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 FRB (11) >
류영준과 해리스 국장, 그리고 이사야 프랭클린은 다른 경호원 및 수행원들과 함께 VIP석에 앉아있었다.
“미국 대통령 전용기를 타는 테러범은 세상에 나밖에 없을 거다.”
이사야 프랭클린이 말했다.
“네덜란드에서 증언을 잘 하면 네 재판도 어느 정도 참작받을 수 있을 거야. 성실하게 해.”
해리스 국장이 말했다.
“그보다 이 비행기는 안전한 게 맞겠지? 여기서 사고가 나면 다 끝장이야.”
이사야 프랭클린이 물었다.
“에어포스원이 공격받는 경우는 백악관이 직접 테러를 당하는 것과 같은 수준의 위기야. 로페어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에어포스원을 직접 공격하기는 쉽지 않을 거다. 이 비행기는 모든 종류의 테러에 대한 대비가 최고 수준으로 돼있어. 이번에는 수행단도 믿을 수 있는 사람들로만 소수 정예로 꾸렸고.”
“대신 내린 후에 조심해야 합니다.”
프레지던트 스위트 쪽에서 나오면서 캠벨 대통령이 말했다.
“해리스 국장님 생각으로는 네덜란드에 이미 우리를 노리는 저격수나 테러범들이 자리 잡고 있을 거라고 합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죠. 링컨 대통령이나 케네디 대통령도 죽였던 사람들이니까요.”
해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캠벨에게 동의했다.
“요즘 금융가에서는 분위기가 점점 험해지는 가운데 시민들이 자꾸 집회를 연다더군요.”
류영준이 끼어들었다.
“맞습니다. 구호가 ‘연준을 국유화하라’라고 합니다. 우리가 처음 계획했던 대로 흘러가는 분위기예요. 여론이 더 끓어오르고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판결이 나올 때 즈음엔 연준을 의회에서 공격할 겁니다.”
캠벨이 말했다.
“연준을 통째로 국유화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연방준비법 수정법안을 마련해서 연준의 영업이익을 모두 재무부로 귀속시킨다거나, 달러 발행권이나 금리 결정권을 재무부 권한으로 가져오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로페어는 이제 막다른 길 앞까지 와있기 때문에 상당히 거친 수를 쓸 겁니다. 류 박사님. 우리 모두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해리스가 류영준의 품을 손으로 가리켰다.
“정말로 이 시국에 네덜란드로 아이를 데려가시는 게 괜찮을까요?”
류영준의 무릎 위에는 빨간 머리카락의 조그만 여자아이가 안겨서 잠들어 있었다.
에어포스원을 탄 후에 흥분해서 프레지던트 스위트석부터 비행기 후방의 수행원 이코노미석까지 뛰어다니던 아이다.
지금은 지쳤는지 류영준이 안아주자 새근새근하며 잠들었는데 꿈속에서도 장난을 치고 있는지 가끔씩 끙끙 소릴 냈다.
로잘린.
호기심이 많고 발랄하고 사랑스러운 이 아이를 갑자기 류영준이 일행이라고 데려왔을 때는 모두가 놀랐다.
덕분에 큰 싸움을 앞두고 캠벨 행정부에선 다들 조금이나마 웃을 수 있게 되었지만,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괜찮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이 애는 지금 로페어가 노리고 있는 아이거든요. 미국에 있는 게 더 위험합니다. 제 옆에 둬야 지킬 수 있어요.”
***
지금으로부터 몇 주 전.
류영준이 이사야 프랭클린을 처음 보러 해리스 국장의 아지트에 들렀던 날의 일이다.
류영준은 약물을 주입해서 이사야 프랭클린의 정신을 차리게 했다.
그때는 임상 동의서도 없었고 체세포를 채취할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는데 말이다.
여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사야 프랭클린이 만나야 하는 손님들이 또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엘시와 송지현이었다.
한 명은 이사야 프랭클린의 친모이고, 한 명은 야세르와 함께 매스컴에서 CIA가 이사야를 제거하려 했다는 사실을 폭로한 과학자다.
해리스는 두 사람의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는 걸 예측하고 미리 요원들을 보내어 둘을 보호하고 있었다.
“네덜란드로 가기 전에 제 딸을 한번 봐야겠어요. 다시 못 볼지도 모르잖아요? 안 보여주면 증언하러 가지 않을 거예요.”
엘시는 해리스 국장에게 그렇게 말했다.
