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 그랜드슬램 (3) >
조현병이 한참이던 때, 송종호는 현실과 망상을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이건 조현병 환자를 치료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다.
환자 본인이 망상을 현실로 믿기 때문에 자신이 환상이나 환청을 겪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죽했으면 ‘조현병의 치료는 자신에게 병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게 절반’이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하지만 도파민 수용체 억제제 약물을 계속 복용하면 어느 정도 병증이 잡혀서 환상과 현실을 구분하게 된다.
그리고 완치된 케이스인 송종호에게는 이제 망상을 겪던 시절의 환상들이 마치 오래된 필름 카메라 사진처럼 빛바랜 느낌이다.
그것들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명백하게 인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애를 봤던 건 완전히 현실 같았어요. 로잘린이라고 적혀있는 무슨 홀로그램 화면 같은 것도 봤고……."
"......."
류영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송종호를 쳐다보았지만 속으로는 약간 당황했다.
-어떡할 거예요?
‘잡아떼야지, 뭘 어떡해.’
송지현은 믿을 수 있는 동료고, 로잘린에 대해 그녀가 알게 된다고 해도 문제가 생길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설명하는 것 자체가 너무 까다로울 것이다.
“특히 이 빨간 머리.”
송종호가 사진을 가리켰다.
“이게 너무 인상적이어서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나거든요. 저 돌아보면서 손가락 딱 튕기고 사라지던 거......."
“근데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잖아요.”
류영준이 말했다.
“종호 씨가 치료 과정에서 생긴 부작용으로 좀 특이한 환상을 보고, 그걸 얘랑 착각하는 거 아닐까요?”
"......."
송종호는 혼란스러운 듯 머리를 갸웃했다.
“그 후에도 또 눈에 보인 적 있나요?”
“아뇨……. 그 후로는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그럼 괜찮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류영준이 말했다.
“네."
송종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특이한 일이긴 하지만 류영준 말처럼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얘기였다.
“근데 저희 누나랑 류 박사님은 오늘 왜 만난 거에요?”
송종호가 물었다.
"음......."
송지현이 머리를 매만졌다.
“내가 자문을 좀 구하려고 면담하자고 불렀어.”
“무슨 자문?"
“송 박사님의 셀리제너는 미세먼지 저감 장치를 운영하면서 에이젠바이오의 제7 연구소와 함께 지금 환경오염 문제에 있어서 가장 유명한 회사예요.”
류영준이 말했다.
“미세먼지 저감 장치의 연장선으로 방사능 물질 제거 기술을 개발하고 싶으시대요.”
“방사능 물질?”
“일본에서 얼마 전에 후쿠시마 지역의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하면서 대규모 방사능이 유출됐잖아.”
송지현이 말했다.
2011년 일본의 후쿠시마 도호쿠 지방에서 일어난 사고다.
일본 관측사상 최대 규모의 지진이 발생하면서 높이 10 미터에 이르는 쓰나미가 원전을 덮쳤다.
자연 재해가 아니라 인재였던 이유는, 쓰나미를 대비해 원자로를 셧다운한 후 작동해야 하는 비상발전체계가 침수로 인해 망가졌기 때문이다.
발전소가 정전이 되었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노심 냉각이 안 되어서 노심 온도가 계속 올라갔다.
결국 원자로 3기가 노심용융 (원자력발전소에서 원자로가 담긴 압력용기 내부의 온도가 올라가 중심부의 핵연료봉이 녹아버리는 것) 현상이 일어났고, 연료봉에서 수소 가스가 발생했다.
“하……한국말로 해줘.”
송지현의 설명을 듣던 송종호가 고통스러운 듯 말했다.
“한 마디로 원자력발전소에 전기가 끊겨서 냉각수를 못 돌렸고, 그래서 내부 온도가 올라가는 바람에 연료봉이 불타서 수소 가스가 엄청나게 나왔다는 거야.”
송지현이 말했다.
“그리고 그 수소 가스 때문에 원자력 발전소 내 건물 네 개가 폭발하면서 방사능이 사방으로 유출된 거죠.”
류영준이 덧붙였다
둘이 말이 착착 맞아떨어지는 걸 보면서, 송종호는 이 커플이 굉장히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논문 하나 펼쳐 놓으면 둘이 밤새 수다도 떨겠군.’
