아요? 태양 전지 수출도 되니까.”
히데오가 말했다.
“일단 알겠습니다. 원전 터지면 일본만 피해보는 게 아니니.”
류영준은 서류들을 가방에 넣었다.
***
“이 자료를 어디서 얻으셨습니까?”
마쓰모토가 물었다.
“비밀입니다. 제게 정보를 제공한 분이 신원 노출을 꺼리셨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니혼 전력 본사의 대표사무실.
마쓰모토는 과학계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인물로 칭송받는 인물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는 충격적인 자료를 가져와서 도호쿠 원전 가동 중지를 권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마쓰모토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노화 치료였다.
에이젠바이오 본사에서는 모르쇠로 일관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닐 것이다.
익명으로 받은 그 이메일에는 이사야의 몸에서 일어난 일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개인적으로 다시 알아보았을 때도 미국의 재생의학계에서 그런 소문이 도는 것이 거의 확실한 듯 보였다.
그리고 그 당사자가 눈앞에 직접 찾아오는 천운이 발생했다.
“아무튼 원전 가동을 중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파견된 기술자들은 물론이고 그곳 내부 기술자들 사이에서도 지배적인 모양입니다. 중지하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
류영준이 물었다.
“그러면 류 대표님은 태양 전지를 팔 수 있으니까 좋으시겠죠.”
“그런 이유로 이 말씀을 드리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어찌 생각하시든 상관없습니다. 만약 마쓰모토 사장님이 원전 가동을 멈추지 않으시면 저는 이 문건을 언론에 공개하겠습니다. 일본 국민들의 건강은 둘째 치더라도, 여기서 방사능이 터지면 한국에도 악영향을 초래할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가동 중지하겠습니다.”
마쓰모토가 말했다.
“그대신 류 대표님한테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노화 치료요?”
류영준이 물었다. 그는 이미 김영훈 이사를 통해서 얘길 들은 후였다.
“알고 계시는군요. 저희 어머니가 상당히 연로하셔서 거동도 불편한데, 꼭 그 임상을 받고 싶습니다.”
“안 됩니다.”
류영준이 딱잘라 거절했다.
“네?”
“이사야 프랭클린은 일반적인 노화가 아니었습니다. 배아복제와 유전자 조작에 의한 질병적인 조로 현상이었어요. 그리고 그걸 치료하는 것도 상당히 실험적인 임상이었습니다. 전임상도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대부분의 작업을 제 지식과 감에만 의존해서 갔던 겁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그 임상은 환자 본인이 그 실험 치료에 대해서 엄청난 깊이로 이해하고 있는 예외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환자의 동의만을 바탕으로 진행할 수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한테서 이런 준비 안 된 임상을 진행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니 해달라는 겁니다. 류 대표님 손을 타면 절대 실패하지 않잖아요?”
“그렇게 맹신하지 마세요. 과학은 지식을 이해하는 거지 사람을 믿는 게 아닙니다."
"......."
마쓰모토는 고개를 떨구었다.
“1945년에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될 때 내 아버지는 거기서 병참 장교로 일하시다 사망하셨습니다.”
그가 말했다.
“신생아였던 저는 어머니와 함께 외가에 있어서 살았어요. 하지만 그때부터 아빠 없는 아들로 자랐습니다. 어머니는 여자 몸으로 혼자서 절 키운다고 정말 온갖 고생을 다 하셨죠.”
"......."
“아직 젊었으니 재혼을 주선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다 마다하시고, 과부 혼자 산다고 찝쩍거리는 유부남들, 머리채 잡으러 오는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과일 팔면서 억척스럽게 사셨습니다. 이젠 나이가 아흔입니다. 얼마나 살 날이 많이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거동도 불편한 몸으로 무기력하게 보내드리고 싶지 않아요.”
마쓰모토가 간절하게 말했다.
“제발 부탁입니다. 한번만 도와주십시오. 뭐 20대 30대 이런 걸 바라는 게 아닙니다. 걸어다닐 수 있을 정도만 되어도 됩니다. 치료하실 수 있잖아요? 이사야 프랭클린한테 했던 것처럼 하실 수 있잖아요.”
“노화 치료라는 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실험 데이터들이 너무 없어서 함부로 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류 대표님한테 직접 부탁하는 거 아닙니까. 대표님은 노벨상도 네 개씩 받으시는 분이잖아요.”
“같은 얘기가 반복되는 것 같은데 안 됩니다.”
류영준이 목소리에 힘을 주고 말했다.
"......."
마쓰모토는 입술을 깨물었다.
“류 박사님. 그럼 도호쿠 원전 얘기는 제 맘대로 하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럼 저도 이걸 언론에 제출하겠습니다.”
류영준이 도호쿠 원자력발전소의 기술 리포트를 집어들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 나라는 류 박사님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당신은 의학 전문가지 원전 전문가가 아니에요. 도호쿠 원전은 터지지 않을 겁니다!”
***
아사히 신문, 요미우리 신문, 산케이 신문 등은 차례로 이 소식을 발표했다.
-도호쿠 원전 폭발 가능성.
이미 지난 2주 동안 귀에 딱지 앉도록 나왔던 얘기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내부자 자료를 들고 나와서 니혼 전력을 저격한 인물이 노벨상 네 개에 동시 후보로 점쳐진 사람이다.
니혼 전력의 주가는 순식간에 요동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일본 여론은 크게 나뉘어서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류영준이 아무리 잘 났어도 생물학자가 원전에 대해 어떻게 아냐? 선 넘지 마라
-내부자 자료를 우연히 수집하게 됐다잖아
-류영준은 니카라과 사건을 보면 사업가 기질이 상당하다. 이번 것도 태양 전지 팔려는 수작이라 생각된다
-류영준이 일본에 태양전지 팔아서 뭐하냐 에이젠바이오 주력은 신약이지 태양전지가 아니다
그리고 이처럼 혼란한 가운데 마쓰모토는 류영준을 직접 공격했다.
[에이젠바이오 류영준 대표, 니혼 전력에 형사 피소]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기업 가치를 훼손한 혐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