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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화. < 보통의 과학자 (1) > (143/301)

287화.  < 보통의 과학자 (1) >

판사 15명의 일치된 의견으로 미국 정부에 배상 책임이 있음이 선고됐다.

국제사법재판소의 정문 밖에서는 네덜란드 경찰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미국 법무부에서 알폰스를 기소한 후 네덜란드 정부 측에 신병 확보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도피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것이다.

네덜란드 경찰들의 지시를 받아 경찰차에 올라타는 알폰스를 캠벨이 가만히 쳐다보았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캠벨이 류영준에게 말했다.

“뭘요. 제가 자선 사업한 것도 아닌데요.”

캠벨이 알폰스와 체노버 은행을 완전히 무너뜨리려면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 결과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

그러려면 이곳의 사법권을 인정해줄 수밖에 없고, 결국 니카라과 정부에 대한 배상도 수행할 것이다.

그건 니카라과 정부로부터 다시 에이젠바이오와 차세대 병원으로 넘어가게 된다. 엄청난 액수의 영업 이익이다.

“그래도 류 박사님이 아니었으면 이 모든 일을 시작도 못했을 겁니다. 저는 정말 류 박사님 같은 친구를 둬서 다행입니다.”

캠벨이 말했다.

“그럼 저는 다음 일정이 있어 가보겠습니다. 류 박사님. 제가 여기까지 와서 네덜란드 총리를 만나지도 않고 돌아가면 외교적 결례 거든요.”

“네, 가보세요.”

류영준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류 박사님은 가급적 오늘은 어디 돌아다니지 말고 호텔에 계십시오. 호텔까지 가시는 길은 저희 경호원들이 동행해드릴 겁니다. 한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한동안 몸조심하시고요.”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캠벨은 류영준과 가볍게 비즈니스 포옹을 나누었다.

그가 떠난 후, 류영준은 법정 안쪽에서 나오는 이사야와 엘시를 발견했다.

그들 모녀 역시 네덜란드 경찰의 차량에 올라탔다.

엘시는 그룸 레이크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기도 했으니 어느 정도 그 범죄의 참여 이력이 있다.

이사야는 말할 것도 없고.

아마 참작을 받긴 할 테지만.

“류 박사님.”

안쪽에서 송지현이 나오면서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워낙 바빠서 이제야 인사하네요.”

"......."

“같이 저녁 식사나 하실래요?”

류영준이 물었다.

“류 박사님, 저 궁금한 거 있어요.”

“네. 말씀하세요.”

“전에 해리스 국장님 아지트에서 저 빼고 셋이 무슨 얘기 했어요?”

"음......."

류영준이 대답을 고르며 망설였다.

여긴 듣는 귀도 많고, 로잘린에 대한 걸 납득할 수 있게 전달하려면 뭐부터 설명해야할지 그 순서도 모르겠다.

하지만 송지현은 그걸 얘기하고 싶지 않은 것으로 이해했다.

"......."

그녀의 표정에 실망감이 비쳤다.

“어려운 거면 말씀 안 하셔도 돼요. 그리고 저 오늘 약속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송지현이 말했다.

“여기 아직 알폰스가 부리던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고, 송 박사님을 노릴 수도 있어요. 경호원들하고 같이 가시는 거 아니면 호텔에 계세요.”

“괜찮아요. 노려도 류 박사님을 건드리지, 누가 저 같은 평범한 과학자를 노리겠어요.”

송지현이 웃으며 거절했다.

***

약 20분 전, 재판이 끝난 직후 송지현은 엘시와 얘길 나누었다.

“만약 류 박사님이 못 오시면 탈렌 데이터를 제가 설명하려고 했어요.”

송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류 박사님은 정말 모든 면이 완벽하네요. 뭐든지 앞서가고, 모르는 게 없고......."

“그럼 네가 걔를 뭐 따라잡기라도 할 셈이었어?”

옆에서 이사야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엘시가 그녀의 어깨를 팔꿈치로 툭 쳤다.

"......."

송지현은 약간 침울한 표정이 되었다.

“그냥 류 박사님이 믿을 수 있는 동료가 되고 싶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이 업계에 연구 윤리를 어기는 케이스는 정말 허다하게 많았잖아요. 아예 데이터가 조작된 논문을 사이언스에 내기도 하고, 연골 세포라고 속이고 HEK293T 같은 ‘암화’된 세포를 환자들한테 투여하기도 하고.”

“5년 전에 제네틱티슈에서 임상하던 관절염 치료제? 역대급 미친 짓이었지. 우리 반군들도 혀를 내둘렀다.”

이사야가 말했다.

