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 보통의 과학자 (3) >
“수상 일정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노르웨이에서 먼저 시상할 수도 없고, 스웨덴에서 먼저 시상할 수도 없어요. 그렇다고 노르웨이 국회의 노벨 위원회보고 스웨덴으로 오라고 하면 절대 듣지 않을 겁니다. 평화상을 수여할 수 있다는 권리는 노르웨이 정부도 상당히 자부심 갖는 부분이니까요.”
포스버그가 말했다.
“그럼 우리가 노르웨이로 가는 건 어떻습니까?”
스웨덴의 왕립 과학 한림원의 오스카 박사가 물었다.
“그것도 솔직히 말이 안 되죠.”
마커스 교수가 반대했다.
“우리는 상을 세 개나 수여해야 하는데, 노르웨이까지 찾아가서 거기서 드려요?”
“이런 게 국가 자존심 세울 일입니까? 기쁜 날에 좋은 상을 훌륭한 사람한테 주는 건데, 어디서든 장소는 뭐 상관없죠.”
오스카가 말했다.
“마커스 박사님. 평화상 수여하는 사람들은 정치적인 활동이 강하고 운동권에 수여하는 경우도 많고 하니, 다른 나라로 이동해서 시상하는 것에 더 민감하겠죠. 하지만 우리는 과학자가 아닙니까? 과학에 국경이 어딨어요?”
“에이. 그래도 안 됩니다. 우리는 신경 안 쓴다고 해도 우리 국민들은 신경 쓸 겁니다. 욕 먹을 수도 있다고요.”
“그럼 한국으로 가면 어때요?”
잠자코 얘길 듣던 데시데리아 공주가 물었다.
사실 모두가 그걸 생각하고 있었지만 쉽게 말하지 못하던 것이었다.
“한국으로요?”
오스카가 물었다.
“우리도 가고, 노르웨이 정부 측에서도 한국으로 가시라고 하는 거죠. 수여자인 류 박사님이 한국에 계시니까 명분도 생기잖아요?”
“그럼 다른 수상자가 문제군요.”
마커스가 말했다.
“그렇죠. 공주님. 문학상은 미투 스캔들 때문에 이번에 수상하지 않기로 했고. 문제는 경제학상인데, 경제학상 수상자는 한국인이 아닙니다.”
오스카가 말했다.
“일본인 교수님이었죠? 노부히로?”
“맞습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예측하는 논문을 1997년에 내셨죠. 그걸로 금융 위기 이후에 학계에서 순식간에 스타덤에 오른 사람입니다.”
“경제학이 무슨 과학이에요. 애초에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도 경제학상은 없었습니다. 중앙은행에서 하나 만들어다 노벨 권위에 붙인 거지.”
포스버그가 말했다.
“경제학도 나름 사회‘과학’이에요. 그러지 마십쇼.”
마커스가 말했다.
“아무튼 공주님 말씀대로 일본이면 한국이랑 가까울 텐데, 그 분도 한국으로 오시라고 하면 되겠네요.”
“그렇죠?”
데시데리아가 빙긋 웃었다.
포스버그가 마음을 알겠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공주님께서 한국에 가고 싶으신 거군요.”
“궁금하긴 해요. 불과 1, 2년 사이에 세계 최고 기업이 되어버린 그곳이 지금 어떤 분위기일지.”
데시데리아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하지만 그래도 본래 시상식이 열리는 나라가 아니라 다른 수상자에게 맞추어서 그곳으로 오라가라 하면 노부히로 교수한테 좀 무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스카가 지적했다.
“그럼 노부히로 교수님 의견을 먼저 들어보죠. 수상자 발표 이후에 말입니다. 그 분 요즘 많이 바쁘신가요? 무슨 일 하고 계세요?”
마커스가 머뭇거렸다.
“원전에 대한 연구를 하고 계십니다.”
“원전이요?”
데시데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경제학자가 원전이요?”
“뭐 아예 원자로의 핵융합 반응 같은 걸 공부하겠어요? 그건 아니고, 일본의 전력 사업과 원전 유지의 효과 비용, 이런 것들을 연구하는 모양이에요. 저야 잘 모르지만. 최근 일본에서는 후쿠시마 원전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이슈들이 다시 급부상하면서 많은 논란을 야기하고 있거든요.”
오스카가 말했다.
“그래요?”
“네. 그리고 노부히로 교수는 에이젠바이오의 태양 전지를 적극 도입해서 원전을 전부 교체해야 한다는 쪽으로 주장하면서 탈원전 정책 지지자들의 핵심 스피커로 움직이고 계십니다.”
