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 콜드체인 (4) >
카이로 시내에서 앨 버스탄 스트리트를 따라 이동하면 꽤 세련되고 큰 건물 하나가 나타난다.
옛날 에이바이오 사옥보단 조금 작지만 활기가 넘치는 곳이다.
블레셋.
중동 제약 산업의 샛별이자 아프리카의 하이테크를 상징하는 회사.
이집트라는 위치마저 의미심장하다.
바로 이웃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분쟁과 중동 전쟁에 깊이 연관돼있고, 동시에 고대 과학의 정수라 할 수 있는 것들이 유적으로 남아있는 땅이다.
어쩌면 블레셋은 이 인근 국가들에게 중요한 메타포일지도 모른다.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현대의 문제들을 모두 극복하고, 과학적이고 평화로운 세상이 올 거라는 희망이 이곳에 있다.
“안녕하세요.”
야세르가 김영훈을 반겨주었다.
“반갑습니다.”
김영훈은 야세르와 인사하고 미팅룸으로 이동했다.
“갑자기 약속을 잡고 찾아온 건데 흔쾌히 맞아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에이젠바이오에서 오신 건데요. 당연한 일이죠.”
“말씀 드렸듯이, 저희 대표님께서 블레셋에 투자를 하고 싶어하십니다.”
“네, 그런데 얼굴을 보고 얘기하자고하셔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했지만, 유선상으로 말씀드렸듯이 저희 회사는 지금 투자 유치에 그리 목말라 있지는 않습니다.”
야세르가 공손하게 말했다.
“보톨리눔 톡신을 만들어서 앨래건의 시장 지분을 상당 부분 빼앗으셨죠. 많이 벌었나요?”
“직원들 전부 성과급 1,000 퍼센트씩 줄 정도였습니다.”
야세르가 흐뭇하게 웃으며 답했다.
“정말 대단하군요. 어떻게 그런 기술 혁신이 가능했는지 궁금하네요.”
“그 부분은 기업 비밀이죠.”
직원 한 명이 차 두 잔을 가지고 미팅룸에 들어왔다.
“쉐이라고 부르는 음료입니다. 외국에는 홍차라고 소개돼있기도 한 모양인데 약간 다를 겁니다.”
“감사합니다. 막무가내로 찾아온 건데 이런 걸 다 내주시고.”
“손님 접대는 무슬림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 중 하납니다.”
야세르가 말했다.
“그리고 쉐이는 접대의 기본이죠. 무슬림은 술을 먹지 않으니 이걸 대접하는 겁니다. 여기 설탕과 박하, 우유도 있으니 원하시는 대로 드세요.”
그리고 야세르는 자신의 잔에 설탕을 무려 아홉 스푼이나 넣었다.
저게 다 녹기는 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제가 단 걸 좋아하거든요.”
야세르가 말했다.
“그렇군요.”
“재밌는 사실 하나 알려드릴까요? ‘당’을 가장 좋아하는 신체 기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야세르가물었다.
“무엇인가요?”
“바로 ‘뇌’입니다. 뇌는 순수한 포도당만을 에너지원으로 이용하죠. 굉장히 입맛이 까다롭고 소화하기 쉬운 것만 먹는 깍쟁이 미식가입니다.”
야세르가 말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얻은 강력한 에너지를 바탕으로, 사람의 뇌는 방대한 정보를 처리하고 다른 고등 동물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상상력과 추리력을 동원해서 논리를 만들고 과학을 발전시키고 하는 거죠.”
“재밌군요.”
“재밌는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 포도당을 좋아하는 조직이 사람 몸에는 또 하나 있다는 거예요.”
야세르가 말했다.
“그건 뭔가요?”
“암 조직입니다.”
“암 조직……."
“생명의 신비란 정말 문학적이죠. 뇌와 암. 두 조직이 같은 에너지원을 쓰는데 하나는 생명체의 생명 유지를 위해 초월적인 힘을 발휘하고, 또 하나는 자신의 이기만을 위해 증식하려고 주위 모든 조직들을 말살시키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과학도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어떤 과학자들은 암 덩어리죠. 그들은 세계를 병들게 하면서 자신의 자산만 종양처럼 증식시킵니다. 그리고 어떤 과학자들은 인류의 두뇌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야말로 지성의 보고가 되어서 공공의 안녕과 환경을 위해서 분투하는 거죠.”
"......."
“보톨리눔 톡신이 세계 최악의 맹독이지만 온갖 질병의 치료제로 쓰이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보톨리눔 톡신은 주름 개선이나 다한증 정도에 쓰였지만 이제 점점 만병통치약이 되어가는 분위기거든요.”
김영훈이 화제를 끌었다.
“네. 맞습니다. 최근에는 요실금이나 변성발성장애 같은 목소리 문제, 연축사경, 이갈이, 편두통 등 별별 분야에 다 투입되는 분위기죠."
