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2화. < 보통의 과학자 (6) > (148/301)

292화.  < 보통의 과학자 (6) >

[최근 니카라과에 위치했던 그룸 레이크 공군 기지의 유전체학 연구소에서 유전자 조작과 인체 실험을 한 혐의로 기소되어 조사받던 알폰스 로페어 (81)가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고 미 연방경찰이 밝혔다. 연방경찰은 정확한 사인이 확인되지 않았으나 식사 중 사망했다는 사실과 피해자가 사망 전에 구토한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음식물에 독극물이 들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독극물.’

순간 류영준의 머릿속에 한 가지 물질이 떠올랐다.

지구상 존재하는 모든 독소 중 가장 치명적인 물질.

‘H형 보툴리눔톡신.’

류영준은 이사야 프랭클린에게 왜 하필 보툴리눔톡신을 개발했었는지 물었다.

‘세계 최악의 독극물이지만, 그 악명은 H형에 대한 얘기야. 다른 제형의 보툴리눔톡신도 독성이 높지만 그 정도는 아니거든. 게다가 H형 제재는 해독제도 없지. 극미량만 있어도 되니 운반이 편하고, 공항에서 검출되지도 않고, 목표 외에 확산 위험이 없어서 특정인만 살해하기 딱 좋아.’

이사야는 그렇게 말했다.

‘유럽에서 보툴리눔톡신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팔레스타인에 돌아온 야세르를 만났을 때, 우리는 보툴리눔톡신으로 과학계의 거만한 리더들을 제거하고 폴리오마바이러스로 로잘린의 활동영역을 늘리는 계획을 세웠어.’

H형 보툴리눔톡신은 그 독성의 사악함 때문에 혈청형이 공개되지 않았다. 미국을 비롯한 몇몇 국가의 식약처, 그리고 일부 연구소에서만 그 정보를 독점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걸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일반 연구자나 기업에서 보툴리눔톡신을 응용해서 뭘 해보겠다고 사업 계획서를 내는 정도로는 혈청형의 정보를 제공받을 수 없다.

아예 보툴리눔톡신 자체를 연구하는 기초과학 분야 종사자여야 약간의 가능성이 생길 것이다.

야세르는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는 H형을 확보했었지. 야세르는 그쪽으로 꽤 실력 있는 과학자였으니까.’

이사야는 그렇게 덧붙였다.

류영준은 그녀의 설명을 곱씹으면서 기사를 계속 읽었다.

[근래 들어 장기간 저택을 비웠던 알폰스 로페어는 저택 관리인들을 자세히 알지 못했고, 최근에 생긴 다양한 악재가 겹쳐서 많은 관리인들이 일을 그만두거나 새로 채용되는 등 인선에 변동이 컸다. 피고용인 중 누군가가 알폰스 로페어의 식사에 독을 탄 것으로 추측되며, 연방경찰은 니카라과 사태의 피해자 중 한 사람이거나 체노버 은행의 주가 하락으로 큰 피해를 입은 투자자가 악의를 품고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을…….]

그럴 수도 있다.

또는 알폰스가 남은 권력의 마지막 힘을 짜내어 사망을 위장하고 탈출하려고 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류영준은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고 싶었다.

블레셋은 사실상 회사 문을 닫은 거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지만, 야세르는 아니다.

그는 팔레스타인 반군과의 연관성을 사전에 차단해서 미리 빠져나갔다.

정말 무관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야세르는 이사야와 함께 일했던 블레셋의 간부라는 점에서 로잘린에 대해 상당히 많이 알고 있을 공산이 크고 엘시에 대해서도 많이 알 것이다.

그리고 아마 지금 쯤은 류영준이 입양한 로잘린이 생명의 신비를 모두 꿰찬 차세대 생명체 로잘린임을 짐작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은 현미경 너머에서 보이는 미지의 마법이었지만 이젠 손이 닿는 물리계에 아홉 살 소녀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보통의 과학자는 로잘린을 탐내게 되어 있다.’

이사야가 했던 경고가 다시 떠올랐다.

만약 야세르가 어떤 형태로든 로잘린을 노리고 있다면?

알폰스 로페어는 엘시가 로잘린을 키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테고, 그런 만큼 로잘린의 정체에 가장 가까운 인물 중 하나다.

야세르의 입장에선 그를 경쟁자로 보고 미리 제거해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야세르가 로잘린한테 무슨 짓을 할 수 있지?

'.......'

할 수 있는 게 없다.

무장 군인 스무 명을 몇 초만에 기절시키는 이 초능력 소녀한테 과연 어떻게 손을 댈 수 있을까?

하지만 로잘린의 보호자로서, 류영준은 어떤 상황이든 대비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류 박사님.”

“류영준!”

공항 터미널 저 반대편에서 송지현이 보였다.

그리고 로잘린이 양팔을 활짝 펼치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다 넘어지겠다.”

류영준이 웃으면서 로잘린을 안아주었다.

로잘린은 류영준을 와락 껴안았다.

