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0화. < 그랜드슬램 (8) > (126/301)

270화.  < 그랜드슬램 (8) >

로페어 가문은 지난 200년 동안 세계 곳곳에 진출해서 크고 복잡한 가계도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유교적인 문화가 없다 해도, 경제권력을 쥐고 있어 가장 목소리가 큰 어른이 어느 집안이든 하나씩은 있게 마련이다.

가문의 수장이라 부를만한 그 위치가 지금은 알폰스의 차지였다.

알폰스는 로페어 집안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으며, 고조부 때부터 내려오던 워싱턴D.C.의 로페어 저택의 주인이다.

그는 금융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집안이 암스테르담 은행을 경영하던 시절부터 내려온 거대한 금융 자산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알폰스는 그걸 직접 굴리는 대신 전문가들을 고용해서 운영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중요한 사업들을 실력 있는 동생들과 의논하여 처리했다.

오늘도 처음에는 그런 자리였다.

“뭐 고민 있으십니까?”

체노버 금융지주의 회장, 테이트 로페어가 물었다.

알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와인을 조금 마시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알폰스 형님이 그렇게 미간 찌푸리고 있는 경우는 와인이 별로거나 일에 문제가 생겼거나 둘 중 하나 아닙니까?”

킴버 로페어가 물었다.

“와인은 좋아.”

알폰스가 말했다.

“그럼 일 문제라는 거네.”

테이트가 말했다.

“알폰스 형. 곧 백악관으로 가실 거잖아요? 캠벨 대통령을 바로 옆에서 들들 볶겠다면서 으스대시더니?”

“그 전에 나사에서 중요한 프로젝트를 하나 하려고 했지. 우주선 외벽에 서식하는 미생물을 채취해서 제공하고, 류영준 박사와 송지현 박사가 같이 방사능을 제거하는 신 제염제를 개발하는 것.”

알폰스는 혀를 쯧 찼다.

“근데 왜 갑자기 그만둔다고 했을까?”

“그만 두다뇨?”

킴버가 물었다.

“송 박사 말이야. 계약서 쓰기 직전이었는데 여기서부턴 셀리제너 사장이랑 얘기해봐야 한다면서 뒤로 슬슬 빼더라고.”

알폰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 여자는 노벨상 수상 후보야. 셀리제너 사장 이름은 아무도 모르지만 송지현 박사는 알아. 류영준의 명성하고 같이 떠오른 미래형 젊은 과학자 중 하나니까. 그런 사람이 미국까지 출장을 왔는데 계약서 작성에 대해 가이드라인 없이 혼자 왔다? 나랑 미팅을 하는데?”

“뭐, 이상하긴 하지만 그 정도로 걱정하실 필요 있습니까?”

“하필 류영준의 전화를 받은 이후였다는 게 마음에 걸린단 말이지.”

알폰스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지압했다.

“그러고보니 류영준 박사 얘길 내가 아까 기자들 통해서 한 박자 빠르게 접했는데.”

테이트가 말했다.

“무슨 소식?”

“자세한 건 아니고 에이젠바이오 제7 연구소에서 줄기세포를 이용해서 신경 치료나 조직 재생 치료를 하는 팀들 있잖습니까. 그걸로 태스크포스를 만든다고 하더군요.”

“태스크포스?”

알폰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을 위한 태스크포스?”

“그것까진 모르죠. 에이젠바이오에 우리가 뭐 산업 스파이를 심어놓은 것도 아니고. 류영준 대표의 지시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도 사실 모릅니다. 태스크포스라고는 하지만, 그것도 각 부서마다 테크니션들이 우르르 자원하고 차출되고 해서 조직도를 새로 짜고 있다는 소문에 기자들이 소설 쓴 거예요.”

“음.”

알폰스는 와인을 조금 마셨다.

“류영준 박사는 아직 워싱턴에 있나?”

“그럴겁니다. 근데 비행기 표를 샀다더군요. 곧 출국할 모양이에요.”

킴버가 말했다.

“비행기 표를 사?”

“네."

“네가 어떻게 알아?”

“형이 류 박사한테 관심을 계속 두기에 행적을 미리 조사해본 거예요. 류영준은 어제 날짜로 델타항공 표를 끊었습니다.”

“어디로 가는데?”

“니카라과.”

“니카라과!”

알폰스가 순간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그래?”

"......."

알폰스의 손가락이 떨렸다. 엄청난 불안감이 엄습했다.

“알폰스 형."

테이트가 말을 걸었다.

“형님이 그 지역에 안 좋은 기억이 있다는 건 우리도 알아요. 하지만 류 박사가 거기에 가서 뭘 어쩌겠습니까? 이미 30년 전의 일이에요. 지금 뭔가 냄새를 맡고 갔다고 해도 증거를 찾아낼 순 없어요. 우린 다 폐기했잖습니까.”

