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 콜드체인 (10) >
과학이란 무엇이냐고 물으면 과학자들마다 대답이 다를 것이다.
김현택에게는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어 자신과 가족을 지킬 수 있는 무기였다. 똑똑하고 책 꽤나 읽은 놈들이 쓰기 좋은, 성공가도를 위한 지름길.
양혜숙처럼 사회와 정치에 관심 많은 과학자들한테는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었다. 과학에 기반을 둔 실용적이고 실증적인 사고방식과 그 산물들은 문명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다.
과거의 과학자 로잘린드 프랭클린에게 과학은 세상을 정확히 이해하는 창구였다. 현미경이 인간의 인지 범위 내에 미시세계를 공개해 주었듯이, 과학은 한 개인에게 세상이란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주는 사전과 같았다.
‘전부 틀렸다.’
과학에 대한 수많은 이해들은 모두 하나씩 나사가 빠져있거나, 어린애들의 호기심 대상인 말랑하고 낭만적인 얘기들이다.
닥터 레프는 그렇게 생각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야세르가 물었다.
“별 거 아냐.”
야세르는 닥터 레프의 찻잔에 쉐이를 조금 따라주었다.
"......."
“약 먹을 시간 아냐?”
야세르가 물었다.
“맞아. 요즘은 정신이 없어서 자꾸 깜빡깜빡하네. 고마워. 네가 이런 걸 다 기억해줄 줄이야.”
닥터 레프는 가방에서 약을 꺼내어 한 알 삼켰다.
“그거 안 먹으면 어떻게 돼?”
“쓰러져. 죽을 수도 있고.”
닥터 레프가 말했다.
그녀가 이사야 프랭클린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의 발생학 연구소에서 태어나던 시절부터 달고 살았던 고질병이다.
“내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알려줬나?”
닥터 레프가 물었다.
“유전자 조작해서 낳았다며? 엘시인가 뭔가 하는 과학자가.”
“냉전 중에 미국은 극도의 공포에 질려 있었어. 사실 그 시대에 안 그런 사람이 어딨었겠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시점부터 과학은 인간의 통제범위를 넘어서버린 거야.”
닥터 레프가 말했다.
“인류도 진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겠지. 그래서 핵무기를 막아낼 정도로 강력한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과학자, 또는 히틀러 이상의 통솔력으로 세상을 장악할 수 있는 지도자, 그도 아니면 마르크스처럼 혁명적인 사상으로 정치 수반을 새롭게 다듬을 수 있는 사상가 ……. 미국에는 그런 게 필요했어.”
“생명체를 창조할 수 있는 과학자를 만들고 싶어했다며?”
“그건 내 어머니의 망상이었지. 미국 정부하고는 입장이 달랐어. 웃기는 일이지. 그런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닥터 레프가 말했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태어났어. 덕분에 내 어머니와 세포생물학적인 나이가 똑같지.”
“약 먹는 것도 그것 때문이야?”
“맞아. 나는 골수 기능이 좀 맛이 가버려서……."
“류영준한테 고쳐달라고 해보지?”
“미쳤어?”
“농담이야.”
손을 내젓는 야세르를 보면서 닥터 레프는 피식 웃었다.
“폴리오마바이러스는 어때?”
“계속 생산중이야.”
“지금 얼마나 있지?”
“3백만 명 정도 감염시킬 분량.”
“아직 멀었군.”
“표적이 될 만한 요인들한테만 감염시키기에는 적절해.”
“민간 피해가 발생하면 안 돼. 알고 있지?”
닥터 레프가 못 박듯이 확인했다. 야세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 닥터. 내가 책임지고 완벽하게 할 테니까.”
“고마워.”
닥터 레프가 말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내 수명도, 우리의 작업도.”
“얼마나 남았는데?”
야세르가 물었다.
“글쎄. 길어도 몇 달 이내가 아닐까.”
“……. 내가 오랜 친구로서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좀 들어줄게."
“새삼스럽게 굳이?”
닥터 레프가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앞으로 못 만날지도 모르잖아.”
"......."
닥터 레프.
본명은 이사야 프랭클린.
과학계에서 가장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과학자다.
그녀는 미국의 그룸 레이크 공군 기지 내의 유전체학 연구소의 발생학 연구실에서 태어났다.
미국의 차기 지도자네 뭐네 하면서 온갖 최고급 교육으로 육성받다가 다섯 살 무렵에는 버림받았다.
‘냉전이 끝났기 때문에’
투명한 척, 깨끗한 척, 민주적인 척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사야 프랭클린의 존재는 그 자체로 미국의 치부였다.
