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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화. < FRB (13) > (141/301)

285화.  < FRB (13) >

미국 정부 요인들은 스키폴 국제 공항 근처의 호프도르프 호텔에 투숙했다. 류영준과 로잘린, 이사야도 마찬가지다.

호텔은 보안 수준이 완벽해서 누가 습격하기가 쉽지 않다. 미국 정부에서는 호텔을 통째로 빌렸고, 네덜란드 정부의 협조를 구해서 경찰 인력 7천명의 지원을 받았다.

미국 비밀경호국 (United States Secret Service)에서는 호텔 반경 100미터의 주요 지점마다 경호 인력을 배치했고, 저격이 가능한 모든 건물과 야산을 전부 수색하고 경계했다.

이 보안을 뚫고 호텔을 공격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국제사법재판소로 이동하는 길.

국제사법재판소는 덴하그에 있는데, 차량으로 35분 정도가 소요된다.

그 거리가 관건이다.

류영준과 이사야는 캠벨 대통령과 같은 차량을 타기로 했다. 그리고 수행 인력과 함께 모터케이트를 형성해서 이동할 것이다.

모터케이트는 현지 경찰이 선두에서 안내하고, 대통령 차량, 장관 및 참모 등의 수행단 차량, 경호팀 차량 등이 일렬로 이동하는 걸 말한다.

출발 후 최종 목적지 도착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이 원칙이다.

따라서 도로를 통제해야하는데, 네덜란드 정부는 무려 네 시간 전부터 호텔에서 국제사법재판소로 들어오는 경로의 교통을 완전 통제했다.

이사야는 테러범의 입장에서 이 팀을 공격하기 위한 최선의 전략을 구상해주었고, 네덜란드와 미국 정부는 그걸 전부 대비했다.

맨홀 뚜껑을 열고 아래로 내려가 하수로까지 수색하고 이동 루트의 우체통까지 철거했다.

헬기를 띄워서 인근 시민들의 이동 경로와 수상한 움직임을 감시했다.

“솔직히 제가 할 일이 없을 정도네요.”

김철권이 말했다.

“저쪽은 미국 대통령을 경호하는 작업이니까 아무래도 민간 기업의 사설 경호단보다는 규모가 크겠죠.”

류영준이 말했다.

“캠벨 대통령이 네덜란드를 방문하고 사법재판소까지 가는 것은 류 박사님한테 이 경호를 제공하기 위해서군요.”

“네. 캠벨 대통령도 이젠 이 싸움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승리해서 금권을 확보하고 재선에 성공하거나, 아니면 여기서 저랑 같이 피살 당하거나 둘 중 하나예요.”

류영준이 말했다.

“아마 네덜란드 정부도 좀 골치아프겠죠. 저에 대한 테러 가능성이 굉장히 높은 상황에서 국가 수준 경호를 걸기 위해 미 대통령이 직접 들어와버렸으니. 사고가 터지면 이제 미국하고 외교 문제로까지 번지는 거죠.”

“저는 뭘 하면 좋을까요?”

“그냥 호텔에 계세요. 만약의 상황에는 로잘린을 부탁드립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그리고 오전 11시.

그는 캠벨 대통령 수행단과 가볍게 식사를 하고 대통령 전용 방탄 차량에 올랐다.

***

생각보다 경계가 너무 삼엄해서 로페어는 전략을 약간 조정하기로 했다. 이제 플랜 B다.

류영준을 아예 죽여버리는 게 최선의 수지만, 그게 너무 어렵다면 굳이 거기에 목을 메지 않아도 좋다. 이번 공판만 견디고 나면 다른 방법들이 생길 테니까.

대통령까지 방문한 지금 공판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여기서 재판관들의 거수로 판결이 반드시 날 텐데, 국가사법재판소는 국가간 분쟁을 전담하는 유일한 기관이자 최고등 사법기관인만큼 ‘항소’의 개념이 없다.

즉, 이곳의 판결은 절대적이고 되돌리지 못한다.

따라서 시간을 끌어서 증인의 불출석을 유도하고 재판관들을 부추겨서 판결을 속행토록만 해도 알폰스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증인의 불출석을 어떻게 유도할 것인가?

캠벨 대통령 일행과 류영준, 이사야가 모두 빠져나간 다음 호텔에는 로잘린이 남는다.

그 이유는 국제사법재판에 참석하려면 신원 확인을 해야하는데 로잘린은 아직 스웨덴 시민권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 혼자 어디 내보낼 리는 없고 가장 안전한 철통 보안의 호텔에 둘 것이다.