"......."

알폰스는 자리에 앉았다.

“너희들. 에이젠바이오에서 뭘 발표하는지 지켜봐. 그리고 가능하면 먼저 알아낼 수 있으면 좋고. 니카라과로 사람도 좀 보내야겠어.”

알폰스가 말했다.

“과민반응 하시는 거라니까.”

“중국 주석이 불법 심장 이식을 받은 사실도 교묘하게 파헤치고 상상도 못한 방법으로 증명한 사람이야.”

알폰스가 말했다.

“에이젠바이오의 태스크포스가 뭔지 알아야겠어.”

***

다행히 알폰스의 혼란은 오래 가지 않았다.

불과 나흘 후에 에이젠바이오에서 공식 발표를 했기 때문이다.

[에이젠바이오-차세대 병원, 니카라과 정부에 줄기세포 치료 지원.]

날카롭게 튀어오른 그 뉴스는 대중들의 상상을 한참 초월하는 목표를 내세우고 있었다.

[총 600명에 이르는 테크니션과 전문의로 구성된 의료 사업단 팀이 라틴 아메리카에 위치한 국가 니카라과에서 거대 의료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에이젠바이오와 차세대병원의 협력 아래 구성된 이 태스크포스 팀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현재 급증하는 길랑 바레 증후군과 지카 바이러스를 잡는 것을 목표로 하며, 이에 더해 니카라과에서 살고 있는 만성적인 난치병 환자들의 각종 유전 질환과 신경 질환을 완치시키고자 한다.]

온갖 뉴스에는 류영준 대신 경영을 맡은 CEO 김영훈이 나왔다.

“그동안 에이젠바이오와 차세대 병원은 세계 각지의 의료진과 인도적 차원에서 기술을 기꺼이 공유하고자 했으나, 유전자 외과 수술법이나 역분화 줄기세포의 뇌실하대 투입 같은 방법들은 너무나 난이도가 높아서 해외 의료진이 따라하기 어려웠습니다.”

김영훈이 말했다.

“자료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김영훈은 화면에 차트 하나를 띄웠다. 수십 개의 국가들의 방문 교수의 숫자와, 그들의 출신 병원들에 신기술이 도입된 현황, 그리고 그런 기술들을 사용할 수 있는 의료진의 수가 적혀 있었다.

“이들을 각자 점수화해서 그래프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김영훈이 화면을 넘겼다.

그래프에 나타난 점수표는 격차가 심했다.

에이젠바이오와 첫 번째 국내의 차세대 병원이 100이라면 선진국의 차세대 병원들은 30 근처였고, 저개발 국가들은 한 자릿수였다.

“위 표와 점수화된 그래프는 3개월 전 WHO에서 발표한 자료이며, 에이젠바이오의 기술 개발은 점점 가속이 붙어서 위 그래프에서 발생한 격차는 줄어들기보다는 오히려 더 벌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김영훈은 화면을 가리켰다.

“비록 세계 곳곳의 여러 병원의 명망 있는 선생님들께서 국내로 직접 들어오셔서 에이젠바이오에 방문 교수로 참여하셨고, 몇 개월씩 수련을 쌓고 돌아가시곤 했지만 그걸로 메우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가 말했다.

“류영준 대표이사님이 에이바이오를 창설하셨던 이후, 줄기세포 원천 기술과 캐스나인 원천 기술이 미래 의학의 돌파구라는 것을 모두가 알았기 때문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노벨상을 받았거나 수상 후보에 올라있던 최고의 엘리트들이 국내로 몰려들었고, 에이젠바이오에 합류해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김영훈은 겸손한 목소리로 마이크를 쥐었다.

“에이젠바이오는 당사의 지난 2년간의 놀라운 성장과 혁신이, 전 세계의 유능한 인재들의 참여 덕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이에 보답하기 위해 좀 더 효율적인 방식으로 국제 학술 교류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말했다.

“따라서 앞으로 에이젠바이오와 차세대 병원은 각 국가 정부 또는 주지사와 논의한 후, 해당 지역을 방문해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필요한 모든 장비와 의약품은 콜드체인을 이용하여 에이젠바이오가 직접 가지고 갈 것이며, 어떤 곳이든 해당 지역의 난치 환자의 80 퍼센트 이상을 완치시킬 것을 약속드립니다.”

김영훈의 이 선언은 각종 언론을 타고 세계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치료 그 자체를 영업화했다.’

이건 질병과의 전쟁에서 부르는 곳마다 찾아다니며 승리를 안겨주는 막강한 용병 집단 같은 것이다.

