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2화. < 그랜드슬램 (10) > (128/301)

272화.  < 그랜드슬램 (10) >

19세기 말 영국 런던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신출귀몰한 연쇄 살인마 잭 더 리퍼.

피해자의 배를 열어서 장기를 전부 꺼내어 헤집어 놓은 잔혹한 현장 때문에 이 연쇄 살인마는 크게 이슈가 됐다.

하지만 유명세를 몰게 된 더 큰 이유가 있다. 바로 잭 더 리퍼가 신문사나 감시위원회에 편지를 보내며 도발했던 것이다.

사체로부터 꺼낸 신장을 동봉해서 보낸다거나 자신의 범행 과정을 고백하는 미친 편지였다. 최초의 극장형 범죄인 것이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분노해서 직접 그 살인마를 반드시 잡으라고 지시를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범인은 체포되지 못했다.

심지어는 당대 최고의 추리 소설가였던 코난 도일에게 영국 경찰이 추리를 의뢰하기까지 했다. 근데도 못 잡았다.

몇 명의 용의자가 나왔지만 증거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19세기의 얘기다.

현대 과학은 이제 완벽하게 감추어진 범죄의 비밀도 찾아낸다.

DNA는 언제나 증거를 남긴다.

2014년, 과학자들은 잭 더 리퍼에 의해 살해당한 피해자 중 한 사람이 목에 두르고 있었던 숄에 묻어있는 정액의 DNA를 감식했다.

그리고 당시 용의자들의 후손들의 DNA와 대조한 결과, 용의자 중 하나였던 애런 코즈민스키라는 이발사를 특정해냈다.

여전히 논란이 있지만 이 DNA 감식 결과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되어서, 많은 과학자와 프로파일러들이 코즈민스키를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옛날에는 범행 현장에서 사체를 치우고 피를 닦아내면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지만 현대에는 루미놀이 있지.”

류영준은 의료진으로부터 들어오는 DNA 샘플들을 마이크로튜브 랙 (rack)에 차례로 꽂았다.

-캐스나인이 없던 시절에는 이런 식으로 유전자 조작을 했군요.

로잘린이 재밌다는 듯 DNA들을 들여다보았다.

“그때는 탈렌 (TALEN, Transcription activator-like effector nuclease)이라는 기술이 있었어.”

류영준이 말했다.

탈렌은 DNA를 읽을 수 있는 단백질들을 하나씩 연결해 붙인 다음 그 끝에 Fokl이라는 뉴클리에이즈 (Endonuclease)를 달아놓은 유전자 가위다.

이 거대한 유전자 가위는 DNA의 특정 위치를 인식해서 달라붙은 다음, Fokl에 의해서 표적 위치가 절단된다.

“캐스나인에 비해서 합성 과정이 너무나 까다로워서 한 군데 조작하려면 시간과 노동력 소모가 굉장히 큰 기술이었지.”

류영준이 말했다.

“그래도 결과물은 그럭저럭 쓸만했어. 한두 군데 교정하는 데는 괜찮았거든.”

그룸 레이크 공군 기지의 발생한 연구소에서는 수정란의 유전자 조작을 위해서 탈렌을 썼다.

확률이 낮더라도 탈렌으로 변이를 일으키는 데 성공한 수정란들만 골라서 대리모에게 착상시키고 출산한 다음 그 아기의 건강도와 지능 지수를 평가하는 방식이다.

그럼 이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DNA는 세포의 핵 내부에 있는 것이고, 탈렌이 DNA를 자르려면 그 안까지 들어가야 한다.

무려 30년 전에 탈렌이라는 유전자 가위를 무슨 수로 수정란 내부에 집어넣었을까?

그 시대에는 현미경의 배율이 지금처럼 뛰어나지 않았다. 마이크로 주사기를 이용해서 세포 내에 직접 주입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전기 자극을 이용해서 세포막을 살짝 찢어내고 그 틈을 타서 유전자 가위를 쏘아 넣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이 케이스는 수율이 굉장히 낮다. 대부분의 수정란이 전기 자극을 견디지 못하고 사멸해버리기 때문이다.

엄청난 양의 유전자 조작을 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그 연구실에서 이 방법을 쓰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 선택지는?

바이러스다.

탈렌을 합성하는 유전자를 바이러스에 실어서 수정란을 감염시키는 것이다.

바이러스는 자기 DNA를 숙주의 DNA 내부에 삽입하려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탈렌을 합성하는 DNA는 수정란의 DNA 내부에 들어갔을 것이다.