“신경을 국소적으로 죽일 수 있다는 게 의학적인 응용 여지가 크니까요.”
“맞아요. 에이젠바이오는 줄기세포로 신경을 ‘되살려서’ 사람을 치료하고, 우리는 과도하게 흥분하는 신경을 ‘죽여서’ 사람을 치료하죠. 양방향 모두 필요한 과학입니다.”
“네. 그래서 말인데, 에이젠바이오만큼의 잠재력을 보톨리눔톡신에서 기대할 수 있다고 우리가 가정하고, 그 이용 목적이 확장된다면 블레셋에서 보톨리눔톡신 약을 판매하는 나라들도 좀 바뀔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김영훈이 말했다.
“나라들요?”
“지금은 미용 목적으로 보톨리눔톡신 시술이 발달한 선진국에 주로 판촉하시지만, 신경 치료 쪽으로 쓴다면 저개발국에서도 수요가 상당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죠.”
“에이젠바이오처럼 아예 차세대 병원을 설립하고 거기서 신경 치료 허브를 키울 수도 있을 테고요. 그럼 중동에 의학 허브가 생기는 거죠.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던 이 화약고 같은 지역에 치유와 건강을 상징하는 회사가 되는 겁니다.”
“듣긴 좋은 얘기지만 저희 회사한테는 아직 좀 이르군요. 혹시 그런 쪽으로 자금 투자를 권유하시려는 거라면……."
“아닙니다.”
김영훈이 고개를 저었다.
“저희는 콜드체인 쪽에서 협업을 하고 싶어서요.”
“콜드체인이요?”
“에이젠바이오는 이제 단순한 생물 제약 회사를 넘어서 환경 에너지 문제까지 다루는 전방위적인 과학 기업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식품이나 의약품의 유통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콜드체인 아니겠어요?”
“제가 이집트에 살고 있으니 적도의 저개발 국가들에서 유통 비용이 얼마나 막대한지는 잘 알고 있죠.”
“그럼 보톨리눔톡신이 선진국 말고, 말씀하신 지역의 나라들한테도 유통된다면 블레셋사 입장에선 콜드체인 유지 방법이 하나의 문제로 떠오르지 않겠습니까?”
그가 말했다.
“요점을 알겠군요. 그 콜드체인 유지 기술을 제공하시겠다는 거죠? 그건 개발된 겁니까? 어떤 건가요?”
“개발 초기입니다.”
김영훈이 답했다.
“그럼 아쉽지만 당장 계약을 맺고 어쩌고 할 수 없겠는데요.”
야세르가 말했다.
“에이젠바이오에서 기술 개발은 눈 한번 깜짝하면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개발이 완료됐다면 그냥 제품을 블레셋에 팔았겠죠. 협력 제안을 하는 대신에요.”
“개발 단계에 있으니까 우리가 서로의 이익을 맞춰볼 여지가 있다. 이거군요?”
“어떻습니까? 저희가 콜드체인 기술의 개발 중간 단계에서 자료를 좀 보내드리면 그 후에 검토하셔도 좋습니다.”
“그래주신다면 저희 대표님하고 이사진들과 같이 상의해보겠습니다.”
야세르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 대신.”
김영훈이 덧붙였다.
“블레셋에서도 보톨리눔톡신 생산 혁신의 과정 정도는 알려주셔야 합니다. 어떤 지놈 엔지니어링(genome engineering)으로 이런 생산력 증진이 발생했는지. 그래야 우리도 투자의 합리성을 평가할 수 있으니까요.”
"......."
야세르는 잠깐 생각하다 답했다.
“알겠습니다.”
“차 잘 마셨습니다. 다음에 또 뵙죠.”
김영훈은 야세르와 악수를 나누고 떠났다.
그가 완전히 나가고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한 다음, 야세르는 셔츠 안주머니에서 조그만 마이크를 꺼냈다.
“어땠어? 프랭클린.”
야세르가 물었다.
-나쁘지 않아.
젊은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이사야 프랭클린, 또는 닥터 레프.
그녀는 야세르를 비롯한 몇 명의 과학자와 함께 블레셋을 창업한 숨겨진 오너다.
“지금 어디에 있어?”
-팔레스타인 인민해방 전선 군인들하고 같이 있지.
여자가 말했다.
“이따 회사 앞에서 봐. 이 건에 대해 얘기 좀 하자.”
***
팔마리아 로마타 (Palmaria romata)는 팔마리아 속에 속하는 해조류의 일종이다.
특이하게도 500 피트 이상의 깊은 바다에 사는데 지금은 그게 에이젠바이오의 제7 연구소 앞으로 대량 몰려와있었다.
“아니 뭔 수산물 시장입니까? 이게 다 뭐예요?”
충격을 받은 박동현이 출근길에 멈춰섰다.
