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 뇌사 (8) >
“아쉽지만 오늘은 계약 갱신만 하러 온 거라서요.”
야세르가 말했다.
“다음에 납품이 들어오면 그때 원장님께서 한 통만 에이젠바이오로 보내주시죠. 그때 확인해보시면 되겠습니다.”
“……. 알겠습니다.”
류영준이 답했다.
“근데 설마 저희 같은 조그만 기업체의 밥그릇까지 뺏으려고 하시는 건 아니겠죠?”
야세르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냥 궁금해서 여쭤본 겁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하하. 다행입니다. 보톨리눔 톡신 시장은 항암제 같은 것엔 비할 바가 못 돼요. 에이젠바이오나 류 박사님 같은 거물이 들어가기엔 너무 물이 작습니다.”
"......."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야세르는 두 사람에게 깍듯하게 인사한 후, 서류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참 대단한 사람이에요.”
이인주 원장이 칭찬했다.
“야세르 저 친구, 단순히 영업 뛰는 사원이 아니에요. 연구원이기도 합니다. 나름 실력도 상당한 모양이에요. 스탠포드였나 어디서 보톨리눔톡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자기 동료들하고 같이 이집트에서 회사를 창업한 거예요.”
“그럼 공동창설자군요?”
“근데 경영에는 손을 안 대고 이렇게 큰 계약 건하고 연구만 처리하는 모양입니다. 류 박사님께서 차세대 병원을 제 손에 그냥 맡겨두신 것처럼요.”
“……. 블레셋이란 회사는 어떤 회사인가요?”
류영준이 물었다.
“혁신성이나 성장력만 보면 에이젠바이오만큼은 아니어도 셀리제너만큼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인주 원장이 답했다.
“그래요?”
류영준이 물었다.
“그 회사 창립된 지 몇 년 안 됐습니다. 굉장히 젊고 어린 회사예요. 근데 짧은 기간 동안 순식간에 성장해서 이제 중동 지역에서 꽤 중요한 중견 기업이 됐죠.”
“제품은 메디보토 하나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 밖에 다른 신약들도 하나씩 개발하고 있다는데. 아직 후보 물질 발굴 단계라서 한참 더 가야 한답니다. 근데 그 메디보토의 기술력이 대단한 거죠. 보톨리눔 톡신을 그 정도의 단가에 그 정도 순도와 용량으로 만들어내는 게 정말 쉽지 않다더군요. 저는 약품 생산은 잘 모르지만.”
이인주가 대답했다.
“하지만 원장님. 보톨리눔 톡신은 독성이 너무 강한 물질이라서 아무한테나 연구 허가를 내주지 않습니다. 신생 회사가 도전하기에는 쉽지 않았을 텐데요.”
“이집트에서는 규제 법안이 좀 다른가보죠.”
이인주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아무튼 저 회사는 메디보토를 앞세워서 2년 안에 보톨리눔톡신 시장을 전부 차지하는 게 목표라더군요. 그 만큼 혁신적인 회사가 이집트에서 발생한 게 정말 대단한 부분이죠. 아시다시피 의학이란 건 과학자의 노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인주가 말했다.
“반드시 ‘돈’이 필요하죠.”
류영준이 답했다.
“맞아요. 저도 이집트 정부에서 과학에 그렇게 많이 투자를 하는지 몰랐는데, 아무튼 저런 벤처가 급성장하는 걸 보면 중동이나 아프리카에 대한 장밋빛 전망들이 꽤 그럴싸해요.”
이인주는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류영준에게 다가왔다.
“그건 그렇고, 임상 수술은 잘 마쳤답니까?”
“네……. 그럴 겁니다.”
류영준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
보톨리눔 톡신 (Botulinum toxin)은 보톨리누스균 (Clostridium botulinum)이라는 박테리아한테서 추출한 독소다.
세계 최강의 독소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 게, 보톨리눔 톡신은 독극물의 대명사인 청산가리의 독성보다 무려 1,000,000배나 강하다.
‘나노 그램’ 단위에서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이런 미친 독극물이 의학에서 이용될 수 있다는 게 정말 생명의 신비다.
엄청난 ‘묽기’로 희석한 다음 주사하면 특정 신경과 국소 조직만 마비시킬 수 있는 것이다.
요즘은 피부과나 신경과에서 다한증이나 만성편두통, 신경 협착 등에도 쓰는데, 가장 큰 시장은 안티에이징 쪽이다.
“보톨리눔 톡신을 가장 먼저 의약품으로 재개발한 회사가 앨러간이었고, 그때 만든 제품명이 ‘보톡스’였지.”
류영준이 말했다.
그는 경호 업체와 차를 따로 타고 로잘린을 조수석에 앉힌 다음 직접 운전했다.
돌아가는 길에 둘은 야세르와 블레셋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그거 그냥 대충 만든 약 아니야. 워낙에 획기적이고 품질이 우수하니까, 게다가 그런 독극물을 안전하게 다룰 만큼 퀄리티 체크를 잘하니까 성공한 거거든.”
