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 FRB (8) >
류지원은 잠깐 사고가 마비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 상당한 혼란이 떠올랐다.
“어……."
남자는 모자를 고쳐쓰면서 다시 물었다.
“모르는 사람이에요?”
“……네.”
류지원이 대답했다.
“이 남자는 저희 오빠고 옆에 있는 애는 누군지 모르겠네요. 근데 당신은 누구시죠?”
“류 박사님은 이 아이가 친척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친척분인데 모르세요?”
“저는 몰라요.”
류지원이 약간 불쾌한 듯 답했다.
“그리고 당신이 누군지부터 말씀해주세요. 모르는 사람이 대뜸 찾아와서 우리 오빠 뒷조사를 하는데 제가 말을 섞고 싶겠어요?”
“실례했습니다. 제 명함을 드리죠. 나중에 저 아이가 누군지 기억나시면 알려주세요.”
남자는 명함 하나를 꺼내 류지원에게 내밀었다.
[체노버 투자증권 홍유성.]
“거기 누구십니까?”
아파트 단지 안에서 젊은 경비 두 명이 불쑥 튀어나왔다.
두 달 쯤 전에 류영준은 이 아파트 단지의 경비를 통째로 바꾸었다.
케이캅스의 훈련된 보안 요원들이 단지 내외부를 매일같이 순찰하고 있었고, 외부인의 출입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경비 비용은 모두 류영준이 사비로 처리했으니 주민들 입장에선 좋았지만 그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류지원은 이제 약간 알 것 같았다.
“지원 씨, 아시는 분입니까?”
경비가 류지원에게 물었다.
“아니요. 이 앞에서 갑자기 붙잡고 말을 걸었어요.”
“볼일 다 끝났으니 가보겠습니다.”
홍유성은 류지원에게 인사하고 후다닥 사라졌다.
"......."
경비는 그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류지원에게 말했다.
“댁까지 모셔드리겠습니다.”
***
테이트 로페어는 알폰스의 방을 찾아왔다.
“한국에 있는 금융사들 중에 한 군데를 이용해서 가족한테 직접 물어봤습니다.”
테이트가 말했다.
“가능하면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네. 그래서 뭐래?”
“모른다고 했대요.”
"......."
알폰스는 생각에 잠겼다.
에이바이오 암 연구소가 설립될 당시 제임스 홀드런은 류영준의 영입에 엄청난 열을 올렸다.
만약 류영준의 친척이 미국에 살고 있다면 그렇게 좋은 협상 카드를 그가 쓰지 않았을까?
그럼 백악관의 과학기술정책국에 류영준의 친척 동생이라는 그 아이의 정보가 남아있어야 한다.
그러나 알폰스는 거기서 어떤 정보도 찾지 못했다.
제임스 홀드런 본인을 떠보기도 했지만 금시초문인 듯 반응했다.
알폰스는 경찰을 시켜서 미국의 이민 가정을 전수 조사했다.
거기서도 마땅한 답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근데 이젠 심지어 류영준의 가족조차도 저 친척을 모른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저 애가 진짜로 류영준의 친척이 맞을까?
“결국 정체를 못 찾았으니 아무 수확도 없네요.”
테이트 로페어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아니야.”
알폰스가 고개를 저었다.
“정체를 못 찾았다는 수확이 있지.”
“류영준이 과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막내의 죽음 때문이었다고 했지?”
“네."
“그리고 에이젠에 있을 때 연구소장 김현택을 받아버리고 좌천된 이유도 그 막내 트라우마를 건드려서 그런 거고.”
“간암 치료제를 김현택이 묻어버리려고 하다가 그 사태가 벌어졌다고 하더군요.”
“류영준은 이제 세계 최고의 권력자 중 하나야. 중국 주석 후보 양군위를 뒷배로 두고, 캠벨 미국 대통령도 자기 편에 서있지. 스웨덴에선 기사 작위를 받았고, 제3 세계에서는 거의 예수 수준이잖아? 그럼 자기 막내 동생을 똑 닮은 꼬마 하나 어디서 구할 수도 있겠지.”
“네?”
“힘없는 주임 시절에 연구소장도 받아버릴 정도로 막내에 집착하는 놈이, 막내랑 똑같은 정체 불명의 꼬마를 어디서 구해다가 몰래 키우고 있는 거잖아. 누가 봐도 뒤가 구린 그림이란 말이야.”
알폰스가 말했다.
