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 보통의 과학자 (5) >
류영준은 노부히로, 카게쿠니 교수와 함께 도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나 없다고 사고 치지 말고.’
그는 로잘린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네.
‘부모님 집에 계셔?’
-네.
‘두 분 괴롭히면 안 된다.’
-제가 누굴 괴롭혀요.
‘배는 안 고파?’
-아까 나가시기 전에 같이 밥 먹었잖아요. 그리고 저는 배고픔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어린애 보듯이 걱정 안 해도 돼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뭐 그렇긴 한데, 그래도 네가 사람이 되니까 여러모로 괜히 불안하네. 무슨 일 있으면 메시지 보내.’
-네.
‘심심하면 지원이한테 놀아달라고 하고. 걔 너랑 친해지고 싶어하더라.’
로잘린은 소파 옆자리를 홱 돌아보았다.
휴대폰을 보던 류지원이 움찔했다.
“어, 왜? 뭐 필요해?”
류지원이 물었다.
로잘린한테 말 거는 건 항상 긴장된다. 좀 더 친해지면 괜찮겠지?
“나가고 싶어요.”
로잘린이 말했다.
“나가고 싶어? 밖에?”
“네."
“그럼 나가자. 잠깐만. 언니 옷 좀 갈아입고. 눈썹이랑 입술만 좀 만들고 가자.”
“눈썹이랑 입술을 만들어요?”
순간 로잘린은 상피 세포로 모근 조직을 만드는 과정을 상상했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류지원은 방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간단한 화장을 하고 나왔다.
그녀는 로잘린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날씨가 약간 쌀쌀하다.
“춥진 않아?”
류지원이 로잘린의 코트를 여며주면서 물었다.
“네. 괜찮아요.”
밖으로 나온 로잘린은 류지원의 손을 꼭 잡고 걸었다.
“오늘따라 좀 기운이 없어보이네. 무슨 일 있니?”
류지원이 물었다.
“기운이 없어보인다고요?”
“오빠가 일본 가서 그런가?”
"......."
"네가 좀 우울해보여서.”
류지원이 말했다.
“우울하다……."
로잘린은 그게 어떤 감정인지 알아내려고 생각에 잠겼다.
도파민, 세로토닌, 멜라토닌의 수치는 모두 아홉살의 건강한 인간의 평균에 해당하도록 맞추었다.
우울증은 아니다.
질병이 아닌 우울하다는 감정은 어떤 걸까?
“기운 빠지고 축축 처지고 단 거 먹고싶은 기분 말이야.”
골똘히 고민하는 로잘린의 표정을 보고 류지원이 말했다.
“단 건 먹고 싶어요.”
“저기서 핫초코 마실래?”
류지원이 정윤대학교 앞 사거리의 카페를 가리켰다.
“좋아요.”
류지원이 그 카페에 들어간 건 사실 다른 의도도 하나 있었다.
카페 카운터에서 그녀의 남자친구, 양동욱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손님 아무도 없네?”
“그치? 진짜 개꿀 알바야.”
양동욱이 히죽거렸다.
“얘는 누구야?”
“조카야.”
“조카가 있었어?”
“응. 인사해. 이름은 로잘린이야.”
“안녕?”
양동욱이 카운터 아래로 고개를 내밀고 로잘린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류지원은 메뉴판을 잠깐 읽다가 주문했다.
“모카 따뜻한 거 한 잔이랑 핫초코 한 잔, 그리고 음……. 로잘린, 케이크 먹을래?”
“그럼 당근치즈케이크.”
로잘린이 케이크를 가리켰다.
“그걸로 하나 줘.”
류지원은 지갑에서 류영준이 준 카드를 꺼냈다.
자기 딸 먹이는 건데 오빠 찬스 좀 써도 되겠지?
결제하고 자리에 앉아서 좀 기다리자 양동욱이 음료와 케이크를 가지고 나타났다.
그는 류지원과 앉아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동안 로잘린은 음료를 마시면서 류영준을 생각했다.
아홉 살 어린이의 몸을 하고 있지만 로잘린은 태어난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다.
원자 단위에서 우주의 모든 원리를 이해할 수 있고 모든 지식을 갖고 있지만 이런 기분은 불가사의하다.
학술적으로 따지자면 분리불안에 가깝지만 로잘린은 자신이 그런 상태에 놓인다는 걸 상상할 수가 없었다.
‘몸’은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잘린은 태어난 직후 지금까지 모든 시간을 류영준과 함께했다.