류영준이 말했다.
“그래서 보톡스가 그냥 약품 한 개의 이름인데도 본래의 원료명을 밀어내버리고 보톨리눔톡신 제제의 대명사처럼 쓰이게 된 거야. 아세트 아미노펜 계열 진통제를 전부 타이레놀의 이미지가 먹어치운 것처럼. 보톡스가 가진 위상은 그 시장에서 장난 아냐.”
“근데 불과 몇년만에 시장 점유율을 절반이나 빼앗겼다니 놀랍긴 하네요.”
“그치? 특히 이런 치료제는 기존에 시장을 선점한 업체를 밀어내기 쉽지 않아. 품질과 가격 경쟁력에서 블레셋의 기술력이 엄청난 수준이란 건데, 내가 과민반응하는 건가? 그 기술력 뒤에 왜 닥터 레프가 있을 것 같지?”
“그럴 수 있습니다. 박테리아로부터 보톨리눔톡신을 정제하는 방법은 다들 비슷비슷할 테고. 그런 제약 벤처 입장에서 기술 혁신을 한다면 박테리아를 조작해서 생산량 자체를 늘리는 게 최선일 겁니다. 그리고 위구르 수용소에 풀었던 바이러스나, GSC에 투척한 탄저 무기 같은 걸 보면, 닥터 레프는 미생물의 지놈 엔지니어링 (genome engineering)과 대사 공학(Metabolic engineering)에 인간 기준에선 상당히 능숙한 것 같거든요.”
“이집트에서 신생 제약사가 갑자기 등장해서 굉장한 속도로 성장했는데, 다루는 물질이 하필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극악한 독약이고, 여기에 추가로 이집트 바로 옆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분쟁 지역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여러모로 너무 찜찜해.”
-실제로 회사 창립과 성장에 무관하더라도 이용하려고 할 순 있겠죠. 보톨리눔 톡신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회사니까.
“……우리나라가 의약품을 수입할 때 QC를 어떻게 하는지 좀 봐야겠어.”
류영준이 말했다.
***
회사로 가는 길에 류영준은 제6 연구소에 들렀다.
이제 슬슬 퇴근을 준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류영준은 로잘린과 함께 생명창조 연구실로 이동했다.
“제 예상대롭니다.”
로잘린은 인큐베이터에서 배양접시를 꺼내며 말했다.
“그때 조작한 유전자 세트가 정답이 맞네요. 이쪽에서만 제 세포들이 전부 죽었습니다.”
로잘린은 묘한 감상이 들었다.
“이 200개의 윤리 유전자는 모든 인간에게 있지만 당신의 몸에서는 돌연변이로 발현량이 훨씬 높아요. 그리고 그게 저를 탄생시킨 마지막 키였고요. 윤리에 대한 당신의 강박증이 저를 만들었습니다. 그게 이젠 생물학적으로 증명이 되었어요.”
로잘린이 말했다.
“이 유전자 200개의 그룹을 류영준 유전자라고 이름 붙일까요?”
“그러지 마. 민망하다.”
류영준이 웃으면서 답했다.
"......."
로잘린은 배양접시를 빤히 바라보았다.
류영준은 그녀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로잘린은 이제 자신의 탄생의 비밀을 찾았다. 잃어버린 유전자의 파편도 얻었고, 일시적이지만 몸도 얻었다.
류영준은 로잘린이 자아조차 없어서 시스템 메시지만 받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를 생각하면 로잘린은 정말 엄청나게 변했고 성장했다.
그녀는 초월적이지만 인간적이다.
과학 그 자체나 다름없을 정도로 전지전능하지만 순수하다.
“이제 뭐할래?”
류영준이 물었다.
“뭘 해요?”
“너 아직 하루 정도 남지 않았니?”
“아마 내일 아침이면 슬슬 약발이 떨어질 것 같군요.”
“하고싶은 거 없어?”
“글쎄요……."
로잘린은 어깨를 으쓱했다.
뭘 물어보든 정답을 척척 찾아내는 천재였지만 자신의 취향에는 둔감했다.
류영준은 어쩐지 안쓰럽고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이리와.”
“엑."
류영준은 로잘린을 끌어 당겨서 살며시 안아주었다.
“새이가 다 나으면 놀이공원 가고 싶단 얘길 많이 했어.”
류영준이 말했다.
“결국 그 애는 병실을 나가지 못하고 세상을 떴지만……. 넌 어때? 가보고 싶니?”
“그래도 돼요?”
로잘린이 물었다.
“그럼. 이제 퇴근 시간이니 에버랜드 야간 개장 들어가면 돼.”
“흐음……. 가보고 싶긴 한데, 저는 롤러코스터 같은 걸로 스릴을 느끼거나 하진 않기 때문에......."
“일단 가보자. 재밌을 거야. 어때?”