그 애가 진짜 엘시 딸이든 뭐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류영준이 그 꼬마를 애지중지한다는 것이다.

알폰스는 호텔의 청소부 중 하나를 물색했다. 난민 출신 가정에서 자란 가난한 아프리칸 흑인이었다.

30년째 청소를 하면서 자식들 대학 보낼 걱정에 시달리는 그 남자에게, 브로커를 통해서 인생 펼 만한 돈을 쥐여줬다.

“뭘 시키셔도 저는 안 할 겁니다.”

겁을 집어먹고 거부하는 청소부에게 브로커는 아주 간단한 작업을 맡겼다.

“빈 객실에 불을 지르면 돼. 그게 끝이야. 만약 나중에 사고가 터지고 경찰이 수사하더라도, 너는 손님이 두고 나간 담배가 침대 시트에 불을 붙였다거나, 그런 식의 변명으로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어. 누굴 죽이라거나 폭탄을 터뜨리라거나 물건을 훔치라는 것도 아니잖아? 핵심 요인들이 다 나간 후에 빈 객실에 불만 지르는 거야.”

월세방을 계약 해지한 다음 저택을 하나 장만하고 애들을 대학 보낼 만한 돈의 대가로는 너무 쉬운 일이었다.

결국 청소부는 대통령 일행과 류영준, 이사야가 나간 다음, 시계를 확인하고 미리 지시받은 객실에 불을 질렀다.

그가 몰랐던 사실은 똑같은 방법으로 매수된 호텔 관리인들이 무려 여덟 명이었다는 것이다.

큰 화재가 아니었음에도 객실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연기가 나오고 화재 경보가 울리면 혼란이 생긴다.

경호팀이 화재의 규모와 위치들을 정확히 파악하려 애쓰는 가운데 소방차 네 대가 출동했다.

암스테르담 소방청의 마크를 달고 있었지만 그들의 실체는 조금 달랐다.

로페어는 일찍이 네덜란드에 도착한 후, 1차 공판이 이루어지는 동안 벨기에의 투른호우트에서 제작된 미등록 차량 네 대를 은밀하게 들여왔다.

그걸 암스텔벤의 한 폐공장에 숨긴 다음 소방차량으로 개조하고 습격 훈련을 받은 테러범들에게 맡겼던 것이다.

이제 상황은 빠르게 전개된다.

대통령과 백악관의 수행단이 모두 자리를 비운 호텔의 경호는 심리적으로 한결 느슨해졌다.

테러범들은 그 빈 틈을 파고들었다.

“아니 대통령님하고 수행단 이미 다 빠져나간 거 아니에요? 화재 경보 우는 상황에서 무슨 소방관을 몸수색을 합니까? 여기서 방화복 장비랑 호흡기 가스통 다 벗고 검사받고 다시 무장해요? 미쳤습니까? 우리 암스테르담 소방청 소속 맞다고요! 보세요!”

소방관으로 위장한 테러범들은 호텔 경호팀에게 신분증을 보여주고 윽박질렀다.

“이렇게 질질 끌다가 불이 더 나거나 인명 피해라도 나면 어쩔 겁니까? 아직 화재 규모나 위치도 정확히 파악 안 됐죠?”

“그럼 당신들 동선은 우리가 체크하겠습니다.”

마지못해 경호팀이 허락하자, 테러범들은 빠르게 호텔 내부로 진입했다.

그들의 미션은 하나다.

로잘린을 붙잡는다.

그리고 인질극을 벌이면서 류영준이 이곳에 오도록 유도한다.

이후 신호를 받으면 모든 무기를 버리고 경찰에 투항하면 된다.

아마 그 시점에는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재판관들이 거수를 하고 있을 것이다.

알폰스는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호프도르프 호텔에 화재 경보가 울렸습니다.]

‘됐다.’

증인의 출석이 늦어지면 아마 변호인단은 휴정을 요구할 것이다.

하지만 국제사법재판소는 증인의 불출석 같은 가벼운 사유로 휴정하는 경우가 드물다. 국가간 분쟁을 다루는 거대 기관이기 때문이다.

만약 재판장이 고민하면, 알폰스는 친밀한 관계의 재판관들을 부추겨서 재판을 속행하라고 압박할 생각이었다.

이제 재판의 시작까지 10여분 남았다. 아직까지 캠벨과 류영준은 도착하지 않았다.

잠깐 시간이 지나자 여기저기 소식이 전해졌다.

미국과 니카라과 정부측 변호인단들은 예정에 없던 사고에 불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먼저 와서 방청석에 앉아있던 엘시와 송지현에게도 그 소식이 전해졌다.