네덜란드 공판 때 몇 시간을 제외하고는 정말 잠깐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이 거리감은 로잘린에게 매우 커다랗게 느껴졌다.
‘진정하자.’
로잘린은 핫초코를 마시면서 자신의 마음을 달랬다.
메시지는 주고받을 수 있다.
만약 류영준이 허락해주고, 피트니스를 좀 소모한다면 류영준의 시야로 들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기다리자.
이 몸에 적응해야 한다.
“어?”
갑자기 로잘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창밖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왜 그래?”
양동욱과 잠깐 수다를 떨던 류지원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송 박사!”
로잘린이 대로 건너편을 가리켰다.
정윤대 사거리의 역사를 지키는 유서 깊은 온누리 약국은 사장이 나이 많은 할머니였는데, 그녀는 송지현의 고모였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 송지현은 몇 가지 상비약을 챙기기 위해 약국에 들렀다.
그리고 나오는 길에 대로 건너편 카페에서 튀어나오는 로잘린을 발견했다.
"엇!"
송지현이 화들짝 놀랐다.
뒤이어 카페 안에서 류지원과 양동욱이 동시에 뛰쳐나왔다.
이곳 정윤대 앞 대로는 주말에 차없는거리 제도를 실시해서 차가 다니지 않지만 애가 혼자 흥분해서 뛰어나가니 두 사람은 적잖게 당황했다.
그리고 아는 사람을 발견해서 괜히 반가웠던 로잘린은 송지현에게 달려가던 중 갑자기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로잘린의 의식은 마치 마취제를 꽂아서 기절시킨 것처럼 완전하게 암전되었다.
-음.
로잘린이 메시지를 보냈다.
같은 시각, 도쿄에 도착해서 입국 수속을 마친 후, 공항에서 나가던 류영준이 답했다.
‘무슨 일 있어?’
-저도 몰랐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문제?’
-이렇게 몸을 구성한 걸로 충분하지 않았나봐요. 혹시 잠깐만 멈추시고 오던 길로 열다섯 걸음 정도 되돌아가보실래요?
“교수님들 잠깐만요.”
류영준은 카게쿠니 교수와 노부히로를 뒤로하고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일이 생긴 거지?’
류영준이 메시지를 보내 물었다.
“로잘린!”
류지원이 동시에 로잘린을 붙들고 흔들었다.
송지현은 재빨리 로잘린을 똑바로 돌려서 앙와위 자세로 눕혔다.
맥박을 확인하고 휴대폰 라이트를 켜서 동공의 빛 반사를 확인했다.
“헉!"
로잘린이 갑자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류영준과의 거리가 견딜 수 있는 역치값 이내로 들어왔다.
피트니스가 공급되는 것이 느껴진다.
로잘린은 호흡을 고르면서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아무 문제 없다.
"......."
세포를 구성해서 몸을 만들었지만 로잘린은 아직 독립할 수 없었다.
로잘린 자신도 몰랐던 일이다.
원래 그녀의 세포들은 본체 콜로니가 존재하는 류영준의 몸 밖에서 생존할 수 없다.
그 원칙이 8조 개의 세포 복합체인, 류새이의 외모를 한 로잘린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나 니카라과에서 피트니스를 보내주는 세포들은 폴리오마바이러스 감염자의 신경에 들어간 거라서 자체 생존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 몸뚱이는 아니다.
벌써 한 달 넘게 멀쩡했기 때문에 괜찮은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일시적이지만 피트니스가 끊겼다.’
본체가 들어있는 류영준이 멀어지자 8조 개의 세포들이 사멸하려 했던 것이다.
“일본으로 가야해요.”
로잘린이 말했다.
“뭐라고?”
류지원이 황당한 듯 눈이 커졌다.
-당신과 거리가 멀어지면 이 몸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집니다.
로잘린이 류영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럴 수가……. 몸은 좀 어때? 괜찮아? 어떻게 됐어?’
-블루투스 같은 느낌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생물학적으로는 몇십 초 동안 사망 상태였는데 지금은 회복시켰어요. ‘네덜란드에선 왜 괜찮았지?’
-호텔에서 재판장까지 차로 30분 거리였죠. 지금은 동해를 건너야 하는 거리가 되었고요.
'.......'
낭패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다니.
후쿠시마 쪽으로 올라가면 로잘린하고 연결이 끊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로잘린을 일본으로 불러야 하나?
