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6화. < FRB (4) > (132/301)

276화.  < FRB (4) >

“신나게 얻어터지는군요.”

제임스 홀드런이 말했다.

캠벨 대통령의 집무실. 제임스 홀드런과 해리스 CIA 국장은 앞으로의 전략을 논의하고 있었다.

“저건 우리 모두 예상 못했던 일 아닌가.”

캠벨 대통령은 모니터로 송지현과 야세르의 발표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일이 좀 수월해졌어. 니카라과 정부의 공격으로 불이 붙는가 했는데 저쪽에서 또 기름을 부워주는군. 이대로 헤이건 행정부 실료들을 하나씩 압박하면 되겠어.”

“그리고 로페어도요.”

홀드런이 덧붙였다.

“CIA는 좀 걱정되지만……."

캠벨이 해리스 국장을 힐끔 살폈다.

“괜찮습니다. 이 쯤 돼야 사람들이 금융 권력의 힘이 심지어 대통령 직속 기관에까지 미쳤다는 걸 알 수 있죠.”

해리스가 말했다.

“자네는 약간 피를 볼 수도 있겠는데.”

“괜찮습니다. 제 책임이죠. 저도 처음엔 정보만 캐내고 이사야 프랭클린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설마 각하께서 로페어랑 싸울 줄은 몰랐으니까요.”

캠벨은 미안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해리스. 이사야 프랭클린은 지금 상태가 어떤가?”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 하지만 증언하고 어쩌고 할 상태는 아닙니다.”

해리스 국장이 답했다.

“게다가 송 박사랑 야세르 말대로 ‘완치된’ 게 아니라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태인가?”

“그렇습니다.”

“이사야 프랭클린이 죽게 되면 이 싸움의 국면이 또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네.”

캠벨이 말했다.

“류 박사님을 미국으로 모실까요?”

해리스가 물었다.

***

“저는 다시 미국으로 잠깐 들어갈 겁니다. 그리고 네덜란드로 가야할 수도 있어요.”

류영준이 말했다.

“네덜란드요?”

차세대 병원의 구연성 부원장은 뜬금없는 말에 좀 놀란 듯했다.

“국제사법재판소가 거기에 있거든요. 니카라과 정부 측을 위해서 증언하러 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그렇군요.”

구연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은 정말 쉴 새 없이 바쁜 분이시네요.”

“뭐 우리 회사나 차세대 병원이나 모든 분들이 바쁘죠. 우리는 의학을 미래로 견인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까요.”

“떠나시기 전에 환자분들 한번 보시겠습니까?”

구연성이 물었다.

“환자분들이요?”

“완치된 사람도 있고, 아직 치료 중인 사람들도 있고, 대기 중인 사람도 있고……. 근데 다들 류 대표님은 한번 보고싶어 하세요.”

"......."

“계속 연구만 하시느라 환자들하고 만난 적은 없으시잖아요? 의료진 600명을 데리고 국가 수준에서 ‘외진’을 하는 이런 집단 방문 의료 사업은 굉장히 신선한 건데, 책임자로서 한번 보고 싶지 않으세요?”

“뭐, 궁금하긴 하지만……."

류영준이 약간 민망한 듯 웃음 지으며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제가 여기서 한 게 뭐 있다고요. 진료는 차세대 병원 선생님들이 봐주셨고, 줄기세포나 유전자 가위는 에이젠바이오 과학자들이 제작해준 건데요.”

구연성은 빙긋 웃었다.

류영준은 정말 겸손한 사람이다. 그리고 철저한 원칙주의자다.

“환자를 보는 건 의료진이지, 저 같은 사업가나 과학자가 아니에요.”

류영준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언제 미국으로 나가시나요?”

“아마 별일 없으면 모레 쯤 나갈 겁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그는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왔다.

탈렌 조작 데이터를 전부 정리해서 가방에 담았다.

‘우리 직원들이나 의사들을 믿지만 그래도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말이야.’

류영준이 로잘린에게 말했다.

‘시뮬레이션 모드에서 이 병동에 있는 환자들을 한번 스캔해줄 수 있니?’

-예후가 어떤지 보려고요?

로잘린이 물었다.

‘여기서 꽤 오래 자리를 비울 테니까.’

로잘린은 류영준의 몸에서 튀어나와 실험 테이블 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테이블에 쪼그리고 앉더니 눈을 감았다.

붉은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며 떠올랐다.

[시뮬레이션 모드 작동]

이곳에 있는 사람의 수는 자원봉사자와 축제 참여자들까지 약 20만 명에 이른다.

그 중에서 환자는 현재 23,291명

그 중 진료를 받은 사람이 14,559명이다. 대부분은 의약품 처방과 함께 입원하거나 했고, 다양한 파이프라인에서 치료가 긴급한 순서대로 에이젠바이오의 맞춤 치료가 진행되었다.

줄기세포 치료를 받은 만성적인 신경 질환자가 842명.

