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4화. < 그랜드슬램 (2) > (120/301)

264화.  < 그랜드슬램 (2) >

클래리베이트가 노벨상 후보로 누굴 지목한다고 해도 본래 후보가 자국민이 아니면 딱히 들뜨지 않는 게 정상이다.

실제로 수상을 한 것도 아니고, 심지어 스웨덴의 왕립 과학 한림원에서 밝힌 것도 아니고, 완전히 제3자인 민간 기관에서 예측한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래리베이트의 발표는 세계 곳곳에서 TV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저거 봐, 시아야.”

류영준 신화의 첫 장을 쓴, 최초의 녹내장 완치 환자 손수영은 그의 딸을 안고 TV를 가리켰다.

태명 파랑이였던 폐동맥 고혈압 환아는 이제 시아라는 이름을 갖고 두돌이 가까워진 유아가 됐다.

“우리 살려주신 선생님이 상 받으신대.”

손수영이 말했다.

“엄마 눈도 낫게 해주고, 시아 숨도 쉬게 해준 사람이야.”

“우우으.”

시아는 팔을 허우적거리더니 손수영의 품에서 빠져나와 TV 앞으로 이동했다.

탕탕!

그리고는 모니터를 손으로 두들기며 배시시 웃었다.

손수영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따라 웃었다.

남들은 아기를 키우면 잠도 못 자고 온갖 고생을 다 해서 정말 고통스럽다는데, 그녀는 모든 순간이 눈물 날 정도로 좋았다.

행복은 상대적인 것이다.

삐리릭! 찰칵!

“나 왔어.”

손수영의 남편이 현관을 열고 들어왔다.

“오늘 일찍 왔네?”

“나 요즘 회식 방어율 100 퍼센트잖아. 다들 내 사정 알아서 뭐라 하지도 못해. 우리…… 으싸.”

그는 바닥에 아장아장 기어나오는 딸을 번쩍 안아들었다.

“우리 시아랑 당신 아팠던 거 아니까.”

손수영은 그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뺨에 입을 맞췄다.

“나 일자리도 구했어.”

그녀가 말했다.

“정말?”

남편이 깜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응. 전에 면접 본 곳. 나 녹내장 오기 전에 다니던 출판사보다는 조금 작은 데지만 연봉도 비슷하고 거리도 가깝고."

“우와! 축하해!”

남편은 한 팔에 딸을 안고 다른 팔로 손수영을 와락 껴안았다.

“그래도 무리하지는 말고. 알았지?”

“응. 그럼.”

손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같은 시각, 인도 뭄바이의 작은 물류 회사.

직원들이 TV 앞에 모여앉아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 네 개란다! 네 개!”

“류 박사님은 저럴만 하시지.”

직원들이 소리쳤다.

이곳은 다국적 거대 제약회사 슈마틱스를 파멸로 몰고간 전설의 환자, ‘아르답’이 세운 회사다.

사명은 닥터 마이트레야(Dr. Maitreya).

인도 바라나시국에서 태어났다는 불교 신앙의 구원자, 한국어 음역으로는 ‘미륵’에 해당하는 ‘마이트레야’에다가 닥터를 붙인 것이다.

그게 누구를 기념하는 사명이었는지는 이 동네 사람이 아니라도 예상할 수 있었다.

닥터 마이트레야의 직원은 98 퍼센트가 여성인 특이한 성비 구조를 갖고 있었는데, 아직까지는 100 퍼센트 카마티푸라 출신을 고용했기 때문이다.

사바세계에 구현된 그 생지옥이 파괴되면서 탈출에 성공한 여성들은 에이즈까지 완치시키는 엄청난 행운을 맛보았다.

그리고 아르답을 돌봐주던 여자들은 그와 함께 회사를 차리고 같이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만약 상 못 받으시면 우리가 스웨덴으로 다 같이 항의하러 찾아갈까요? 이런 사람이 왜 평화상 못 받냐고.”

아르답이 말했다.

“아르답! 평화상은 노르웨이에서 주는 거야.”

여자들이 함박 웃으며 말했다.

“그럼 노르웨이로 가면 되지!”

***

“왜 평화상은 노르웨이에서 주는 겁니까?”

작년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카게쿠니 교수가 물었다.

“하! 노벨 그 양반이 살던 때에 아마 스웨덴이 노르웨이랑 동맹인가 뭔가 했을 거요. 그래서 하나 쯤 가지라고 줬을걸.”

포스버그가 답했다.

그는 말기 암에 신기술로 일주일 시한부를 받았다가, 그보다 더한 신기술로 회복된 별난 환자였다.

스웨덴 의학과 왕립 과학 한림원의 상징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아쉽겠군요. 네 개 다 직접 수여하고 싶으실 텐데.”

“맘 같아선 문학상이나 경제학상도 줬어.”

포스버그가 말했다.

“하지만 노벨상이 뭐 내 맘대로 되나. 난 은퇴한 몸이요.”

