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 뇌사 (12) >
카펜티어와 미팅이 거의 끝날 시점, 류영준의 사무실에는 김영훈 이사가 찾아왔다.
“이미 손님이 있었네요.”
김영훈이 카펜티어를 보고 말했다.
“이따 다시 오죠.”
“아닙니다. 저는 볼일 다 끝났습니다.”
카펜티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김현택의 락트 인 신드롬 치료에 대한 건 실무자들하고 같이 미팅을 해야하니 나중에 다시 뵙죠."
그가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류영준은 이제 김영훈을 소파에 앉혔다.
“어서 오세요, 이사님.”
김영훈은 몇 개의 서류를 내밀었다. 그건 기업체의 합병 계약서였다.
“타냐 맨커 대표와 협의가 끝났습니다.”
제7 연구소가 광둥성의 모기 재난 사태를 예측할 때, 생물환경 인공지능 ABAI를 개발했었다.
그 인공지능은 타냐 맨커의 GRO 인더스트리의 알고리즘을 가져다 쓴 것이었고, 김영훈은 로열티 지급 대신 아예 GRO를 흡수하는 방법을 제시했던 것이다.
“제가 그동안 바빠서 이쪽은 거의 손을 놓고 있었는데 혼자서 쭉 진행해주셨군요. 고맙습니다.”
류영준이 계약서를 읽으며 말했다.
“타냐 대표가 류 대표님께 굉장히 우호적인 데다, 환경과 보건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 일이 쉽게 풀렸습니다.”
김영훈이 설명했다.
“GRO의 핵심이 되는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들과 통계학자들, 프로그래머들을 한국으로 데려오긴 어려우니 에이바이오 암 연구소를 우회하는 방법을 썼습니다.”
“그렇게 얘기하셨었죠.”
류영준이 기억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GRO는 에이바이오 암 연구소에 인수될 겁니다. ABAI를 기반으로 각종 발암물질에 따른 환경 공해를 추적하고 그 데이터를 토대로 암 연구소에서 예방법이나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을 겁니다.”
“연구 속도가 더 올라가겠군요.”
“그리고 GRO의 주주들도 에이바이오 암 연구소와 합병하는 걸 굉장히 좋아했기 때문에 비교적 적은 주식을 나눠주고도 합병할 수 있었습니다.”
류영준은 서류를 꼼꼼히 읽은 후 서명했다.
“그럼 계약 마무리하겠습니다.”
김영훈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근데 김 이사님.”
자리에서 일어나는 김영훈을 류영준이 붙잡았다.
“네?”
“혹시 블레셋이라는 제약회사에 대해 아십니까?”
“그럼요. 지금 이집트에서 생물학의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유명 벤처죠.”
“그 회사에서 어떤 식으로 연구개발을 하는지 좀 알 수 있을까요?”
“어떤 목적인가요?”
김영훈이 물었다.
“목적이요?”
“블레셋이 아무리 잘 나가봤자 에이젠바이오가 한번 걷어차면 산산조각나는 조그만 기업입니다. 게다가 기술력이 아무리 뛰어나고 진보적이라 해도 대표님만큼은 아니죠. 우리 경쟁업체도 아니고 배울 점도 없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 업종이 다릅니다. 우리는 보톨리눔톡신을 개발하지 않죠. 근데 그들의 연구개발에 대해 관심을 가지시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요.”
“……. 예전에 GSC를 공격한 테러리스트들 중에 상당히 실력이 뛰어난 과학자가 있습니다. 그쪽 테러 조직들 사이에선 닥터 레프라고 불리고, 실명은 이사야 프랭클린입니다.”
“이사야 프랭클린.”
“블레셋에서 일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서요.”
“그렇군요. 그럼 좀 철저하게 조사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김영훈이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유송미가 들어오려다 김영훈과 부딪혔다.
“아고……. 죄송합니다.”
유송미는 팔을 문지르며 말했다.
“무슨 일이에요?”
류영준이 물었다.
“뇌사 회복 임상 시험에 지원한다는 사람들이 지금 계속 연락이 오고 있는데요.”
“……. 일단 다 거절해요. 지금 임상이 끝나야 다음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이스라엘 대통령도 있는데요……?”
“누구요?”
“예루살렘의 대통령궁에서 연락을 해왔습니다. 비밀 유지를 부탁하면서요."
“대통령이 쓰러진 거예요?”
“그건 아닌 것 같고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알려주겠대요.”
"......."
“제가 만나보죠.”
김영훈 이사가 말했다.
“블레셋에 대해서도 뭘 알지도 모릅니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김영훈과 유송미를 보냉 후, 류영준도 나갈 준비를 했다.
겉옷을 입었다가 다시 벗었다.
이제 낮 기온이 많이 올라 얇은 코트라도 꽤 덥게 느껴졌다.
