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 콜드체인 (2) >
“태양광 에너지……."
류영준이 현수막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관심 있니?”
반두일이 물었다.
“관심은 있죠. 교수님, 옛날에 게이트 재단에서 콜드 체인 공모했던 거 기억나시나요?”
“네가 그거 지원했었지. 연구비랑 장학금 따내겠다고……."
“서류에서 광탈했죠.”
“그때 네가 썼던 아이디어가 태양광 발전기를 달아서 적도에서 아프리카 내륙 지방에 의약품이나 식품을 전달할 때 냉장을 유지하는 거였던가?”
“맞아요.”
“왜 떨어졌지?”
“그만한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크기의 태양광집적 패널을 선박이나 차량에 설치하고 유지하는 비용이 비현실적이라고요.”
“그렇구나.”
“그리고 흐린 날씨나 밤에 부족한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날이 좋을 때 전력을 저장해야 하는데 그것도 어렵댔죠.”
“그 공모전 결국 누가 됐니?”
“다 떨어졌어요. 사업화 되는 수상자는 없었고, 그냥 신박한 아이디어들에다 표창이나 몇 개 주고 흐지부지 끝났죠.”
“저 세미나 한번 들어볼래?”
“외부인이 들을 수 있나요? 우리 과 세미나도 아니잖아요?”
“류영준이 듣겠다는데 막겠냐, 설마. 그리고 조그만 학회인데, 사전 예약 안해도 현장 발권도 돼.”
류영준은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에이. 됐어요. 학교에 장학금 전달하는 것 때문에 잠깐 들른 거예요. 다시 돌아가야 돼요.”
두 사람은 정윤대 행정관 4층으로 이동했다.
총장실을 방문하기 위해서다.
생명공학부에 펀딩하는 것이지만, 액수가 무려 1,000억에 이르러 학부 사무실에서 자체 처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고! 류 대표님!”
정윤대 총장 염주필은 서류를 작성하다가 류영준이 온 것을 보고 자리를 박차고 튀어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하하, 제가 여기 밑에 마중을 나갔어야 했는데, 앞에 와서 알려주셨으면 나갔을 텐데요.”
“아닙니다. 저희 모교인데요 뭘.”
류영준이 웃으면서 말했다.
“전대 총장님이 횡령했다 어쨌다 하면서 학생들이 집회를 열었을 때 여기 와봤거든요.”
"억......."
염주필이 움찔했다.
“하하……. 아시겠지만 저는 그 이후에 임용된 겁니다. ……아시지요?”
“그럼요. 예산 처리는 아주 투명하게 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그럼요. 저희는 내역도 전부 공개합니다.”
염주필이 웃으면서 류영준을 소파로 안내했다.
“정말 동문 하나 잘 둔 게 이렇게 좋을 수가 없네요. 오늘 류 대표님이 장학금과 연구비로 지원하시는 금액이 통틀어서 1,000억 원이 넘는다고 들었습니다.”
그가 말했다.
“맞습니다.”
“캬아. 저희 학교 전체 등록금 세입 규모가 2,500억 원 정도인데, 학부 하나에 그 절반 가까이 되는 돈을 투자하시는군요.”
“현대 과학은 돈을 부어야 돌아가는 학문이니까요.”
“정말 훌륭하십니다. 반두일 교수님이 진짜 훌륭한 제자를 키우셨네요.”
총장이 거듭 칭찬하며 반두일을 쳐다보았다. 반두일이 끼어들었다.
“영준이 덕분에 저희 학부에서 그동안 사고 싶어서 안달이었던 차세대 염기 분석 장비랑 울트라 센트리퓨즈(Ultra centrifuge)를 사려고 합니다. 하하, 둘 다 억 소리가 나는 물건이다보니 학과 행정실에서 쉽게 건드리질 못했거든요.”
“그런 장비는 공용으로 많이 써야하니까 한 다섯 대 사두시죠.”
류영준이 말했다.
“그래야겠어.”
“아, 근데 우리 학교에 정윤시보 아시죠?”
염주필이 물었다.
“학교 신문이요?”
“예. 거기서 오늘 류 박사님께서 장학금 전달하는 걸 촬영하고 싶다고 저희한테 미리 요청을 했었는데, 불러도 되겠습니까?”
"음......."
사실 밖에서 이런 행사를 하고 사진 찍어서 남기고 홍보하는 게 별로 내키진 않았다.
하지만 그 학교 신문사를 운영하는 기자들도 학생이라는 걸 생각하니 뿌리쳐선 안 될 것 같았다.
“제가 여기 오래 기다릴 수는 없는데, 기자들은 근처에 있나요?”
