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 그랜드슬램 (5) >
-너 로페어 가문에 대해서 알아봐달라고 비서실에 지시했다며?
박주혁이 말했다.
새벽에 날아온 국제 전화였다.
“그래.”
잠들기 직전에 침대에 누워있던 류영준이 답했다.
-목소리에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
“별 거 아냐.”
류영준은 닥터 레프를 만나는 데 실패했다.
-딱 봐도 무슨 일 있구만.
“CIA에서 면담을 거절했어.”
류영준이 말했다.
-면담을 거절하다니?
“닥터 레프를 만나는 것 말이야. 자기들 쪽에 포로의 전담 의사가 있으니 신경쓰지 말래."
-그럼 그냥 신경 꺼버려.
"......."
닥터 레프가 앓고 있는 병은 골수이형성증후군.
골수에서 생성하는 혈구세포의 형태가 비정상적일 뿐만 아니라, 생산 효율 자체도 낮아서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이 모두 낮아지는 범혈구감소증이 나타나는 케이스다.
질병 자체가 현재로써는 골수이식밖에 방법이 없는 꽤 까다로운 병이다.
닥터 레프는 덱시타빈 (Decitabine) 이라는 치료제를 복용하고 있었다.
비정상적인 혈구 생성을 억제하는 치료제 중 하나다. 완치시킬 수는 없고 연명 치료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제 슬슬 한계다.
에이젠바이오의 줄기세포 치료법이라면 적합한 골수 공여자를 찾지 않더라도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닥터 레프는 아직까지 이 방법을 쓰지 않았다.
류영준이 만든 기술을 흉내내는 것 정도는 혼자서도 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인데도 말이다.
‘그 방법으로 안 되는 거지.’
닥터 레프의 골수이형성증후군은 일반적인 환자들과 발병 기작이 다르다.
그녀는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사람이고, 출생 직후부터 카운트하면 류영준 또래지만 세포생물학적인 나이는 모체인 엘시와 동등하다.
그 간극이 발생 과정에 치명적인 오류를 만들었을 것이다.
사우디에서는 너무 경황이 없는 가운데 동기화 모드로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를 치료하는 데 성공하려면 직접 동기화 모드를 써서 관찰해야 한다.
하지만 면담이 안 되는 것이다.
“미국 정부에서는 그 여자를 그냥 죽일 생각이야.”
류영준이 말했다.
“현대 의학으로, 의사들만의 힘으로 치료하는 건 불가능해. 다른 신기술이 필요할 거야. 그런데 미리 예정돼있었던 내 면담을 취소시키는 것은 그 여자가 회복되는 것 자체를 원치 않는다는 거지.”
-그게 로페어 가문이야?
박주혁이 물었다.
“그냥 의심만 하는 거야. 어떨지 몰라. 근데 비서실에 맡긴 일을 어떻게 네가 아냐?”
-나한테 얘기해준 건 아니고, 그 집안에서 벌였던 소송 몇 개에 대해서 자문을 구하더라고. 딱 감이 왔지. 류영준이다. 류영준이 얘네랑 싸울 작정이다.
“아직 모르는 일이야.”
-로페어는 건드리지 마.
박주혁이 말했다.
“건드리지 말라고?”
-너무 큰 적이야. 그냥 한 가문이지만 미국에서 정계, 재계에 미치는 입김이 너무 강해.
“나는 중국 주석하고도 싸웠어.”
-그게 문제야 미친놈아! 너는 주석을 끌어내렸던 사람이야.
박주혁이 말했다.
-이제 다른 거대 권력자들이 너랑 신경전이 생기면 얼마나 긴장하고 까칠하게 변할지 생각해봐. 중국 정권을 교체시킨 사람인데 나한테 발톱을 드러낸다? 너처럼 윤리 광신자 같은 애들이나 정정당당하게 사실에 기반해서 잘잘못을 가리고 처벌 받자고 하는 거지, 대부분은 널 죽이는 것만 생각할걸.
"......."
-로페어 가문에 대해서 내가 아는 걸 알려줄게. 그 사람들은 본래 암스테르담 은행에 뿌리를 두었던 금융가 집안이야.
박주혁이 말했다.
정부에서 설립한 최초의 은행인 암스테르담 은행을 운영하던 마이어 로페어의 자손들은 윌리엄3세와 함께 영국으로 네덜란드식 금융을 수출했다.
덕분에 영국 정부는 금융의 신뢰도가 크게 높아져서 매우 저금리로 많은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고, 그 자금은 대형 전열함들을 건조하고 유지할 수 있는 국가의 기반 체력이 됐다.
