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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화. < FRB (6) > (134/301)

278화.  < FRB (6) >

류영준은 새벽 이른 시간에 짐을 꾸렸다. 창밖은 아직도 어두웠다.

이제 쿠크리 힐의 메디컬 센터를 떠날 시간이다.

개인실을 나와 복도로 이동하자 경호팀장 김철권과 경호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가시죠.”

김철권이 말했다.

“이제 미국으로 가면 좀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저를 노리는 권력자가 있거든요. 괜찮겠어요?”

류영준이 물었다.

“류 대표님하고 같이 다니면 수명이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처음엔 굉장히 긴장했는데 이제 적응됐으니 걱정 마십쇼.”

김철권이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중국에서도 대표님 경호를 끝까지 해낸 사람이잖습니까?”

그가 류영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 건장한 팔뚝에 어쩐지 안정감이 들었다.

“고맙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우리 환자들 깨지 않게 조용히 나가죠.”

류영준은 경호팀의 보호를 받으면서 복도를 걸었다.

형광등은 두 개만 남기고 모두 꺼져 있었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용하고 쌀쌀한 새벽 공기가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복도 끝에서 계단을 내려가 문밖으로 나갔다.

병동 로비 1층이다.

원무과와 접수대와 접수 대기 환자들이 있고, 시민들이 축제를 벌이던 장소다.

그리고 뜻밖의 광경이 펼쳐졌다.

“어……."

새벽 세시 반인 이 시각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곳을 가득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니카라과의 환자와 보호자들, 그리고 자원 봉사자들이었다.

“류 박사님!”

시민들이 류영준에게 와르르 몰려들더니 순식간에 김철권과 경호팀의 바깥을 에워쌌다.

“류 박사님이 네덜란드로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미국 정부랑 싸우신다고 들었어요.”

"......."

사실 지금은 네덜란드가 아니라 미국으로 간다. 그리고 미국 정부랑 싸우는 게 아니라 로페어 금융 권력과 싸운다.

묘하게 사실과 다르지만 류영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먼저 떠나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가더라도 저희 회사와 병원의 선생님들은 모두 여기 남아 계실 겁니다. 그분들이 친절하게 진료를 봐주실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류영준은 그들이 자신을 붙잡으려고 몰려왔다고 생각했다.

이 의료사업의 책임자가 자리를 비운다는 게 환자들 입장에서 염려스러울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시민들이 이렇게 모여든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제발 어디 다치지 마세요.”

자원 봉사를 하러 들어온 스페인어 통역사가 말했다.

“류 박사님이 우리를 위해서 미국 정부랑 싸워주신다는 걸 다들 알고 있습니다.”

“류 박사님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다치지 마세요.”

“행운을 빌게요.”

시민들은 짧은 영어로 한 마디씩 하면서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우리나라로 오신 이유가 처음부터 미국한테 희생당했던 환자들을 고쳐주고 보상을 받아주려고 하신 거라면서요……."

통역사가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처음 로비에 몰려들 때부터 몇몇이 훌쩍였는데, 류영준의 얼굴을 보자 이젠 분위기가 점점 더 습해지고 있었다.

시민들은 여기저기서 눈물을 흘리고 기도를 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갑자기 한 중년 여성이 앞으로 나섰다.

“나까따마. 나까따마.”

그녀는 김철권의 어깨 너머로 손을 불쑥 올렸다.

“워어!”

깜짝 놀란 김철권이 막아서자 그녀는 움찔하며 한 걸음 물러나더니, 조심스럽게 김철권한테 손을 보여주었다.

식당에서 굳은살이 잔뜩 박힌 그녀의 손바닥에 담겨있는 것은, 바나나 잎에 싸여있는 옥수수 떡 같은 것이었다.

니카라과의 전통 음식 중 하나였다.

“비행기에서 드시래요.”

통역사가 말했다.

류영준이 김철권의 어깨 옆으로 손을 뻗어서 조심스럽게 음식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그러자 용기를 얻은 시민들이 하나씩 앞으로 다가오면서 이런저런 마음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시내에 소가 끄는 달구지 마차가 다니는 이 나라는 정말 가난한 곳이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후 에스파냐의 영토였다가, 독립 후에는 미국의 무력 개입을 겪다가 독재 군사 정부의 악독한 착취에 시달렸다.

산디니스타의 결속력과 끈질긴 투쟁으로 마침내 민중 정부를 수립했지만 여전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기계화된 장비 없이 낫으로 사탕 수수를 추수하면서 산다. 도둑과 강도도 많고 치안도 나쁘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활이 어려운 만큼 그들의 선물이란 것도 전부 초라한 것들이었다.

각설탕 한 묶음.

찻잎이 담긴 병.

손바닥만한 크기의 종이 인형.