“멀리서 오느라 고생했어.”

류영준이 로잘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애 데려오느라 고생하셨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류영준은 송지현에게도 감사를 표했다.

송지현은 두 사람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뭐, 새삼스럽게. 우리 그동안 서로 이런저런 도움을 많이 주고받은 사이잖아요.”

그녀가 말했다.

“이 정도쯤은 별 거 아니죠.”

“근데 송 박사님은 일본에 무슨 볼일이 있어서 오신 건가요?”

“전에 류 박사님이 구해주신 니카라과 화산토에서 방사능 물질을 제거하는 박테리아를 분리했어요”

송지현이 말했다.

“정말요?”

“네. 그걸 후쿠시마에서 테스트해볼 예정이에요.”

“그러셨군요. 잘 됐으면 좋겠네요.”

“네. 따님 데리고 온 것도 류 박사님이 니카라과 화산 미생물들 구해주신 거 답례한 거니까 신경쓰지 않아도 돼요.”

송지현이 말했다.

“그럼 저는 다음 비행기 때문에 이만……."

“잠깐만요.”

류영준이 송지현을 붙잡았다.

“혹시 야세르랑 워싱턴에서 기자회견 하신 후에, 야세르가 어디로 갔는지 아시나요?”

***

류영준은 송지현, 로잘린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도쿄를 향했다.

후쿠오카에서 도쿄까지는 기차로 일곱 시간 쯤 걸리는 거리였는데, 비행기가 더 빨랐기 때문이다.

류영준은 로잘린에 대해 설명해주지 않아서 송지현이 또 기분 상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녀는 아예 체념해버린 느낌이었다.

도쿄에서 카게쿠니는 이미 집으로 돌아갔고, 노부히로 교수가 혼자 류영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셀리제너에서 온 연구원 십여 명도 송지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다음에 또 봬요.”

송지현이 헤어지면서 인사했다.

“네. 방사능 제거 연구 잘 되길 빌어요.”

류영준이 말했다.

송지현은 차량에서 내려 팀원들이 묵고 있는 호텔 쪽으로 걸어가다 우뚝 멈추었다.

류영준의 차량은 아직 신호에 걸려 있어 출발하지 않았다.

송지현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이쪽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류 박사님.”

“네?”

“제가 류 박사님처럼 뛰어난 사람은 아니지만, 평범한 과학자들도 어쩔 때는 류 박사님이 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네?”

“그냥……. 만약 무슨 일 있으면 저한테 얘기하셔도 된다고요.”

송지현이 말했다.

“아무리 류 박사님이라도 힘에 부칠 때가 있겠죠. 그럼 도와달라고 하세요. 우리 친구잖아요. 이 필드는 경쟁도 치열하지만 서로 협력도 많이 하는 곳이니까요.”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류영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

“이 애가 후쿠오카로 류 박사님을 소환한 그 따님입니까?”

“안녕하세요.”

로잘린이 한국말로 인사했다.

“잠깐 데리고 다녀도 괜찮죠? 애가 저랑 떨어지면 불안해해서요.”

류영준이 물었다.

“그럼요. 따님이 귀여우시네요.”

문제의 원전은 후쿠시마의 오쿠마정에 있었다. 후쿠시마 현의 가장 동부에 해당하는 해변가다.

송지현은 셀리제너 연구원들과 함께 6번 국도를 타고 그쪽으로 이동했고, 류영준은 그보다 서쪽인 고리야마시 방향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가는 길에 노부히로 교수에게 사업 개요를 들었다.

“요즘 일본 내에서는 탈원전 운동이 상당히 거세졌습니다. 그 이유는 후쿠시마의 오염수 처리 비용 문제, 니혼 전력 책임자들의 무죄 판결, 태양 전지의 개발 등 다양하겠지만, 모두 근본적으로는 정경유착 자체에 기초해요.”

노부이로가 말했다.

“니혼 전력은 아시아에서 가장 큰 전력 회사고 세계에서도 4위입니다. 그렇게 커진 데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쑥대밭이 된 일본의 전기 인프라를 독점적으로 공급하면서 성장한 배경이 있죠. 정부 사업을 사실상 도맡아서 혼자 진행한 셈입니다.”

“그 과정에서 정부와 연결고리가 강해졌다는 건가요?”

“니혼 전력 출신의 의원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니혼 전력은 도요타 이상으로 발언권이 강해요. 그리고 후쿠시마 원전은 사실 1976년 부터 이번 지진해일로 피해를 보기 전까지 크고 작은 사고가 잦았습니다.”

노부이로가 말했다.

“특히 그 중에는 '임계사고'라는 게 있었는데, 핵연료의 연쇄 반응이 커져 시설 손상과 작업자에게 방사선 피해가 생기는 아주 큰 사고입니다. 원래는 피폭 피해자와 안전 설비의 위험 문제로 떠들썩해야 정상인 사건이었는데, 아무도 몰랐죠. 은폐한 거예요. 정부에서 감사를 할 텐데 어떻게 그만한 사고를 은폐할 수 있었나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죠.”

