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 콜드체인 (7) >
“그럼 블레셋이 보툴리눔톡신 시장에 뛰어든 것도 웅담제약이랑 비슷하군요?”
류영준이 물었다.
“블레셋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홍명운이 물었다.
“맞습니다.”
“하지만 거기는 아니에요. 저희도 이미 의심해봤죠.”
“어떻게 아닌 줄 아시죠?”
“거기랑 우리가 엮일 일이 전혀 없으니까요. 직원들 대부분이 아랍인이라서 영어 할 줄 아는 사람도 몇 명 안 되는 곳이에요. 심지어 지금 시점 기준으로도 말이에요.”
홍명운이 말했다.
“4년 전에 창립 당시에는 진짜 직원 다 합쳐서 열 명 안팎이었을 걸요. 그런 곳에서 한국까지 날아와서 제약계 굴지의 대기어……."
홍명운이 말을 뚝 멈추었다.
그는 류영준의 눈치를 슬쩍 보며 말을 이었다.
“그……중견기업……인 라이프톡신에 들어와서 보툴리눔톡신 균주 스탁 (Stock)을 훔쳐간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우리 회사 보안이 좀 허술한 건 인정하는데, 그 정도로 구멍이 슝슝 뚫려있지는 않습니다.”
“운송업체 아샴이 거기 들락거린다면서요?”
“에이, 아샴이……."
홍명운은 뭔가 말하려다가 삼키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설마요. 아샴, 그 기업 대표는 회사 운영을 거의 취미로 하는 사람이에요.”
“취미로?”
“사우디 왕자 중 하나거든요. 금수저 위의 다이아 수저까지 압살한다는 ‘유전 수저……그게 아샴 대표인 압둘 아샴입니다.”
“그렇군요.”
“그런 사람이 한국에서 남의 회사 균주를 훔치라고 지시할 리가 없잖아요.”
“그냥 배송 담당자가 블레셋한테 뒷돈 받고 훔쳤을 수도 있죠.”
“에이. 그렇게 일반인이 저지르기엔 너무 큰 범죄예요. 배송하는 사람들 대부분 고등 교육도 못 받고 배송 일 해서 가족들 먹고 사는 소박한 소시민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런 미친 짓을 해서 얻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창립 당시 블레셋한테 돈도 없었을 텐데요.”
홍명운이 손을 내저었다.
“훔쳐갔다는 균주는 액체 질소에 보관돼있던 건가요?”
류영준이 물었다.
“맞습니다.”
"......."
확실히 아무나 할 수는 없는 범죄다. 보안을 뚫는 것은 둘째 치고 액체 질소 탱크에서 맹독성 균주를 찾아내어 꺼내고 감염이 없고 균이 죽지 않도록 보관해서 중동까지 가지고 돌아가야 한다.
일반인이 저지를 만한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 균주가 블레셋으로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아보였다.
그럼 어쩌면…….
“아샴은 국제 운송업체이니 다양한 인종이 있겠죠?”
류영준이 물었다.
“맞습니다.”
류영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홍 대표님.”
“근데 이 균주 DNA 데이터, 혹시 웅담 제약에도 보내셨습니까?”
홍명운이 물었다.
“안 보내셨으면 제가 지금 연락해서 소송 정리하고 슬쩍 마무리 지었으면 싶어가지고......."
“이미 보냈습니다.”
“……그렇군요.”
“네. 돈 좀 깨지시겠네요. 어쩔 수 없죠.”
***
홍명운이 나간 후, 류영준은 김영훈에게 펠루스 대통령의 연락처를 받아서 직접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류영준입니다.”
-류 대표님!
“전에 김 이사님 부탁으로 이집트와 그 일대에서 이사야 프랭클린이라는 과학자를 찾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혹시 진척된 게 있나요?”
-블레셋하고의 연결고리는 거의 찾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사야 프랭클린은 팔레스타인 인민해방 전선에 들어가서 테러 활동을 했는데, 그 시점부터는 행적을 추적하기가 어렵네요.
“그 전 기록은 있습니까?”
-이집트는 아니고……. 그, 상관없을지도 모르지만 사우디에서 일한 기록이 있습니다.
“사우디요?’’
-국제 운송업체 아샴에서 근무했대요.
“근무 기록을 확인하신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아샴 본사의 직원들한테 이사야 프랭클린에 대해 아는지 물었더니 안다고 했대요.
“그래요?”