“그렇군요. 그 정도로 바쁘시면 차라리 잘 된 것일 수도 있겠네요. 노르웨이나 스웨덴 오시는 것보다는 한국 가시는 게 더 편하시지 않겠어요? 이제 문제가 있다면 한국이랑 일본이 사이가 안 좋다는 것 정도겠네요.”
데시데리아가 말했다.
“둘이 사이가 나빠요?”
포스버그가 처음 알았다는 듯 물었다.
“류 박사랑 카게쿠니 교수도 사이 좋아 보였는데?”
오스카도 당황했다.
이들은 너무나 과학자라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동북아시아의 조그만 나라의 역사 같은 것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데시데리아가 짧게 설명해주었다.
“근대사적인 문제들도 많이 있었고, 최근에는 일본이 한국을 백색 국가에서 제외시키면서 무역 분쟁이 일어났거든요. 그걸로 불매 운동도 하고. 서로 감정이 나쁜 모양이에요.”
“그랬군요. 그럼 한국으로 가시는 걸 거부하실 수도 있겠네요. 미리 노부히로 교수한테 연락해서 물어볼까요?”
오스카가 물었다.
“안 됩니다. 수상자 발표는 원칙대로 시상식 일주일 전이에요. 노부히로 교수한테 스포일러를 할 수는 없죠. 상황을 좀 더 지켜봐요. 노르웨이 측에만 한국행에 대해 얘기해보고요.”
***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의 후유증은 아직도 일본을 괴롭히고 있었다.
일단 후쿠시마현은 도호쿠 지방의 남단에 위치해서 도쿄와 가장 가깝다는 중요한 이점이 있다.
이러한 지리 때문에 옛날부터 오슈 가도와 요네자와 가도 및 우슈 가도의 분기점이었고, 교통 요충지로 발달했던 곳이다.
지금은 산업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고 특히 원자력 발전에 굉장히 많은 투자를 했던 도시다.
그게 문제였지만.
일본 문부과학성의 히시지마는 기존의 제염 작업의 개요서와 새로운 제염법에 대한 서류들을 검토하고 있었다.
2011년에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로 사방에 오염된 방사능을 제염하는 작업은 대강 이런 순서였다.
1. 주택이나 정원에서는 많은 양의 방사성 물질이 빗물로 씻겨나갈 것으로 예측하고, 빗물받이와 배수구 주변 잡고체 제거를 진행했다.
2. 도로와 거리는 포장표면에서 씻겨나갔을 것으로 예측하고, 도로 가장자리의 토지의 표면을 제거했다. 하지만 오염도가 높은 주차장과 도로의 경우에는 표면을 깎아내는 작업을 진행했다.
3. 농경지는 표층 토양을 제거하고 흙을 덮는다.
4. 가장 오염이 심한 원전 시설 인근은 천층처분법으로 지표를 10여 미터만큼 파고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들어 고체 폐기물들을 매립한 다음, 그 위에 모르타르(Mortar)를 충전해서 덮어버린다.
5. 기기의 경우에는 옥실산, 인산 등의 화학물질을 이용하여 구석구석을 제염했다.
이렇게 처리를 마친 다음,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로 다시 시민들을 이주시키는 정책을 폈다.
그리고 전부 정지했던 원전들을 다시 하나씩 재가동하고 있다.
원자력발전소는 과거 일본 전역의 전력의 30 퍼센트를 공급하는 핵심 전력 자원이었다.
그 중대한 시설들을 쉽게 다 놓아버릴 수는 없다.
“문제는 그 모르타르가 깨졌단 말이지.”
히시지마는 보고서를 읽으면서 혀를 찼다.
모르타르 표면에 균열이 발생해서 방사능이 새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하지만 큰 문제가 하나 더 있다.
모르타르로 묻어놓은 것들은 고체 폐기물이나 원전 자체의 폐기물들이다. 하지만 제염 작업을 하면서 발생한 오염수는 아직까지 처리 방법이 없다.
사건 발생 당시 일본에서는 후쿠시마의 폐수 중 상당수를 해양으로 방류했는데, 그걸로 국제사회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자국 내에서도 비난 여론이 심했다.
때문에 방법을 약간 바꾸었다.
원전 인근에 거대한 저장 탱크를 만들어서 오염수를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오염수의 양이 어느 순간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 됐다.
2019년 초에는 112만 톤을 넘어버렸다.