“이 여자애가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 정체불명이라는 게 포인트라고. 기사화되면 그것 자체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해서 이미지에 치명상이야. 미국에 사는 친척이라고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죽은 막내를 닮은 애를 대체 어디서 구해서 데리고 다니는 거냐고 의혹을 일으키는 거지. 뻔질나게 들낙거리던 가난한 국가들에서 인신매매라도 해서 사온 게 아니냐, 평소에는 어디다 숨겨놓는 거냐, 애 부모는 누구냐, 이런 의혹들 말이야.”
“그걸로 협박을 해보라는 겁니까?”
“그래.”
“진짜로 아무도 몰랐던 친척일 수도 있습니다. 협박해서 안 먹히면 어쩝니까?”
“그럼 최후의 수를 써야지.”
테이트는 침을 꼴깍 삼키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보다 형님. 이젠 비행기 시간이 다 됐어요.”
“그래. 출발해야겠다.”
“근데 참 이해할 수가 없네요. 변호인들 시켜서 해결하면 될 것을 왜 굳이 가려는지.”
“내가 직접 가야한다. 다녀올 테니 집 잘 보고 있어라.”
알폰스가 말했다.
***
“너 정말 미친 거 아니냐?”
이사야는 경악해서 소리쳤다.
“나 하나 살리겠다고 무슨 기술을 만드는 거야? 텔로머레이즈를 골수로 뭐? 로잘린이 그러라고 시켰어?”
“밖에서 해리스나 로버트가 들을 수 있으니 목소리 낮춰.”
류영준이 말했다.
“아니, 그게 문제야? 류영준. 텔로머레이즈는 텔로미어를 연장시키는 거야. 알고는 있겠지?”
“그래.”
“그럼 그걸 이용해서 그동안 수많은 과학자들이 인간 수명을 늘리려고 시도했을 거라는 것도?”
“그래. 그리고 그게 전부 실패했다는 것도 잘 알아. 하지만 내가 너한테 하면 성공해.”
“성공하겠지! 그러니까 문제야. 골수이형성 치료는 좋아. 하지만 이건 ‘노화 치료’ 잖아? 심지어 없던 기술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아무도 못하는 기술을 성공시키는 거잖아? 그럼 어떻게 될……."
“빤한 얘기 그만하고 임상 시험 동의서나 써. 넌 워낙 몸 상태가 엉망이라 전임상 같은 걸 할 시간도 없다. 그냥 로잘린을 믿고 사인해.”
콱!
이사야 프랭클린이 류영준의 옷깃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로잘린을 공개라도 하려는 거야 뭐야? 절대 그러면 안 돼.”
그녀가 말했다.
지이잉!
류영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류영준은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고 약간 표정이 굳었다.
그건 류지원이 보낸 것이었다.
[아파트 입구에서 어떤 남자가 나한테 말 걸었어. 체노버 금융투자라는 데서 온 홍유성이란 사람이래. 사진을 하나 보여주면서 아는 사람이냐고 묻던데 그 사진에 오빠랑 새이처럼 생긴 애가 있더라. 놀이공원 같은 데서 찍힌 것 같았는데 대체 누구야? 닮은 사람이라기엔 너무 똑같이 생겼어. 오빠가 미국에 사는 친척이라고 했다는데 그런 친척 없잖아? 난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어.]
"......."
체노버 금융투자.
국내에 들어와있는 외국계 금융회사다. 그리고 체노버 금융지주사의 회장이 알폰스의 동생 테이트 로페어다.
“가족들까지 건드리다니.”
“뭐야? 무슨 일이야?”
이사야 프랭클린이 류영준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아무것도 아냐. 그리고 로잘린을 공개할 일은 없어. 그랬다가 무슨 봉변을 보려고. 그 부분은 따로 생각해둔 게 있어.”
"......."
“이거 놓고 사인이나 해.”
류영준은 이사야 프랭클린의 손을 떼어내고 임상 동의서를 다시 내밀었다.
이사야 프랭클린은 미심쩍은 표정이었지만 얌전히 동의서를 집어들고 쭉 훑었다.
그녀는 동의서에 사인했다.
“지금쯤 네덜란드에서는 1차 공판이 진행되고 있을 거야. 내가 준 자료들과 엘시의 증언을 토대로 진행되겠지. 하지만 결정타는 실제 피해자인 네가 들어가서 증언하는 거야.”
류영준이 말했다.
“그러니 빨리 나을 생각만 해.”
***
“본 재판은 니카라과 정부가 미국 정부를 대상으로 제기한 손해 배상 청구에 대한 심리입니다. 두 당사국 간의 특별 협정에 의해 재판이 이루어졌으므로, 제소국과 피소국의 개념이 적용되지 아니합니다.”
