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 FRB (12) >
‘기회는 충분히 줬지만 그걸 걷어찬 것은 류영준이다.’
알폰스 로페어는 이제 류영준을 습격할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을 시작하기 전에 최대한 그의 명예에 흠집을 내야만 했다.
네덜란드에서 사고가 터지면 모든 사람들이 로페어를 의심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류영준은 온갖 병든 이들을 치유하며 약자를 위해서 기득권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는 정의의 순교자여선 안 된다.
사고가 터졌을 때 로페어에게 불리한 그 분위기 속에서, "사실 그 놈도 뒤에서는 추악한 일면이 있었지.” 하고 여론의 물을 흐려줄 시각이 필요한 것이다.
때문에 로페어는 언론을 조작해서 류영준을 공격하는 비난들을 계속 생산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류영준은 처음부터 니카라과에서 있었던 유전자 조작과 인체 실험에 대한 모든 배경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때문에 니카라과 정부를 부추겨 막대한 치료비 청구를 노리고 니카라과에 접근한 것이다. 이는 의료인이라는 그의 위치를 생각할 때 지나치게 계산적인 행동으로, 타국의 아픔을 이용해서 이익을 추구하는…….]
그러나 이런 공격은 거의 쓸모가 없었다. 그들이 불과 몇 주 전에 내놓은 논평과 사설들이 완전 정반대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여론은 오히려 그들에게 더욱 매섭게 작동했다.
-불과 2주 전에 주식회사 대표는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 돈 버는 일을 해야한다 했던 새끼들이 바로 니들이잖아 미친놈들아
-그때는 니카라과에 고작 150억 받고 착한 일 하러 가는 게 잘못된 거라고 난리를 치더니? 언론들이 미쳐 날뛰는 걸 보니 요즘 도는 로페어 음모론이 맞긴 맞나보다
-니카라과에서 자원봉사하던 사람입니다. 무슨 생각으로 의료인으로서 악독한 일이라 비난하는지 모르겠네요. 한국에서 여기까지 그 많은 의료진을 데리고 와서 최대한 저렴한 가격에 밤새 환자들 고쳐주시던 분인데요. 오죽했으면 니카라과 시민들이 병원에서 축제를 다 벌이겠습니까? 현지 상황 알지도 못하면서 말 함부로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당연히 이건 로페어가 뒤에서 공작한 거지 류영준 어떻게든 견제해보려고 lol 애쓴다 진짜
-헛소리 물타기 그만하고 연준이나 국가 자산으로 돌려라 로페어놈들아 우리는 너희한테 달러 발행권을 준 적 없다
네덜란드에 미리 도착해있었던 알폰스 로페어는 고민 끝에 그 무기를 쓰기로 했다.
어차피 테이트가 회유하려던 걸 류영준이 거절하지 않았던가.
알폰스는 미리 만들어둔 로잘린 시나리오를 꺼냈다. 그는 테이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로잘린 얘기를 언론에 흘려서 류영준을 공격해. 최대한 자극적일수록 좋아.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그 애를 류영준이 제3 세계에서 인신매매 같은 경로로 샀다는 식으로 공격을 가하는 거야.”
알폰스가 말했다.
그런데 테이트의 답변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형님.
테이트가 말했다.
“뭐?”
-류영준이 입양 신청을 한 것 같습니다.
“입양? 그 애를?”
-네. 아직 아는 사람은 얼마 없습니다.
“바로 얼마전에 한국에서 류영준의 친인척 관계들을 다 조사했는데 입양 얘긴 없었잖아?”
-그리고 한국은 독신 남성이 여자아이를 입양하는 게 안 됩니다.
“그럼 문제 없네?”
-하지만 류영준은 스웨덴 기사 작위를 받고 그 나라에서 명예 시민권을 받았죠.
"......."
-스웨덴 왕실을 통해서 행정부에 직접 입양을 요청했답니다.