“불이요?”

송지현은 화들짝 놀랐다.

“대통령 차량과 경호단, 그리고 증인들은 모두 이미 호텔을 나왔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소방차도 도착했답니다.”

소식을 전해온 백악관 비서실 직원이 말했다.

“하지만……."

송지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엘시를 돌아보았다.

“류 박사님이 엘시 박사님이 돌보던, 로잘린인가 하는 애를 데리고 오신다면서요?”

“네……. 그럼 지금 호텔에 있을 텐데.”

“……. 큰 화재는 아니라고 하니까 괜찮겠죠?”

“……근데 갑자기 화재가 난다는 게 좀……."

멀리서 그들의 혼란을 지켜보며 알폰스는 미소를 지었다.

‘끝났다.’

마찬가지로 증인으로 출석한 알폰스는 모든 정황을 흐리고 엎어버릴 자신이 있었다.

철컥.

재판소의 문이 열렸다.

캠벨 대통령과 수행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방청석으로 이동해서 자리에 앉았고, 그 뒤를 이어 류영준과 이사야 프랭클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알폰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그는 다시 휴대폰을 확인했다.

[소방관으로 위장하고 호프도르프 호텔에 침입한 무장 조직원 전원 체포]

[호프도르프 호텔 화재 진압 중]

현지 실시간 뉴스로 소식이 떠오르고 있었다.

***

“그러니까 너희는 안 되는 거야 모질이들아.”

2차 공판 하루 전.

이사야는 해리스 국장에게 그렇게 말했다.

“테러가 무작정 사람 죽이는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대통령만 철통 경호하면 게임 끝인 거 같지? 인명피해가 아니라 테러범들이 원하는 게 이루어지지 않게하는 데 초점을 둬야지. 우릴 공격하는 척 하면서 여기 혼자 남겨진 류영준 입양딸을 잡아서 협박한다거나, 그런 방법들이 있다구. 나도 옛날에 GSC 칠 때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거든.”

해리스 국장은 이 진성 테러범의 날것 그대로인 조언에 약간 질리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호텔에 외부인은 침투할 수 없어.”

해리스가 항변했다.

“시민으로 들어오면 그렇지. 가난한 팔레스타인 반군 같은 애들은 자살 폭탄 테러 같은 걸 하고 총을 쏴대면서 뚫어야 하겠지만 로페어는 훨씬 돈이 많잖아. 좀 더 우아한 방법을 쓰겠지. 관공서를 위장해서 들어온다거나. 경찰은 여기 이미 깔려있으니 경찰로 위장하는 건 어렵겠고, 음……. 호텔 관리인이나 소방관?”

그녀의 조언을 받아들인 해리스 국장은 비밀경호국과 함께 호텔에 접근하는 관공서 직원들과 호텔 직원들에 대해서도 평소보다 경계 레벨을 올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이 활약할 일은 아예 없었다.

테러범들이 중간 지점에서 총기를 꺼내고 뒤따라온 경호팀과 싸움을 벌이기 시작하는 찰나였다.

"으......."

테러범들은 갑자기 하나씩 머리를 움켜쥐고 고통스러워하더니 풀썩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구토하고 숨을 헐떡이다가 차례로 기절해버린 것이다.

무려 20여 명이 한꺼번에.

비밀경호국의 경호원들이나 케이캅스 직원들 모두 황당함에 할 말을 잃었다.

오직 김철권만이 그때 특이한 사실 하나를 알아챘는데, 그건 바로 로잘린이 몹시 얌전해졌다는 것이다.

김철권에게 계속 말을 걸고 쉴 새 없이 까불던 그녀는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자 침대에 올라가서 똑바로 누웠다.

그리고 잠든 것처럼 눈을 꼭 감았다.

-뇌를 가볍게 흔들어서 기절시켰어요.

로잘린이 메시지를 보냈다.

‘수고했어. 좀 놀고 있어. 김철권 팀장님 너무 괴롭히진 말고.’

류영준은 빙긋 웃으면서 머릿속으로 대답했다.

“2차 공판을 시작합니다. 니카라과 정부 측에서 제시한 증거와 증인 류영준의 발언을 듣겠습니다. 류영준 씨는 증인석 앞으로 나와주십시오.”

재판장이 말했다.

류영준은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알폰스는 그가 옆을 지나가면서 슬쩍 눈을 맞추는 걸 보았다.

그 표정에는 약간의 조소와 차가운 분노가 들어 있었다.

“유전자 가위 탈렌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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