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8화. < 그랜드슬램 (6) > (124/301)

268화.  < 그랜드슬램 (6) >

그룸 레이크 공군 기지는 미국 소유였지만 위치는 중앙아메리카의 니카라과에 있었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이어지면서 니카라과의 소모사 정부와, 공산주의의 산디니스타 반군은 분쟁을 계속 빚었다.

치안이 불안정한 이 나라에 자리 잡은 이 공군 기지에는 놀라운 비밀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초고도로 발달한 유전체학 연구 시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1986년 여름.

연구소 내의 발생학 연구실에서 그 아기는 첫울음을 울었다.

연구소장 알폰스 로페어는 지난 18년간의 엄청난 고생길이 드디어 끝났다는 걸 깨달았다.

가업이나 다름없는 금융을 배우는 대신 생물학에 뛰어든 이 괴짜를 로페어 가문의 형님들과 아버지는 한심하게 여겼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다.

“아기의 상태는 어때?”

알폰스가 보고를 위해 들어온 발생학 연구실의 카를로스 박사에게 물었다.

“건강한 듯 보입니다.”

“엘시 박사가 이름을 뭐라고 붙였나?”

“이사야입니다.”

“하하!”

알폰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유대인 아니랄까봐.”

그가 말했다.

“하지만 틀린 이름은 아니군. 그 애는 냉전에 지친 세계 인류를 구원할 예언자야.”

최초의 유전자 조작 인간.

지능과 관련된 유전자 수백, 수천 개를 뜯어고치고도 멀쩡하게 태어나는 데 성공한 기적의 아이.

“다들 비웃었지만 나는 결국 성공했어. 그 애는 세상을 치유하고 냉전을 종식시킬 지도자야. 예술가든 과학자든 전부 가능하겠지만 나는 미래 인류로, 그리고 혁명가로 키울 생각이야.”

알폰스가 말했다.

“안내해. 그 아기를 한번 봐야겠어.”

그는 연구소 내의 산모병동으로 이동했다.

놀랍게도 연구소 부지 내의 이 병동에는 아예 스윙체어 등이 갖추어진 분만실과 수술실, 산후조리실은 물론이고, 초음파 검사를 비롯한 영상 진단과 핵형 분석이 가능한 태아 검사실, 수유실, 유아실 등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산모의 입원실은 무려 120명을 동시 수용할 수 있는 크기였으며, 수많은 의료진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오갔다.

이 거대한 스케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8년이라는 시간은 엄청나게 길지만, 그래도 유전자 조작 아기를 태어나게 하기에 충분하지는 않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닥터 레프는 유전자 조작된 첫 아기가 아니다. 첫 ‘성공작’일 뿐.

이곳에는 무수히 많은 실패작들이 있었다.

“좀 떨리는데.”

알폰스 로페어는 신생아 인큐베이터 앞으로 이동했다가 움찔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벤자민 선생.”

그가 인큐베이터 한쪽을 가리켰다.

“내가 생명을 경시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굳이 조국의 미래를 언제 죽을지 모르는 네가티브 데이터와 함께 둘 필요가 있나?”

“죄송합니다.”

닥터 벤자민은 얼른 인큐베이터에 다가와서 갓난아기 셋을 품에 안았다.

그 중 하나는 이미 호흡이 거의 끊어진 상태였고, 하나는 선천적으로 간과 위장이 기형이었으며, 하나는 지나친 조산이었다.

아마 셋 다 살긴 글렀다.

“확실히 성공한 샘플은 피부에 도는 생기부터 다르군.”

알폰스는 이사야 프랭클린의 뺨을 어루만졌다.

“소장님!”

누군가 옆에서 불쑥 튀어나와 알폰스의 손목을 쳐내고 앞에 끼어들었다.

“제 아깁니다. 제 허락없이 함부로 만지시면 안 되죠.”

출산으로 몹시 수척해진 엘시가 말했다.

“흠. 아무래도 엘시 박사님은 임상 동의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실 필요가 있겠군요. 아시다시피 이 아기는.”

알폰스가 아기를 가리켰다.

“연구소의 자산입니다.”

“압니다. 하지만 그 전에 제 딸이에요.”

“아니요. 당신 딸이기 전에 우리의 자산이요.”

알폰스가 지적했다.

“그리고 딸이라니. 그런 비과학적인 표현을 쓰시는 걸 믿을 수가 없군요. 유전자 3,000 군데를 조작하고 얼굴도 모르는 남자의 정자로 수정한, 엘시 박사 당신의 세포 핵으로 치환한 이 아기가 당신 딸이라고요?”

알폰스는 코웃음을 쳤다.