소련과의 분쟁에서 공포에 질려있었다는 증거, 그리고 온갖 비윤리적 연구의 집약체.
그녀는 정의롭고 민주적인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였다.
상부에서 프로젝트 종료 및 ‘연구물’ 폐기 명령이 내려왔다.
엘시는 그 명령을 따르는 대신 이사야 프랭클린을 데리고 도주했다. 그녀의 고향이었던 팔레스타인에 들어와 숨었다.
“내 어머니는 아직도 내가 그때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할걸. 사실 그때 나는 연구소 사람들이 날 죽이려 한다는 걸 다 알고 있었는데. 그래서 유서까지 쓰고 있었는데 말이야.”
닥터 레프는 웃으면서 차를 조금 마셨다.
고향에서는 평범한 모녀로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심각한 착각이었다.
이사야 프랭클린의 외모는 샛노란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앵글로색슨.
게다가 아버지는 없고, 어머니인 엘시는 미국에서 오래 살다가 애와 함께 야반도주하듯 빈손으로 입국한 여자다.
고향의 유대인 사회와 가족들은 그들을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미국 가서 문란하게 행동하다 백인 아이를 데리고 돌아온 년.’
무슨 민족 역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엘시는 그곳에서 갖은 핍박을 받았다.
엘시는 이사야 프랭클린의 조그만 손을 붙잡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고생했겠군.”
야세르가 말했다.
“장난 아니었지. 시장에서 식재료를 사다가 그냥 갑자기 끌려가서 두들겨 맞는 게 일상이었어.”
“너도 맞았어?”
“가끔. 그래도 난 덜했어. 어머니가 엄청나게 얻어터졌지. 내 눈앞에서 발로 짓밟고 침을 뱉고 몽둥이로 후려치는 거야.”
닥터 레프가 말했다.
“그 사람들 아직 살아있냐? 네 성격에 싹 다 죽였을 것 같은데.”
“내가 죽인 게 아냐.”
닥터 레프가 피식 웃었다.
“우리가 살았던 마을은 가자 지구의 촌구석이었어. 거기에 수도가 설치돼있었는데 우리 모녀는 그걸 쓸 수 없었거든. 정말 간단한 상수도 시스템 하나 마련해놓고 대단한 걸 돈 들여 설치한 것처럼 우쭐대면서 우리는 못 쓰게 했지.”
그녀가 말했다.
“그래서 나랑 엄마는 마을에서 10 킬로미터나 떨어진 강에서 물을 길어 와야 했는데, 돌아와보니 전부 불바다인 거야.”
“불바다?”
“이스라엘 공군이 거기다 백린을 떨어뜨렸거든. 전부 다 불타 죽었어.”
"......."
“재밌지?”
닥터 레프는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정말 웃음이 빵 터져서, 평생 웃을 웃음을 다 웃었어. 엄마가 놀라서 왜 웃냐고 물을 정도로. 근데 그 상황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잖아. 우리한테 그렇게 악마 같았던 아랍인들이 더 큰 포식자들 앞에서는 그냥 날파리 같았던 거야. 그냥 웃음밖에 안 나왔어.”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그때 과학이란 게 무엇인지 깨달았지. 그건 기득권이 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이야. 세상을 바로 본다는 것도 헛소리고, 문명을 발전시킨다는 것도 그냥 명목일 뿐이야.”
"......."
“과학이란 건 미국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게 해주는 힘이야. 끝. 더 이상 정확한 정의는 없어.”
닥터 레프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이제는 류영준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느낌이지만.”
"......."
야세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닥터 레프는 한숨을 내쉬면서 의자에 기대었다.
“우리는 로잘린을 만나야 돼. 로잘린만이 유일한 희망이야.”
그녀가 말했다.
“내가 차세대 병원에서 로잘린이라는 어린애 만났다는 거 얘기해줬지?”
야세르가 물었다.
“응.”
닥터 레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자를 쓰고 가방을 멨다.
“어디 가는 거야?”
“아샴을 만나기로 했어.”
“걔 아직도 만나?”
“그래도 그 멍청이가 우리 돈줄이야. 조금은 더 뽑아먹어야지.”
***
압둘 아샴은 30분 전부터 극도의 공포에 질려 있었다.
전 세계 10대 한정으로 판매된 맥라렌을 큰 형의 허락 없이 끌고 나갔다가 박살냈을 때보다 더 무서웠다.
“이제 기회는 두 번 남았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이 미친놈이 아샴 사에 들어와서는 다짜고짜 닥터 레프에 대해 아는 것을 전부 내놓으라고 했던 것이다.