그리고 그 체력이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게 해준 숨은 공신이었다.
이 과정에서 로페어 가문이 엄청난 부와 명예를 축적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로페어 가문은 동인도 회사를 펀딩했고, 오스트리아, 프랑크푸르트, 스웨덴 등에 수많은 은행들을 만들어나갔다.
그들은 미국의 독립 운동과 파나마 운하 건설을 지원해주었고 미국으로 진출했다.
1, 2차 세계대전 때는 가문의 기반을 아예 미국으로 옮기기에 이르렀고, 석유왕 록펠러, 철강왕 카네기, 화학 회사 듀폰의 창립자인 뒤풍 등의 미국 초대 거부들의 사업을 지원했다.
“뭐야 대체? 손을 안 댄 게 없네?”
류영준이 황당한 듯 물었다.
-지금 너랑 비슷하지?
"......."
-기득권의 고인물 중에서도 고인물이야. 단순히 돈만 많이 모은 게 아니라 인적 네트워크 측면에서도 누가 따라잡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권력적이야. 여론 몰이로 대통령도 만들었다 치웠다 할 수 있을걸. ‘왕’이 없는 미국에서 왕족이라 불릴 만한 사람들이라고.
박주혁이 말했다.
-최근에는 빌게이츠라든지, 마크 주커버그라든지 하는 신흥 거부들이 많이 떠오르고 IT 산업과 생물학이 급발전했잖아? 그래도 상대가 안 돼. 그들은 다 개인이지만, 이쪽은 금융가를 토대로 여러 굵직한 사업들을 쥐고 있는 집단이야.
“혹시 그 사람들이 생물학에도 진입한 적 있나?”
-왜 없겠어? 슈마틱스의 최대 주주였던 금융사가 아마 로페어 소유일 거야.
“…….. 그럼 혹시 그 사람들이 그룸 레이크 공군 기지의 발생학 연구실이랑 관련 있는지 알 수 있어?”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하긴 그렇지.”
-근데 그 시설은 왜?
“닥터 레프가 거기서 실험적으로 태어났어. 그리고 그 연구를 지휘한다고 관련됐던 사람들이 미국에서 지금 고위직에 있는 요인들이야. 내 감이지만 그 중에는 로페어 가문 사람들도 있을 것 같고, 그래서 닥터 레프를 그냥 죽여 없애버리려는 것 같아.”
-그럼 그냥 죽게 둬! 테러범 살리려고 그런 괴물들하고 굳이 충돌할 필요 없잖아.
“그게…… 그렇긴 한데……."
-네가 인도의 카마티푸라, 중국의 신장, 그리고 이번엔 중동의 분쟁 지역까지 크든 작든 비윤리를 척결하고 문제를 해결해온 건 알아.
하지만 이번 건 달라. 이런 이상한 데서 그랜드슬램 탐내지 말라고. 제발.
똑똑똑!
호텔 방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잠깐만. 이따 다시 통화해.”
류영준은 전화를 끊고 호텔 문을 열었다.
마스크와 안경을 쓴 남자가 모자를 눌러쓰고 서있었다.
CIA의 로버트였다.
슈마틱스를 잡을 때부터 이런저런 일들에서 류영준과 호흡을 맞추며, 가장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파트너다.
그는 류영준에게 인사하고는 방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류 박사님께 사과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당신도 저한테 닥터 레프는 신경 끄고 귀국하라고 하실 건가요?”
류영준이 물었다.
"......."
로버트는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앉았다.
“아닙니다. 저는 류 박사님 도움을 청하려고 합니다.”
“도움이요?”
“이사야 프랭클린은 지금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로버트가 말했다.
“담당 의사가 시한부 선고를 했어요. 앞으로 한 달 이상 버티지 못할 거라고 했습니다.”
“저도 그럴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현대 의학으로 치료하기 힘든 케이스일 것 같아서 제가 환자 샘플을 받아보고 줄기세포 치료법으로 맞춤형 시술 전략을 짜려고 했던 겁니다. 근데 여기까지 왔는데 만나질 못했죠."
“죄송합니다.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류 박사님. 제가 볼 때는 이사야 프랭클린은 예상하신 것보다 더 빨리 죽을 수도 있을 듯합니다.”
“어째서요?”
“심문 방법이 좀 과격하거든요.”
“고문을 한다는 겁니까?”
“제 입으로 그 방법을 얘기할 순 없습니다. 다만 이대로 가면 어떤 정보도 알아내지 못하고 죽을 게 분명합니다. 독하게 입을 다물고 있으니까요. 제 경험상 저런 경우는 심문을 과격하게 한다고 정보가 나오지 않습니다.”