그는 지하로 내려가 차를 타고 차세대 병원으로 이동했다.
***
김현택의 제4 뇌실하대에 주입된 줄기세포는 뇌신경으로 분화하면서 기존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연수의 죽은 조직을 밀어내고 뇌간을 회복시켰다.
하지만 아직 조직 분화가 더딘 위치가 하나 있다.
뇌간의 상단 앞부분의 교뇌 (pons)다.
운동신경이 이곳을 지나간다. 모든 락트 인 신드롬 환자들은 뇌경색 등의 이유로 이 부위가 손상되어있다.
그들 대부분이 김현택처럼 눈은 뜰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눈을 움직이는 신경은 교뇌가 아니라 중뇌이기 때문이다.
비글 실험에서도 교뇌의 신경 회복은 가장 마지막 단계에 나타났다.
“아세틸콜린(acetylcholine, ACh)을 투여했어요.”
송지현이 말했다.
“아세틸콜린.”
류영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 전달 물질 중 하나다.
“비글을 치료하면서 계속 도파민과 에피네프린 같은 신경신호물질들을 주입했었는데, 락트 인 신드롬으로 회복된 시점에서는 아세틸콜린으로 바꾼 거죠. 교뇌로 신경분화를 집중시키기 위해서 썼어요.”
“신경세포는 추가 주입하지 않아도 됩니까?”
미구엘이 물었다.
“네. 10만 개가 전부 뇌실하대에 들어갔다면 아직 분화하지 않은 줄기세포들이 조금 남아있을 테고, 그들은 자리를 잡아가는 중일 겁니다. 그 양으로 충분할 거예요.”
송지현이 말했다.
-이것 보세요. 제가 그때 들어가서 역류하는 줄기세포들을 도로 집어넣길 잘했죠?
‘그래, 수고했다.’
류영준이 속으로 말했다.
송지현이 덧붙였다.
“물론 이게 기존에 시도된 적 없는 임상이니 뭐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임상이 비글하고 다른 점이 하나 생깁니다.”
미구엘이 말했다.
“환자가 이제 의식이 있고, 의사 표시가 가능한 상태라는 거죠. 임상시험을 더 진행하는 걸 거절할 수도 있어요.”
“거절한다고요?”
박동현이 놀라서 물었다.
“당연하죠. 그 사람은 잘 살다가 사고를 당해서 락트 인 신드롬에 빠진 게 아니에요. 뇌사 상태에서 천천히 각성 능력을 회복해서 죽다 살아난 사람이죠. 지금 앞을 볼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지도 모릅니다. 락트 인 신드롬 상태에 만족하고 더 이상 치료를 진행하는 걸 포기해버린다는 겁니다.”
“아니……. 말도 안 돼요. 우리가 이 정도를 해내고 증명했는데도 못 믿는다는 말입니까?”
“김현택은 과학자니까요.”
카펜티어가 말했다.
“아는 만큼 의심도 많겠죠. 우린 정말 분명한 게 아니면 안 믿잖습니까. 하물며 임상 전례가 한번도 없고 전임상 동물실험 뿐인데, 그걸 자기 몸을 희생해서 첫 번째로 시험하려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맞아요. 김현택 입장에선 지금 상태가 매우 안정돼있는데, 임상 전례가 전혀 없는 시험을, 아세틸콜린을 교뇌로 전달하는 걸 진행하면 부담스러울 수 있어요. 그렇게 해서 낫는다 하더라도 그한테 남는 건 감옥이랑 류 박사의 인지도 상승 뿐이고요.”
송지현이 말했다.
“김현택 입장에선 감옥 가는 대신 병원에서 좀 더 시간을 끌면서 다른 락트 인 신드롬 환자의 완치 케이스가 나오기를 기다릴 수도 있죠. 아세틸콜린의 교뇌 전달이 안전한 게 확인되면 그때 치료를 받아도 그 사람 입장에선 손해보는 게 별로 없습니다.”
"......."
“하지만 임상시험 동의서에는 분명 이 임상이 운동신경의 회복까지 포함하는 걸로 돼있지 않습니까?”
천지명이 물었다.
“김현택의 아내가 쓴 동의서죠. 의료법적으로 이런 상황에선 환자한테 임상에 대해 다시 설명해야 합니다."
미구엘이 말했다.
"흠......."
과학자들과 의료진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 교묘하고 이기적인 김현택이 자기 몸을 시험용으로 류영준에게 제공할까?
송지현은 솔직히 회의적이었다.
“우리가 고민할 필요 없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김현택이 거절하면 다른 락트 인 신드롬 환자를 찾아야 하고, 허락하면 계속하는 거죠. 그거 말고 다른 길은 없습니다. 김현택은 임상 피험자로서 선택할 권리가 있고, 우린 그걸 존중해야하는 의무가 있어요.”
“네……."
