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0화. < 콜드체인 (12) > (116/301)

260화.  < 콜드체인 (12) >

“폴리오마바이러스?”

닥터 레프가 물었다.

“그 바이러스에 보툴리눔톡신을 담아서 테러에 쓰려는 거 아닌가?”

류영준이 물었다.

“뭐?”

닥터 레프는 눈이 동그래지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왜 웃어?”

“아니, 천재가 생각하는 테러는 나하고는 수준이 다른 것 같아서. 정말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

닥터 레프는 눈물까지 닦아내며 웃음을 간신히 진정했다.

“그 목적이 아니라는 거야?”

류영준이 물었다.

“아니야.”

“그럼 폴리오마바이러스는 어디에 쓰려고?”

“비밀이야.”

류영준은 닥터 레프를 가만히 쏘아보았다.

-적어도 보툴리눔톡신을 담아서 쓰려는 게 아니라는 말은 사실이에요.

닥터 레프의 뇌혈류 흐름을 관찰하던 로잘린이 메시지를 보냈다.

“……. 네가 보툴리누스 균주를 라이프톡신에서 훔쳤지?”

류영준이 물었다.

“맞아.”

닥터 레프는 포기한 듯 무덤덤하고 짧게 답했다.

“블레셋도 네가 세운 회사고?”

“야세르와 그 측근들이 세웠지. 하지만 내가 금전적으로나 균주 공급 문제나 여러모로 도와준 건 사실이야.”

“보툴리눔톡신을 어디다 쓰려는 거야?”

“어디다 쓰긴? 그건 신경마비성 치료제야. 당연히 의료용이지.”

“테러범이 의료용 치료제를 개발해?”

“엘시를 만나지 않았어? 내 어머니 말이야.”

닥터 레프가 물었다.

“만났어.”

“그럼 그 사람이 나에 대해 얘기해주지 않았나? 난 미치광이 테러범 같은 게 아냐. 아랍 문화권의 독립 국가를 만들려고 싸우는 IS나 팔레스타인 해방 군인들하고도 달라.”

닥터 레프가 말했다.

“그 사람들은 저마다 종교 이념이나 국가관에 따라서 움직이는 광전사들이지. 그 안엔 테러범도 있고, 독립군도 있고, 반군도 있어. 하지만 난 어느 쪽도 아니야. 내 어머니가 정말 내 목적에 대해 얘기해주지 않았어?”

“로잘린이 과학을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한다고 하시더군.”

“그래. 그러니 난 민간인을 해치는 일 같은 건 안 해. 보툴리눔톡신을 운반하는 폴리오마바이러스라니. 듣기만 해도 끔찍하고 황당하다.”

"......."

“그리고 류영준. 날 체포한 건 큰 실수를 한 거야."

닥터 레프가 말했다.

“실수라고?”

“나는 네 적이 아니니까. 조만간 네가 네 손으로 파놓은 무덤 속에 들어갈 때, 밖에서 손잡고 꺼내줄 수 있는 유일한 아군이라 생각해.”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류영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똑똑하면서 이런 쪽으로는 예측을 잘 못하는군.”

닥터 레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를 들어서.”

그녀가 말했다.

“세계 최대의 산유국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미국으로 변한지 좀 됐어.”

"......."

“그동안 미국은 석유 자원을 아끼려고 이라크도 침공하고 사우디를 간접적으로 개발하면서 갖은 노력을 들였거든. 덕분에 그 중요한 지하자원을 많이 비축했지.”

닥터 레프가 말했다.

“이제 슬슬 석유의 희소성도 많이 올랐겠다, 비싼 값을 매겨서 팔아볼까 하는 시점일 거야. 근데 갑자기 태양 전지도 만들고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전지전능하신 류 박사가 튀어나와서 바이오 디젤의 생산 효율을 극도로 끌어올려서 고급 휘발유라도 만들어봐. 미국 같은 나라가 그걸 곱게 보겠어? 네가 CIA 친구들하고 노는 것도 거기까지야.”

"......."

류영준이 답이 없자 닥터 레프는 피식 웃었다.

“쫄지 마. 뭐 석유 하나 갖고 널 해치기야 하겠어? 한동안은 지금처럼 내버려둘 거야. 하지만 그 후에는 모르겠네.”

그녀가 말했다.

“류영준. 과학은 21세기에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고 수탈하는 교범이야. 과학자는 순수하게 연구를 하더라도, 그걸 이용하는 정치인이나 기업가들은 달라. 마치 성경 구절을 취사 선택하고 입맛대로 해석해서 신자들을 모집하고 착취하는 사이비 종교와 똑같지. 중세 시대 종교의 자리를 과학이 대신하고 있다고. ‘합리적’이라든지, ‘국제학술지’라든지 하는 단어를 앞세워서. 특히 이런 저개발국가에서는 더하고.”