“거기선 입양이 되나?”
-스웨덴은 동성 부부의 입양도 허락해주는 나랍니다. 그런 쪽으로는 많이 열려 있어요. 게다가 류영준은 스웨덴에서 왕족이나 국가원수한테만 주는 세라핌 훈장을 수여받은 사람인데 애 하나 입양하는 것을 문제 삼겠습니까.
“잠깐만. 그 애를 정식 입양한다는 건 그 애의 신원이 확실하다는 건데 그걸 어떻게 증명했지?”
-엘시 프랭클린이 몇 년 동안 키운 불법 이민 가정의 고아라고 합니다. 그래서 시민 등록이 안 돼있었고요.
“엘시? 엘시라고? 엘시 프랭클린?”
알폰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완전히 거짓말이잖아! 엘시한테 애가 생겼으면 우리가 그동안 몰랐겠어? 그쪽 지역 마약 브로커들이 일주일에 두 번씩 엘시 집을 찾아갔는데!”
-그 얘길 우리가 할 수는 없죠.
"......."
-우리가 엘시를 감시하고 약을 먹이고 있었다고 시인하는 꼴 아닙니까? 우리한테 더 불리한 정국이 될 겁니다.
“마약 브로커들의 입을 통해서 우리하곤 상관없는 일인 것처럼 얘기하면?”
-엘시는 십수년 동안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고 재산도 없고 마약 중독자인데, 무슨 수로 그 마약을 계속 구매했는지를 설명할 수 없죠. 실상은 우리가 마약을 주면서 돈도 줘서 인질로 살려놓았던 것 아닙니까…….
“돈을 오히려 주면서 마약을 공급하는 미친 브로커를 꾸며내기가 어렵다 이거지.”
-네.
알폰스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 애는 지금 어디에 있어? 엘시가 네덜란드로 온 지가 벌써 한참 됐는데, 류영준하고 같이 있나?”
-네. 그리고……
테이트가 잠깐 머뭇거렸다.
-그게…… 좀 전에 네덜란드에서 내릴 때 수행원들 틈에 모자 쓴 어린애가 하나 있었다는데 그게 로잘린이 아닐지…….
“네덜란드에 왔다고?”
-네.
“차라리 미국에 남아있었으면 어떻게든 해볼 텐데. 여기 들어와있으면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좀 어렵겠군.”
-게다가 철통 보안으로 지키고 있겠죠. 하지만 형님.
테이트가 말했다.
-아직까지 그 애가 어떻게 한국에 들어갔는지는 해명되지 않았습니다. 불법 이민 가정에서 태어난 고아라서 시민권도 없는 앱니다. 당연히 미국에서 출국하는 게 불가능했을 테고, 한국에도 입국 기록이 없으니 밀입국이잖습니까? 그 부분을 공격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밀입국했다고 해도 상관없어. 그 꼬맹이가 네덜란드로 왔다는 사실도 우리는 이제야 파악하지 않았니?”
-그건 민간 항공기를 탄 게 아니라 무려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나간 케이스니까 그렇습니다. 백악관에서 출국 기록의 공개 여부를 설정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말이야. 한국에 들어간 것도 똑같다고. 류영준이 그 애를 엘시나 우리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정부 도움을 받아 조용히 입국한 거다, 로페어와 싸우기 위해서 비밀리에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기록이 남은 게 없는 거다, 뭐 이런 식으로 둘러대면 끝이야.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아무도 그깟 걸로 류영준을 의심 안 해. 공격 자체가 너무 약하다고.”
알폰스가 말했다.
“오히려 한국에 입국한 사람의 명단 같은 건 국가 기록물인데 우리 같은 외국의 민간인이 수집했다는 게 외교 문제를 만들어서 더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지. 정보 출처를 밝히지 않으면 아무도 믿지 않을 테고.”
-그럼 어떡하면 좋을까요?
"......."
솔직히 방법이 없다.
