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 그랜드슬램 (7) >
삑.
[동기화 모드 종료]
닥터 레프의 DNA 편지를 거의 다 읽어가던 찰나에 류영준은 미시 세계의 시야를 놓쳤다.
“무슨 일이야?”
류영준이 물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
-이건 정말 특이한 상황이군요. 라그바의 몸에서 저한테 피트니스가 흘러들어옵니다.
류영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라그바?”
-이스라엘 대통령 펠루스의 양아들 말입니다. 우리가 뇌사 상태에서 살려냈던.
“그건 나도 알아. 근데 그 애 몸에서 피트니스가 나온다고?”
-네. 정말 놀랍군요. 폴리오마바이러스로 닥터 레프가 뭘 했는지 이젠 알겠어요.
로잘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류영준이 지난 1년간 세계 곳곳을 자기 집 앞 골목처럼 싸돌아다닌 덕분에 미국, 스웨덴, 중국, 콩고,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등 다양한 국가의 고급 호텔들에는 그의 흔적들이 조금씩 남았다.
블레셋은 은밀하게 호텔 청소부들을 고용해서 류영준의 머리카락을 수집했다.
유명인의 체모나 손톱 등에 집착하는 괴짜 팬들은 수두룩하다. 호텔 청소부들 중에서 책임감 강한 사람들은 거부했지만, 어떤 이들은 뒷돈을 받고 머리카락 몇 개 챙겨주는 건 별로 나쁜 짓이 아니라 생각했다.
그렇게 수집된 머리카락들 중에는 약간의 모근 세포가 붙어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를 단세포 RNA 분석법 (Single cell RNA sequencing)으로 살펴보면 어떤 유전자들의 발현량이 높은지 알 수 있다.
닥터 레프는 유일하게 생명창조에 성공한 류영준의 비밀을, 그가 가진 DNA 단계에서부터 파헤치려 한 것이다.
-그런 식으로 일반인과 발현량이 다른 수많은 유전자 위치들을 확인했을 테고, 그 중에는 당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도덕 유전자 그룹도 있었겠죠.
로잘린이 말했다.
-그건 거대한 수수께끼 퍼즐처럼 보였을 겁니다. 그걸 다양한 조합으로 인공 세포에 넣어주거나 조작해가면서 생명창조를 시도해봤을 테지만 잘 안 됐을 거예요.
로잘린이 말했다.
“그러고보니 옛날에 휘태커 요원이 닥터 레프의 아지트를 수색했을 때, 거기에 생명창조 실험을 했던 흔적이 있었지. 그 실험에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나 했는데, 그런 아이템이 있어서 시도해본 건가?”
-네. 하지만 생명창조는 딱 한 번만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기 때문에 잘 안 됐을 겁니다. 그래서 닥터 레프는 작전을 바꾼 거예요. 저를 바이러스라고 생각하고, 제가 모든 인간을 감염시킬 수 있게끔 하려고 한 거죠.
로잘린이 말했다.
-그 폴리오마바이러스에는 다양한 유전자 라이브러리가 들어있었습니다. 닥터 레프도 십억 쌍의 DNA를 완벽하게 분석하진 못해서 오류도 많고 일관성도 없어서 저도 그게 뭘 의도한 건지 몰랐어요. 하지만 이제 생각해보니 당신의 특이한 유전자들만 여러 조합으로 모아 놓은 것이었네요.
로잘린이 말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 몇 개는 당신의 도덕성 유전자와 약간의 염기서열이 겹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이러스가 깊이 침투하진 못했지만, 라그바의 경우에는 중추신경까지 침투했죠. 기억나요? 그리고 죽어버린 뇌를 살려내면서 연수에 바이러스의 도덕성 DNA들이 자리잡은 거예요.
아풀라 시에서 정전이 일어났을 때 치료용 줄기세포에는 약간의 박테리아 오염이 생겼다.
그걸 제거하고 뇌간 회복 시술을 하면서 동기화 모드로 관찰했었다. 그리고 그때 라그바의 뇌실하대로 함께 들어간 로잘린 세포 몇 개가 그곳에 남은 것이다.
-세포 두세개 쯤이야 당신이 없으니 곧 죽을 줄 알았는데, 거기서 도덕성 유전자를 붙잡고 살아남았어요. 피트니스를 흡수하면서 저한테 보내고 있습니다.
로잘린이 말했다.
“잠깐만. 그럼 지금 그 애가 내가 보는 동기화모드나 메시지창을 본다는 거야?”
-그건 아닐걸요.
로잘린이 고개를 저었다.
-제 왕국에서 당신은 왕이고, 당신의 몸은 궁전이에요. 라그바는 뭐라고 해야하나…….
로잘린이 적당한 비유 대상을 찾다가 말했다.
-외국에 설립한 대사관 정도?
"......."
-아니면 작은 도시 국가에다 심어놓은 스파이? 그런 느낌이죠.
