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 그랜드슬램 (9) >
“그거, 혹시 알폰스 로페어랑 관련있는 건가요?”
송지현이 물었다.
“굳이 알려고 하지 마세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귀국해서 조금 기다리시면 방사능 제거 미생물을 구하는 건 제가 도와드릴게요.”
류영준이 답했다.
“류 박사님은 전에 제가 알폰스랑 계약을 해도 결국 그 프로젝트가 불발될 거라고 하셨죠. 그 사람한테 문제가 있다면서요. 그 문제라는 게 니카라과의 유전질환자들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뜻인 거죠?”
송지현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어디 가서 얘기하지는 마세요? 송 박사님은 제가 믿을 수 있는 친구니까 그때 전화해서 말린 거예요.”
"......."
“이제 거의 도착했습니다.”
경호팀의 김철권이 말했다.
공항에 들어오자마자 류영준은 바쁘게 체크인과 출국 수속을 진행했다.
“지갑 흘리셨어요!”
정신없이 이동하는 류영준을 송지현이 붙잡고 지갑을 건네주었다.
“고마워요. 제가 지금 좀 바빠서 정신이 없네요. 다음에 서울에서 봬요.”
류영준은 지갑을 받아 주머니에 넣고는 케이캅스 경호팀과 함께 비행기를 타러 이동했다.
그 뒷모습을 송지현은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그녀는 특별히 할 일이 없었지만 서울행 비행기를 타러 올라가지 않았다.
남은 시간을 라운지에서 보내면서 고민에 잠겨 있었다.
불안하다.
류영준은 비윤리로 점철된 거대 권력들과 꾸준히 맞서온 사람이다. 그리고 항상 승리했다.
하지만 이번엔 느낌이 다르다.
딱 한번 만났지만 알폰스 로페어라는 인물은 그렇게 호락호락해보이지 않았다.
그의 배경도 특이하다.
그는 냉전 후에 미르호라는 러시아의 우주정거장을 나사와 공유하도록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그 공로로 나사에서 빠르게 진급하면서 지금 자리까지 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본업은 생물학자였다. 그것도 유전학을 전공한 발생학 연구자.
"......."
니카라과에서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류 박사가 저렇게 공격적으로 움직이는 걸까.
DNA에 남은 증거를 추적한다는 게 가능하긴 한 일일까.
정말 류 박사를 혼자 두고 귀국해도 되는 걸까?
“후우.”
송지현은 한숨을 쉬며 자판기로 이동했다.
코코아를 뽑으려다가 손가락이 우뚝 멈추었다.
코코아를 들여다보면서 필터를 갈지 않아 박테리아가 떠다닌다고 소리치던 기묘한 여자애가 떠올랐다.
‘로잘린.’
송종호는 그 애를 환상 속에서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차세대 병원의 병실에서는 잠깐 나간 사이 불쑥 튀어나왔는데 류영준은 그 애가 어디 있다 온 건지 설명해주지 않았다.
미국에서 어디에 사는지 물었을 때도 답해주지 않았다.
“도대체가……."
“익스큐스미.”
누군가 뒤에서 송지현을 불렀다.
턱수염을 멋지게 기른 아랍계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송지현은 약간 경계하면서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송지현 박사님. 잠깐 얘기 좀 할까요?”
“누구시죠?”
“저는 이집트에 있는 보툴리눔톡신 제약 회사 블레셋의 창립 멤버, 야세르라고 합니다.”
“블레셋?”
송지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번에 중동에서 일어난 일들은 상당부분 대외 공개되었다.
체포된 흉악한 테러리스트 닥터 레프가 어찌 되었는가는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블레셋이라는 기업과 커넥션이 있었다는 정황은 밝혀졌다.
그리고 이집트 정부에서 수사중이다.
“……그쪽 임원들은 지금 이집트 경찰한테 조사를 받고 계신 줄 알았는데요.”
송지현이 말했다.
“조사는 이미 받았습니다. 대부분 정황 증거들이고, 뭐 제가 출국하겠다는데 금지할 만한 여지가 ‘이집트에선’ 없어보였나보죠?”
야세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도 그럴 게, 우리는 이사야 프랭클린이라는 여자를 통해서 불법적으로 보툴리눔톡신을 수입한 죄밖에 없으니까요. 폴리오마바이러스를 연구한 건 맞지만 그걸 어디다 풀었다거나 하는 것도 모두 CIA 측 주장일 뿐이고. 게다가 푼다해도 본래는 위험하지 않은 종이고요. 박테리아 밀수 정도로 출국까지 금지하긴 좀…… 그렇죠?”
야세르가 빙그레 웃었다.
"......."
“아, 그리고 우린 팔레스타인 반군하고도 관련이 없는 깨끗한 회사입니다. 이사야 프랭클린은 관련이 있었나보지만.”