“닥터 레프요? 그게 누굽니까?”
압둘 아샴은 당연히 모른 척 시침을 뚝 떼고 반응했는데, 류영준은 묘한 표정으로 웃더니 맞은편에 앉았다.
“아샴 대표님. 당신의 슈퍼카를 같이 타고 다니던 금발의 미인입니다. 모르세요? 아샴 사에 취업해서 한동안 일하기도 했다고 들었는데요.”
"......."
“본명은 이사야 프랭클린. 이렇게 생긴 여잡니다.”
류영준은 닥터 레프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 여자는 지금 국제 1급 수배범으로, GSC와 신장 위구르에 생물 공격을 감행한 고위험군 테러리스트입니다.”
“테러리스트요?”
“블레셋이라는 회사를 창립시키는 데 일조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그 회사에서 지금 쓰고 있는 보툴리누스 균주를 공급하기 위해서 아샴에 잠입해 그 유통망에서 균주를 빼돌린 겁니다.”
압둘은 빳빳하게 굳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지금 이 상황에 대한 해석이 빠르게 굴러가고 있었다.
“어떤 관계인지 솔직히 얘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압둘은 침을 꼴깍 삼켰다.
여자 조심해야 된다는 아버지 말이 이렇게 가슴에 와닿은 건 처음이다.
테러범이랑 만나면서 돈도 대주고 물건 공급망도 대주고 전혀 몰랐다고 하면 왕가에 대체 무슨 먹칠이 될까?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는 이런 사람 모릅니다.”
압둘이 잡아뗐다.
“그래요?”
“네."
“아샴 대표님 . fMRI라고 아십니까?”
류영준이 물었다.
“fMRI요?”
“뇌혈류영상을 측정하는 기계입니다. 이걸로 뇌의 어느 부위가 활성화되는지 알 수 있죠. 거짓말을 하면 전두엽과 측두엽, 변두엽 부위에 혈류 공급이 늘어나면서 fMRI상에서 관찰됩니다. 미국에서는 NO LIE MRI 같은 회사가 이걸 이용해서 거짓말 판별 서비스도 하고 있죠.”
"......."
“근데 저는 사실 fMRI를 쓰지 않아도 사람의 거짓말을 가려낼 수 있는 신통한 능력이 있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앞으로 두 번까지만 거짓말을 더 들어드리죠.”
“뭐……. 제가 거짓말을 하면 뭘 어쩌겠다는 겁니까? 류 박사님이 아무리 대단해도 민간인 아닙니까? 저는 사우디 정부인 왕가의 핏줄입니다. 미국을 사주해서 전쟁이라도 치겠다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류영준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콜드체인 같은 걸로 절 협박하시려는 겁니까? 카르푸인지 뭔지 하는 그 삼류 유령 회사 같은 데다 콜드체인을 넣고 우리 회사를 경쟁에서 밀어내겠다고? 제가 그런 협박에 움츠러들 것처럼 보이십……."
“어차피 세계의 발전소 대부분은 석유가 아니라 석탄이나 천연가스로 돌아가는 것이고.”
류영준이 말했다.
“전기차는 ‘발전 효율’이 아니라 ESS 시스템 같은 ‘전력 적재 효율’과 ‘충전 속도’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아직 태양 전지의 덕을 보기엔 갈 길이 멀고. 그래서 석유는 한동안 계속 차량과 선박과 군수산업에서 쓰일 테니 경쟁력이 유지된다. 이렇게 생각하고 계시죠?”
"......."
“제가 태양 전지를 개발하는 데 딱 3주 정도 걸렸습니다. 테슬라에 연락해서 차량용 배터리의 전력 적재량 증진과 충전 속도 증진을 이뤄드리겠다고 연락할까요? 태양 전지가 있는 이상 그거 제 손에선 다음 달 안에 끝낼 수 있습니다.”
"거……뭐라고요?”
"그리고 대장균에서 메타볼리즘을 조금 만지면 포도당을 휘발유로 만들 수 있습니다. 어차피 전부 탄소 복합체 아닙니까?"
"......."
“아샴 대표님.”
류영준이 말했다.
“……네, 네?”
“닥터 레프를 잡고 싶습니다. 협조해주세요.”
“어……어떻게요?”
“그 사람을 여기로 불러주십시오.”
“……저한텐 연락처가 없습니다.”
압둘의 뇌에서 변연계가 활성화되었다.
“이제 한 번 남으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에이젠바이오가 석유를 생산해서 사우디에 팔 겁니다.”
류영준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