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 뇌사 (5) >
“놀랐나요?”
로잘린이 물었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너 지금…… 내 눈에만 보이는 환각 같은 게 아니라 실제로……?”
너무 놀란 류영준이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이 몸은 현재 완벽하게 물질계에 존재하는 다세포 연합체입니다.”
로잘린이 말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에요. 김현택의 체내에서 흘러나와 조 단위의 세포와 무기물이 되어서 이 방 안에 떠돌고 있었습니다.”
“조 단위?”
“9살 류새이의 몸은 약 8조 개의 세포로 구성돼있습니다. 한 데 밀집시키면 이렇게 사람 몸을 구성할 수 있지만 무기물을 원자 단위로 흩트리고 세포 개개를 모두 떼어놓으면 사람 눈으로 분별할 수 없죠.”
로잘린이 말했다.
“진즉에 이렇게 몸뚱이로 합칠 수 있었지만 놀라게 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좀 지켜보고 있었죠. 과연 어떻게 하시나 궁금하기도 했고.”
"......."
“설마 저를 포기할 줄이야.”
로잘린이 짓궂은 표정으로 나무랐다.
“포기한게 아냐. 다른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지.”
“실망하진 않았어요. 당신 답다고 생각했습니다.”
로잘린이 말했다.
“그리고 참고로 이제 세포들을 한 데 모아서 다 붙였으니까 다시 떼기는 어려워요.”
“정말 사람 간 떨어지게 하는구나……. 나한테 언질이라도 좀 주지 그랬어.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류영준이 말했다.
“후후. 미안해요. 근데 생명의 신비라는 것은 정말이지 오묘하군요. 저도 이 정도 깊이까지는 내려가본 적이 없어서 처음 깨달은 것들입니다.”
로잘린은 자신의 손가락과 손목 무릎 등을 콕콕 찔러보고 주물러댔다.
“아주 새롭고 짜릿해요.”
“그럼 이제 계속 그 몸으로 사는 거야?”
류영준이 물었다.
“안타깝게도 이건 일시적인 겁니다.”
“그래?”
“김현택의 체내에 엄청난 양의 ATP가 축적돼있었어요.”
“그랬지.”
“그건 우리가 주입해준 약 때문이 아니었어요. 보세요. 지금은 김현택이 반 폐인이 되어버렸지만, 옛날에는 꽤 건장한 몸이었어요. 비록 담배와 술에 찌들어 있었고 지방간이 약간 있었지만 말이에요. 무려 80 킬로그램에 육박하는 체중이었죠."
"......."
“그게 지금은 50 킬로그램밖에 안 돼요. 빠져버린 30 킬로그램은 어디로 갔을까요?”
“설마……."
“그 설마입니다. 10 킬로그램 정도는 열역학법칙에 의해서 분해되고 확산되었죠. 그리고 나머지 20 킬로그램은 생명의 탄생의 경계를 틈타서 형성된 태반과 탯줄을 타고 다른 차원에 공급되고 있었어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생명창조는 신의 영역이에요.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긴 쉽지 않을 겁니다. 저조차도 처음엔 몰랐으니까요.”
로잘린이 말했다.
“저를 뇌실하대까지 끌고 갔던 ATP는 전체 에너지원에 비하면 매우 극미량이었어요. 축적된 에너지가 수조 탱크면 저를 휩쓸어버렸던 건 한 컵의 물에 지나지 않았죠. 저는 김현택의 뇌실하대에서 물탱크에 있는 걸 전부 꺼냈어요. 아주 막대한 피트니스였습니다. 그걸로 이렇게 20 킬로그램짜리 류새이의 몸을 재현했죠.”
"......."
“세포나 무기질을 만들어내고 김현택의 몸 밖으로 하나씩 날려서 빼낸 후에 바깥에 모으다가 방금 집합시킨 거예요.”
“근데 왜 그 몸이 일시적이라는 거야?”
“그게……."
그녀는 팔을 쓰다듬었다.
“근데 이게 추위라는 건가요? 알싸한 느낌과 함께 피부 겉면의 입모근이 수축하며 표피 세포의 경도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아마 맞을걸. 미안하다. 지금 상황 자체가 너무 충격이라 내가 신경을 못 썼네.”
류영준은 코트를 벗어서 로잘린에게 덮어주었다.
“으아악……."
코트의 촉감에 로잘린은 또 한번 몸을 파르르 떨었다.
“미끌거려……."
그녀가 신기한 듯 코트 안감을 매만졌다.
로잘린은 겨우 9살 된 류새이의 모습 그대로였고, 류영준의 코트는 그녀에게는 아주 컸기 때문에 바닥에 코트 자락이 다 끌렸다.
“아무튼 제 몸이 일시적이라는 이유는, 이게 ATP를 잔뜩 흡수해서 억지로 도핑하다시피 만들어낸 피트니스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에요.”
“시간이 지나면 ATP 때문에 늘어난 피트니스가 빠졌던 것처럼 그 몸이 사라진다는 거야?”
“맞아요. 하지만 반대로 얘기하면, 제가 피트니스를 직접 모은다면 안정된 몸을 가질 수도 있다는 거죠!”
로잘린이 환하게 웃으면서 외쳤다.
"......."
“저는 병원체의 DNA를 흡수하면서 이제 피트니스의 한계가 없어졌어요.”
“그럼 바로 몸을 만들 수 있는 거 아냐?”
“아쉽지만 피트니스의 회복 속도가 느리네요.”
“하지만 피트니스를 안 쓰고 며칠 자면 회복될 거 아냐?”
“하하. 그 정도가 아니에요. 지금 상태창 한번 열어볼래요? 이제 열릴 거예요."
류영준은 상태창을 열었다.