재판장 크로포드가 재판을 시작했다.
국제사법재판소의 심리는 두 국가가 재판에 응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손쉽게 진행된다.
UN 가입국이라면 한쪽의 일방적인 제소로도 심리가 진행되는 게 원칙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는 재판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미국 같은 강대국이 불리하면 재판 참여를 아예 거부해버리면 어찌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 정부가 특별 협정을 하면서 이 재판에 임했다는 사실 자체가 상당히 재밌는 포인트다.
게다가 사건 발생 기준일이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서 50여년 전에 이르는 과거사라는 걸 고려하면, 미국 정부는 선결적 항변으로 이 재판 자체를 정당하게 무효화해버릴 수도 있었다.
당시 헤이건 행정부의 요인들이 대부분 사망했기 때문에 심리가 불가능하다고 잡아떼면 그만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캠벨 정부가 이렇게 나선 것은 그들이 헤이건 행정부가 저지른 과거사를 청산하면서 그들의 악행을 폭로하기 위함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헤이건을 승계하는 미국 공화당과 다음 대선에서 맞붙을 때 캠벨은 더 유리한 포지션을 가져갈 수 있을 테고, 재선에 성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아마 캠벨은 적극적으로 니카라과의 승리를 지지해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국제사법재판소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국가간 분쟁을 해결하는 사법권의 꼭대기인 이곳은, 그런 정치적인 수를 넘어서서 사건을 명확하게 분별하고 정의로운 판결을 내려야 한다.
이 재판에는 제소국과 피소국의 개념이 없다. 사건을 정확히 분석하는 데에 목표가 있을 뿐이다.
“니카라과 정부 측은 제소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주시기 바랍니다.”
재판장 크로포드가 말했다.
대륙별로 한 명씩 할당된 15개 국가의 판사들, 총 15명은 엄중한 표정으로 니카라과 정부의 대변인과 변호인단을 바라보았다.
“미국 정부는 니카라과에 1958년에 그룸 레이크 공군 기지를 설립하였고, 1968년에는 그곳에 유전체학 연구실을 준설하였습니다. 그곳에서는 니카라과 국민을 대상으로 유전자 조작 실험이 불법적으로 자행되었으며, 그 결과 현재 니카라과에는 약 1,132명의 유전질환 환자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입은 손해에 대한 배상 청구를 요구합니다.”
니카라과 정부의 변호인 대표가 말했다.
“미국 정부는 헤이건 행정부를 승계하며, 이 사건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고 모든 진실을 가감없이 밝히고자 합니다.”
미국 정부의 변호인이 말했다.
“미국 정부 측 첫 번째 증인에 대해 먼저 심리를 진행하겠습니다.”
재판장이 말했다.
첫 번째 증인은 바로 노튼 하원 의원이었다.
그는 부쩍 수척해진 표정으로 증인석에 올랐다.
“증인은 이란-콘트라 게이트 때 니카라과 정부가 제소한 국제사법재판에서도 출석했습니다. 당시 군에서 대령으로 복무하셨는데, 이란에 밀매한 무기 대금을 그룸 레이크 공군 기지에도 전달하셨습니까?”
변호인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노튼 하원 의원은 반쯤 체념한 듯 대답했다.
“그 돈이 유전체학 연구소에서 사용되었을 수도 있겠네요?”
“그랬을 겁니다.”
“그럼 궁금한 게 하나 생깁니다.”
미국 정부 측 변호인이 말했다.
“당시 헤이건 행정부는 콘트라 반군을 지원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 적국이었던 이란에 무기를 밀매할 정도로 운용할 수 있는 자금이 적었습니다.”
변호인은 연도표를 꺼내들고 86년도에 체크했다.
“그리고 무기 판매 시점은 86년입니다. 하지만 그룸 레이크 공군 기지에 유전체학 연구소가 생긴 시점은 니카라과 정부측의 발표대로 1968년이었고, 그 후 약 18년간 많은 연구가 자행되었습니다.”
변호인이 말했다.
“당시 최고 시설의 병동과 연구소를 마련하고 수백 명의 산모를 데리고 18년간 발생학 연구를 진행한 그 돈은 어디서 공급되었던 걸까요? 증인은 그룸 레이크 공군 기지에서 당시 근무한 기록이 있는데, 혹시 이에 대해 아십니까?”
"......."
노튼 의원은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체노버 은행에서 그룸 레이크 공군 기지에 많은 자금을 투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