녹내장, 수근관 증후군, 갈랑-바레 증후군, 당뇨병성 신경병증, 알츠하이머, 조현병, 헌팅턴, 파킨슨씨 병, 척수 마비 등을 앓는 환자들이다.

완치된 이들은 일부고, 대부분은 점점 좋아지는 경과를 보며 신기해하고 있었다.

211명의 환자에게서 인공 장기 제작과 이식이 이루어졌다. 심장과 폐, 췌장, 간, 신장.

그들 중에는 유전 질환자들도 있다. 예를 들어 그룸 레이크에서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나서 선천적으로 간 경화를 달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인공 간을 제작하려면 환자 본인의 세포를 역분화하고 간세포로 재분화해야 하는데, 환자 본인의 모든 세포의 유전자에 이미 문제의 변이가 있는 케이스라 이게 쉽지 않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는 환자의 조직을 채취하고 거기서 분리한 세포를 줄기세포로 역분화시키고, 캐스나인을 이용해서 유전자 교정을 해준 다음, 교정이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유전자 검사로 확인하고나서, 다시 간 조직으로 재분화하는 순서로 맞춤 치료가 진행됐다.

몇 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이제 에이젠바이오와 차세대 병원의 의료진들은 그걸 척척 해냈다.

첨단 기술의 집약,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폴리오마 바이러스가 있네요.

로잘린이 말했다.

“뭐?”

류영준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 병동 환자들 중 상당수가 폴리오마 바이러스에 감염돼있습니다.

"......."

-생각해보면 야세르가 지금 저런 발표를 하기 전까지 시간이 많이 있었을 것 같은데, 그때 여기서 풀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우리 둘 다 DNA 연구하느라 바빠서 저런 쪽은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요.

“인공 장기 이식이나 줄기세포 치료나 유전자 교정 작업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곳이니까. 이런 곳에서 바이러스가 풀리면 호흡기 근처에 머무는 게 아니라 깊이 침투하기 좋겠지. 축제를 보러 온 관광객이나 봉사자로 위장해서 들어온 다음 바이러스를 푼 건가?”

류영준이 말했다.

-그럴 것 같네요. 그리고 거의 다 도덕 유전자들을 옮기는 바이러스입니다. 라그바를 감염시킨 거랑 비슷해요.

로잘린이 말했다.

“안전상에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은 없고?”

-원래 질병을 유발하지 않는 바이러스니까요. 라그바가 아주아주 특이한 케이스였죠.

“그래……."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야세르랑 송 박사가 그렇게 움직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로잘린이 말했다.

“야세르는 닥터 레프를 구하려고 그랬다 치고, 송 박사님은 정말 깜짝 놀랐어. 귀국하신 줄 알았는데.”

류영준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러고보니 송 박사님이 귀국하신 게 아니면, 내가 니카라과로 온 후로 몇 주나 지났는데 그동안 뭘 하신 거지?”

***

송지현은 야세르와 함께 매스컴에 중대한 폭로를 마친 후. 혼자서 워싱턴 교외 지역의 작은 식당에 방문했다.

자리에 앉아서 좀 기다리자 약속 시간이 됐다.

뚱뚱한 여자 한 명이 가게로 들어왔다.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로 안경을 가린 그녀는 송지현의 맞은편에 앉았다.

“용기 내주셔서 고마워요. 엘시 박사님.”

송지현이 말했다.

“안 한다고 했지만 상황이 재밌게 돼서요.”

엘시가 애플 파이와 콜라를 주문하고 말했다.

“그럼 엘시 박사님도 저랑 같이 네덜란드로 가서 증언하실 건가요?”

“그럴까 싶어요. 로페어의 시작이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은행이었는데, 어쩌면 그 네덜란드에서 그 집안의 명운이 끝날지도 모르겠네요.”

“이제 약은 안 하세요?”

송지현이 물었다.

“끊었어요.”

“그렇게 단번에 끊을 수 있어요?”

“애초에 좋아서 한 것도 아닌걸.”

엘시는 쓴웃음을 지었다.

송지현은 엘시를 처음 만났던 때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두 과학자의 특이한 만남은 지금으로부터 몇 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공항에서 니카라과행 비행기를 탄 류영준을 배웅한 후, 송지현은 야세르의 현란한 설득을 들었다.

그리고 거절하려고 했다.

아무래도 야세르는 뒤가 구린 인물이었고 함께 일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야세르는 작전을 바꾸어 미국에 있는 엘시의 집 주소를 알려주었다.

“이사야 프랭클린의 친모이자 에이젠 생명창조 부서의 직원이었던 사람이에요. 최근에 류 박사하고도 비밀리에 만남을 가졌던 사람이고. 류 박사도 아마 그때 이런저런 얘길 듣고 이번 스캔들에 관심을 가졌을 겁니다.”

송지현은 엘시에게 많은 호기심이 생겼다.