“저기, 죄송한데, 저희가 지금 많이 바쁩니다. 그리고 짐도 많이 들 수가 없어서 이걸 다 받을 수가 없습니다.”

김철권과 경호원들이 사람들을 막아내며 거절하기 시작했다.

“오쿠빠도! 오쿠빠도!”

시민들 몇몇이 손을 휘저어가며 자체적으로 길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류영준은 그들에게 인사하고 경호팀과 함께 빠져나갔다.

시민들은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라틴 아메리카의 반미 투쟁의 상징, 아우구스토 세사르 산디노를 떠올렸다.

그들은 두 손을 모으고 류영준이 무사하길 기도했다.

***

버지니아주 북부를 지나가는 포토맥 강 인근에는 거대한 캠핑장들이 많다.

맥아더 대로와 브락야드 로드가 교차하는 지점 북동쪽 숲속에는 최근 수상한 사람들이 들락거렸다.

언뜻 보면 길을 잃어버린 동네 주정뱅이 같기도 하고 실직한 아저씨 같기도 하지만 그들의 정체는 미국의 ‘공식적인’ 최고 권력자들이었다.

CIA 국장 해리스는 간단한 변장을 한 채 숲속 한 가운데에서 낙엽을 치우고 있었다.

적당히 걷어내자 여닫이 문 하나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15평 정도 되는 지하실.

그곳은 해리스 국장의 개인 세이프 하우스였다.

여섯 명의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는데, 로버트와 이사야 프랭클린, 그리고 존스 홉킨스 대학의 의료진이었다.

“상태가 어떻습니까?”

해리스 국장이 물었다.

“아, 정말 안 좋습니다……."

존스 홉킨스 대학의 외과 교수 알버트는 세이프 하우스에서 이사야 프랭클린을 붙잡고 씨름하고 있었다.

이사야 프랭클린은 애초에 골수이형성증후군으로 건강이 매우 나빴다.

거기다 오랜 심문으로 지쳐있었던 데다가 몸 곳곳에 총을 맞고 대량의 피를 흘렸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길에 의식을 잃어버린 그녀는 배녹번 메모리얼 병원으로 가서 응급 처치만 받고 바로 나왔다.

입원 수속을 해버리면 로페어가 추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입원을 해야하지 않았을까요?”

로버트가 물었다.

“아니야. 수석작전장교가 우리가 이동한 방향의 대형 병원들을 전부 수색했어. 금방 붙잡혔을 거야.”

“잡아도 뭘 어쩌겠습니까? 국장님도 계시고 우리도 있는데요.”

“하하. 정말 순진하군.”

해리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CIA가 정말로 정부가 거둔 세금과 그 예산으로만 깨끗하게 운영된다고 생각하나? 그럼 우리가 예산안을 왜 공개하지 못하겠어.”

해리스가 말했다.

“CIA 예산의 절반은 월가에서 나와. 그만큼 월가의 입김이 깊이 미치지. 이 조직에 오랫동안 몸담은 사람일수록 그들하고 커넥션이 강해지고, 그 중에서 ‘수석작전장교’라는 직위로 뽑히는 사람들은 사실상 로페어의 심복이야.”

"......."

“명령만 내려지면 미친 척하고 대통령한테도 총을 쓸 수 있는 사람이네. ‘CIA에서 탈출해서 민간 병원에 들어간 테러범’ 정도면 현장 사살하기 매우 쉽지 않겠어?”

“거기 잡담 그만하시죠. 여기 중환자실입니다.”

알버트 교수가 말했다.

로버트와 해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병원에 입원한다 해도 사실 어떻게 손쓸 방법은 따로 없습니다. 골수이형성증후군은 혈액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는 병인데, 그 중에서도 이런 케이스는 처음이거든요.”

알버트가 말했다.

“이런 건 최첨단 시설이나 의사의 전문성, 테크닉 같은 걸로 치료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창의성’이 필요하죠.”

"......."

“그래서 말인데 류 박사님은 언제 옵니까?”

알버트가 해리스한테 물었다.

“지금 쯤 워싱턴에 도착했을 테고, 휘태커 요원이 모시고 올 겁니다.”

“류 박사님 신변은 안전하겠죠?”

로버트가 말했다.

“로페어와 싸우는 이상 누구도 안전을 보장할 순 없어. 각하도 목숨 내놓고 일하시잖나."

***

닥터 레프는 꿈을 꾸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지독한 불행에 시달렸던 그녀는 과학의 사악한 모든 면에 짓눌린 채 살아왔다.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나 골수이형성증후군을 선천적으로 앓았고, 어린 나이에 동생들과 친구들이 모두 죽는 처참한 대학살을 목격했다.

팔레스타인으로 이동해서는 극악한 차별에 시달렸다. 폭행과 따돌림과 백린탄 폭격을 겪었다.