“알겠어요. 더 들을 필요 없을 것 같군요. 저한텐 무슨 볼일이죠?”
송지현이 말을 자르고 물었다.
“단도직입적이군요. 좋아요. 송 박사님하고 같이 일하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해가 될 얘기는 아닐 겁니다.”
야세르가 말했다.
“류 박사님의 이번 적은 상당히 거물입니다. 중국 주석처럼 약점도 없어요.”
그가 자기 가슴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우리가 좀 도와드릴 부분이 있을 것 같네요.”
***
“류 박사가 어디로 갔다고?”
미합중국 대통령 캠벨은 충격적인 소식에 몸이 굳었다.
“니카라과로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대대적인 의료 사업을 진행한답니다."
비서가 답했다.
"......."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불안감이 캠벨을 휘감았다.
“알겠네. 잠깐 나 혼자 있게 해주게.”
비서를 내보낸 후 캠벨은 착잡한 듯 손톱을 물어뜯었다.
니카라과라는 나라는 미국 정부에겐 거대한 스캔들 덩어리다.
냉전이 한참이던 때, 니카라과에서는 미국의 꼭두각시 역할을 하던 ‘소모사’라는 독재 정부가 있었다.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 (Anastasio Somoza Garcia)가 대통령에 오르면서 시작된 이 족벌 정부는 3대에 걸쳐서 정권을 세습하며 부를 독점했다.
나중에는 소모사 가문이 니카라과 국가 전체의 GDP의 40퍼센트를 먹어치울 정도에 이르렀다.
결국 시민들이 소모사를 밀어내고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반군을 조직했다.
이들은 당연히 반미주의 정서가 강했고, 조직의 이름은 반미 투쟁의 전설적인 인물인 아우구스토 세사르 산디노 (Augusto Cesar Sandino)의 이름을 따 ‘산디니스타’라고 지어졌다.
그리고 산디니스타는 성공적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소모사를 쫓아내고 민중 정부를 수립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니카라과 내에는 산디니스타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하는 콘트라 반군이라는 조직도 있었는데, 미국이 그들을 지원해주었다.
미국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다. 미국의 턱아래에 반미 정부가 들어섰으니 니카라과를 중심으로 공산화될 게 뻔하니까.
문제는 그 지원이 불법이었다는 것.
당시 미국 의회는 볼랜드 수정 법안으로 중남미의 반군을 미국 정부가 지원하는 것을 금지했다.
즉, 헤이건 행정부는 콘트라 반군을 의회 몰래 불법으로 원조해준 것이다.
그럼 그 불법 원조금은 어디서 났을까?
정말 믿어지지 않겠지만 이란에게 무기를 밀매했다.
당시 이란은 이라크와 전쟁중이었고, 테러 국가였으며, 미국의 적국이었다.
테러조직이자 적성 국가에게 무기를 팔아버리고, 그 수익금으로 볼랜드 법안을 위반하면서 콘트라 반군을 지원하는 거친 방법으로 니카라과에서 정권 전복을 기도한 것이다.
이 스캔들이 바로 헤이건을 탄핵 직전까지 몰고갔던 이란-콘트라 게이트다.
“남미에서 미국이 저지른 일들 중에서 가장 창피한 사건 중 하나다.”
캠벨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이건 니카라과의 거대 스캔들 둘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대통령이 되어서 기밀 정보들에 접근할 수 있게 되면 자연히 알아내는 더 충격적인 진실도 있다.
‘이란에 무기를 밀매한 그 수익금은 그룸 레이크 공군 기지로도 갔다.’
캠벨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룸 레이크 공군 기지는 물론이고, 그 내부에 설립된 발생학 연구소 역시 미국 정부의 펀딩을 받은 기관이다.’
그리고 연구소의 핵심 요인들 중에서 많은 이들이 정보부 소속이었다.
그 연구소의 결말이 어떻게 났는지는 캠벨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에이젠바이오는 그 많은 유전 질환자들의 탄생에 어떤 환경적인 문제가 있었는지도 연구하겠다고 공표했다.
“이걸 선전포고로 봐야 하나, 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순수하게 연구하고 치료하러 가는 걸 보고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건가?”
캠벨은 자리에 앉지를 못하고 집무실을 왔다갔다했다.
만약 이게 터지면 감옥 갈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룸 레이크 시설을 관리한 군 관계자들과, 당시 일을 용인해주었던 헤이건 행정부의 실료들, 그리고 로페어 가문까지.
피바람이 분다.
천만다행히도 캠벨 대통령 행정부는 큰 관련이 없었지만, 이런 싸움에 중립은 없고 로페어는 너무나 무서운 인물이다.
똑똑.
누가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제임스 홀드런 과학기술정책 국장이었다.
