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7화. < FRB (5) > (133/301)

277화.  < FRB (5) >

“아…… 이게 아닌가.”

송지현이 민망한 듯 웃었다.

“류 박사님의 친척 동생 말씀하시는 줄 알았어요. 그 애 이름도 로잘린이거든요.”

“류 박사님한테 미국에 사는 친척이 있어요?”

엘시는 생명창조와 새로운 생명계의 시초, 로잘린에 대한 엄청난 집착으로 류영준의 신변에 대한 걸 상당히 많이 조사했다.

하지만 미국에 사는 친척이 있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다.

“네. 제가 직접 만난 적도 있어요. 류 박사님 많이 닮았어요. 근데 머리칼은 꼭 혼혈처럼 붉은 색이고, 한국어도 약간 어색하고, 근데 또 말은 엄청 잘하고 똑똑해요.”

송지현이 말했다.

“막 코코아 보고 박테리아가 들끓네 어쩌네 하더라고요.”

그녀는 입을 가리면서 까르르 웃었다.

“……. 별난 일이네요.”

엘시는 머리를 긁적였다.

“엘시 박사님이 얘기한 로잘린은 뭐예요? 다른 사람이에요?”

“어……. 그러니까……."

엘시는 잠깐 머뭇거리다 말했다.

“제가 생명창조 부서에 있을 때 만들던 인공 세포 이름을 로잘린이라고 붙였어요.”

“그래요?”

“네. 로잘린드 엘시 프랭클린에서 가져온 거죠. 그게 누구냐면……."

“DNA 이중나선의 X선 사진을 찍은 과학자요?”

“네. 알고 계시네요.”

“그럼요. 생물학을 하는 여성 과학자면 거의 다 알지 않을까요?”

송지현이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지금 그 이름에 어떤 역사가 생겨났는지 그녀는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순진한 눈빛이 엘시의 눈에는 어쩐지 찬란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엘시는 그제야 자신이 어떤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송지현은 여성이었고, 과학자였고, 셀리큐어라는 역대급 간암 치료제를 개발한 최고의 연구원이다.

류영준과 함께 굵직굵직한 논문들을 사이언스와 네이처에 연달아 발표했고, 지금은 류영준 다음 가는 노벨 생리의학상 후보다.

과학계로 진입하면서 겪었던 성차별 때문에 생명창조를 시작했던 엘시에겐 가장 완벽한 이상형이었던 것이다.

“송 박사님은……. 노벨상 후보잖아요. 어떤 기분이에요?”

엘시가 물었다.

“어떤 기분이냐고 해봤자, 뭐……. 좋긴 하지만 어차피 그 상은 류 박사님이 받으실 것 같고.”

송지현은 머리를 매만지며 웃었다.

“그러지 마세요. 송 박사님이 받으실 수도 있죠.”

엘시가 말했다.

“하하, 글쎄요. 근데 애초에 저는 노벨상에 별로 욕심이 없어요.”

송지현이 말했다.

“그래요?”

엘시가 뜻밖이라는 듯 반응했다.

“네."

“송 박사님. 노벨 생리의학상, 화학상, 물리학상, 이 세 가지 과학계의 노벨상을 여태까지 수상한 사람은 총 607명인데 그 중에 여성은 20명뿐이에요.”

엘시가 말했다.

“만약 송 박사님이 노벨상을 받으면 그 희귀한 여성 수상자 중 하나가 되는 건데, 그래도 별로 욕심이 안 나세요?”

“음. 글쎄요. 딱히 별로.”

송지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송 박사님은 과학계에서 성차별을 별로 겪어본 적이 없나보네요. 제가 학위를 할 때는 여자가 무슨 대학원을 가냐, 여자는 감성적이라서 이과 머리가 딸린다면서 한 마디씩 거들던 사람들이 수두룩했거든요.”

“당연히 저도 있었죠. 심지어 저는 약사 자격증도 있었으니까, 여자가 약국 하면 얼마나 편한데 왜 굳이 연구직을 하냐고 친척들이 돌아가며 잔소리를 했죠.”

송지현이 말했다.

“근데 제 동생 고치려고 한다고 하면 다들 입 싹 다물던데요. 제 동생이 조현병이었거든요. 그리고 저는 과학계의 성차별을 없애는 것은 필요하다 생각하지만, 그 목적으로 과학을 하고 싶진 않아요.”