로잘린이 말했다.
-그 애는 생명창조 위업을 달성한 인물이 아니니까요. 다만 거기서 피트니스만 조금씩 흘러들어오는 거예요.
“라그바의 몸에 문제는 없는 거지?”
-전부 제 통제 아래에 있는 세포들이니까요. 제가 해치려고 하지 않는 이상 아무 문제 없습니다.
“……펠루스 대통령한테 전화를 해봐야겠어.”
류영준은 전화를 들었다.
-무슨 소릴 하시려고요?
“라그바가 얼마나 나았는지 물어보려고. 그리고……
류영준이 말했다.
“방금 얘기하다 생각난 건데 펠루스 대통령은 본래 미국의 금융가 출신이거든. 닥터 레프 얘길 다른 시각에서 재확인해봐야겠어.”
류영준은 펠루스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류 박사님?
“안녕하세요? 아드님은 좀 어떠십니까?”
-좀 전에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됐습니다! 제가 지금 옆에서 애를 보다가 잠깐 전화 받으러 복도로 나온 겁니다.
“다행이군요. 혹시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다거나 그런 건 없나요?”
류영준이 말했다.
-전부 다 좋습니다. 아주 안정적이에요. 전부 류 박사님 덕분입니다.
“대통령님, 미국에서 금융가에 계시다가 이스라엘로 돌아가서 정치를 시작하신 거죠?”
-그렇습니다.
“그럼 혹시 로페어 가문에 대해서도 좀 아시나요? 미국의 유서 깊은 금융가 집안이라고 하던데.
-금융가 집안이 아니더라도 워낙 유명한 가문이라 많은 사람들이 알죠. 게다가 본래 유대인 집안입니다.
펠루스가 말했다.
“그래요?”
-네. 그쪽 집안 사람들하고는 자주 만났기 때문에, 다행히 제가 좀 아는 편입니다.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말씀드리겠습니다. 궁금하신 게 있나요?
“알폰스 로페어라는 인물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
송지현은 워싱턴 D.C.에 있는 고다드 우주비행 센터의 한 미팅룸에서 알폰스 로페어를 만났다. 제임스 홀드런이 주선해준 자리였다.
그는 큰 키에 흰 수염을 단정하게 깎고, 슈트 단추를 다 채우고 다니는 깔끔한 노신사였다.
“반갑습니다. 송지현 박사.”
그는 송지현과 악수를 나누었다.
“난 식사 후에 미팅룸에 앉아서 떠드는 것보다 움직이는 걸 좋아합니다. 우리 잠깐 걸을까요?”
“네, 좋아요.”
송지현은 알폰스를 따라 미팅룸 밖으로 나갔다. 알폰스는 그녀를 데리고 고다드 우주비행 센터 시설을 한 바퀴 돌았다.
“케네디 우주센터에 계신다고 들었는데 여기로 부르셔서 좀 놀랐습니다.”
송지현이 말했다.
“케네디 센터는 플로리다에 있어요. 바쁘실 텐데 굳이 거기까지 이동하게 할 수는 없죠. 저는 마침 고다드 센터에 볼일이 있었고요. 제임스 홀드런 국장이 미팅을 주선하기에 제가 직접 이 일을 받아냈습니다.”
알폰스가 말했다.
“근데 류영준 박사님하고 같이 미팅을 하게 될 줄 알았는데, 그 분은 안 계시는군요?”
“이 일은 셀리제너에서 진행하는 일입니다. 류 박사님께서는 홀드런 국장님이나 미국 암센터 등에 줄이 많으시니 책임자를 만날 수 있게 다리만 놔주신 거죠.”
“그랬군요.”
알폰스의 목소리에 약간의 아쉬움이 묻어났다.
사실 그는 류영준을 만나기 위해 직접 자처해서 워싱턴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이사야 프랭클린에 대해 류영준이 얼마나 아는지 확인하기 위해.
솔직히 말해서 그룸 레이크 공군 기지에서 유전자 조작으로 이사야 프랭클린이 태어났다는 사실까지 류영준이 알 거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하지만 그냥 무시하기엔 류영준은 이사야 프랭클린과 접점이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혹시 뭔가 알고 있다면 미리 대비를 해야했다. 중국 주석한테도 쫄지 않고 덤벼드는 그 사나운 성질을 생각하면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나사 시설에 들어오신 소감은 어떻습니까?”
알폰스가 송지현에게 말했다.
“확실히 명성에 걸맞게 규모가 크네요.”
“나사는 단순히 우주 개발 연구소가 아니라 정보 기관이기도 하고, 미국의 과학력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기관이기도 하죠.”
알폰스가 말했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소비에트 연방이 아직 건재했고, 미국은 그들하고 직접 충돌하는 대신 우주 개발을 통해서 우리의 과학이 이 정도로 우월하다는 걸 보여주면서 대리전을 치렀으니까요.”
