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9화. < 콜드체인 (11) > (115/301)

259화.  < 콜드체인 (11) >

“석유를 만든다고요……?”

압둘이 말했다.

“네. 포도당을 해당 과정으로 쪼개어 피루브산을 만든 다음, 포스트 트랜슬레이셔널 모디피케이션(Post translational modification)에 관려하는 트랜스퍼레이즈 (Transferase)들을 이용해 몇 번의 탈수축합 반응으로 탄소 사슬을 연장해주면 됩니다. 정제 과정이 까다롭겠지만 저는 그것도 해결할 방법이 있고요. 오히려 원유에서 분별 증류로 휘발유, 경유, 아스팔트 찌꺼기까지 나눠 분리하는 과정 대신 각각에 해당하는 생산공정을 따로 개발하면 분별 증류의 비용을 절약해 정제 효율이 더 높아질 겁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이에 더해서, 바이오시스템 기반으로 생산할 수 있는 휘발유는 옥탄가를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노킹이 잘 일어나지 않은 고급유로 생산 대상을 한정지음으로써 사우디에서 생산되는 석유보다 품질 측면에서 훨씬 더 우월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

“해드릴까요?”

“혀, 협박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압둘 아샴이 화를 내며 벌떡 일어났다.

“말이……. 말이 안 돼.”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한테 정말 그런 기술이 있었다면 왜 그동안 개발을 안 했겠습니까? 가장 큰 돈이 되는 사업인데!"

“저는 별로 돈을 원해서 과학을 한 게 아니니까요.”

류영준이 말했다.

"......."

“하지만 닥터 레프에 대한 정보를 나눠주시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을 텐데 왜 거부하시는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혹시 테러를 같이 하셨나요?”

“무슨 소립니까!”

압둘이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절대 아닙니다! 나하곤 그 테러는 아무 관계가 없어!”

“그럼 알려주십시오.”

"......."

“어서요.”

“……. 알겠습니다. 아는 거 다 털어놓고 하라는 대로 하죠.”

압둘 아샴이 포기한 듯 말했다. 이제 그는 왕자의 자존심을 반쯤 내려놓았다.

“하지만 류 박사님. 내 경고하는데, 이만한 기술력이 있다고 사우디에서 왕자의 면전에 대고 떠들고 협박을 하시고도 안전이 보장될 거라 생각하십니까?”

“절 위협하시는 건가요?”

“이 나라의 최고, 최대의 자산이 석유입니다. 그걸 헐값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제가 아니더라도 류 박사님께는 적이 많이 생길 겁니다. 사우디의 누군가 류 박사님을 노릴 수도 있겠죠?”

“적어도 지금은 안될 겁니다. 저는 생물학자고, 사기업의 대표일 뿐입니다. 테러범을 잡는 일 같은 걸 제가 혼자 할 리가 없잖습니까?”

“네?”

“닥터 레프는 GSC를 공격한 국제 테러리스트입니다. 당연히 CIA 같은 국제 정보 기관들이 그 사람을 추적하고 있지 않겠어요?”

“류 박사님이 지금 CIA랑 같이 일하고 있다는 뜻입니까?”

“저한테 접촉하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저는 방금 얘기한 GSC 테러를 막아낸 사람입니다.”

"......."

“사우디는 중동의 다른 수많은 나라들과 다르게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굳이 외교적인 마찰을 만들어서 미국을 비롯해 석유를 탐내는 강대국들이 이곳을 공격할 명분을 주지 마세요.”

류영준이 말했다.

“테러범은 팔레스타인 출신이고 테러범의 본사는 이집트에 있는데, 국제사회가 제일 먼저 공격하는 게 사우디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

“닥터 레프, 아니, 이사야 프랭클린하고 어떤 관계였나요?”

“후우……. 잠깐 만나던 여자였습니다.”

압둘 아샴이 말했다.

“맹세코 그 여자가 테러범인 줄은 몰랐습니다. 미국에서 국제 물류 사업을 하다가 집안이 망해서 여기로 도망쳐온 거라고 했습니다. 저한테 보호해달라고 했어요. 제가 그래도 사우디 왕자인데, 통치자 된 입장에서 거 사정 딱한 사람을 그냥 버리기도 좀 그렇고 이래저래 인도적인 차원에서 약간 소액으로다가 지원을 해줬……."