결국 두 사람은 네덜란드로 떠나기 전에 해리스 국장의 아지트에 들러서 류영준과 이사야를 만났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이사야 프랭클린이 침대에서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이야, 이사야.”
중동에서 크게 다투고 이사야 프랭클린이 집을 나가버린 후, 오랜 시간이 지났다.
엘시는 딸을 만나면 불편할까봐 걱정했지만 막상 얼굴을 보니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먼저 울컥 솟았다.
“얼굴이 왜 이렇게 형편없니. 밥은 먹었어? 몸은 좀 어때?”
“왜 이래? 뭐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나한테 골수 이형성 증후군 있는 거 알잖아?”
"......."
“이쪽이 그 유명한 송 박사님이신가?”
이사야가 송지현을 쳐다보았다.
“송지현입니다. 엘시 박사님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반가워요. 사실 아무 상관없는 송 박사님이 이 싸움에 굳이 낄 필요는 없었는데요. 참전해주셔서 고맙긴 하지만 다치실까봐 걱정되네요."
“류 박사님도 아무 상관없으시지만 여기서 목숨 걸고 당신들 위해서 싸워주고 계시잖아요?”
“아뇨. 류영준은 상관이 있어요. 이 일은 사실 우리 셋이 만나기 한참 전부터 시작된 거거든요."
이사야가 웃으며 말했다.
"......."
송지현은 이사야를 잠깐 쏘아보았다.
가능하면 사적인 감정 누르고 대화하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 된다. 자기만 모르는 비밀을 셋이 공유하고 있다는 듯한 뉘앙스가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GSC를 테러하셨어요? 류 박사님도 계셨던 그 호텔을?”
송지현이 말했다.
그녀는 그때부터 테러리스트 닥터 레프에 대한 분노가 잔잔한 불처럼 타올라서 아직까지 남아있었다.
이사야도 니카라과나 중동에서 많은 고통을 겪은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지만, 그래도 용서가 안 된다.
“콩고에서 탄저균 무기로 류 박사님한테 혐의도 덮어씌우려고 했었고요?”
송지현이 따졌다.
“류영준을 죽일 생각은 없었어요. 그 혐의도 류영준이면 금방 벗을 거라 생각했죠.”
“조금도 죄책감을 안 느끼시나보죠? 뻔뻔하게 말씀하시네요.”
“류영준한테 관심이라도 있어요? 다 지난 일인데다, 공격 받은 당사자인 류영준도 가만히 있는데 송 박사님이 왜 그렇게 예민한지 모르겠네.”
“뭐라고요?”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약간 날카로워졌다.
“저기, 잠깐만. 우리 싸우자고 모인 것 아닙니다. 네덜란드에서 사법 재판을 진행할 것을 대비해서 전략을 세워야죠.”
류영준이 끼어들어 중재했다.
“1차 공판은 엘시와 송 박사님이 진행해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여기서 이사야를 치료하고 같이 2차 공판 때 들어가겠습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그 전에 우리 얘기할 게 좀 있는데.”
이사야 프랭클린이 말했다.
“송 박사님은 잠깐 자리 비켜주실 수 있을까요?”
“무슨 일인데요?”
송지현이 물었다.
“얘기하면 알아요? 로잘린에 대해서 들으신 거 있어요?”
이사야가 물었다.
“로잘린?”
“송 박사님. 죄송한데 잠깐만……."
류영준이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
송지현은 침을 조금 삼키고는 일어났다.
“얘기 나누고 불러주세요.”
그녀는 약간 기분이 상한 듯 밖으로 나갔다.
바깥에서 해리스 국장과 로버트가 송지현을 쳐다보았다.
“얘기 다 끝났어요?”
“셋이 할 말 있대요.”
송지현은 의자에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노벨상 후보까지 되었지만 그녀는 평범한 민간인이었다.
그러나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 남아서 야세르와 함께 매스컴 앞에 서고, 엘시를 만나고 네덜란드행을 결정했다.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게 류영준에게 도움이 될 줄 알았다. 류영준하고 나란히 서서 같이 일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근데 테러범만도 못한 위치라니.
“휴우……."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책상에 엎드렸다.
도대체 로잘린이 뭐기에?
그녀는 차세대 병원에서 만났던 류영준의 친척 동생을 떠올렸다.
그 아이는 여러모로 신비한 아이였다.
병실에서 코코아를 사러 송지현이 자리를 비우기 전에는 분명 없었는데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것도 수상하다.