알폰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싸움에서 끝내 승리했습니다. 소련은 미르호라는 초거대 우주 정거장을 띄우기까지 했지만 결국 자충수가 되었죠. 해체 후에는 유지하지 못해서 폐기하기 전까진 우리와 공유하게 되었답니다.”
“그랬군요.”
“나사는 이제 영광과 평화의 기관입니다. 더 이상 경쟁자가 없는 최강의 과학 기관. 그리고 냉전 이후 과학적인 화합의 상징이요.”
알폰스가 말했다.
“그리고 노벨상 수상 후보인 송 박사님 덕분에 앞으로는 소련의 잔해까지 치워버릴 수 있겠군요.”
“체르노빌이요?”
“네. 그건 비틀거리던 소련이 싸질러놓른 거대한 똥덩어리 같은 거였죠. 동시에 소련의 숨을 끊어버린 최악의 재해였습니다.”
알폰스가 말했다.
“송 박사님은 어려서 모르시겠지만, 소련이라는 강대국은 만성적인 식량 부족에 시달리던 나라였어요. 공산주의 국가들의 업무 효율이라는 게 뭐 그렇죠. 게다가 추위로 얼어붙은 그 러시아 땅에서 경작은 아주 보잘 것 없는 수준 아니었겠습니까?”
“그래서 중동이나 아프리카에 무기를 많이 팔고 식량을 사갔다고 들었어요.”
“그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그 양은 별로 대단치 않았고, 소련의 식량 생산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건 지금 우크라이나 지역이었습니다. 그때는 소비에트 연방의 일부였죠. 그 광활한 토지 대부분이 농사 짓기 최적인 비옥한 땅이었거든요.”
알폰스가 말했다.
“그리고 체르노빌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
“상상이 가십니까? 무려 30만 제곱 킬로미터 면적이 오염됐습니다. 그 지역 식량을 전부 폐기하고 소 10만 마리를 폐처분했죠. 그 피해는 진짜로 고르바초프의 머리가 아찔할 정도였을 겁니다.”
알폰스가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도 소련은 그 땅을 절대 그냥 내다버릴 수가 없었어요. 거기서 농사를 못 지으면 끝장이니까. 40만 명을 동원해서 수백억 루블을 써서 제염 작업을 했죠. 거기서 예산을 다 쓴겁니다.”
설마 그렇다고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그 막강한 적이 무너질까, 많은 전문가들도 의견이 갈렸지만 고작 다섯 살 나이에 그걸 예측한 아이도 있었다.
알폰스는 이사야 프랭클린을 떠올리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송지현은 약간 따분한 기분이었다.
첫 만남에 냉전이니 소련이니 떠들어대는 이 노인이 조금 답답했다.
진성 과학자인 송지현은 연구에 대한 얘기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연구를 하다보면, 그리고 역사를 읽다보면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오늘 만남도 그런 것 같습니다.”
알폰스가 말했다.
“송 박사님, 우리 같이 체르노빌이 있었던 프리피야트 시나, 후쿠시마의 방사능을 걷어내고 사람 살기 좋은 곳으로 되살려보죠.”
송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요. 우주 정거장에서 미생물 샘플을 제공해주시는 건 언제쯤이 될까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곳에서 작업하고 있는 우주비행사들 중에 다음 주에 들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한테 부탁하면 쉽게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정말요?”
“네. 이 연구의 지분을 나사와 어떻게 공유할지는 그쪽 대표와 같이 미팅하면서 차차 공유하기로 하고요. 에이젠바이오도 연구에 참여합니까?”
“아닐 거예요.”
“아쉽군요. 근데 전화 오는 거 아닌가요?”
알폰스가 송지현의 가방을 가리켰다. 지잉하는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그렇네요. 류 박사님이에요.”
송지현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그리고 그녀는 약간 당혹스러운 듯 눈을 깜빡이며 알폰스를 쳐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알폰스가 물었다.
“아뇨 잠깐만요."
송지현은 알폰스와 조금 거리를 두고 몸을 돌린 채 통화를 이어갔다.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알폰스는 직감적으로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걸 깨달았다.
-홀드런 국장님이 이번 프로젝트를 맡은 게 알폰스 로페어라고 하더군요.
“맞아요.”
-그럼 그 프로젝트 불발될 겁니다. 괜히 힘 빼지 마시고 돌아오세요. 로페어한테는 그냥 대충 둘러대시고요. 방사능을 제거하는 건 저한테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그......."
-송 박사님을 걱정해서 말씀드린 거예요. 주선자가 저니까 책임도 느껴지고.
“아니 근데 불발된다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로페어한테 문제가 좀 있거든요.
"......."
-아직 아는 사람은 몇 없습니다. 근데 제가 볼 땐 거의 정확한 정보인 것 같고, 저는 그냥 넘어갈 생각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