“그렇죠.”

카게쿠니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벨상 심사위원과 노벨상 수상자. 의사와 의학 박사. 의대 교수와 생명공학 교수.

여러모로 접점이 많은 두 사람은 포스버그의 건강이 회복되면서 점점 친해졌다.

“내가 죽기 전에 저런 경이로운 천재를 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한 때 제가 키운 제자입니다?”

카게쿠니가 어깨를 으쓱했다.

“뭘 당신이 키워, 1년 겨우 가르쳤으면서.”

“그래도 1년 제자도 제자죠.”

“참 나, 좋겠수. 숟가락 하나 얹을 수 있어서.”

다음날 아침에도 뉴스는 계속 나왔고, 강혁수는 그때 면도를 하고 있었다.

“어어? 잠깐만. 당신 저거 TV 좀……."

“말 하지 말고 가만 있어, 칼에 벤다. 면도할 때는 가능하면 입을 움직이지 말어.”

그의 턱수염을 정리해주던 박주남이 말했다.

“어째 당신은 맨날 택시 하러 나가기 전에 그 잠깐을 TV를 못 봐서 안달이야? 내 얼굴을 봐야지.”

그녀가 핀잔을 주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러다가 내가 또 알츠하이머 오면? 그때는 또 무슨 후회를 하려고. 나 조수석에 실어놓고 손님 받으러 다닐 거야?"

"......."

“하, 그때 생각하면 진짜.”

“생각 나지도 않으면서.”

“드문드문 나거든?”

박주남이 면도기를 강혁수의 코앞에 들고 말했다.

“어우, 야. 칼은 들지 말고 얘기하자.”

“류영준 박사님이 진짜 대단한 사람이지, 어떻게 내가 치매 있는걸 그거를 그렇게 치료를 다 해주고.”

“지금 그 류 박사님 얘기가 나오는 것 같은데 소리만 좀 높이면 안 돼?”

“류 박사님 얘기라고?”

박주남은 면도를 멈추고 고개를 홱 돌렸다.

TV에서 클래리베이트의 예측에 대한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4개 부문에서 노벨상 수상 1순위로 예측]

“어메 세상에! 저게 뭐여?”

그녀는 얼른 식탁을 향해 달려가 리모컨을 집었다.

“아, 달리지 말어! 넘어져!”

강혁수가 잔소리를 했다.

“잠깐만 기다려봐.”

TV 볼륨을 높이면서 박주남이 말했다.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 테디로스는 신장 위구르 캠프에서 나온 시민들의 의료 복지 서비스와 함께, 광둥성에 적용됐던 모기 멸종 프로젝트를 세계 단위로 확대하는 것을 기획하고 있었다.

“참 이상한 게 말이야.”

테디로스가 직원들과 함께 태블릿으로 클래리베이트의 예측 뉴스를 보며 말했다.

“분명히 류 박사 덕에 의학이 엄청나게 발전해서 옛날에는 꿈도 못 꾸던 것들을 하고 있는데, 어째 나는 류 박사가 뜨기 전보다 백 배는 더 바빠진 거 같아.”

“류 박사님 덕분에 거대 프로젝트들이 자꾸 생겼으니까요.”

“아마 업무량으로는 역대 WHO 사무총장 중에 내가 일등일걸?”

“저희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개고생을 하는데 나도 노벨상 뭐 하나 줘야하는 거 아냐?”

테디로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럴 게 아니라 아예 우리가 류영준 상을 제정하죠. 모기 퇴치와 에이즈 퇴치 같은 업적을 기념해서.”

직원들이 말했다.

“그런 걸 해내는 사람한테 주는 상이라면 류영준 박사 말고 받을 사람 없을 것 같은데.”

테디로스가 말했다.

“그래도 혹시 압니까? 나름 뛰어난 은메달리스트들 많이 있잖아요.”

“흐음. 1등이랑 격차가 너무 많이 나서 문제지만.”

***

은메달리스트 송지현은 류영준을 보자마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아주 그냥 사방에서 난리예요.”

그녀가 말했다.

두 사람은 용산구의 작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얘길 나누고 있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둘 다 선글라스와 모자를 쓰고 조용히 만났다.

“인터뷰 하자고 그래요?”

류영준이 물었다.

“네!”

그녀가 외쳤다.

클래리베이트의 수상 후보 중에는 송지현도 의학상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도 두 번째로.

“아무리 저는 못 받는다, 이건 누가 봐도 류 박사님한테 가게 될 상이다, 클래리베이트는 15명씩 후보를 뽑으니까 어쩔 수 없이 들어간 거다, 그걸 몇번씩 얘길 해도……."

“그러지 마세요. 송 박사님도 자격 있죠.”

류영준이 말했다.

“뇌사 치료 논문 제 1저자도 송 박사님이시고, 셀리큐어라는 그 대단한 간암 치료제도 만드셨잖아요.”