“다른 분들도 그걸 알 텐데 왜 그런 방법을 쓰죠?”
“저도 그걸 모르겠습니다.”
“모르시는 건가요? 아니면 말하실 수 없는 건가요?”
"......."
로버트는 답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예측은 하고 계신 거군요. 이사야 프랭클린이 차라리 죽길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든가.”
“아무것도 확실한 건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나요?”
“치료제를 주십시오. 일단 시간이라도 벌어야 합니다. 이사야 프랭클린의 수명을 연장시켜놓으면 다음 기회가 생길 테니까요.”
로버트가 말했다.
“그럼 최소한 이사야 프랭클린의 혈액 샘플이 필요합니다.”
“사실 그러실 것 같아서 이미 가지고 왔습니다.”
“정말요?”
“네. 그리고 이사야 프랭클린의 피를 뽑을 때 제가 이 얘길 했더니, 아무리 천재라도 자기가 복용하던 약의 샘플이 있어야 치료제를 만들기 수월할 거라더군요. 그래서 이사야 프랭클린이 복용하던 약도 소량 가지고 왔습니다.”
류영준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 약의 성분을 혹시 분석한 자료 같은 것도 있습니까?”
사실 그런 건 필요 없다.
하지만 류영준이 치료제를 만드는 데는 환자가 기존에 복용하던 약도 필요 없다.
그리고 그 사실을 닥터 레프도 알고 있었다.
즉, 이 약을 보낸 것은 류영준에게 전달하는 어떤 신호의 일종인 셈이다.
아무리 로버트가 상부의 명령을 어기고 이사야 프랭클린의 목숨을 연장시키려 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심문과 정보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당연히 닥터 레프가 류영준에게 몰래 전달하는 정보의 정체도 모른체 여기까지 날라주는 전서구 역할을 해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 약품은 CIA에서 외부로 나가도 안전하다고 판단된 물질이다.
“성분 분석을 당연히 했죠. 저희 본부 내부로 들어오고 나가는 약물 종류는 전부 성분 분석이 진행됩니다.”
로버트가 말했다.
“이 약품은 이사야 프랭클린이 직접 만든 약이고, 덱시타빈이라는 물질이라고 합니다. 여기, 분석팀에서 성분 분석을 진행한 데이터 시트입니다.”
로버트가 서류를 내밀었다.
류영준은 그걸 읽다가 재밌는 사실을 알아냈다.
“별로 순도가 높지 않네요?”
“이사야 프랭클린이 지저분한 실험실에서 혼자 만들어낸 약입니다. 그래서 불순물들이 섞여 있다고 하는데, 정체는 정확히 모르겠다는군요. 워낙 다양한 종류의 불순물들이 매우 미량씩 들어가서 개별 분석이 안 된답니다.”
"......."
류영준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이사야 프랭클린, 정말 대단한 여자다.
“감사합니다.”
로버트가 나간 후, 류영준은 혈액 샘플을 냉장 보관하고 이사야 프랭클린의 치료제를 동기화 모드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 안엔 DNA가 있었다.
엄청나게 희석되어, 다른 불순물들 틈에 섞이면 실험적으로 관찰되지 않을 정도의 극미량의 DNA.
아마 성분분석 팀은 너무 적은 양이라 DNA의 존재조차 몰랐을 것이고, 다른 불순물들이 많이 섞여있어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보통은 문제가 되지 않아야 정상이다.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적은 개수의 DNA는 정확히 분석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로잘린은 그걸 할 수 있다.
그리고 천연계의 가장 안전한 분자 구조로써 DNA는 생명의 정보를 담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경우 ‘알파벳’을 담을 수도 있다.
DNA는 아데닌 (A), 구아닌 (G), 싸이토신 (C), 티민 (T)이라고 불리는 네 개의 분자들이 진주목걸이처럼 주렁주렁 연결된 구조를 가진다.
이들을 세 개씩 묶어서 하나의 알파벳을 할당하면 문장을 암호화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만약 ACT가 연속으로 나온다면 알파벳 A.
CAT가 나온다면 알파벳 B.
TCA는 알파벳 C, TAC는 D와 같은 식이다.
이걸 이용해서 DNA를 정보 저장 장치로 개발하려는 시도가 20세기 중엽부터 있었다.
류영준은 닥터 레프의 치료제 캡슐 한 개 내에 들어있는 1개 분자의 거대한 DNA의 첫줄을 읽었다.
TACCTAACT CACAG CTACCACACG CACGACGAT
DearDr.Ryu
그건 죽음을 앞둔 이사야 프랭클린의 일생과 중대한 고발이 담긴 메시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