타고난 지능과 노력으로 국제 대회에서 상을 받고, 유럽의 대학에서 영재 스쿨에도 들어갈 수 있었지만 결국 모든 것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과학자도, 예술가도, 정치인도 될 수 있었지만 끝내 걷게 된 길은 팔레스타인의 반군 조직이었다.

그 길은 험난했지만 외롭지는 않았다. 그 반군들은 그나마 이사야 프랭클린과 비슷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삶은 지루하게 뒤틀린 비극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이사야 프랭클린은 딱 한 줄기의 빛을 발견했다.

‘로잘린.’

지금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를 전부 교체할 수 있는 다음 세대의 생물.

위대한 지성을 가지고 세계를 원자 단위에서부터 이해할 수 있는 존재.

로잘린의 한 차원 높은 시야는 최선의 효율을 바라본다.

로잘린이 통제하는 세계는 어쭙잖은 권력자들의 착취가 불가능한 곳이다.

인간 자체를 하나의 미물처럼 이해하는 로잘린에겐 성별에 따른 차별도, 종교에 따른 차별도, 능력에 따른 차별도 없다.

오직 공평정대한 존재. 가장 효율적인 통치 체제 속에서 인간의 모든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구원자.

그건 이사야 프랭클린의 손에 잡힐 듯, 잡힐 듯했지만 계속 빠져나갔다.

로잘린의 곁에는 항상 류영준이 있었다.

부러움과 질투와 자괴감으로 온갖 통증을 느끼던 이사야 프랭클린은 완전히 지쳐버렸고, CIA가 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수명이 다하기 전에 자신의 탄생의 비밀이라도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 틀렸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천천히 죽음을 받아들였다.

정말 지루하고 힘든 삶이었다.

다시는 살고 싶지 않은 인생이다.

팍!

뜨거운 불빛과 함께 이사야 프랭클린의 머릿속에 강렬한 섬광이 몰아쳤다.

"헉......."

그녀는 눈을 떴다.

“일어나지 말고 얌전히 누워 있어.”

류영준이 말했다.

알버트 교수가 이사야 프랭클린의 오른쪽 팔뚝에 주사를 놓고 있었다.

“정말 류 박사님 말대로 이 치료제를 고농도로 주사하니까 깨어나네요.”

알버트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비장의 활성을 조절해서 혈구 파괴를 억제하고 각성 효과를 높인 겁니다. 하지만 일시적인 거예요.”

류영준이 말했다.

“이사야 프랭클린하고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하셨죠. 자리 비켜드리겠습니다.”

알버트는 류영준에게 인사하고 바깥으로 나갔다.

문을 닫은 다음 류영준은 이사야 프랭클린의 병상 옆에 앉았다.

“어떻게 된 거야?”

이사야 프랭클린이 물었다.

“널 치료하려고 왔어.”

“……. 정말 실망스럽군. 내가 좋아할 줄 알았어? 덕분에 로잘린이 위험에 처했는데. 로페어의 힘은 상상을 초월해.”

“맘대로 생각해. 하지만 이미 물은 엎어졌어. 이사야 프랭클린. 난 너를 골수 이식으로 치료할 거다.”

“……. 난 골수 이식법으로는 치료할 수 없을 텐데.”

이사야 프랭클린이 말했다.

“류영준. 나도 에이젠바이오에서 개발된 골수이식 치료를 흉내낼 수는 있다. 하지만 내 몸에선 안 들어. 내 수명은 세포생물학적인 나이의 문제야.”

“그건 네 생각이고.”

류영준이 말했다.

"......."

“나랑 로잘린이 조혈모세포를 제작하면 널 치료할 수 있다.”

이사야 프랭클린은 피식 웃었다.

“그거 치료비 굉장히 비싸겠군.”

“네가 그거 낼 돈은 없을 테고, 청구하지 않을 테니 대신 네덜란드에서 증언을 해.”

류영준이 말했다.

“네덜란드?”

“니카라과 정부가 미국 정부를 상대로 국제 소송을 걸었거든. 그룸 레이크 공군 기지의 발생학 연구소에서 불법적인 유전자 조작 시술을 했다는 내용이야.”

“뭐라고?”

이사야 프랭클린이 깜짝 놀랐다.

“내가 그 증거를 대량으로 모았다. 그리고 야세르와 송 박사가 CIA와 네 이름을 언급하면서 매스컴에서 한번 난리를 쳤어.”

“아니……."

“게다가 네 어머니, 엘시한테도 연락을 받았어. 송 박사님하고 같이 네덜란드로 가시겠다더군. 이미 이 게임은 꽤 커졌다고. 이제 들어가거나 빠지거나 둘 중 하나야.”

"......."

“어때? 내가 판 깔아줄 테니까 가서 원 없이 한번 로페어를 물어뜯어보는 건?”

류영준이 말했다.

“로페어를……."

“네가 저지른 테러 죗값은 그 후에 받으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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