“한번 남으셨다고 했습니다.”

“젠장. 그 년이 절 유혹해서……. 그래요, 같이 좀 놀았습니다. 그때는 제가 이혼도 했고 많이 외로울 때였다구요. 쉽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그……. 저는 피해자예요! 난……. 사랑인 줄 알았다구요……."

압둘이 치욕스럽다는 듯 말했다.

“누가 뭐랍니까.”

“하지만 집안이 어렵다고 한 건 진짜예요. 그 망한 사업에 호흡기를 좀 달게 도와달라고 하더군요. 2천만 달러 정도가 필요했습니다. 제 사비로 주기에는 좀 큰 돈이어서 아샴의 공금을 빼줬어요.”

“4년 쯤 전에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압둘이 깜짝 놀랐다.

“그 쯤에 블레셋이 세워졌으니까요. 아마 창립 자금이었을 겁니다.”

“블레셋이요?”

“블레셋을 세운 창립자들이 모두 가난한 과학자들이었고, 펀딩을 받은 내역도 없었는데 어떻게 카이로에서 번쩍거리는 건물을 세워 놓고 사업을 크게 벌렸겠습니까. 당신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그걸 차린 거예요.”

"......."

“그래서, 닥터 레프가 어떻게 여기서 일하게 된 겁니까?”

“……그 돈을 주기 위해서는 서류상으로 처리할 게 좀 있었고, 그 때문에 잠깐 우리 회사 직원으로 썼습니다. 사무 일만 해도 된다고 그랬는데 기어이 운송을 하러 나가더군요.”

“한국으로요?”

“그건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압둘이 또다시 당황했다.

“아마 닥터 레프는 그때 한국의 라이프톡신이라는 회사에 물건을 공급한다고 실험실까지 들어가서 보툴리누스 균주를 훔쳤을 겁니다.”

"......."

“대충 상황 견적이 나오네요. 앨러간 같은 회사는 너무 크고 보안이 강력하고, 보툴리눔톡신 사업을 갑자기 왕창 벌이고 있는 한국은 그만큼 균주 통제와 보안이 취약하니 만만해서 들어왔겠죠."

“그럴수가……."

“직접 균주를 찾아내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리니 안 됐을 테고. ……아샴 대표님. 닥터 레프랑 지금도 연락이 됩니까?”

“네."

압둘 아샴이 말했다.

“그 후에도 계속 돈을 조금씩 대주고 만나고 했으니까요……."

“그랬군요.”

류영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빛을 보고 압둘이 물었다.

“제가 한심한가요?”

“그런 말 안 했지만 솔직히 그렇습니다.”

“저기……. 그리고 블레셋이 저희 유통망을 통해서 보툴리눔톡신을 팔고 있습니다.”

압둘이 말했다.

“그것도 이사야 프랭클린이 소개해준 겁니다. 저한테 보답하고 싶다고 사업 파트너를 연결해준다면서……."

“블레셋이 그렇게 초고속 성장한 데는 이유가 있었군요. 석유 재벌집 막내가 거기다 돈을 펑펑 썼으니.”

“류 박사님! 저 이거 형들이 알면 큰일납니다!”

갑자기 압둘이 울상이 돼서 매달렸다.

“저, 제발 비밀로 해주십쇼!”

“닥터 레프를 잡는 데 최대한 협조하세요. 그럼 디테일들을 어디 가서 발설하진 않을 테니 알아서 무마하시고.”

류영준이 말했다.

***

류영준이 이스라엘에 방문했다. 며칠 전에 떠들썩하게 뉴스가 다 나왔다.

문제는 그가 이스라엘을 찾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더 안 좋은 소식이 하나 더.

확실한 건 아니지만 정보통에 의하면 류영준과 펠루스 대통령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탄 차량이 아풀라 시를 향했다는 얘기가 있다.

‘거기다 폴리오마바이러스를 풀었었지.’

닥터 레프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사우디아라비아의 타브크 시까지 가는 여정의 가운데 있었다.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이집트가, 남동쪽에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있다.