“어쩔 수 없지. 로잘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공개하지 마.”
알폰스가 말했다.
“2차 공판이 모레다. 이젠 새로운 수를 찾기엔 너무 늦었어. 류영준이 재판정에 들어가기 전에 그냥 제거해버려야 돼."
***
“애가 하나 생기니까 경호가 더 어렵네요.”
김철권이 말했다.
“저만한 애는 누가 노리지 않아도 혼자 놀다 어디 다치거나 차로에 함부로 들어갈까봐 걱정되는데, 심지어 로페어가 노리는 애라니.”
그는 로잘린을 보면서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로잘린은 호텔의 전기 주전자에서 물이 끓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로잘린한테 과연 경호가 필요할까.’
류영준은 김철권한테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진화적으로 프로그램된 발생 체계에 따라서 수정란에서부터 다세포 생물체로 발달한 인간과 다르게 로잘린은 여전히 세포 기반이다.
그녀의 생명력은 세포 하나하나에 모두 균일하게 들어있고, 특히 류영준의 몸에 자리잡은 세포들에 기반한다.
따라서 류새이를 닮은 저 몸뚱아리가 아무리 다쳐도, 심지어 누가 목을 날려버린다고 하더라도 로잘린은 ‘죽지 않는’다.
다시 살아있는 조직끼리 접합하고 신경을 이어서 복구해낼 것이다.
세포 기반 생물체인데다 차세대 생명체인 그녀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훨씬 근본적인 데서 시작되는 일이다.
“앗!"
로잘린은 주전자를 가지고 놀다가 뜨거운 물을 쏟아서 손을 뎄다.
그녀가 깜짝 놀라는 걸 보고 류영준은 화들짝 놀라 달려갔다.
조그만 손가락에 입은 화상을 살펴보는데, 호텔 방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그건 이사야 프랭클린이었다.
그리고 김철권이 못 들어가게 막고 있었다.
“괜찮아요. 잠깐 들어오라고 해요. 얘기할 것 있으니까.”
류영준은 이사야를 방 안으로 들이고 문을 잠갔다.
“고마워. 나 로잘린하고 얘기 좀 나눠도 돼?”
그녀가 물었다.
“그래. 대신 나도 들을 거야.”
“좋아.”
이사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로잘린의 맞은편에 앉았다.
로잘린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이사야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혹시 내가 밉니?”
이사야가 물었다.
“왜요?”
“류영준을 해치려고 했으니까.”
“류영준이 다쳤으면 치료 방법을 고민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집중했을 거예요. 저는 분노나 슬픔 같은 인간적인 감정을 쉽게 느끼지 않아요. 저는 원래 그런 게 없으니까요.”
로잘린이 답했다.
류영준은 문득 처음 로잘린을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로잘린은 완전히 싸이코패스 그 자체였다.
면역력이 떨어지는 노인과 어린이들을 좀 희생시켜서 독감 바이러스를 절멸시키면 상당히 많이 남는 장사라고 권유하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그때에 비하면 인간적인 모습들을 많이 갖추게 되었지만 그래도 거기까지다.
이사야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내가 그동안 네가 세상을 지배하게 하려고 애썼다는 거 알고 있지?”
“네."
로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네가 류영준하고 같이 아무리 멋진 과학을 만들어도 오용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야. 예를 들어서 셀레바이트 (Celebite) 라는 회사, 혹시 알아?”
그녀가 물었다.
로잘린은 고개를 저었다.
류영준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미국 실리콘 밸리에 생긴 바이오 벤처야.”
이사야가 설명했다.
“거기서는 에이젠바이오가 개발한 배양육 기술을 이용해서 고기를 만들어서 판매하고 있지. 근데 그 고기가 ‘인육’이야.”
류영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인육?"