“이미 생물학적으로 ‘딸’이라는 기존의 정의랑 너무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제 배로 낳은 아깁니다.”

“하하. 감정적으로 호소한다 해도 틀렸습니다. 당신이 모성을 주장할 만한 아기라면 이런 데서 동의서 쓰고 낳지를 않았겠지.”

알폰스가 말했다.

“우리 시설에서 애 낳는 여자들을 보세요. 다 흑인이거나, 거지거나, 집에서 쫓겨난 여자거나, 약에 찌들었거나 합니다.”

"......."

“아닙니까? 다들 돈 없고 갈 데 없어서 여기서 ‘출산능력’을 임상시험에 파는 것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의 ‘합법적 사업’이 약간의 윤리적인 문제를 동반할 수도 있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알폰스가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설이 허용된 이유는 인류를 진보시키는 게 미국의 시대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알폰스의 목소리에 절박함이 묻어났다.

“엘시.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고, 우리는 모스크바를 타격할 수 있는 미사일 발사대를 서독에 배치했어요. 우리 하원 의원이 탄 비행기가 소련 서부에서 격추당해서 미국인 200여 명이 사망한 게 불과 3년 전이요. 소련의 핵무기는 지난 달에 무려 40,000개를 넘었습니다. 우주 경쟁에선 미르 호라는 미친 우주 정거장의 첫 모듈을 띄웠고요. 이제 이 냉전은 곱게 끝나지 못한다는 게 내 생각이요.”

"......."

“우리 모두가 곧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대재앙을 대비해서 미래 인류 계획을 이곳에서 디자인하고 있는 겁니다.”

알폰스가 말했다.

“그걸 위해 모두가 양심이 쑤시는 걸 참고 이곳에서 피를 묻혀가면서 일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당신은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헛된 야망 때문에 이 천재 아기를 탄생시킨 건데, 감히 내 앞에서 모성을 무기 삼아 이 아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겠다고?”

알폰스는 비릿한 비웃음을 지었다.

“뻔뻔한 것도 정도껏 하십시오. 이 아기는 이제부터 그룸 레이크 공군 기지의 유전체학 연구소의 자산입니다. 직무발명된 아이디어의 특허가 사측에 귀속되듯이, 당신이 만든 이 성과는 내 거란 말이에요.”

그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잡아먹기라도 한답니까? 멋지게 키워줄 겁니다. 우리 집안은 엘리트 양성에 도가 튼 곳이거든.”

***

"스페이드랑 왜 싸웠니?"

20대 후반의 젊은 박사 다이애나가 물었다.

“그 애는 멍청이에요.”

“생후 36개월에 미적분을 푸는 앤데 ……?”

“그건 나도 했어요. 그 정도는 해야지. 어떤 유전자를 가졌는데.”

이사야 프랭클린이 볼멘 소리로 말했다.

“왜 싸운 건지 언니한테만 슬쩍 알려줄래?”

“걔는 알폰스 박사를 좋아해요. 자기 아빠인 줄 알아요. 그게 하도 답답해서 한 마디 했죠. 곧 그 사람이 우릴 다 죽일 거라고. 그랬더니 소리 꽥꽥 지르면서 덤비던데. 쬐그만 게.”

이사야가 말했다.

“너희를 죽일 거라고 했다고?”

“네. 발생학 연구실에서 86년 이후에 태어난 나랑 내 동생들, 스페이드는 물론이고 다이애나가 맨날 예쁘다고 뽀뽀해대는 클럽이나 레드하트도 다 죽을 거예요.”

생후 49개월, 이사야 프랭클린은 교사들을 당황시킬 때가 종종 있었지만 이번엔 유별났다.

“뭐, 무슨 소리야?”

다이애나의 말이 꼬이는 걸 보고 이사야 프랭클린은 웃음을 터뜨렸다.

“다이애나는 거짓말을 잘 못해요. 다이애나도 들었죠? 날 폐기하라는 얘기.”

다이애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모르는 얘기야. 정말로. 언니한테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알려줄래?”

“소련은 알아서 자멸할 나라예요.”

이사야가 말했다.

“제가 태어나던 86년까지는 미국과 소련이 냉전을 계속했죠. 군비 감축을 위해서 헤이건과 고르바초프가 만났을 때도 협상이 결렬됐고요. 그래서 알폰스는 제가 태어났을 때도 앞으로 계속 사이가 나빠질 거라 믿었겠죠. 하지만 봐요.”

이사야는 신문들을 앞에 늘어놓았다.

“87년에 군비 감축 협상에 성공했어요. 그리고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고 있죠.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

이사야가 말했다.