송지현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엘시 박사님.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과학을 공부할 때, 자기 아버지하고 충돌이 되게 잦았대요. 아버지는 딸이 과학을 하는 걸 못마땅해 한 거죠.”

“맞아요. 여성 과학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면서……."

“그때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아버지한테 쓴 편지를 보면 이런 말이 나와요.”

송지현이 말했다.

“과학과 일상은 분리할 수 없고 분리해서도 안 됩니다. 과학은 제게 삶을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사실과 경험, 실험에 근거한 설명을 줍니다.”

"......."

“저한테는 과학이 그런 거예요. 아무런 보상이 없어도 저는 과학을 할 거예요. 그래서 노벨상은 저한텐 그냥 일종의 성과급 같은 느낌이죠.”

송지현이 말했다.

“그래요……."

엘시는 어쩐지 어깨가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아마 제 생각에는 류 박사님도 저랑 똑같을 걸요. 얘기하다보면 가끔 찐하게 느껴지는 과학 너드의 기운이 있거든요.”

송지현이 웃으면서 덧붙였다.

***

“어떻게 하실 겁니까?”

테이트 로페어가 물었다.

“수석작전장교 말에 따르면 해리스 국장이 대통령하고 같이 이사야 프랭클린을 워싱턴 교외로 데리고 나갔다더군. 그리고 그 방향의 어떤 병원에서도 그런 환자가 들어오진 않았어.”

알폰스 로페어가 말했다.

“의사를 따로 불렀겠죠.”

“그랬겠지. 그리고 총알을 빼내더라도 출혈이 심하고, 원래 골수이형성증후군인지 뭔지하는 병을 앓았다고 했으니 오래 가지 못할 거야.”

“하지만 류영준이 문제죠.”

“맞아. 모든 게 다 그 놈이 문제지.”

알폰스는 턱을 매만졌다.

“니카라과 정부가 갑자기 미국 정부를 고소하고 나서는 걸 보면 분명히 류영준이 뭔가를 찾아준 것 같긴 한데, 그게 뭔지 짐작도 안 되거든?”

“증거물이 뭐든, 일반적인 방법으로 찾아낸 건 아니겠죠. 분명 또 골 깨지는 생물학의 신비, 뭐 그런 걸겁니다.”

테이트가 말했다.

“그러니까 형님. 어차피 일반 대중들이 이해하기 힘든 증거물이라면 그걸 설명만 못하게 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

“류영준을 죽이자고?”

“류영준 숨을 끊으면 자연스럽게 이사야 프랭클린도 죽는 셈이죠. 우리가 재판을 질질 끌기만 해도 말이에요.”

"......."

“캠벨 행정부에서 CIA 자료를 토대로 헤이건 행정부가 그룸 레이크를 운영했다는 식으로 인정해버린다고 해도, 다른 증거물들이 하나도 없으면 꽤 해볼만 합니다.”

“니카라과 정부가 이긴다 하더라도, 적당히 흐지부지시킬 수 있지. 대중들한테 어필하기가 쉽지 않을 테니까, 캠벨 정부도 우릴 압박하기 어려울 거다.”

“그렇죠.”

“하지만 그래도 류영준을 죽이는 건 마지막 수단이야.”

“어째서요?”

“죽이기엔 너무 아깝잖니. 게다가 그런 인물이 이런 소송을 벌이던 가운데 사망하면 많은 사람들이 의심하고 들쑤실 거다.”

“그렇긴 하지만……."

“물론 최악의 경우에는 류영준을 따야겠지.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까. 하지만 최선의 루트는 류영준을 우리가 이용할 수 있게 되는 거야. 이번 위기를 넘기면서 말이야.”

“그래서 가족들을 알아보라고 하신 겁니까?”

킴버 테이트가 계단을 올라오면서 물었다.

“그래, 막내야. 이리 와라.”

알폰스는 옆자리 소파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류영준의 가족 관계는 다음이 끝입니다.”

킴버는 류영준의 부모와 여동생 사진을 내놓았다.

“이들 중에 누굴 압박하거나 매수하긴 쉽지 않을 겁니다. 류영준은 가족 셋 모두하고 굉장히 친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류영준의 부모한텐 경호원이 붙어있고, 최근에 여행에서 돌아와서 집에만 있답니다.”

킴버는 젊은 여자 사진을 가리켰다.