둘 다 영토가 꽤 큰 편인데, 다행히도 카이로는 이집트의 북동쪽에, 타브크 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북쪽에 위치하므로 두 도시간의 거리는 의외로 가깝다.

비록 아카바 만에서 배를 타야하는 게 번거롭긴 하지만 말이다.

야세르는 비행기를 타고 가라고 했다. 위조 신분증이 꽤 쓸만해서 먹힐 거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비행기는 아카바 만의 선박보다 검문이 더 까다로우니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뉴웨이바 포트까지는 야세르가 데려다주었고,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배를 타고 사우디 국경을 넘어가 택시를 탄 것이다.

그 가운데 닥터 레프의 고민은 하나뿐이었다.

류영준이 아풀라 시에 왜 갔을까? 폴리오마바이러스를 눈치챈 걸까?

만약 그렇다면 계획이 수정될 가능성이 있을까?

“이렇게 아침 일찍 데이트 가십니까? 예쁘게 입으시고.”

택시 기사가 물었다.

“네? 아, 네.”

닥터 레프는 고민에서 빠져나와 웃으며 대답했다.

“도착했습니다.”

택시 기사가 말했다.

“고마워요.”

닥터 레프는 밝은 표정으로 차비를 주고 내렸다.

아침 여섯 시.

카르푸 시의 외곽, 모스크와 중동 레스토랑 사이의 작은 공원이었다.

‘이번만 등처먹고 관둬야지.’

압둘 아샴을 빨아먹는 것도 이제 슬슬 그만둬야할 시점이다.

‘야세르도 나한테 조심하라고 했지. 시기가 콜드체인이니 뭐니 하는 때니 류영준이 아샴과 접촉할지도 모르고, 그럼 꼬리가 밟힐 수도 있다고.’

하지만 류영준은 카르푸라는 조그만 운송업체에 콜드체인을 공급하는 중이다. 게다가 지금은 아풀라 시에 있으니 아마 아샴을 통해서 붙잡힐 가능성은 낮다.

“프랭클린!”

큰길 건너편에서 압둘 아샴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샴. 잘 지냈어요?”

닥터 레프는 반갑게 인사하며 그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미터 다가가던 닥터 레프는 묘한 분위기를 느끼고 걸음을 멈추었다.

아샴이 이상할 정도로 긴장해있었다.

그의 목덜미에 식은땀이 흥건하다. 그리고 이 지역도 평소와 달리 지나치게 조용하다.

닥터 레프는 빠르게 주위 인물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어떤 도시든 아침 여섯 시 쯤 특정한 골목에서 마주치는 얼굴들의 절반은 규칙적인 법이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사람들의 면면은 모두 낯설다.

여긴 지금 통제 구역이다.

‘망했다.’

닥터 레프는 위험을 직감했다.

그녀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잡아!"

사방에서 시민으로 위장하고 있었던 남자들이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

“젠장.”

어디 정보 요원들인가, 아니면 형사들인가.

신문 보다 집어던지고 달려오는 놈.

데이트하다 달려오는 커플.

개 산책 시키다 달려오는 놈.

이제 보니 저 개가 군견이다.

‘어쩌면 이렇게 흔한 첩보 영화 레파토리랑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다 똑같은지.’

죽을 힘을 다해 달리던 닥터 레프는 골목을 돌다가 누군가와 딱 마주쳤다.

CIA 요원 로버트였다.

***

-작전 종료.

무전기에서 로버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표적을 붙잡았다.

상황 통제실에서 모니터 요원들과 함께 지켜보던 류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번 봐도 되죠?”

류영준이 CIA 요원들에게 물었다.

“그럼요.”

류영준은 건물을 내려와 커다란 검정색 밴을 향했다.

차량 안에는 수갑을 채워 포박된 젊은 여자가 정보 요원들과 함께 있었다.

“아풀라로 갔다고 들었는데. 아샴은 언제 구워삶은 거야?”

류영준을 본 닥터 레프는 쓴웃음을 지었다.

“예루살렘에서 일부러 모습을 노출한 다음 볼일을 보고 여기 있는 요원들하고 같이 조용히 사우디로 이동했었어.”

류영준이 말했다.

“우리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은데. 폴리오마바이러스부터 시작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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