“그래도……."

“거기다 스웨덴에서 수지상세포 우회법도 먼저 떠올리셨고.”

“에이, 그건 빼요. 망상 수준의 아이디어였는데 류 박사님 아니었으면 실현 못했어요.”

송지현이 손을 내저었다.

“항상 그런 크레이지 아이디어가 과학을 견인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

“헤이!”

갑자기 누가 옆에서 테이블 위로 불쑥 끼어들었다.

무슨 모델처럼 늘씬하고 잘 생긴 청년이었다.

카페 내의 수많은 시선들이 이쪽으로 쏠리는 게 느껴졌다.

깜짝 놀란 송지현과 류영준은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그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야, 야. 얼른 앉아, 조용히.”

송지현이 남자한테 손짓을 했다.

“저, 근데 누구세요?”

류영준이 물었다.

“접니다. 전에 한번 뵀는데.”

“네?”

“제 동생이에요.”

송지현이 말했다.

"헉.......”

류영준은 순간 말을 잃었다.

송지현의 동생 송종호는 조현병이 치료된 후 세 달 쯤 지났을 때도 한번 만났다.

그때도 살이 많이 빠지고 피부도 깨끗해지고 눈도 맑아져서 사람이 바뀌었다 싶었는데, 이젠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다.

“그러고보니 학창 시절 때 잘 생긴 걸로 유명하셨었댔죠.”

“옛날 일인데요, 뭘.”

송종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앉았다.

“아무튼 도서관에 공부하러 가다가 잠깐 들렀습니다. 누나가 류 박사님하고 같이 계신다고 해서 보고 싶어서요. 곧 다시 갈 거예요.”

“미리 얘기 안 해서 미안해요. 진짜 올 줄 몰랐어요.”

송지현이 미안한 듯 말했다.

“괜찮아요. 오랜만에 뵈니까 반갑네요.”

류영준은 송종호와 악수를 나누었다.

“류 박사님도 동생분 있으시댔죠? 정윤대 다니신대서 제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 공부해서 거기 갈 거거든요.”

“네, 지금 2학년이에요.”

류영준이 말했다.

“류 박사님 조카도 있어.”

송지현이 말했다.

“조카요?”

“미국 사는 조카인데 전에 한국 왔을 때 류 박사님이 돌봐주셨거든.”

“그럼 교포예요?”

송종호가 물었다.

“예, 뭐……. 정확히는 조카는 아니고 먼 친척인데……."

“엄청 예뻐.”

송지현이 말했다.

“오, 좀 보고 싶은데요. 사진은 없어요?”

“팬클럽에 있어.”

송지현이 말했다.

“팬클럽에 있다고요?”

류영준의 눈이 동그래졌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네. 조카분 데리고 놀이공원 가셨죠? 그때 누가 찍었나보던데요. 이거 류영준 아니냐하고 올렸다가 류영준의 숨겨놓은 딸이네마네 작은 소동이 날 뻔했죠.”

송지현이 말했다.

“……저는 왜 처음 듣죠?”

“그게……."

송지현은 머리를 매만졌다.

“제가 그 글 보자마자 바로 친척이라고 댓글 달았거든요……."

“누나도 거기 가입했어?”

송종호가 물었다.

송지현은 눈을 피하면서 커피를 홀짝였다.

“그 후에 제6 연구소 직원들도 그냥 친척이라고 알려줬어요. 그리고 팬들이 괜히 이런 거 냅두면 기자들이 가져가서 헛소리하면서 스캔들 만들려고 한다고 언급을 자제하자는 분위기가 된 덕에 금방 없어졌죠. 별로 대단한 해프닝은 아니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랬군요.”

류영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 게시물이 아직 남아있을걸요.”

그녀가 휴대폰으로 옛날 게시물을 뒤적였다.

“많이 삭제됐는데 그래도 하나 남아있네요. 류 박사님도 보실래요? 화질이 뭐 대단한 건 아니고 해서 기사거리도 안 됐지만, 아무튼 몰래 촬영당한 당사자이시니……."

송지현은 휴대폰 화면에 사진을 띄웠다.

송종호의 눈이 가느다랗게 변했다.

“이 애 어디서 본 것 같……."

“얘 이름이 뭐랬더라, 로잘린? 맞죠?”

송지현이 류영준에게 물었다.

"......."

류영준은 침을 꼴깍 삼켰다.

“이 애가 류 박사님 친척이라고요?”

송종호가 물었다.

송종호의 조현병을 치료하기 전.

로잘린은 조현병의 발병 원인을 찾기 위해 세포 상태로 송종호의 뇌까지 들어갔었다.

“내가 환상으로 봤던 애잖아.”

송종호가 말했다.

당시 약을 먹고 잠에서 깨어난 송종호는 도파민 과분비 상태에서 류새이 모습의 로잘린과 그녀의 상태창을 몇 초간 목격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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