“유명인들한테 돈을 주고 체세포를 구매한 다음 그걸 역분화시키고 다시 배양육을 만들어서 파는 거야. ‘당신이 사랑하는 아이돌의 살을 맛보라’는 게 홍보 문구고.”
“역겹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지만 좋아하는 팬들도 많아. 별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해서 뺨 안쪽에서 상피 세포를 긁어다 팔아버리는 배우나 가수들도 많고.”
이사야가 말했다.
“차라리 이런 건 귀여운 케이스지. 에이젠바이오가 만든 미친 기술들이 앞으로 생명 연장의 시대의 막을 열어서, 돈과 힘이 있는 사람은 텔로미어가 다해서 늙어도, 또는 뇌사 상태가 되어도 치료받아서 건강하게 살아남을 테지만 없는 사람들은 그냥 죽게 될 거야. 그 시대에 오는 갈등들, 자본의 빈부격차가 생명력의 빈부격차로 한 단계 심화되는 세상을 류영준이 감당할 수 있을까?”
"......."
류영준은 잠자코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 윤리 같은 걸로는 기술의 팽창을 감당하기 어려워. 누군가 직접 통제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
이사야가 말했다.
“류영준의 몸에서만 살 수 있는 네가 만약 모든 인간의 몸에서 살 수 있게 된다면, 극도의 효율을 추구하는 너는 그 모든 인간의 몸뚱이를 하나의 재산처럼 여기고 아껴서 최적의 통제를 하게 되겠지. 그래서 너한테……."
“정말 흥미롭네요. 당신은 로페어처럼 얘기하고 있어요.”
“로페어?”
“알폰스 로페어도 당신을 만든 이유가 핵무기가 늘어남에 따라 냉전을 감당할 방법이 없어서라고 했죠. 기술이 너무 발달해서 그걸 통제할 수 있는 우월한 인간이 필요하다고요.”
"......."
“로페어가 당신한테 기대하던 걸 당신이 저한테 하려는 거예요. 혹시 만약 제가 쓸모 없으면 절 없애려고 할 건가요?”
“그건 아냐! 난 그냥……."
“그리고 저는 세상을 지배하는 데 별로 관심이 없어요.”
그녀는 천진난만하게 활짝 웃었다.
“그래……."
이사야는 쓴웃음을 지었다.
대강 예상은 했지만 깨끗하게 차였다.
지켜보던 류영준이 말했다.
“로잘린이 인간을 매개로 하는 지능적인 바이러스라면 인간의 종 보존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 넌 그런 생각으로 로잘린에게 인간을 맡기는 걸 고민했겠지만 로잘린은 그런 애가 아냐.”
"......."
“난 로잘린을 행복하게 해줄 거야. 어른들이 어지럽혀놓은 세상은 어른들이 치워야지. 왜 그걸 애한테 시켜? 귀찮고 어려운 일 떠넘길 생각 하지 마. 난 그런 꼴 두고볼 수 없으니까.”
"......."
이사야는 피식 웃었다.
그녀는 평생 로잘린을 찬양하고 구원자처럼 떠받들어왔지만, 류영준은 로잘린을 보호해야 할 어린애나 믿을 수 있는 친구처럼 여겼다. 그 간극이 새삼 와닿았다.
“그래. 성공한 사람은 마인드가 다르네. 알겠어. 이제 어찌 되든 깔끔하게 포기할게.”
그녀가 말했다.
류영준은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다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는 이만하면 됐고, 우리 사법재판소로 가는 길에 습격 당할 수 있는데 그거 방어할 작전이나 좀 생각해 봐.”
“안 그래도 캠벨 대통령 만나고 오는 길이야. 이쪽은 진짜로 내 전문이니까 걱정하지 마.”
이사야 프랭클린이 말했다.
“난 팔레스타인 분쟁 지역에서 20년을 넘게 살았고 반군들하고 10년 넘게 같이 일한 진성 테러범이거든. 어디 금융가 집안에서 편안히 살아온 3류가 상대가 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