잠깐 고민에 잠겨있는데 류영준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류지원이었다.
“여보세요?”
-오빠? 로잘린 방금 쓰러졌어…….
류지원은 상당히 놀라고 겁을 먹은 것 같았지만 애써 침착하며 말했다.
-얘 무슨 지병 있어? 지금은 깨어났는데 병원으로 갈까?
“아니. 그보다 너 혹시 로잘린 데리고 일본으로 올 수 있니?”
-일본으로 데려오라고? 갑자기?
“애가 분리 불안이 좀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옆에서 돌봐줘야…….
-그래도 방금 쓰러진 애한테 그게 무슨……. 엇, 잠깐만…….
잠깐 무슨 소리가 나더니 목소리가 바뀌었다.
-류 박사님? 접니다. 송지현이에요.
“아? 송 박사님이 거긴 어쩐 일로……."
-정윤대 앞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류 박사님. 방금 로잘린을 일본으로 데려오라고 하셨나요?
“……네.”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송지현이 말했다.
-저도 지금 일본 갈 일 있어서 비행편 급히 구하는 중이거든요.
“……. 그럼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대신…….
“네?”
-아니요. 아닙니다. 제가 데리고 갈게요.
***
“류 박사님, 우리가 갈 곳은 후쿠오카가 아니라 후쿠시마인데요......."
카게쿠니 교수가 황당한 듯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후쿠오카에는 제 딸을 데리러 가는 겁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따님이요?”
“네. 후쿠오카로 온다네요.”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 땅이 후쿠오카다. 류영준은 송지현에게 부탁해서 그쪽으로 와달라고 했다.
서울에서 인천공항으로 이동하는 길에 또 로잘린과 연결이 끊어질 수도 있으니 류영준 쪽에서 미리 안전 거리를 확보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인천공항에서 출국 수속하다가 기절하면 정말 낭패니까 최대한 한국과 가까운 위치로 가려는 것이다.
류영준은 도쿄 공항에서 나오던 길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서 비행기를 다시 탔다.
그리고 며칠 후.
송지현은 로잘린을 데리고 후쿠오카행 비행기에 올랐다.
로잘린은 류영준을 보러 간다는 생각에 좀 들뜬 것 같았다.
다행히 법석을 떨지는 않았다.
송지현은 과자와 음료수를 주문해서 로잘린에게 건네주었다.
그냥 겉모습만 보면 예쁘고 귀엽게 생긴 아홉살 어린이인데.
역시 수상하다.
로잘린이 실신했을 때, 송지현은 맥박과 동공 반사를 확인했는데 둘 다 잡히지 않았다.
동공의 대광반사가 소실된 상태였고 심박이 없었다.
뇌간이 정지한 상태였다는 뜻이다.
그런데 류지원에게 119를 부르게 하고 심폐소생술을 실시하려던 찰나에 애가 갑자기 일어난 것이다.
아주 멀쩡하고 건강하게.
이럴 수가 있는가? 도대체 이 애의 정체가 뭐지?
“우와!”
로잘린은 감자칩을 씹으면서 감탄했다.
“바삭거리고 맛있어요.”
그녀는 송지현에게 과자를 내밀었다.
“송 박사님도 드실래요?”
“아니. 괜찮아.”
송지현은 웃으면서 거절했다.
그녀는 계속 생각에 잠겼다.
이상한 점은 더 있다. 어차피 로잘린이 이제 건강해졌고, 송지현이 일본으로 데리고 갈 거라면 도쿄로 가면 된다.
류영준도, 송지현도 도쿄에서 차를 타고 후쿠시마 지방으로 올라갈 생각이었으니까.
근데 한참 떨어진 후쿠오카로 와달라고 하는 게 이상하다.
결국 송지현은 셀리제너 동료들을 도쿄 직항 비행기에 태워 보내고, 본인은 후쿠오카를 경유하는 비행기를 탔다.
이렇게까지 해준 이유는 로잘린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지만.
‘데리고 가는 대신 로잘린에 대해 전부 알려주세요.’
송지현은 그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얘기해주시지 않는 것은 얘기하지 못할 이유가 있어서겠지.’
송지현은 로잘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
후쿠오카 공항에서 송지현과 로잘린을 기다리던 류영준은 메일 하나를 받았다.
비서실에서 보내준 것이다.
오늘 아침 미국에서 떠들썩해진 사건을 다룬 속보 뉴스.
-알폰스 로페어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