로잘린은 빙그레 웃었다.
“좋아요.”
류영준은 그녀를 데리고 다시 차를 탔다.
***
놀이공원에는 야간 개장으로 들어갔지만 아직 해가 지지 않았다.
로잘린은 처음엔 그다지 내켜하지 않는 것 같더니 놀이공원에 도착하자 그때부터 펄펄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티익스프레스!”
그녀는 가장 악명 높은 살벌한 롤러코스터 앞으로 류영준을 잡아끌었다.
“너 이런 거 타도 별로 스릴 없다고 하지 않았냐?”
“그러니까 젤 험악한 걸 타야죠!”
“잠깐……잠깐만. 너 어차피 키 안 돼서 못 타.”
“그렇군요. 몇 초만 기다리십시오. 지금 세포 위치 좀 재배열할 테니.”
“뭐하는 거야!”
로잘린은 살을 약간 빼면서 다리와 허리를 늘려 5센티미터 정도 키를 키웠다.
그리고는 충격으로 굳어있는 류영준을 잡아끌고 대기줄로 달려가시 시작했다.
‘이런.’
사실 류영준은 별로 그걸 타고 싶지 않았다.
놀이기구를 몇 개 타고 난 후.
놀이공원의 식당가 쪽으로 이동하면서 로잘린이 말했다.
“배 고파요.”
“이미 지난 두 시간 동안 핫도그랑 츄러스랑 아이스크림을 전부 먹지 않았니?”
“내일부턴 못 먹잖아요. 우리 저거 먹을까요?”
로잘린은 공룡 테마의 탈출 게임장 앞에서 파는 칠면조 다리 구이를 가리켰다.
[티라노 다리]
메뉴 이름을 보고 로잘린은 코웃음을 쳤다.
“공룡 테마라서 이름을 이렇게 지어놨군요. 뭐, 티라노사우루스의 근섬유 콜라겐 조직은 닭과 비슷하기 때문에 그 친척뻘인 이 칠면조도 결국 티라노 고기랑 비슷한 맛이 나긴 할 겁니다.”
"......."
간단한 식사를 마친 후에 후식으로 커피와 오렌지주스를 샀다.
두 사람은 각자 음료를 마시면서 전망대를 향했다.
그곳에서는 천하의 로잘린도 감탄을 터뜨리는 일이 일어났다.
폭죽놀이가 시작된 것이다.
“와……."
로잘린은 마치 신비한 것에 홀린 것처럼 그걸 지켜보았다.
“전에도 한강변에서 폭죽놀이하는 걸 가끔 외출해서 봤는데,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이런 느낌이군요."
“맘에 들어?”
"......."
로잘린이 대답이 없어서 힐끔 돌아보니, 그녀는 폭죽놀이에 완전히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녀가 입은 옷이 밤 공기에는 조금 추워보였다.
류영준은 처음 로잘린이 왔을 때처럼 코트를 벗어서 덮어주었다.
“정말 예뻐요.”
로잘린이 폭죽 불꽃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너 나중에 피트니스 모아서 사람 되면 이런 데 자주 오자.”
류영준이 말했다.
“송 박사님도 같이 와요.”
“송 박사님은 왜?”
“엄마?”
“미쳤어?”
“장난이에요. 당신이 연구만 하다가 혼자 외롭게 늙어죽을까봐 그랬죠. 저까지 사람 돼서 독립하면......."
로잘린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류영준은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
아침이 됐다.
류영준은 알람 소리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간밤에 체크인한 테마파크 인근의 모텔이었다.
로잘린을 재웠던 옆 침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류영준의 침대에 로잘린이 입었던 옷이 사람 모양으로 누워있었다.
‘얘가 분리불안이 있나……. 잠을 혼자서 못 자고 기어이 간밤에 이 침대로 왔나보군.’
류영준은 그 옷가지를 정리하면서 말했다.
-옆에 딱 붙어있으면 따뜻하고 푹신푹신해서 좋던데요.
로잘린이 메시지를 보냈다.
-정말 꿈같은 사흘이었어요. 이제부터 부지런히 피트니스를 모을 겁니다.
‘그래. 나도 가급적 피트니스 안 쓸게.’
-고마워요.
지이이잉!
류영준의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미구엘 교수였다.
“여보세요?”
류영준은 스피커폰을 켠 다음 옷을 입으면서 전화를 받았다.
-류 박사님!
미구엘이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나.
-성공했습니다……. 성공했어요!
“호흡기 제거했나요? 오늘이 제거하는 날이죠?”
-맞습니다. 생명유지장치 다 뗐어요. 그리고…….
미구엘이 말했다.
-이제 자가호흡을 합니다……. 뇌사가 회복됐습니다. 이젠 PVS 상태입니다. 전임상의 비글하고 똑같은 추세예요!
그가 외쳤다.
-이제 뇌사자는 사망이 아닙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뇌사자를 살려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