“지금 수업 듣다가 나왔다고 합니다.”
“제가 수업을 방해했네요.”
똑똑!
말 끝나기 무섭게 누가 문을 두드렸다.
아직 얼굴에 핏기가 생생한, 고등학생 같이 생긴 남학생 둘과 여학생 둘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정윤시보입니다.”
그들은 카메라와 마이크를 가지고 류영준과 총장에게 다가왔다.
“인터뷰 짧게 가능할까요? 그……류영준……선배님……."
여학생 한 명이 마이크를 건네면서 약간 목소리를 떨었다.
“선배라고 불러주셔서 고맙습니다. 학교로 돌아온 기분이라 신선하네요.”
류영준이 말했다.
학생들은 환하게 웃었다.
“오늘 무려 1,000억이나 되는 돈을 학교에 기부하신다고 들었는데요. 맞나요?”
처음 말을 걸었던 학생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맞습니다. 그리고 정윤대만이 아니라 전국의 여러 대학들에 생물학과, 의대, 그리고 학과 관계없이 줄기세포 연구를 하는 연구실에 투자할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전기전자공학부인데요, 혹시 그쪽에는 펀딩이 없나요?”
“하하, 죄송합니다. 이 펀딩은 에이젠바이오나 차세대 병원의 인력 수급을 위해 학생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퍼붓는 걸 목적으로 회사 공금으로 운용되는 겁니다. 마음 같아선 다른 학과에도 투자하고 싶지만 어렵군요.”
“하하, 당연히 그렇죠, 그냥 분위기 좀 환기하려고 한 농담이었습니다. 제가 생명공학과로 전과하겠습니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윤대는 제 모교이기도 하고……. 다른 학과들에도 제 사비로 조금 기부하겠습니다. 학생들 등록금을 한 학기 정도 감면할 만큼은 될 겁니다.”
“우아……."
“정말 감사합니다!”
학생들이 외쳤다.
“본격적으로 그럼 인터뷰 들어가서……."
“그 전에 질문 하나만 드릴게요. 이건 제가 궁금해서 여쭙는 건데 전기전자공학과라고 하셨죠?”
류영준이 물었다.
“네."
“오늘 오는 길에 보니 태양광 에너지 세미나를 한다고 되어 있더군요."
“맞습니다!”
“그거 혹시 대학원 세미나인가요? 외부인도 들을 수 있을까요?”
“안 듣겠다더니?”
반두일이 물었다.
“근데 아무래도 관심이 가서요.”
“외부인도 현장 발권해서 들을 수 있어요.”
학생들이 말했다.
“저희도 오후에 거기 가려고요. 이따 안내해드릴까요?”
“인터뷰 하고요.”
***
김광명 교수는 세미나 시작을 앞두고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지금 과학계 최고의 슈퍼스타 류영준이 학교에 방문했다는 것이다.
무려 천 억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돈을 출신 학부에 지원하기 위해서.
“너희도 나중에 성공해서 우리 과에 투자 좀 하고 그래라.”
김광명은 학생들에게 우스개소리를 했다.
그리고 세미나 강의를 위해 연단에 올라가기 직전엔 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류영준이 대체 전력 세미나에 등록했다는 것이다.
“우리 학회 세미나에?”
소식을 전해온 과사무실 조교한테 김광명이 물었다.
“생물학자가 우리 학회 세미나를? 아니 대체 왜?”
조교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야 모르죠. 등록해달라고 연락이 왔대요. 곧 참석하겠다면서. 몇 개 세션만 듣는대요.”
“내 강의는 아니겠지? 아무리 분야가 달라도 그런 슈퍼스타 대기업 오너가 찾아오는 건 좀 부담스러운데……."
김광명 교수가 말을 흐렸다.
학회 사회자가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다음 세션은 정윤대 전기전자공학부의 김광명 교수님입니다.”
박수가 터졌다.
무대로 올라가던 김광명은 세미나실 출입문이 열리는 것을 발견했다.
류영준이 들어왔다.
“에…….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김광명이 슬라이드를 열었다.
“다들 아시다시피, 기존에는 전력 공급을 석유나 석탄으로 했었는데, 이런 방식은 대기 오염이 심각해서 대체 전력을 많이 찾게 되었습니다. 수력이나 풍력 발전이 한 때 각광받았지만, 장소의 한정성 문제로 보편적인 발전원으로 자리잡지는 못했고, 원자력 발전이 중요한 아이템으로 떠올랐지만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 사태 등을 볼 때, 한번 사고가 터지면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초래하므로 최선의 선택이 되진 못합니다.”
김광명이 말했다.