폴리오마바이러스가 라그바의 중추신경계에 도덕성 유전자를 집어넣지 않았던가?

똑같은 방식이다.

류영준은 닥터 레프가 썼던 폴리오마바이러스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했다.

“범죄자들이 쓸 만한 방법이지.”

그룸 레이크 연구소는 수정란의 DNA에 탈렌의 유전자가 삽입되고, 그 유전자가 작동해서 만들어진 탈렌이 표적 유전자들을 조작했다.

‘그렇다면 그 탈렌 유전자 가위가 아직도 피해자의 DNA 내부에 남아있겠지.’

DNA의 보존 능력은 천연 고분자 물질 중에서 압도적으로 우월하다.

30년이 지났어도 그 DNA는 반드시 남아있다.

류영준은 DNA 샘플 중에서 예비 실험용으로 두 개를 골랐다.

그리고 유전자 증폭 (PCR, Polymerase Chain Reaction)기계를 이용해서 탈렌을 합성하는 유전자들을 증폭했다.

그걸 PCR 산물 정제 키트로 정제했다. 불필요한 단백질과 염을 제거한 다음, 뉴클리에이즈 프리 워터 (Nuclease free water)라는 물로 뽑았다.

농도는 480 ng/uL.

상당한 양이다. 이 정도로 증폭되었다면 그 서열을 분석해서 이 DNA의 정체가 탈렌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다.

류영준은 먼거 아가로즈 젤 (Agarose gel)에서 DNA를 로딩 (Loading)해서 UV 램프로 확인했다.

증폭된 DNA 조각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범행 도구를 찾았어.’

류영준이 말했다.

이제는 피해자의 ‘환부’를 찾아낼 시간이다.

DNA에 절단이 발생하면 세포는 그 상황을 매우 심각한 위기로 느낀다.

세포 내에는 다행히 DNA의 절단 부위를 수리하는 기작이 존재하는데, 이 기작이 작동할 때 절단부위에는 몇 개의 DNA 염기가 추가되거나 제거되거나 한다.

인델 (InDel)이라고 불리는 현상이다.

이번에는 탈렌을 찾듯이 쉽게 뽑아낼 수 없다. 이 인델은 알아보기 힘든 무작위적인 패턴으로 수십억 염기쌍에 마구 분포해있기 때문이다.

보통 과학자들은 이걸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로잘린의 시각에서는 아니다.

“동기화 모드 좀 쓸게.”

류영준은 DNA들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동기화 모드 : InDel 패턴 분석, 피트니스 소모 : -0.5/1초]

류영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피트니스 소모량이 마이너스잖아?”

-라그바 때문이에요.

로잘린이 말했다.

-초당 피트니스 증가량이 너무 많이 늘어서 이제 동기화 모드로는 피트니스가 줄어들지도 않네요.

"......."

류영준은 약간 충격을 받았다.

“좋아, 그럼 환부를 찾아보자고.”

동기화 모드를 작동한 채로 류영준은 DNA 샘플 2개의 인델 패턴을 하나씩 뜯어 살폈다.

오른손으로는 그 패턴들을 종이에 쓰고 있었다.

샘플 1번

TAM A779del

LOS1A15 T112M

.......

그건 조작된 유전자의 조작된 위치에 발생한 변이 패턴을 기록하는 것이다.

환자 두 명에 해당하는 샘플 두 개에서 총 194개의 유전 변이를 찾아냈다.

범행 도구에 이어서, 그 범행 도구가 찔러버린 환자들의 환부도 찾아냈다.

“이만한 유전 변이가 DNA 조작 없이 자연 발생할 가능성은 거의 없지.”

류영준이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우길 가능성을 대비해서, 삽입된 탈렌이 이 유전 변이를 일으켰다는 사실까지 증명해주는 편이 가장 깔끔하다.

류영준은 칩 시퀀싱 (ChiP sequencing)을 준비했다.

DNA는 히스톤 (Histone)이라는 고분자 생체 물질에 수십 나노미터 단위로 감겨있다.

DNA에 절단이 발생하면 히스톤에도 약간의 변이가 생긴다.

이를 에피지네틱 모디피케이션 (Epigenetic modification)이라고 부른다.

히스톤에 발생한 변이는 DNA의 절단이 일어났었다는 가장 직접적인 증거물이 된다.

류영준은 칩 시퀀싱으로 위에서 찾아낸 환부들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

류영준이 실험실을 나왔을 때는 밤 10시가 지난 시점이었다.