“아무튼.”
송지현이 말했다.
“그 원전 폭발 이후에 유출된 방사능은 아직도 제거되지 않았어. ‘희석’되긴 했지. 태평양으로 흘러들어가서. 하지만 토지 오염은 여전히 심각하고 후쿠시마 지역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상당한 방사선에 노출돼.”
“하지만 그래서 그 지역에 사람들이 안 가잖아?”
송종호가 물었다.
“안 가면 안 다치겠죠.”
류영준이 말했다.
“하지만 다치게 할 수 있는 걸 내버려두면 안 되죠.”
“그리고 그렇게 오염된 땅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도 아깝잖아.”
송지현이 덧붙였다.
“와……. 진짜 둘 다 진성……."
송종호가 말을 더듬었다.
“이 정도 해야 노벨상 후보를 하는구나……. 진짜 두 분 다 대단해요.”
“없는 길을 찾아내는 게 우리들이 하는 일이니까요.”
류영준이 말했다.
“그래서 방법이 있나요? 누나한테 알려주셨어요?”
“제가 배우고 있었습니다. 송 박사님께 이미 아이디어가 있었어요. 그걸 저한테 어떠냐고 물어보고 계셨죠.”
“어떤 아이디어인데?”
송종호가 물었다.
“미르 우주 정거장 (Mir Space Station)이라고 들어봤어?”
“아니.”
“옛날 냉전 시대 때, 달 착륙 경쟁을 벌이던 러시아가 진행한 프로젝트야. 1986년에 코아 모듈을 발사하고 1996년까지 총 7개 모듈을 쏴서 완성시킨 엄청나게 거대한 정거장이야.”
송지현이 말했다.
“그리고 미국의 우주 왕복선이 도킹하기도 하고, 같이 임무를 진행하기도 하면서 이제 우주 개발에서 냉전이 멈추고 많은 국가들이 힘을 합치고 화합해서 과학을 발전시킨다, 이런 전망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여러모로 유명한 우주 정거장이었어. 민간에서도 많이 이용했고.”
그랬던 미르호는 2001년 3월에 대기권에 재진입해 남태평양에 떨어져 영원히 폐기되었다.
그리고 이때 재밌는 음모론이 하나 생겼다.
미르호가 폐기된 이유가, 우주 방사선에 오래 노출된 우주선 내부에 어마어마한 독성을 가진 변종 박테리아가 출현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걸 은폐하려고 러시아가 미르호를 작동 중지시키고 남태평양에 묻었다는 주장이다.
황당한 음모론이었지만, 항상 어떤 음모론이든 사실적인 부분이 하나는 있게 마련이다.
미르호 내에는 정말로 미생물이 증식했다.
2000년에 미르호에 방문한 승무원들이 유리창과 에나멜판 등에 곰팡이가 가득 끼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곰팡이들이 우주 방사선을 맞고 돌연변이가 생겼을 가능성에 대해 몇 번 언급되었는데, 그게 어느 순간부터 민간에서는 마치 미르호에 대량 살상 능력을 지닌 사악한 박테리아가 증식했다는 음모론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그 음모론은 사실이 아닌 거지?”
송종호가 물었다.
“당연히 아니지. 그런 박테리아가 자연 발생하기도 쉽지 않아. 하지만 그때부터 미생물학자들은 우주 미생물에 대해서 엄청난 관심을 쏟기 시작했지.”
송지현이 말했다.
“우주 정거장의 미생물은 꽤 중요한 문제점 중 하납니다. 지구의 미생물들 중에는 플라스틱이나 유리나 금속을 갉아먹고 사는 정말 특이한 녀석들이 있어요. 그런 녀석들이 우주선의 외벽에 붙어서, 고도 430 킬로미터의 진공 공간인 우주 한복판에서 태양 방사선까지 정면으로 얻어맞고도 몇 년씩 살아남고 심지어 번식하는 거예요.”
류영준이 말했다.
“그 미생물들 때문에 생기는 부품 손상이 얼마나 천문학적인 비용 손실을 야기할지 상상이 가시나요?”
"......."
“그래서 최근에는 우주 개발 사업에서 미생물 살균을 굉장히 중요한 작업으로 생각하고 시스템을 완비하려고 하는 추세죠. 아직 정형화된 건 없지만.”