그리고 이 오염수의 처리 비용 때문에, 후쿠시마 원전 사태의 처리 비용 전액이 눈덩이처럼 늘어나고 있다.
[2050년까지 약 81조엔으로 전망]
보고서는 고통스러운 값을 점쳤다.
무려 810조 원. 일본의 1년 예산을 거의 다 갖다 부어야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근데 여기에는 비밀이 하나 있다.
이들 중 51조 엔이 오염수 처리비용이다.
오염수를 바다로 흘려보내지 않고 직접 전부 중화한다면 저 돈이 드는 것이다.
만약 희석해서 바다로 방출한다면 11조엔.
어떤 처리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방출하면 4조엔까지 비용이 떨어진다.
이미 경제산업성에서는 이 오염수를 해양과 대기에 전량 방출하겠다는 입장을 굳혔다.
“항상 지들이 똥 싸놓고 처리는 우리한테 맡긴단 말이야.”
히시지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디자인 전공자가 기발한 마법의 메카니즘을 그려놓고 공돌이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네가 고민해야지 하는 거랑 똑같다.
이 오염수를 그대로 방출했을 때 생기는 환경 문제에 대한 예측과 해결 방법, 책임까지 문부과학성이 짊어진다.
히시지마는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의 효과적인 제염 방법에 대한 연구] 파일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국장님!”
원자력과의 스즈키가 국장의 방문을 거칠게 두드리고 들어왔다.
“한국의 셀리제너라는 회사에서 방사능 제거 연구를 하고 싶다고 합니다.”
“셀리제너?”
히시지마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 셀리큐어인가 만들었던 제약회사 아닌가?”
“맞습니다. 그리고 미세먼지 저감 장치도 만들었던 회사고요.”
“……. 방사능 제거를 연구하러 여기까지 온다는 건 어느 정도 효과 있는 아이템이 있다는 건데. 그러니까 현장에서 먹히는지 테스트 하려고 여기 온다는 거 아냐?”
“그런 것 같습니다.”
“좋아. 오라고 해봐."
***
“오랜만입니다. 류 박사.”
카게쿠니 교수는 환하게 웃으며 류영준을 껴안았다.
“잘 지내셨죠?”
“그럼. 난 잘 있었지.”
“그럼 이쪽 분이……?”
류영준이 카게쿠니의 옆에 서있는 60대 노교수를 쳐다보았다.
“노부히로입니다. 반갑습니다.”
노부히로 교수가 류영준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한국말을 잘 하시네요?”
“저것만 비행기에서 외워 오신 거예요. 이젠 영어로 얘기해야 할 걸.”
카게쿠니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안으로 드시죠.”
류영준은 두 사람을 대표 사무실로 안내했다.
“제가 여기 온 이유는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노부히로 교수가 말했다.
“태양 전지를 좀 사려고 오셨다고요?”
“네. 태양 전지로 일본 내에 작은 발전소를 하나 제작하고 싶습니다. 그걸 토대로 일본 정부의 원전 재가동 정책을 공격할 생각입니다."
“일본 정부에서 원전 재가동 정책을 펴고 있나요?”
“아주, 아주, 아주 바보 같은 생각이죠.”
노부이로가 말했다.
“일본은 원전의 피해를 가장 심각하게 본 나라입니다. 원전을 재가동하면서 국제적으로 보게 될 이미지 손상은 물론이고, 그 과정에서 만약 오염수를 방류하기라도 한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모릅니다. 게다가 태양 전지까지 개발되어서 더 이상 원전이 필요가 없는 이 상황에 원전 재가동? 가장 최악의 수죠.”
"흠......."
류영준은 팔짱을 끼며 얘길 들었다.
“일본 정부가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된 건가요?”
“정경유착 때문입니다.”
노부히로는 딱 잘라 말했다.
“정경유착이요?”
“후쿠시마 사태는 기술적으로 막을 수 있었던 ‘인재’입니다. 하지만 원전을 조금이라도 더 살려보겠다고 욕심 부리다가 결국 그 꼴이 된 것이죠.”
노부히로가 말했다.
“그 결과로 책임자들이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아십니까?”
“엄청 처벌 수위가 낮았나본데, 한 2~3년 받았나요?”
“하하하하.”
노부히로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정도 받았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전원 무죄입니다. 회사 차원에서 임금 30 퍼센트 삭감이 끝이었습니다.”
"......."
“아타베 총리가 원전을 재가동하는 이유는, 애초에 일본의 원전 사업이 정경유착이 짙은 사업이었고, 그걸 국유화하는 과정에서 더욱 공고해졌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