“여동생 류지원. 이 여자는 정윤대 학생인데, 가족들이랑 같이 사는 아파트가 정윤대 후문하고 딱 붙어있다시피 합니다. 대학교 내에서 납치를 한다거나 하는 과격한 방법은 좀 어렵겠죠. 직장을 압박한다거나 하는 것도 불가능하고요.”

“……애초에 한국까지 가서 류영준의 가족을 볼모로 잡는다는 게 너무 까다로운 방법이야. 다른 선택지는?”

“얘는 누구야?”

테이트가 끼어들어 9살 정도 된 여자아이 사진을 가리켰다.

“얘는 류새이라고 류영준의 막내 동생이라는데, 이미 죽었답니다.”

“그랬군……."

“근데 이상한 게 하나 있어요.”

킴버 로페어는 다른 사진을 하나 꺼냈다.

“류영준의 팬클럽에 옛날에 올라왔다가 묻힌 자료랍니다.”

그건 놀이공원에서 촬영된 류영준과 류새이의 사진이었다.

다만 류새이의 머리카락이 붉은 색이었다.

“몇 달 전에 찍힌 겁니다.”

킴버가 말했다.

“뭐야 이게?”

알폰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동양인 얼굴을 구별 못하는 건가? 죽은 막내라는 애랑 똑같이 생겼잖아? 얘는 누구야?”

“미국에 사는 친척 동생이라는데요.”

“사실 안 죽은 거 아니야?”

“막내라는 애가 죽은지는 몇 년 됐습니다. 같은 인물이더라도 더 자랐어야하죠.”

킴버가 말했다.

"친척이라는 이 여자애는 류영준의 회사에도 잠깐 방문했었다고 합니다. 근데 며칠 여기저기서 목격된 후에 사라졌대요."

"......."

알폰스는 날카로운 직감을 느꼈다.

이거다.

여기가 구멍이다.

성공한 과학자이자 기회주의자, 타고난 금융가이자 사업가로서 알폰스의 모든 감각이 말하고 있었다.

귓가에 찌르르 울리는 통증이 마치 미국과 소련의 갈등이 빚어진 니카라과에서 커다란 발생학의 찬스를 잡아냈던 때, 이어서 나사에서 미르 호를 공유하는 협의안을 낚아챘던 때와 느낌이 똑같다.

이게 기회다.

“이 애를 찾아.”

그가 말했다.

“이 애가 류영준의 약점이다.”

***

네덜란드의 헤이그 평화궁에 위치한 국제사법재판소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는 유엔 자체의 사법 기관이며, 여섯 개의 주요 기관 중 하나다.

그리고 이 기관은 이미 한번 미국과 니카라과의 소송을 다룬 적이 있었다.

이란-콘트라 게이트가 터졌을 때 말이다.

니카라과 정부는 그때도 미국을 상대로 국제법 위반에 대해 소송을 걸었다.

국제사법재 판소는 정의로운 판결을 내렸다.

“미국은 다른 나라에 무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다른 나라의 국내 문제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그리고 다른 나라의 주권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국제법상 의무를 위반했다.”

16개 항에 걸친 장문의 판결문에서는 미국이 니카라과에 대해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는 내용이 포함돼있었다.

“그리고 미국은 씹었지.”

국제사법재판소의 재판관 15명 중 하나인 조앤 아브라함은 과거의 판결문을 읽으면서 혼잣말을 했다.

놀랍게도 당시 미국은 ‘엘살바도르의 요청에 따라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한 것’이라고 자기 변론을 하다가 패소하자, 아예 국제사법재판소의 사법권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쪽으로 태도를 바꿨다.

그냥 재판을 통째로 묵살해버린 것이다. 심지어 재판관 중에 미국인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야말로 패권 국가라서 할 수 있는 행패였다.

니카라과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로 그 문제를 다시 가지고 갔지만,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미국이 거부권을 행사해서 없애버렸다.

니카라과는 다시 유엔총회에 호소했고, 94대 3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배상금 지급 결의안이 통과됐지만, 마찬가지로 미국 정부는 무시해버렸다.

“라틴아메리카의 그 불쌍하고 가난한 나라의 악몽이 이번에는 어떻게 될지……."

조앤 아브라함은 달력을 확인했다.

다음 주 이 시간.

이곳에서 다시 역사의 한 장면을 상기시키는 재판이 열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