“솔직히 십 년씩 그 약을 개발한 과학자면 그걸 몰랐을 리가 없는데, 그냥 모른 척 한 거잖아요. 회사 주식 안 떨어지게 막기 위해서, 자기 자리 지키려고 입 싹 닫고. 그런 일들 비일비재했잖아요. 그동안 과학계가 그랬다고요. 그리고 그동안 류 박사님 혼자서 싸웠어요.”

송지현이 말했다.

“저는 연구만 같이 하는 게 아니라 그런 일들도 같이 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정말 용기 내서 미국에서 매스컴을 모을 때만 해도 제가 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

“근데 저 분은 혼자서도 너무 잘 해서……."

송지현은 재판소 입구에서 캠벨과 대화를 나누는 류영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제가 필요가 없네요.”

그녀가 말했다.

“뒤에서 쳐다만 보지말고 따라가요.”

엘시가 말했다.

“송 박사님. 나랑 내 딸은 실패한 과학자예요. 하지만 송 박사님은 아니에요. 류영준은 영웅적인 인물이지만 에이젠바이오 신화 같은 건 그 사람이 혼자 쓴 게 아니에요.”

"......."

“생명창조 부서에서 내가 하던 걸 십수년씩 붙잡고 파헤치던 천지명 박사 팀이 없었으면 아예 이 모든 게 시작도 안 됐을 걸요.”

엘시가 빙긋 웃었다.

“에이젠바이오에서 일하는 보통의 과학자들이 있기 때문에 류 박사가 저렇게 괴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송 박사님.”

“네."

“나는 과학계에서 성공한 여성이 되려고 부득부득 악을 쓰고 남성 과학자들과 경쟁했어요. 하지만 송 박사님은 그러지 마세요. 류영준한테 경쟁심을 느끼지 마요. 과학은 협력하는 거지 경쟁하는 게 아니잖아요.”

"......."

***

‘애초에 경쟁 같은 건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같이 협력할 방법도 따로 없는걸.’

암스테르담의 작은 카페에서 커피를 티스푼으로 저으면서 송지현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류영준에게는 부족하거나 아쉬운 게 없다.

미르 호의 외벽에서 박테리아를 채취하는 것도 류영준이 막아서 그만뒀다.

하지만 그때도 류영준은 자세히 설명해주지는 않았다. 위험하니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했을 뿐이다.

결국 송지현은 야세르나 엘시를 만난 후에야 자세한 사정을 들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로잘린이라는 그 애한텐 뭔가 있는 듯한데, 그게 뭔지 알려주지 않는다.

또 뭔가 그 애랑 관련된 일이 다 끝날 때 쯤, 제3의 인물을 통해서 전해들을 거다.

송지현의 위치는 그런 위치였다.

그게 기분을 우울하게 했다.

‘좀 알려주지. 자기 목숨을 노렸던 테러범도 아는 건데.’

근데 이런 걸로 토라져있는 게 더 창피했다. 괜히 애처럼 투정을 부린 사람이 된 기분이다.

‘그냥 같이 저녁 먹는다고 할걸.’

송지현은 커피를 젓다가 한 모금 마셨다.

“송 박사님?"

누가 카페로 불쑥 들어오면서 송지현을 불렀다.

류영준이었다.

“여기 계셨네요.”

“어떻게 찾으셨어요?”

“뭐……. 그냥 우연히.”

류영준이 웃었다.

“안녕하세요.”

그의 등 뒤에서 조그만 소녀가 불쑥 튀어나왔다. 로잘린이다.

“안녕.”

송지현이 인사해주었다.

류영준과 로잘린은 송지현이 앉은 테이블에 합류했다.

“류 박사님 그거 알아요?”

송지현이 말했다.

“저 미국까지 가서 휴가만 잔뜩 쓰고 네덜란드 왔다가 아무 성과도 없이 귀국하는 거.”

“성과가 왜 없어요?”

“로페어를 때려잡고 니카라과를 구원한 건 류 박사님의 성과지, 제가 한 건 아니니까요."

"......."

류영준은 송지현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전에 동생분이 조현병을 치료할 때 로잘린을 봤다고 했잖아요?”

“네."

“그게 만약 환각이 아니라 사실이면 어떨 것 같아요?”

“말도 안 돼요. 그럼 우리 눈에도 보였겠죠."

"......."

류영준은 피식 웃었다.

“그렇죠.”

아무래도 송지현한테 이걸 설명하는 건 너무 어렵다. 로잘린이 직접 막대한 지식이나 기적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걸 쓸데없이 로잘린에게 시키고 싶지 않았다.

“송 박사님.”

류영준이 말했다.

“니카라과는 화산이 많은 나라예요. 남한이랑 비슷한 면적에 무려 화산이 40개나 있죠. 그 중 상당수가 활화산이고요."

“그래요?”

“그리고 화산에는 우라늄 같은 방사능 물질들이 들어있습니다.”

"......."