극도의 피로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하지만 환자 샘플 두 개에서 증거물을 상당히 수집했다.

“이제 이 짓을 여기 있는 유전질환자 숫자만큼 반복하면 돼.”

류영준이 말했다.

“뭐, 이제부턴 직원들 시킬 거지만……."

쿠크라 힐에 설립된 니카라과 최대의 메디컬 센터는 아침부터 지금까지 풀가동 상태였다.

에이젠바이오에서 온 의사들은 분주하게 여기저기 오가며 진료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특이한 사실 하나를 알았다.

이곳의 분위기는 병원답지 않았다. 보통 병원은 공기가 엄숙하게 가라앉아있는 반면 이곳은 몹시 들떠있었다.

문이 열려있는 진료실들에서는 의사와 환자가 대화하다가 웃음을 터뜨리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복도 끝에서는 음악 소리가 들렸다.

원무과를 지나서 병원 1층 로비를 향해 내려갔더니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음악을 틀어놓고 사람들이 춤추고 노래를 부르고 난리가 난 것이다.

류영준은 잠깐 몸이 굳었다.

쿠크리 힐에는 지난달부터 니카라과의 의료진들이 수천 명이나 몰려들었다.

그리고 스페인어가 표준어인 니카라과와 에이젠바이오의 언어장벽을 허물겠다며 통역가들이 자원 봉사하러 들어왔다.

자원 봉사자들은 니카라과 시민들 중에서도 엄청나게 많았는데, 그들은 이 기묘한 의료사업을 돕기 위해 직접 병원을 찾아서 청소와 식사 준비 등을 맡아주었다.

그들 중 상당수가 1층 현관에서 시끄럽게 놀고 있었다.

외부 정원과 1층 현관 등에 크리스마스트리처럼 꽃과 색종이를 잔뜩 붙여놓았다.

아예 병원 외부에는 텐트까지 쳐놓고 과일과 음식을 나눠먹었다.

국내에서도 세브란스 병원 같은 곳에서는 1층 로비에 종종 위문 공연 같은 걸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의 분위기는 위문 공연 정도를 넘어서 축제 수준이다.

"......."

로페어, 그룸 레이크 기지, 유전 질환 환자들에 닥터 레프까지 모두 겹쳐서 머리가 아팠던 류영준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메이폴(May-Pole) 축제입니다.”

고인국 교수가 말을 걸었다.

“캐리비안 해안의 날씨는 2월에서 4월까지 비가 가장 적게 오고, 고지대는 우물이 말라서 식수에 문제가 생긴답니다. 농사도 힘들어지고요. 일 년 중에서 가장 힘든 시기라는데 그걸 넘어서 5월부터는 빗방울이 굵어진다고 5월을 기념하는 축제래요.”

“지금은 5월이 지났는데요……."

류영준이 말했다.

“아픔이 많은 나라잖습니까.”

고인국이 말했다.

“지금 이 나라에서 대표님의 위상은 거의 산디노와 맞먹어요. 옛날 미국의 군사 점령에 맞서서 농민군으로 싸웠던 니카라과의 사령관입니다. 농민군으로 그린 베레모를 물리쳤대요.”

"......."

“방법이 없던 난치 환자들을 한두 명도 아니고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진료하고 대부분 완치시키겠다는데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군요.”

복잡한 상황들 속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니카라과의 시민들은 이 일을 축제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사실 에이젠바이오의 과학자들이나 우리 병원의 의사들도 휴식 시간에 와서 축제를 즐기고 있어요. 다들 처음에는 점잖은 척, 엉덩이 무거운 척 하시더니 이젠 다 고삐 풀려가지고……. 지금 저기서 춤추는 저기, 저 분 황삼준 교수님입니다.”

고인국이 축제 인파 한가운데서 들썩거리는 의대 교수를 가리켰다.

류영준은 피식 웃음을 지 었다.

“대표님도 좀 놀다가 들어가시죠. 아까 직원들이 부르려고 했는데 안 보여서 못 찾았다고……."

고인국이 말했다.

“저는 지켜만 보겠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그는 축제 바깥쪽의 의자에 앉아서 사람들을 지켜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이제 슬슬 제 발 저린 로페어가 움직일 때가 됐는데.’

류영준은 펠루스 대통령과 통화했던 걸 떠올렸다.

로페어 집안의 진짜 힘은 연방준비은행 (FRB)에서 나온다.

미국의 중앙은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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