“체르노빌 원전 폭발. 이 사고는 역대급이에요. 제가 태어날 때 쯤이죠? 미국은 피해 규모를 부풀리기 바쁘고 소련은 감추기 바쁜데, 제 생각엔 저 폭발 사고의 피해 규모는 그 이상이에요. 그리고 군비 증강에 엄청난 돈을 연이어 투자하고 계획 경제에 실패해온 소련은 그걸 감당할 재력이 없어요. 예산을 다 썼을걸요.”

“그, 그러니?”

“소련은 무너져요. 끝났어요. 그리고 저도 더 이상 필요 없어지겠죠. 가장 큰 증거는 바로 알폰스가 요즘 우주생물학을 빌미로 나사(NASA)에서 치근댄다는 거예요. 이 연구소는 글렀다 싶어서 다른 길을 찾는 거죠.”

이사야가 말했다.

“패닉이 지나고 광기가 가시면 오줌 지린 게 부끄러워지는 법이에요. 이제 미국 정부는 제 존재를 창피해하고 감추려고 할거예요.”

“에이. 아니야. 안 그래.”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서 여기저기서 연구윤리 논란이 꽤 핫해요. 근데 보세요. 이 연구실에서 죽어나간 ‘실패작’이 지난 18년 동안 무려 1,200명이에요. 부작용으로 사망한 무연고 여성이 280여 명이고.”

이사야가 말했다.

“너 그런 건 또 어디서……."

“내가 다이애나보다 이 연구실에 더 오래 있었는데요. 여기저기서 들었죠.”

이사야 프랭클린이 말했다.

“그리고 이곳의 여성 연구자들은 모두 ‘난자 기증’을 강요받았어요. 기억나요? 반 강제로 동의서를 받고 호르몬 주사를 놓은 다음 난자를 뽑아다 수정란 발생 실험을 했잖아요. 다이애나도 하지 않았어요?”

"......."

“알폰스는 가능한 모든 수를 써서 증거를 없애고 사람들 입을 틀어막을 텐데, 저랑 다른 애들 같은 경우는 존재 자체가 증거물이니 살려두지 않겠죠.”

***

1991년 12월의 마지막 날.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됐다.

냉전은 끝났다.

그건 그룸 레이크 공군 기지 내에서는 긴급 신호 중 하나였다.

연구소의 보안을 담당하는 샐로나 중장은 라디오로 뉴스를 듣자마자 알폰스 로페어에게 전화를 걸었다.

“냉전이 끝났습니다. 연구 시설을 정리할까요?”

-네. 진행해주세요.

알폰스의 답변은 건조했다.

샐로나는 자신이 지옥에 갈 거라고 생각했다.

공군 기지 군인들의 움직임은 신속하고 정확했다.

대외적인 발표에서 연구소를 습격한 범인들은, 베올리타 차모르 대통령의 집권에 반대하는 산디니스타 군인들이었다.

그들이 소비에트 연맹 해체에 자극을 받아, 다시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그룸 레이크 기지를 습격했다는 것이다.

그럴싸한 얘기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천재가 어쩌고저쩌고 해도 이사야 프랭클린은 생후 5년이 겨우 지난 어린이였다.

총성과 피비린내. 매캐한 연기와 싸이렌.

죽음을 예상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해도 이 광경을 직접 목격하는 것은 얘기가 다르다.

이사야 프랭클린은 다리가 굳었다.

“스페이드……."

히스패닉계 외모의 소년이 총상을 입고 식당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다른 애들도 다 죽었을 게 뻔하다.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이나 연구원들 중에서도 미리 ‘연락 받지 못해’ 죽은 사람들이 있다.

통제할 입을 줄이기 위해서 선별되어 탈락한 사람들일 것이다.

시체가 사방에 굴러다녔다.

이사야는 자신의 방 안에 없었기 때문에 한번 화를 피했지만, 이런 행운은 정말 딱 한번 뿐이었다.

“다이아몬드를 찾았다.”

식당가로 내려오며 연구원과 잡부, 임상 대리모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한 군인 하나가 무전을 치며 총을 들었다.

그가 이사야 프랭클린을 쏘기 직전이었다. 반대편에서 총성과 함께 총알 한 발이 날아와 그의 미간을 뚫었다.

“이사야! 이리 와라!”

엘시 박사는 총을 집어넣으며 이사야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는 대피 명령을 받았지만 연구소 내로 다시 돌아온 사람이다.

그리고 그게 비정한 어머니로서 자신이 한 일 중 유일하게 잘한 일이라고 지금도 자부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사야 프랭클린을 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연구소 후문은 아직 폐쇄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이애나가 그곳에 차를 준비해두겠다고 했다.

“후문까지만 가면 돼. 눈 꼭 감고 있어.”

엘시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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