-외국인들이 많은 회사이긴 하지만, 젊은 금발 백인 여성이 흔치는 않으니까요. 애초에 남초적인 업종이라서 여성이 운송업을 직접하는 경우도 거의 없고. 이사야 프랭클린이 거기서 몇 달 정도 일했는데, 그때 현지인들 사이에선 꽤 유명했던 모양입니다.
“아……."
류영준은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확실한 건 아닌데, 이사야 프랭클린이 아샴 컴퍼니의 오너인 압둘 아샴하고 굉장히 절친한 사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요?”
-아예 대놓고 압둘 아샴의 차를 타고 다닌 적도 있고, 그 회사에 취직한 것도 거의 낙하산 수준으로 그냥 압둘이 꽂아버렸대요. 어디 상장된 회사도 아니고 석유 재벌이 취미 삼아 굴리는 회사니까 자기 맘대로 할 수 있었겠죠.
“알겠습니다. 많은 도움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저……. 뇌사 임상은 언제 진행할 수 있을까요?
“차세대 병원에서 출장 의사들의 스케줄을 맞추는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마 이번 주말 쯤에는 날짜가 확정되어 연락이 갈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의료진이 방문할 때 저도 같이 갈 것 같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같이 오신다고요?
“네. 미구엘 교수님이 안 계셔서 뇌실하대로 줄기세포를 주입하는 방법으로 다른 기술을 사용할 거거든요. 그래서 제가 가는 겁니다.”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류영준은 전화를 끊었다.
-줄기세포 주입 때문이 아니라 블레셋 때문이죠?
로잘린이 물었다.
“그래.”
류영준이 말했다.
“가서 닥터 레프를 잡을 거야.”
-하지만 꽁꽁 숨어있을 텐데요. 블레셋은 모른 척할 테고요.
“아샴을 털어야지.”
류영준이 말했다.
“거기서 닥터 레프를 잡고, 균주를 빼간 걸 확인하면 그걸 토대로 라이프톡신 대표한테 연락해서 블레셋을 고소하라고 할 거야.”
-결국 웅담제약한테 가는 보상은 블레셋 지갑에서 나오겠네요.
류영준은 전화를 들어서 비서실로 연결했다.
-네, 유송미입니다.
유송미 비서가 전화를 받았다.
“유 비서님. 지금 홍보실에 연락해서 에이젠바이오 제7 연구소가 어마어마한 아이템을 만들었다고 보도자료 돌려주세요.”
-아이템이요?
“지속 가능하고, 공해가 없고, 지대 면적 소모도 적으며 설치와 분해가 간편해서 지역간의 이동이 가능한 차세대 발전 시스템입니다.”
-네?
“클로로필 태양 전지를 공개한다고 알려주세요.”
류영준이 말했다.
***
스위스 제네바와 프랑스 사이의 국경지대에는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 (CERN)가 있다.
물리학계의 성지나 다름없는 곳이고,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입자 물리 연구소다.
여기서 일하고 있는 세계적인 핵물리학자이자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피비로바 박사는 올해 1월 중순 무렵, 노벨 물리학상 수상 후보를 추천해달라는 노벨 위원회의 편지를 받았다.
그리고 피비로바는 수상 후보로 류영준을 추천했다.
“그 사람은 생물학자야, 멍청아.”
동료 과학자인 해링턴은 그가 낸 추천서를 보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비웃었다.
“하지만 다른 괜찮은 인물이 없으니 어쩔 수 없어.”
피비로바 박사는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추천 사유로는 뭘 썼나?”
해링턴이 물었다.
“MRI로 포도당 양성자를 추적하는 방법을 찾아낸 공로를 썼지.”
간암 환자 이윤아의 몸에서 암세포가 전이된 걸 찾아낼 때 썼던 방법이다.
“진심으로 그게 물리학상을 받을 만한 아이템이라고 생각하나?”
“그 정도는 아니긴 한데, 에이, 모르겠어. 19세기는 물리학의 시대였고 20세기는 화학의 시대였는데 21세기는 생물학이야. 노벨 화학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바이오 분야에서 계속 꾸역꾸역 먹어왔잖아. 물리학도 이제 슬슬 생물학하고 손잡아야 할 때가 됐다고.”
피비로바 박사가 말했다.
“이게 그 시작이 될 수도 있지. 다른 마땅찮은 후보도 없잖나?”
여기까지가 지난 1월 눈 내리던 아침에 나눴던 대화다.