“그렇군요.”
“그리고 송 박사님 생각은 국제 우주 정거장(ISS)의 외벽에서 연료 폐기물이 빠져나오는 배출구에 살고 있는 미생물을 채취해서 조사해보면, 방사능 물질을 제거할 수 있는 해답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거였어요.”
“아하.”
송종호가 이제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송지현이 끼어들었다.
“그리고 그런 걸 얻는 게 워낙 어려우니까, 일을 진행하기 전에 류 박사님하고 좀 상의를 하고 싶어서……."
“저는 가능성 있다고 생각합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조만간 제가 미국에 또 갈 일이 있습니다. 그때 한번 확인해드리죠.”
“감사합니다.”
“송 박사님도 시간 되시면 같이 가요. 이번 프로젝트 기획자니까 뭐, 나사 (NASA)랑 미팅하거나 하면 직접 얘기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송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에 얘기해볼게요.”
***
“CEO를 맡으라고요?”
김영훈 이사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아시다시피 저는 회사를 자주 비우고, 이 나라, 저 나라 왔다갔다 자주 하잖아요. 돌아올 때마다 서류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거 처리하기도 귀찮고……."
류영준이 말했다.
“하지만 이제 귀국하셨잖습니까?”
김영훈이 물었다.
“다음 주 쯤 다시 나갈 거예요. 미국으로.”
“……아니, 이번엔 또 무슨 일로요?”
“전에 중동에서 그 유명한 테러리스트를 잡았다고 했잖아요? 그 일 때문입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그리고 저는 연구만 하기도 워낙 바빠서……. 아시잖아요? 저는 회사의 CTO 자리를 맡을 겁니다. 대표 이사는 제가 유지하고 이사회에는 가능하면 참석할게요. 하지만 그 밖의 경영 업무 전반은 김 이사님이 해주세요.”
“분명 승진인데 왜 기쁘지가 않죠?”
“저 중국에 있을 때나 중동에 있을 때 고생 많이 하셨죠?”
“장난 아니었죠.”
김영훈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덕분에 제가 많이 편했어요. 그 전에는 해외에 나가서도 저한테 경영 업무 관련해서 전화 오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이번에는 그런 게 많이 줄었거든요.”
“대표님 바쁘신 거 아니까 최대한 제 선에서 다 처리했죠.”
“정말 고마웠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좀 부탁드릴게요. CEO에 걸맞은 대우를 해드릴 테니 조금만 고생해주세요.”
“흠.”
김영훈은 팔짱을 꼈다.
“그래요. 이만한 사업체에 이만한 혁신들을 진행하려면 대표님은 앞만 보고 달리기도 바쁘실 겁니다. 뒤에서 서포트하는 건 저한테 맡기십시오.”
“고맙습니다.”
“출국은 언제예요?”
“다음 주 월요일입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
GSC 공격을 감행했고 탄저 무기 및 장기 이식 시 뇌척수염을 일으키는 렌티 바이러스, 그리고 초고도 감염성의 폴리오마바이러스를 제작하였으며, 한국에서 보툴리눔 균주를 빼돌려 블레셋 창립에 일조한 테러리스트 닥터 레프, 본명 이사야 프랭클린.
중동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체포된 그녀는 1급 위험인물로 선정되어 버지니아주의 CIA 본부 지하의 조사실에 유폐되어 있었다.
그리고 CIA 조사원들은 여러모로 크게 골치를 앓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사야 프랭클린이 폴리오마바이러스나 보툴리눔톡신의 사용처에 대해 입을 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자칫하면 대량 살상 테러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 빨리 목적과 공범자들을 알아내고 미리 방어해야하는 일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이사야 프랭클린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간신히 잡는 데 성공한 이 수배범한테 어떤 정보도 얻지 못했는데 그냥 이대로 죽을 분위기였다.
“하지만 넌 그냥 곱게 죽진 못해.”
닥터 레프를 취조하던 로버트가 말했다.
“요즘은 범죄자들이 죽는 것도 제 맘대로 안 되는 분위기거든.”
“심지어 뇌사에 빠져도 살려내지.”
닥터 레프가 말했다.
“잘 알고 있네.”
“류영준에 대해서라면 세상 누구보다 잘 알걸.”
그녀는 의자에 등을 기대면서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