그는 보드카 한 병과 잔 두 개를 가지고 안으로 들어왔다.
“홀드런?"
“제 퇴직이 얼마 안 남았는데 저랑 한 잔 해주시죠.”
"......."
홀드런 국장은 잔에 보드카를 조금 따랐다.
“안색이 안 좋으시군요.”
“고민이 하나 생겼네.”
“로페어 입니까?”
"......."
“미합중국 대통령한테는 한 가지 불문율이 있죠. 로페어를 건들지 말라."
홀드런이 말했다.
“미국의 달러를 생산하는 중앙 은행인 FRB는 민간 은행입니다. 사실 로페어 가문의 소유나 다름없고요. 그리고 그걸 국유화하려고 했던 대통령들은 모두 정치적, 물리적으로 심각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
“중앙은행 시스템을 거부하고 그린백을 실시했던 링컨 대통령도, 재무부에 화폐 발행권을 넘겨주려 한 케네디 대통령도, 둘 다 암살 당했습니다.”
홀드런이 말했다.
“앤드류 잭슨 대통령도 중앙 은행을 거부했다가 암살 시도를 겪었고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야.”
캠벨은 씁쓸한 듯 말했다.
“국민에 의해서 선출된 나는 미국 내에 두려운 상대가 너무 많아. 그 중에서 로페어가 최고네. 이 나라는 그 집안의 왕국이야.”
“류 박사는 어떻습니까?”
홀드런이 물었다.
“제가 류 박사한테 로페어를 건드리지 말고 귀국하시라고 했는데, 오히려 한국에서 의료진 수백 명을 불러다가 니카라과로 진격해버렸습니다.”
“류영준의 신기술과 과학 혁명에 취해있는 그 사람들은 류영준에 대한 충성심이 상당합니다. 매우 독특한 형태의 사설 군대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니카라과의 정부한테 병원을 빌려서 통째로 차지하고 죽치고 앉아버리면 그대로 성역입니다.”
“그렇겠지.”
“장님 눈 뜨게 하고 마비 환자 걷게 하고, 유전병을 치료하는 집단이에요. 그런 곳에 틀어박히면 그 누구도 류 박사를 해코지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첫 번째 순방이니 온갖 이목이 집중될 텐데, 그 상태에서 그룸 레이크를 들쑤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지만 모든 증거를 은폐했다고 했네. 아무리 위대한 천재라도 거기서 뭘 찾아낼 수 있겠나?”
“모를 일이죠. 천재의 머릿속을 어떻게 압니까. 하지만 대통령님. 제가 오랫동안 이 내각에서 일한 친구로서, 그리고 대통령께 조언을 드려야 하는 ‘백악관의 과학기술 정책 고문’으로서 제 직무를 다하려고 합니다.”
홀드런이 말했다.
“류 박사 편에 서십시오.”
그가 캠벨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사람은 절대 패배하지 않습니다. 류 박사 편에 서서 로페어를 무너뜨리세요.”
***
니카라과 정부는 류영준과 600여 명의 의료진을 국빈으로 맞이했다.
콜드 체인으로 배에 실어서 에이젠바이오로부터 가져온 치료제들은 한참 실어 날라도 계속 나왔다.
“정말 감사합니다.”
니카라과의 대통령 미스테가는 류영준과 악수를 나누었다.
“쿠크라 힐 지역에 몇 개의 건물들을 개조해서 병동으로 쓸 수 있게 준비했습니다. 아직 덜 갖추어졌지만……."
“아시다시피 의사들의 외진 같은 게 아니라 학술 교류이기도 합니다. 니카라과에서도 의료진들이 함께 해주셔야 합니다.”
“우리 나라의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서로 하겠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전부 이미 대기하고 있습니다.”
미스테가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류영준은 미스테가의 소개를 받으며 에이젠바이오와 차세대 병원의 인력을 이끌고 쿠크라 힐의 메디컬 센터로 이동했다.
그곳에서는 이미 현지 의사들이 진료를 보고 있었다.
의사들도 미리 와서 병실을 셋업하고 대기하고 있었는데, 환자들도 미리 소식을 듣고 이틀 전부터 몰려와서 줄 서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전 질환 환자들 혈액 검사할 때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류영준은 차세대 병원의 교수들에게 말했다.
“DNA에 손상이 일어나면 체내에서 그걸 복구하는 과정에서 몇 개의 염기서열이 삽입되거나 제거됩니다. 이걸 인델 (InDel)이라고 부르는데, 탈렌 같은 유전자 가위나 방사선으로 DNA를 편집하면 이런 흔적이 남게 됩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보통 무작위적으로 입력되어서 그걸 분석하는 게 매우 어렵지만, 에이젠바이오는 할 수 있습니다. 혈액 샘플에서 DNA를 추출해서 연구팀으로 보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