그 누가 이런 걸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다양한 국가들과 미리 교섭한 후 방문해서 몇 달씩 머물면서, 그 지역의 온갖 난치 질환들을 싹 정리해버리고 돌아간다는 것이다.

김영훈이 말했다.

“이번 니카라과 방문은 그 첫 번째 시험 운행이 될 겁니다.”

-한국에서는 좀 생소한 나라인데요. 왜 니카라과입니까?

기자들이 질문했다.

기다렸다는 듯 김영훈은 뼈 있는 답변을 내놓았다.

“니카라과는 이상하게 기형이나 유전적인 신경 질환을 가지고 있는 환자들의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웃한 나라인 온두라스에 비해 무려 일곱 배나 됩니다.”

김영훈이 말했다.

“보통 이렇게 유전 질환의 발병 가능성이 높은 경우 심각한 방사능 오염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니카라과 같은 경우에는 미국의 네바다 핵실험장하고도 거리가 멀고, 맨해튼 프로젝트를 진행한 뉴멕시코하고 거리가 꽤 떨어진 나라입니다. 원자력 발전소 사고 같은 게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김영훈은 에이젠바이오의 제7 연구소 마크를 화면에 띄웠다.

“에이젠바이오는 단순히 환자를 치료하는 걸 넘어서, 질병의 발생을 사전 차단하는 헬스 케어 및 질병 통제 기구의 역할도 수행합니다. 따라서 니카라과는 에이젠바이오에겐 연구적인 가치도 상당히 높기 때문입니다.”

***

“왜 니카라과예요?”

공항으로 이동하는 길에 송지현이 물었다.

“김 이사님이 발표하시는 거 들었잖아요.”

“니카라과에만 기형아나 유전 질환 환자가 높은 이유를 류 박사님은 아실 것 같아서 여쭤본 거예요.”

류영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힌트만 하나 드리자면, 그 환자들 대부분이 86년생 이전이에요. 그리고 고아들이고요. 니카라과는 냉전 때 미국의 지원을 받은 소모사 정부와 산디니스타 반군이 계속 싸웠고, 나중에는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후에 산디니스타 정부와 콘트라 반군이 계속 싸웠던 나라죠. 내전이 끊이질 않아서 고아가 많은 것도 이해는 되지만.”

류영준이 말했다.

“이상하지 않아요? 왜 유전질환자의 발생 빈도가 86년 이전에 집중돼있는지.”

“어디서 누가 몰래 핵실험 같은 거라도 했나요?”

송지현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닙니다. 서류상으로도 그 아기들이 태어난 병원들은 모두 방사능 오염의 위험성 같은 건 없는, 안전한 곳이었고.”

류영준이 말했다.

그룸 레이크 공군 기지의 발생학 연구소는 18년간 유전자 조작 아기를 만들었다.

시험에 실패해서 죽은 아기들은 어쩔 수 없지만 장애를 가지고 살아남은 이들도 있다.

그게 골칫거리다.

이런 시설에서 키울 수는 없다. 하지만 죽이기도 부담스러웠다.

냉전 종식 후에는 연구소 자체를 없앨 생각에 이판사판이었지만 그 전의 20여 년 세월 동안은 아니었다.

닥터 레프가 태어날 때만 해도 알폰스 로페어는 그녀를 엘리트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러려면 그룸 레이크 연구소는 사악한 범죄 조직이어선 안 된다.

만약 닥터 레프가 사회에 진출한 후에 연구소 스캔들이 터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는 연구 윤리란 게 없던 시절이었고, 애국심에서 이런 일들을 했다. 잘못 태어난 아이들은 고아원에서 자랐다.’ 고 얘기하는 것 과, ‘우리가 그 아기들을 모두 살해했다.’ 고 얘기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전자는 연구윤리의 미비와 냉전으로 생긴 비극이라면 후자는 영아 살해라는 강력 중범죄다.

이게 부담스러웠던 알폰스는 18년간, 생존한 연구소의 실패작들을 니카라과 내전의 역사 속에 묻었다.

그처럼 심각한 유전 질환을 가진 아기들의 경우에는 대개 산모도 죽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다.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고, 그 어떤 증거도 없다. 모든 서류가 완벽하다.

하지만 류영준은 니카라과의 유전 질환자의 숫자와 그 연령대, 그리고 고아원이라는 공통 분모를 확인하고 단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근데 송 박사님 , 그거 아십니까?”

류영준이 말했다.

“네?”

“DNA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정보 저장 장치입니다. 1그램의 DNA에는 페타 바이트 단위의 정보가 입력되죠.”

"......."

“거기다 뭔 짓을 하면 항상 증거가 남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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