수많은 연구원들이 내려와서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대표님 거야.”
천지명이 말했다.
“에이젠바이오가 이제 해산물 양식에도 들어가는 거예요?”
“말이 되냐? 이걸로 태양 전지를 만들 거래.”
“태양 전지를요? 이걸로요?”
“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의 등 뒤에서 류영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두 사람 사이로 가까이 들어왔다.
“그리고 동현 씨. 이거 겉보기에는 미역 같이 생겼지만 상당히 귀한 거예요. 맛도 없고 쓸모없어서 양식을 안 하거든요. 그러니 수산시장 가도 없을겁니다. 친척뻘 되는 팔마리아 팔마타는 좀 있을지도.”
“대표님 본사로 안 가시고 여기로 출근하신 거예요?”
“네. 김영훈 이사님한테 일 좀 맡기고 왔어요.”
“지난번엔 제6 연구소로 출근하시더니……. 이 다음은 제1 연구소 쪽인가요?”
천지명이 물었다.
“네에. 한 바퀴씩 순회연구 하려고요.”
류영준이 웃으며 받아쳤다.
“근데 김 이사님 귀국하셨어요?”
박동현이 물었다.
“그저께요. 오시자마자 바로 일 시켜서 좀 죄송한데, 저는 여기서 태양 전지 개발 연구를 좀 하고 싶었거든요.”
류영준이 말했다.
“이걸 빨리 해치워야 진행시킬 수 있는 것들이 좀 있어서.”
“혹시 저희도 이 프로젝트 같이 하게 됩니까?”
박동현이 불안한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중국 귀빈들 인공 장기도 다 채워줬고, 이제 인공 장기 공급 쪽은 생산 라인을 따로 만들어서 서비스 제품화를 할 예정이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지금 할 일 없잖아요?”
“하지만 저희는 태양 전지 개발 같은 거 해본 적이 없는데요……."
“제약 회사에서 해본 적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생명창조 팀이 못하면 아무도 못해요. 전문가도 초빙해뒀으니 갑시다.”
류영준은 팔마리아 로마타가 쌓인 손수레를 밀면서 말했다.
“이제 점점 이런 레파토리 익숙하잖아요?”
***
잠시 후 실험실에는 생명창조 팀원들이 모두 모였다.
“먼저 로마타의 잎을 분쇄기로 잘게 갈아야 합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예비 실험이니 엄격하게 할 필요 없어요. 제가 집에 있던 도깨비방망이를 가지고 왔습니다.”
류영준은 가방에서 믹서기를 꺼냈다.
“태양 전지 개발 같은 걸 믹서로 한다고요?”
배선미가 당황해서 물었다.
“장인은 연장을 가리지 않는다더니……."
고순열이 중얼거렸다.
“식물 연구하는 팀들 보면 다들 이런 거 써요. 우리 아가로즈 젤 (Agarose gel) 만들 때도 일반 전자레인지 쓰잖아요? 그거랑 비슷한 거죠.”
류영준은 믹서기를 돌려서 로마타의 잎 500그램을 완전히 갈아버렸다.
걸쭉한 액체 같은 상태가 되었지만 사실 세포들은 거의 다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 안에 있는 클로로필을 추출하려면 세포도 파괴해야한다.
류영준은 라이시스 버퍼 (Lysis buffer, 세포 용해액)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Triton X-100 용액을 100 퍼센트 고순도 에탄올과 3대 7로 섞은 다음 마이크로비드 (Microbead)를 넣었다.
그걸 충분히 흔들어 현탁한 후에로마타의 잎 500그램에 500mL만큼 부어주었다. 전부 유리병에 부어서 한 데 모았다.
워터배스 (waterbath)의 온도를 90도까지 올리고, 김이 무럭무럭 나는 뜨거운 물속에 유리병을 담갔다.
5분 간격으로 꺼내어 볼텍스 (vortex)를 해주었다. 열에 의해 흐물흐물해진 세포막이 마이크로 비드에 부딪히며 박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30분간 반응시킨 후. 류영준이 말했다.
“이제 세포막이 다 깨졌고 이 용액에는 틸라코이드의 전자전달계에서 햇빛을 받아서 전자를 띄우는 분자 ‘로마타 클로로필’이 떠다니고 있을 겁니다.”
그는 조명을 가까이 가지고 와서 용액을 밝게 쪼였다.
클로로필은 여전히 활동한다.
[동기화 모드 작동.]
조명의 빛에너지가 클로로필로 구성된 제2 광계로 향했다.
마치 돋보기로 굴절시켜 한 데 모은 빛이 종이를 태우는 것처럼, 태양광은 물분자를 파괴하고 있었다.
수소 원자 두 개와 산소 원자 하나로 이루어진 그 미세한 분자가 분열하면서 고에너지 전자가 튀어올랐다.
팍!
동기화된 류영준의 시각에서는 마치 스파크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