닥터 레프는 역겨운 단어를 말하는 것처럼 이를 악물었다.

“그동안은 네가 개발한 과학이 모두 세계 최강국가인 미국의 입맛에 맞아떨어지는 것들이었어. 그래서 다들 너를 내버려뒀지. 암도 고치고, 에이즈도 고치고, 미세먼지도 줄이고, 다들 잘 먹고 잘 살고 돈도 벌고 좋지.”

닥터 레프는 류영준에게 고개를 가까이 들이 밀었다.

“하지만 두고 봐. 네 과학은 너무 빠르게 발전했어. 뇌사나 태양 전지부터는 슬슬 사람들 눈에 거슬려.”

그녀가 말했다

“난 그런 거 신경 안 써.”

“정말 너답네.”

닥터 레프는 빙긋 웃었다.

“누가 과학의 발전을 막으려 하면 정면에서 쳐부술 뿐이야. 난 중국 주석하고도 충돌했었어. 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류영준이 딱 잘라 말했다.

"......."

닥터 레프는 류영준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단단해서 좋겠어. 정말 어쩌면 너는 혼자서 그 모든 권위적인 세상의 압력을 이겨내고 원하는 걸 다 해낼지도 모르겠다. 하긴, 이쯤 되니까 로잘린이 태어났을지도 모르지. 나 같은 3류 과학자는 죽었다 깨나도 못 따라가겠네.”

“난 그딴 얘기 들으려고 널 찾아온 게 아냐. 그 망할 폴리오마바이러스로 뭘 하려고 했는지를 말해.”

류영준이 말했다.

“고문해도 얘기할 생각 없어. 근데 류영준. 중동에는 대체 왜 들어온 거야?”

“휴우.”

헤실거리며 화제를 바꾸는 닥터 레프를 보고 류영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뇌사자의 임상시험이 있어.”

그가 말했다.

“역시 그랬군. 그런 게 있으니 여기까지 왔겠지. 혹시 그 환자가 아풀라 시에 있나?”

“그래.”

“좋겠어. 이스라엘은 유대인 커뮤니티에 돈이 많으니까 중동 한복판에서 뇌사에 빠지고도 그 유명한 류영준한테 치료를 받네. 팔레스타인 해방군은 항생제 하나 처방을 못 받아서 별 것 아닌 상처에도 감염으로 죽는데.”

“네가 그딴 소릴 할 입장이 아냐.”

류영준이 말했다.

“뇌사 환자는 네가 풀어놓은 폴리오마바이러스 때문에 그렇게 된 거니까. 프랭클린.”

“무슨 소리야. 폴리오마바이러스는 병원성이 없어. 감염된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에 수없이 많다고. 나도 그걸 알고 테스트한 거고.”

닥터 레프가 웃으며 답했다.

“면역력이 떨어진 사람들한테는 치명적일 수도 있어.”

류영준이 말했다.

“거기에 뭐, 에이즈 환자라도 있었단 말이야?”

닥터 레프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류영준의 다음 말에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백린을 맞은 어린애가 있었어. 그 가스 중독으로 골수 기능이 떨어져서 림프구 수치가 크게 하락한 상태였고.”

"......."

“어린애였다고. 이제 겨우 10대에 들어선 그 애를 네가 뇌사에 빠뜨린 거야.”

닥터 레프는 살짝 눈을 감았다.

“……말은 바로 해야지. 내가 아니라 이스라엘 군의 백린탄이 뇌사에 빠뜨린 거 아냐?”

그녀가 말했다.

“그 나이대에 폭격 후유증이 있다고 하면 가장 최근 가자 지구의 백린 폭격이었겠네. 자업자득 아닌가? 그 아랍인들 사는 동네에 이스라엘 유대인이 왜 기어들어와서 자기네 정부의 폭격을 처맞고 아풀라로 돌아간 거야?”

“팔레스타인인이야.”

“뭐?”

류영준은 닥터 레프를 가만히 쏘아보았다.

“피해자는 팔레스타인의 아랍인이라고. 아풀라 병원에 있는 환자니까 다 이스라엘 국민이고 유대인일 것 같아? 네 생각하고 다르게 의학에는 국경이 없어.”

"......."

“그 어린애가 대체 무슨 죄가 있어? 그 애가 뭘 알겠어? 이쪽 군대한텐 백린 폭격을 당하고, 팔레스타인 해방군한텐 폴리오마바이러스 테러를 당하고. 그래서 지독한 화상을 입고 뇌사 상태야. 그리고 나는 그 애를 치료하러 여기에 온 거고. 알겠어?”

류영준이 말했다.

“이사야 프랭클린.”

"......."