그때까지만 해도, 피비로바 박사는 류영준이 진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를 추천한 이유는 점점 매너리즘에 빠지는 물리학계에 대한 경종이자 장난스러운 반항 같은 것이었다.
근데 이제 모르겠다.
아침에 출근하며 커피를 뽑으려고 연구소 1층의 카페에 들렀던 피비로바는 TV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보았다.
[에이젠바이오, 클로로필 태양 전지 발명]
‘클로로필이 내가 아는 그 클로로필인가?’
피비로바는 눈을 가늘게 뜨며 휴대폰을 꺼냈다.
손이 떨렸다.
아직 어떤 건지 제대로 확인한 것도 아닌데 이미 어떤 미친 발명인지 알 것 같았다.
휴게실에 있는 과학자들 모두 표정들에 경악이 번져 있었기 때문이다.
피비로바는 휴대폰에서 뉴스를 확인했다.
[류영준 대표, “10년 이내에 전기는 공기처럼 흔한 공공재로 만들겠다.” 약속]
[ESS 시스템을 보급해서 이를 토대로 생산된 전력을 저장한다면 모든 발전소를 태양 전지로 대체하는 것도 가능]
[클로로필 태양 전지, 토지 소비 면적 대비 발전 효율, 기존 기술의 12배, 1MW당 100제곱미터로 현존하는 모든 발전소 중 최고 효율.]
[실리콘 대신 이용한 클로로필로 경량화에도 성공, 차량에 실어서 이동식 태양 전지로 쓸 수도 있어.]
[기존 태양 전지와 달리 거의 모든 파장대의 빛을 흡수. 거의 100%의 에너지 전환 효율로 열섬 현상도 없어.]
[발전소에서 화석 연료의 영구 퇴출 가능성 높아]
[한번 설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 가능해서 추가 지출이 없는…….]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얼빠진 표정으로 피비로바가 중얼거렸다.
땡그랑!
피비로바 박사의 등 뒤에서 날카로운 소음이 들렸다.
해링턴이 빵 위에 바르던 잼 통을 떨어뜨렸다. 그도 한 손에 휴대폰을 들고 뉴스를 보고 있었다.
“태양 전지를 만들었다고? 제약 회사가? 그리고 무슨 효율이 이게 무슨……."
***
전력 생산 사업은 다른 수많은 산업의 근간이 되는 기반 사업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정부가 직접 운영하거나 공기업이 관리하는 경우가 많다.
에이젠바이오 제7 연구소는 클로로필 태양 전지를 대량 제작하여 세계 곳곳의 정부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정부들을 상대로 시제품 테스트 판촉을 한 것이다.
화력 발전소에 비해 공해 발생량이 전혀 없으며 대지 면적 소모량도 더 적다.
수력이나 풍력 발전에 비해 위치의 한정성이 덜하다.
원자력 발전에 비해서 위험성이 전혀 없다.
그리고 그 어떤 발전소보다도 에너지 전환 효율이 높으며 설치 및 유지비용이 가장 저렴하고, 반영구적이며 추가 자원 소모가 없고, 설치 및 분해와 이동이 가능하며, 모듈의 개수에 따라서 소규모로 이용할 수 있고 개인화가 가능하며 가볍고 안정적이고…….
“한 마디로 모든 발전소에 대해서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는 소리네.”
콘슨앤커슨의 대표 데이비드는 신문을 읽으면서 감탄했다.
“헛, 참. 피카추야 뭐야. 무슨 도라에몽 주머니처럼 전기가 마법처럼 뚝딱 나오는 수준인데.”
그는 신문을 접어 옆으로 던졌다.
“이제 우리 동네 괴물이 옆 동네도 먹어치우는군요.”
콘슨앤커슨의 CTO 벤터가 말했다.
“아니요. 류 박사는 생물학에 집중하는 사람입니다. 이번 것도 의료적인 일일 거예요.”
데이비드가 말했다.
“아마 이걸로 뭘 한다면……."
같은 제약업계의 대표로서 데이비드는 태양 전지의 경량화 및 효율 극대화로 ‘이동 가능한’ 상태라는 게 의미하는 바를 안다.
“콜드 체인을 만드는 데 쓰겠죠.”
그가 말했다.
“과연 아샴 같은 회사한테 태양 전지를 판매할지, 아니면 독점한 다음 직접 콜드 체인 운송업을 시작할지. 칼자루를 어떻게 휘두를지 궁금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