“태양 에너지는 지구상 어디로 가든 장소의 구애를 크게 받지 않고 에너지를 수집할 수 있으며, 공해가 거의 없고 에너지원이 거의 무한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특히 적도 지방의 저개발국에 유효합니다. 원자력 발전 같은 거대하고 고급화된 발전소를 그곳에 건설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김광명 교수는 류영준을 힐끔 쳐다보았다.
뭔가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표정이다.
“하지만 태양 에너지를 이용하는 데는 큰 장애물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전력 수급의 효율성입니다. 태양 전지의 발전 효율은 10 퍼센트 내외인데, 이는 매우 떨어지는 값입니다. 태양 에너지가 100만큼 들어오면 우리가 그 중에서 전력으로 쓸 수 있는 건 10밖에 안 된다는 뜻입니다. 나머진 전부 열에너지로 날아가죠. 원자력이나 화력 발전이 4, 50 퍼센트. 그리고 수력 발전이 90 퍼센트에 육박하는 걸 생각해보면 정말 떨어지는 값입니다.”
김광명이 말했다.
“두 번째는 태양전지의 원료인 폴리 실리콘이라는 소재의 단점입니다. 가공하는 데 돈과 전력 소모가 상당히 크기 때문에 경제성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수명도 20년 내외로 비교적 짧습니다. 그리고 생산 과정에서 다양한 유독 물질들이 배출되어 과연 이게 정말 친환경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도 생기죠.”
김광명의 강의는 30분 정도 이어졌다.
학생들 중 몇몇은 지쳐가고 있었고, 류영준은 머릿속으로 로잘린과 많은 토의를 했다.
이윽고 질의응답 시간이 되었다.
외부 연사들과 교수들, 학생들이 몇 가지 질문을 던졌고, 김광명이 발표를 마무리하려던 시점이었다.
“질문 있습니다.”
류영준이 손을 들었다.
김광명은 침을 꼴깍 삼켰다.
세미나에 참석한 교수들은 조금 긴장한 채로 류영준의 입에서 어떤 질문이 나오는지 지켜보았다.
“네. 질문 하십시오. 류 박사님.”
김광명이 말했다.
“우선 강의 잘 들었습니다. 제가 이쪽 분야는 잘 몰라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태양광 에너지의 큰 단점 둘을 말씀해주셨는데, 만약 소재를 바꿔서 태양으로부터 전력 수급률을 100 퍼센트까지 높인다면, 태양광 발전 패널을 달고 자가 발전이 가능한 이동식 거대 냉동고를 만들 수 있을까요?”
“이동식 냉동고요?”
“아프리카 같은 적도의 내륙 지역으로 의약품이나 식품을 옮길 때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게 바로 콜드 체인입니다. 어떤 의약품들은 영하 70도 수준까지 유지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요, 날씨와 도로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전달이 아예 불가능한 경우도 있습니다.”
김광명은 그제야 류영준이 왜 이 세미나에 참석했는지 이해했다.
“가능합니다. 하지만 밤중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도록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겠군요.”
“그런 게 있나요?”
“ESS (Energy Storage System) 라고 부르는 겁니다. 리튬 전지를 대량으로 연결해서 초거대 건전지를 만드는 거죠. 하지만 보통 이동식 차량에 적합하진 않고 건물 내에 완비하는 방식입니다.”
“ESS까지 차량에 달아서 방금 말씀드린 걸 할 수 있을까요?”
“하하. 글쎄요. 그 무게와 부피를 고려해야 하겠지만, 만약 전력 수급 100 퍼센트에 육박하는 그 말도 안 되는 태양 전지를 만들 수만 있다면 되긴 할 겁니다.”
김광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쉽지 않을 겁니다. 그걸 저나 다른 동료 교수들도 20년씩 연구를 했는데 아직 답이 안 나왔으니까요.”
“실리콘이 태양 에너지를 전력으로 전환시키는 걸 잘 못해서 그런 것 아닌가요?”
류영준이 물었다.
“맞습니다. 하지만 그게 거의 최선의 소재예요. 자연계에서 그 이상으로 태양 에너지를 잘 흡수하는 소재는 없습니다.”
“있죠.”
류영준이 말했다.
“네?”
류영준은 말없이 창밖을 가리켰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무성한 나뭇잎이 보였다.
칙칙한 공대 건물 밖에 관상용으로 심어놓은 정원수 세 그루다.
“전력이라는 게 결국 전자 흐름을 통해서 에너지를 얻는 것이라면, 식물에 정확히 동일한 기작이 상당히 고효율로 존재합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식물이나 조류 잎에 있는 엽록체의 틸라코이드 막 (Thylakoid membrane)에서 전자전달계 (Electron transport system)를 가져다 쓰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