“그럼 화산 내부에 서식하는 미생물들 중에는 그런 방사능 물질에 강한 저항성을 가지거나 또는, 방사능 물질을 분해할 수도 있겠죠. 굳이 미르 호 외벽을 긁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류영준이 말했다.

“니카라과 정부에 도움을 요청해서 화산 13군데에서 흙을 채집해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지금쯤 다 모였을 거예요. 그걸 송 박사님한테 드릴게요. 한국으로 가져가세요. 근데 미생물 동정부터는 다 직접 하셔야 합니다.”

“아……."

송지현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고맙습니다.”

“제가 고맙죠.”

류영준이 말했다.

“류 박사님이요? 뭐가요?”

“미국에서 CIA와 로페어에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발언해주셨잖아요. 이제 해리스 국장님이 그 부분을 전면적으로 밝히면서 로페어가 행정부에 얼마나 많이 관여했는지 폭로할 거예요. 그리고 송 박사님이 엘시 박사님도 설득해서 네덜란드로 데려오셨잖아요.”

"......."

“엘시 박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송 박사님 아니었으면 용기가 안 났을 거라고. 덕분에 제가 훨씬 편했습니다. 니카라과의 화산토는 작은 답례라고 생각하세요.”

"......."

송지현은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서 커피를 홀짝였다.

“아직 저녁 안 드셨죠?”

류영준이 물었다.

“네……."

“저희랑 같이 드실래요?”

류영준이 물었다.

송지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

일본은 과학계의 갈라파고스 같은 곳이다. 내수 시장이 워낙 거대하고, 충분한 기술력이 바탕이 되니까 해외로 기술을 수출하며 교류하기보다는 독자적인 생태를 만들어버렸다.

‘갈라파고스화’ 라는 단어는 주로 일본에서 IT 산업을 일컫는 용어였지만, 의학에서도 일본은 갈라파고스화가 심하다.

예를 들어 Myocardial infarction이라는 단어를 의대 학부생들은 소화하지 못하고, 心筋授蓋이라고 한자로 써줘야 심근경색이라는 뜻을 알아듣는 식이다.

아예 영어로 된 원서로 교육하는 한국과는 시스템이 좀 다른 것인데, 자국어로 공부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기도 하지만 폐쇄적인 환경이 만드는 별난 것들도 있다.

예를 들어 수면을 적게 하고도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이라든지, 손가락 길이와 성 기능의 상관관계라든지, 좀 특이하고 별난, 그리고 세계 과학계가 주목하지 않는 논문들이 상당수 일본에서 나왔다.

지금까지는 그런 상황이 ‘단점’은 아니었다.

일본은 높은 수준의 과학을 가진 나라였기 때문이다. 노벨상 수상자만 해도 몇 명인가?

그러나 요즘은 분위기가 좀 다르다.

‘에이젠바이오가 너무 커졌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진보의 속도가 너무 압도적이라서 뒤따라가지 못하면 순식간에 뒤쳐진다.

이미 미국은 과학 최강의 타이틀을 내준 분위기다.

일본 문부과학성의 과학기술정책국, 국장 히시지마는 일본 내 대형 병원들의 매출 기록표를 보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급감하고 있다.

한국에 차세대 병원이라는 괴물 같은 의료시설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지구를 반 바퀴 쯤 돌아야하는 거면 몰라도, 바로 옆 나라에 저런 시설이 있다.

만약 사망률 높은 암에 걸려서 치료받는다면 당연히 저기로 가지 않겠는가. 히시지마 본인도 그럴 것이다.

“하아……."

그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반 년 전부터 일본에서 개최되는 과학 컨소시엄이나 학회 참석자가 급격히 줄었다.

다들 류영준 따라다니기 바쁘니까.

심지어 류영준이 없더라도, 에이젠바이오가 자체적으로 여는 홍보성 세미나가 도쿄대에서 개최한 분자생물학 학회보다도 인기가 있다.

이런 가운데 가장 골치 아픈 일은 따로 있다.

-원전 가동 중지하라.

-태양 전지 도입하라.

바깥에서 시민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 나라는 방사능과 핵물리학에 끔찍한 트라우마가 있다.

핵무기로 한번 큰 고통을 겪었고, 원전 폭발로 또 한 번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당연히 일본 내부에서는 원전을 없애자는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나왔는데, 에이젠바이오의 태양전지가 상용화되기 시작하면서 다시 불이 붙은 것이다.

-후쿠시마 방사능 해결방법 제시하라.

시민들이 또 외쳤다.

히시지마는 창문 안쪽에 블라인드를 쳤다.

일본이 과학 최강국이었던 미국 상대로도 꿀린 적이 없었는데, 이제 와서 과연 한국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녀야 하는가.

히시지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일본의 과학이 다시 반등해서 에이젠바이오와 격차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의 효과적인 제염 방법에 대한 연구]

그는 아침에 원자력과에서 올린 리포트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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