류영준을 혼자 니카라과로 보낸 후 기분이 찝찝했는데, 아무래도 엘시를 만나면 해야할 일을 명확히 잡을 수 있을 듯했다.

그리고 야세르가 알려준 주소지를 찾아가 현관 문을 열었는데, 방 안에 들어가면서 송지현은 강한 충격을 받았다.

그 집은 거의 쓰레기 처리장 수준이었다.

마약과 술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엘시는 영양 불균형과 중독으로 살이 엄청나게 찌고 안색이 매우 피폐한 상태였다.

“송지현 박사?”

엘시는 송지현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로잘린 때문에 왔나요? 아니면 닥터 레프 때문에?”

“……류 박사님을 돕고 싶어서요. 야세르가 여기로 가라고 했어요. 이사야 프랭클린에 대한 걸 알려주실 거라면서요.”

“좋아. 내 딸과 로페어에 대한 것 정도는 얘기해주죠. 들어와요.”

엘시는 너저분한 집안을 조금 치우고, 송지현에게 그룸 레이크 공군 기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엘시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얘길 들은 송지현에게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그룸 레이크 공군 기지 사건의 가장 큰 증인. 모든 사건을 알고 있으면서, 이사야 프랭클린을 빼돌려 생존시킨 인물.

정면으로 로페어에게 대들었던 유일한 과학자, 엘시 프랭클린은 어떻게 아직 살아있을까?

왜 로페어는 그녀를 죽이지 않았을까?

엘시가 털어놓은 답변은 그녀의 집안보다 더 혼란스럽고 충격적이었다.

“이사야는 열세살부터 팔레스타인 반군들하고 어울렸어요. 나름 국제 학술 대회 같은 데서 큰 상도 받곤 했는데, 유럽 어느 대학에서 장학생으로 키운다는 것도 마다하고 반군에 들어갔죠.”

그녀가 말했다.

“사실 그게 최선이었을지도 몰라요. ‘밝은 곳’에서 활동하면 언제 살해당했을지 누가 알겠어요. 차라리 국제사회랑 아주 척을 져버린 팔레스타인 반군이 낫지.”

“그럼 이사야를 그곳에 보내고 엘시 박사님은 미국으로 돌아가신 거예요?”

송지현이 물었다.

“맞아요. 그리고 뉴욕 주립대에서 강의를 맡게 됐죠. 다시 연구를 시작하고 논문을 내고. 학계로 복귀한 거예요.”

엘시가 말했다.

“그때는 언제든 로페어가 나한테 사람을 보내서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도 상관없다는 입장이었죠. 모든 것에 지쳐서. 하지만 날 찾아온 건 마약 브로커였어요.”

“마약 브로커요?”

“내가 그냥 커리어적으로 실패해서 이렇게 망가졌다고 생각해요?”

엘시가 웃음을 터뜨리며 방안에 굴러다니는 마약과 술병들을 가리켰다.

“이사야 프랭클린이 닥터 레프가 되어 반군에 들어갔고, 그 애가 누군가를 공격한다면 그건 로페어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죠.”

엘시가 말했다.

“로페어한테는 이사야를 막을 수 있는 인질이 필요했던 거예요.”

“그럼……."

“이사야를 자극하지 않고 협박하기 위해서는 내가 필요하고, 그렇다고 학계에서 설치게 내버려두는 건 불안한 거죠. 제가 명성을 쌓아서 폭로했다간 큰일이 날지도 모르니까.”

브로커가 데려온 갱들은 저항하는 엘시를 붙잡고 팔뚝에 강제로 약을 주사했다.

그들은 엘시를 묶어놓은 다음 몇 주 동안 일정 주기로 약을 투여해서 중독 상태로 만들었다.

“대학에선 당연히 잘렸고, 우습게도 그들이 주는 마약을 하면 브로커가 나한테 돈을 줬어요. 그때 느꼈죠. 이제 나는 학계로 복귀할 수가 없구나. 그리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마약을 한 거예요.”

엘시가 말했다.

“그때부턴 그룸 레이크에 대해서 만약 내가 떠든다 해도 아무도 안 듣게 되죠. 마약 중독자의 헛소리니까.”

우적.

엘시는 애플 파이를 한 입 깨물었다.

그 소리에 송지현은 회상에서 돌아왔다.

“송 박사님.”

엘시가 말했다.

“네."

“전에는 나도 경황이 없어서 얘기하지 못했는데, 송 박사님은 로잘린에 대해 얼마나 아세요?”

“로잘린이요?”

“그 왜, 류 박사가 혹시……."

“아! 류 박사님 친척이요?”

송지현이 환한 얼굴로 말했다.

“친척?”

“미국 사는 류 박사님 친척 동생 말씀하시는 거 아니에요? 키가 요만하고 똑똑하고 예쁘게 생긴 머리카락 빨간 애."

“……네?”

엘시는 굉장히 혼란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