"음......."

“니혼 전력은 지금 태양 전지를 할 생각이 없습니다. 원자력 발전에 그 동안 많은 투자를 했기 때문에 원금을 회수해야 하거든요. 게다가 후쿠시마 사태로 재정이 거덜나서 절반 쯤 국유화된 상태죠.”

노부히로 교수가 말했다.

“근데 일본은 전기가 민영화된 나라입니다. 그럼 니혼 전력이 휘청거리는 틈을 타서 후발 주자들이 태양 전지를 앞세워 성장하려 하는 게 정상 아니겠어요?”

“그렇죠.”

“하지만 사업 허가를 안 내주고 있습니다. 아타베 총리가 니혼 전력을 지지하기 때문이죠. 국민들은 이 상황이 열불 터지는 거예요. 경제학자로서 저도 그렇고요. 니혼 전력, 국제적 민폐 기업인 데다 그린피스나 독일의 에네콘 같은 데서 환경 오염을 저지른 악덕 기업으로 연달아 상을 타낸 저 쓰레기 같은 곳을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시장 질서까지 막아버린 정부가 어처구니가 없는 거죠.”

“그래서 직접 태양 전지로 발전소를 건설해서 사업성을 보여준다는 거군요.”

“맞습니다. 도쿄 대학 차원에서 연구적으로 진행하는 일이라 자본금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고른 발전소의 설치 위치가 고리야마시 서쪽의 산지다.

교외의 농경지역이라 땅값도 싸고, 오쿠마정이나 도쿄와 가까워서 탈원전의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교수들하고 의논해보니 그 지역이면 작은 발전소 하나는 되겠더라고요.”

노부히로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니혼 전력이 운영하던 원전들 상당수가 지금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어떤 곳은 원전 폭발 가능성도 계속 재기되고 있고요.”

“폭발 가능성이요?”

“여기보다 약간 북쪽입니다. 도호쿠 원전이라는 곳이요.”

노부이로가 말했다.

“얼마전에 거기 꽤 강도 높은 지진이 발생하면서 원전이 설치된 지대 자체가 1m 정도 가라앉았거든요.”

“세상에……."

“니혼 전력의 발표로는 문제없다고 하는데 국민들은 불안한 거죠.”

***

“우리 원전은 안 터져.”

니혼 전력의 최고 경영자, 마쓰모토는 요즘 떠도는 뉴스들을 일축했다.

그는 고급 세단 뒷좌석에 앉아서 창밖으로 시위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호쿠 지방으로 들어오니까 확실히 시위대가 더 많아졌다.

하지만 마쓰모토의 생각은 변함이 없다.

“누가 만든 원전인데. 절대 안 터져.”

“하지만 회장님. 국민들이 불안해하고 있으니 좀 더 자세한 조사 내용이라도 발표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운전 기사가 말했다.

“다른 건 다 둘째 치고, 당장 내 모친이 사시는 집이 도호쿠 원전 바로 옆에 있어.”

“정말입니까?”

기사가 깜짝 놀랐다.

“그래. 내가 그 동안 자네랑 차 타고 도호쿠 원전 쪽에 개인적으로 갔던 게 한두 번이 아닌데, 그럼 뭐하러 갔다 생각했나?”

“하하……. 저야 뭐, 회장님 가자고 하시는 곳 모셔다드릴 뿐이지 제가 뭐라고 생각을 하겠습니까.”

기사가 머쓱해하며 답했다.

“흠. 어디 내연녀라도 숨겨놨나 의심했겠군. 그런 거 아니야. 내 어머니가 거기 혼자 살고 계시네.”

“그러셨군요."

“그러니 도호쿠 원전은 안전해. 내가 설마 내 어머니를 죽게 두겠나.”

“그러게요. 회장님이 얼마나 효심이 지극하신 분인데.”

“내 어머니가 젊으실 때 그 전쟁통에서 날 키운다고 혼자 갖은 고생을 다 하셨거든.”

마쓰모토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젠 많이 연로하셔서 거동도 불편하신 분이, 집에 들어오시라고 그렇게 얘길 해도 며느리랑 손주들한테 폐 끼치기 싫다고 혼자 사시겠다면서 에휴……."

마쓰모토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회장님이 자주 찾아뵈니 좋으시겠네요. 거의 매주 두 번씩 가시잖습니까. 내연녀도 그렇게는 안 만날 겁니다.”

“노인이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자꾸 외로움 타시고 힘이 없으셔서 내 걱정돼서 그랬지.”

마쓰모토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젊을 때는 기운이 참 팔팔하셨는데 이런 걸 보면 세월이란 게 참……."

그의 말이 멈췄다.

익명의 누군가에게서 메일이 날아와있었다.

이런 스팸은 그 동안 꽤 많았지만 메일 제목이 좀 충격적이다.

[마쓰모토 회장님께 드립니다. 이사야 프랭클린의 노화 치료 가능성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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