연구진이 약간 기운 빠진 목소리로 답했다.
“답답해도 올바른 길로만 갑시다.”
류영준이 말했다.
***
“천지인 자판은 정말 대단해.”
이미숙은 9개 키패드가 달린 카드를 들고 손가락으로 하나씩 가리키며 말했다.
김현택은 눈을 한번 깜빡이거나 두번 깜빡이거나 길게 깜빡이는 방법으로 이미숙이 가리키는 카드들을 골라 단어와 문장을 만들었다.
-그래.
이미숙은 김현택이 잠들어있는 동안 어떤 일들이 일어났었는지 거의 다 알려주었다.
“당신이 쓰러진 후에 류 박사님이 당신 연구소를 받았어. 그 후에는 탄저 무기 개발 건도 전부 공개됐고……. 윤대성 대표가 직접 자수했어. 그 아들 윤보현이랑 같이 지금 감옥에 있고.”
이미숙이 말했다.
“에이젠하고 에이바이오는 합병해서 에이젠바이오라는 이름을 쓰고 있어. 류 박사님이 단독 최대 주주고 직원도 더 늘고 자본도 더 커졌어.”
-이.......
김현택이 눈을 움직여서 힘겹게 문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미숙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가 말을 완성하도록 도와주었다.
-이제 끝난 건가?
“맞아. 이제 다 끝났어. 이제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돼.”
끝났다.
생각보다 허무하다.
류영준이 연말 세미나에서 튀어오를 때부터 위험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청년의 눈빛은 똑똑하게 빛난다거나 학술적 호기심에 가득 찼다거나 하는 게 아니었다.
그때 류영준의 눈은 야심과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김현택이 저지른 연구 윤리 위반에 분개하고 있었고, 이 제약업계의 모든 부패를 파괴하려 싸울 것만 같았다.
위험을 예감한 건 김현택 한 사람이 아니었다. 지광만은 그가 이 회사를 집어삼키려 한다고 꾸준히 경고했다.
제약회사는 연구개발에 많은 것을 의존하는 업종이고, 그 분야에서 류영준의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면 정말로 가능할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윤대성 일파가 이렇게 쉽게 무너질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잠깐 기절해서 누워있었던 것 같은데 이미 모든 게 끝났다고 한다.
마치 전신마취 수술과 같다.
허무함과 함께 밀려드는 감정은 뜻밖에도 안도감이었다.
회사를 빼앗겼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플 줄 알았는데 의외로 고통이 전부 해소되는 기분이다.
그 희대의 천재를 막아내야 한다는 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일까?
“류 박사님이 당신 치료를 계속하실 거야. 완전히 낫게 해주시려나봐.”
이미숙은 임상동의서를 보여주었다. 병상에 설치한 홀더에 고정시켜서 김현택이 읽을 수 있게 해주었다.
“움직일 수도 있게 해준대.”
-무섭다.
김현택이 카드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잖아.”
-.......
하지만 김현택은 불안한 표정이었다.
“완치된 후에도 걱정하지 마. 감옥 가면 좀 버티다가 죗값 치르고 나오면 되지. 그리고 우리 전부 다 내려놓고 살자. 세상사람들이 다 당신을 손가락질 해도 나는 당신 편이야.”
이미숙은 김현택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죽게 두지 그랬…….
“무슨 소리야.”
그녀가 김현택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안 그래도 이번 일 뉴스 나갈 때 댓글에서 누가 그러더라. 다 나아도 감옥에서 한참 있어야 할 텐데 대체 아내는 무슨 죄냐고.”
-.......
"당신이 반 년 넘게 누워있었지만 욕창이나 요로 감염 같은 건 없어. 내가 지극정성으로 보살폈거든."
-.......
“그 고생에 비하면 감옥에 면회 가는 거 정도는 거저지.”
-미안.
“나한테는 고맙다고만 하면 돼. 미안하다는 말을 전할 사람은 따로 있잖아.”
덜컥.
병실 문이 열렸다.
미안하다 소리를 들어야할 사람들이 나타났다.
류영준은 송지현과 과학자들, 다른 의료진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김 소장님. 오랜만입니다.”
류영준은 임상 동의서를 품에서 꺼냈다.
“소장님의 의식이 회복되었기 때문에 임상시험을 계속 진행하기 전에 이 시험에 대한 것을 모두 설명드려야 합니다. 이 임상은......."
“잠깐만요. 이이가 뭘 말하고 싶대요.”
김현택의 눈짓을 알아챈 이미숙이 글자 카드를 가지고 왔다.
그녀는 그걸 앞에 늘어놓고 하나씩 가리켰다.
눈을 한번 깜빡일 때마다 자음과 획과 점이 하나씩 추가된다.
김현택은 천천히, 짧고 간단한 문장 하나를 만들었다.
-동의하니 진행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