류영준과 함께 미국에 왔을 때 로잘린에 대해 물었지만, 류영준은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엘시도 로잘린에 대해서 아느냐고 물었다. 생명창조 부서에서 키우던 인공 세포라면서.
‘진짜로 생명창조를 하기라도 했어? 왜들 그 이름에 난리법석이야.’
송지현은 책상에 있는 펜을 굴리면서 따분한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이사야 프랭클린의 병실에서는 로잘린의 정체를 아는 세 사람이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송 박사한텐 얘기해도 될 텐데.”
엘시가 말했다.
“이런 건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아. 송 박사는 류영준한테 푹 빠져있는 것 같은데 혹시 알아? 차이면 복수심에 여기저기 폭로하고 다닐지.”
이사야 프랭클린이 말했다.
“송 박사님은 그럴 사람 아니에요. 헛소리 그만하고 로잘린 얘기나 합시다.”
류영준이 말했다.
“내가 이집트에 있었을 때, 야세르가 이런 얘길 했어. 차세대 병원에 갔는데 로잘린이라는 이름의 빨간 머리 소녀가 원장실에서 놀고 있었다고. 네가 데려온 애라고 했지.”
이사야 프랭클린이 류영준한테 말했다.
엘시가 끼어들었다.
“송 박사님도 그 얘길 하더군요. 어쩐지 마음에 걸렸는데……. 류 박사님. 그 애가 정말 로잘린인가요?”
“……네."
류영준이 말했다.
“미친……."
“몸을 만들어낼 정도라니, 세포가 얼마나 있어야 하는 거죠? 우리가 개발하던 때랑 피트니스가 차원이 다르군요.”
이사야와 엘시가 감탄을 터뜨렸다.
“그럼 지금은 어디에 있어?”
이사야가 물었다.
“몸을 유지하는 건 오래 못해. 그래서 지금은 다시 세포 상태로 돌아갔어.”
“다시 몸을 만들 수도 있나요?”
엘시가 물었다.
류영준은 로잘린을 힐끔 돌아보았다.
-네.
로잘린이 말했다.
-피트니스 소모량을 회복량이 따라가지 못해서 몸이 감당하지 못했던 거죠.
그녀는 몸속에 빼곡하게 차오르는 피트니스를 느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니카라과에서 수천 명이 야세르가 퍼뜨린 바이러스에 감염됐고, 그들 대부분이 유전자 치료나 장기 이식 등의 치료를 받았기 때문에 바이러스에서 이식된 DNA가 작동하고 있거든요. 라그바처럼 중추신경이나 간 같은 장기에서 발현된 단백질이 뇌로 공급되고 있습니다.
로잘린이 말했다.
-이젠 언제든지 류새이 만한 몸을 구성할 수 있고 계속 유지할 수도 있을 거예요. 한국 돌아가면 하려고 했죠. 여기선 당신이 곤란해질 수도 있으니까.
"......."
류영준은 그 사실을 그대로 전달해주었다.
“그럼 지금 세포 상태로 우리 얘길 듣고 있나?”
이사야 프랭클린이 물었다.
“응. 저기 있어.”
류영준은 침대 옆의 의자 위를 가리켰다.
이사야와 엘시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두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곳에는 세포 하나가 떠있었고, 류새이의 모습을 한 로잘린이 발을 구르고 있었다.
“좋아. 류영준. 로페어는 너처럼 위험한 사람을 상대할 때 그 가족들부터 들쑤셔. 아마 로잘린에 대해서도 상당히 조사하고 있을 거야.”
이사야가 말했다.
“그 애는 노출되면 안 돼. 사람으로 꾸며낼 거면 완전히 사람으로 해야 돼.”
“제 이름을 파세요.”
엘시가 말했다.
“네?”
“저는 십여 년 동안 마약 팔이들 말고는 사람을 만난 적이 거의 없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살고 있었던 샌디에고 교외 지역이 어떤 곳인지 알아요?”
엘시가 말했다.
“거긴 멕시코에서 넘어온 불법 이민자들이 한가득이에요. 대부분 시민 등록이 되어있지도 않고, 이민자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들이 여기저기 버려지기도 하죠.”
"......."
“마약에 찌든 생명창조 부서의 옛날 과학자가 데려다 키우고 있었던 애라고 하세요. 그리고......."
엘시가 말했다.
“류 박사님이 입양하면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