“마지막으로 묻는다. 폴리오마바이러스를 왜 풀었지? 솔직하게 얘기해. 그럼 블레셋에 있는 네 친구들 목숨 정도는 살려주는 쪽으로 고민해볼 테니까.”

“……그건……."

닥터 레프는 무슨 말을 하려다 뚝 멈추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컥 소릴 내며 입을 틀어막았다.

“커헉!”

그녀는 기침을 심하게 하기 시작했다.

고통스러운 듯 가슴과 목을 움켜쥐었다.

“내 가방……. 약……."

간신히 신음 같은 걸 짜내 말했다.

“뭐야?”

놀란 류영준의 눈앞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동기화 모드 : 골수이형성증후군을 분석하시겠습니까? 피트니스 소모 : 3.5/1초]

“무슨 일입니까?”

차량 밖에서 대기하던 CIA 요원들이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약......."

닥터 레프가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사람 소지품 좀 주세요.”

류영준이 말했다.

“잠깐만요.”

로버트는 압수품을 조사하던 팀원들을 향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가방 안에 있던 약병인데, 이건가요? 혹시 몰라서 가방도 가지고 왔는데.”

“맞는 것 같습니다.”

류영준은 약병을 건네 받으며 닥터 레프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피를 한 움큼 뱉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약을 한 알 삼킨 후, 어느 정도 진정된 닥터 레프는 숨을 고르면서 류영준을 쳐다보았다.

“골수이형성증후군을 앓고 있었나?”

류영준이 물었다.

“그래. 내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혹시 알아?”

“알아.”

“후후. 내 유전자들도 류영준이 만져줘서 태어난 거였다면 건강했을 텐데. 허찌엔칭만도 못한 엘시와 그 머저리 동료들이 함부로 손대는 바람에 이 꼴로 태어났지.”

"......."

“류영준.”

닥터 레프가 말했다.

“폴리오마바이러스에 집착하지 마. 그거 별 것 아냐.”

“하아……."

류영준이 한숨을 내쉬자 닥터 레프는 가까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맹세할게. 사람들에게 해가 될 만한 물건을 만드는 게 아니야. 그 정체를 알려줄 수도 없지만. 물론 믿을 수 없다는 거 아는데, 그래도 믿어.”

“보툴리눔톡신은?”

“그것도 테러용은 아냐. 뭐, 팔레스타인 해방군이 이스라엘 군한테 맞서싸울 때 무기로 쓸 수는 있지만. 아무나 상대로 대량 살상을 하지는 않을 거야.”

닥터 레프가 말했다.

“이 이상은 블레셋을 없애든 날 죽이든 말든 알려줄 수 없어.”

"......."

류영준은 닥터 레프를 가만히 쏘아보았다.

이 여자의 목적은 로잘린이 모든 과학을 독점하게 하는 것이다.

폴리오마바이러스나 보툴리눔톡신도 그것과 관계가 있는 걸까?

“대신 중요한 정보를 하나 주지.”

닥터 레프가 말했다.

“네 임상 환자가 아풀라 시에 있다고 했지? 거기에 다시 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팔레스타인 해방군이 노리고 있거든.”

“뭐라고?”

“아풀라는 이스라엘의 가장 큰 메디컬 허브 중 하나야. 그리고 전쟁으로 부상을 입은 이스라엘 군인들도 상당수 입원해서 치료받고 있지. 해방군 입장에선 매력적인 표적이 되지 않겠어?”

“이런 미친! 병원을 건드린다고?”

“유엔이 세운 민간 학교도 터뜨렸던 게 이스라엘 군인데 누굴 욕해?”

"......."

“그동안 계속 노리고 있었는데, 류영준이 거기에 방문했다는 소식이 도니까 다들 안달이 났을 거야. 거기에 돌아가지 마.”

“거기엔 내 병원 의료진들이 있어! 내가 부탁해서 출장 내고 여기까지 환자 치료하러 온 사람들이라고!”

류영준이 소리쳤다.

그가 밴의 문을 왈칵 열었다.

“어쩌려고?”

닥터 레프가 뒤에서 물었다.

“그 미친 테러를 막아야지!”

“지금 연락한다 해도 이미 늦었을 지도 몰라. 환자들 대피시키는 데 오래 걸려. 알잖아? 대피하는 낌새가 보이면 바로 공격받을 테고."

“만약 못 막으면 최소한 내가 테러 직후에라도 도착해서 현장을 수습하고 피해자들을 치료할 거야.”

“현장의 응급 처치는 중요하겠지만 그 시점엔 시설이 전부 박살나서 남은 게 없을 텐데, 무슨 수로 치료를 해?”

"......."

‘류영준. 아무리 뛰어난 과학자라도 맨손으론 원시인이나 다름없어.”

"......."

류영준의 주먹이 가늘게 떨렸다.

-괜찮아요.

로잘린이 말했다.

-같이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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