그리고 충격적인 스테이터스가 눈앞에 떠올랐다.
<로잘린 Lv.35>
-전이 상태 : 심장 (9%), 간 (47%), 뇌 (9%), 신장 (15%), 척수 (8%)
-동기화 : 24%
-세포 피트니스 : 80,197,447 (ATP에 의해 +80,197,432.6)
“미친 피트니스……."
류영준은 경악해서 소리를 지를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가장 마지막에 봤을 때 10이 약간 넘었던 값이다. 지금은 무려 8천만을 초과해버렸다.
“저 ATP가 빠지면 이 몸을 유지 못할 거예요. 아마 다시 산산이 흩어져서 사라지겠죠. 먼지처럼.”
로잘린이 말했다.
“…….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다시 이전이랑 똑같아요. 저는 당신의 몸속에서 살 테고요. 그리고 꾸준히 피트니스를 모을 겁니다. 적금 들듯이 말이에요. 하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겠죠.”
“그럼 너 메시지창도 여전히 쓸 수 있는 거니?”
류영준이 물었다.
로잘린은 생긋 웃으면서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이렇게요?
메시지창이 류영준의 눈앞에 떠올랐다.
“잘 되는군.”
류영준은 안도의 숨을 돌렸다.
덜컥!
병실 문이 열렸다.
송지현이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물 말고 코코아로 가지고 왔는데 혹시 이런……."
그녀는 걸음을 우뚝 멈췄다.
“엇......?"
그리고 아주 다양한 종류의 의문이 혼합된 얼굴이 되었다.
류영준은 긴장한 듯 침을 꼴깍 삼켰다.
“누구에요?”
송지현이 물었다.
“그게……. 먼 친척 동생입니다.”
류영준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랬군요. 웬 어린애가 류 박사님 코트를 돌돌 말고 있어서 깜짝 놀랐네요.”
“춥다고 해서요.”
류영준은 로잘린의 코트를 더 꼼꼼히 여며주었다.
송지현이 탁자에 코코아를 내려놓았다.
“류 박사님하고 많이 닮았네요.”
“하하…… 외가 쪽 유전자가 강한 편이긴 해요. 근데 그렇게 닮았나요?”
류영준이 로잘린을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그럼요. 처음엔 어디 숨겨둔 딸이라도 있는 줄 알았잖아요. 아니라 다행이에요.”
“다행이요?”
로잘린이 물었다.
“아. 그게……. 기자들이 스캔들로 만들 수도 있으니까……."
송지현이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송 박사님이죠?”
로잘린이 물었다.
송지현은 또 놀란 표정이 되었다.
“응. 송지현이야. 넌 이름이 뭐니?”
“로잘린이에요.”
로잘린은 손을 불쑥 내밀어서 송지현과 악수를 했다.
-이렇게 하는 거 맞죠?
손을 흔들면서 그녀가 메시지창을 보내어 류영준에게 물었다.
‘그래.’
-너무 짜릿합니다. 제가 송 박사님하고 직접 인사를 하다니. 신기해요.
로잘린이 말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송 박사님. 직접 만나게 되어서 정말 기쁘군요. 잘 지내셨나요?”
그녀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쳤다. 코코아를 마시려던 류영준은 순간 입 천장을 델 뻔했다.
“어머. 꼭 비즈니스하는 어른 같네. 되게 말을 잘 하는구나.”
송지현은 재밌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그 다음 대사는 웃을 수 없었다.
“물론입니다. 송 박사님. 당신은 류영준에 비해 손가락 피부의 콜라겐 분자의 크로스링크 (Cross-link)가 덜 이루어져 있군요. 그래서 촉감이 좀 더 코트 안감 같은 느낌입니다. 그리고 손이 좀 차군요. 수족냉증까진 아니지만 손끝으로 혈액이 좀 더 원활하게 공급되도록 하는 게 좋겠습니다.”
송지현은 얼어붙었고 류영준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거 아니야…….'
류영준이 머릿속으로 말했다.
-좀 어색했나요? 송 박사도 과학자니 괜찮을 줄 알았는데요. 아시겠지만 저는 이런 대화만 해봤습니다.
로잘린은 슬며시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보통 지금 너만한 애들은 그런 말 못하거든. 굉장히 어색해보였을걸.’
-송지현이 이해할 수 있으면 되지, 제가 애들 같을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요? 제가 애들 같이 보이지 않으면 대화에 문제가 생기나요?
‘그건 아니지만……. 송 박사한테 네 정체를 설명하기가 어려우니까.’
류영준은 아직도 당혹스러워하는 송지현에게 둘러댔다.
“얘가 굉장히 똑똑한 애거든요. 하하. 근데 TV에서 나오는 거 아무거나 그대로 외워서 말하는 거예요.”
“그렇군요.”
송지현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로잘린, 몇 살이니?”
로잘린은 신중하게 대답을 생각했다.
지금 그녀는 태어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다. 따라서 나이는 한 살이다. 하지만 류새이의 몸은 인간 기준으로 9살 정도 된다.
로잘린은 자신의 몸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이 몸은 아홉 살입니다.”
로잘린은 현명하게 답변한 것에 뿌듯한 듯, 마치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류영준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어색한 문장을 송지현은 다르게 받아들이고 웃었다.
“그렇구나. 로잘린. 내가 좋아하는 과학자랑 이름이 똑같네. 외국에서 왔니? 머리색도 그렇고.”
그녀가 물었다.
“아니요?”
“미국에서……."
로잘린과 류영준이 동시에 상반되게 대답했다.
류영준은 로잘린의 눈치를 살피고는 재빨리 말했다.
“아버지가 미국인이시고 미국에서 태어났어요. 거기서 쭉 살다가 왔죠. 글로벌 시대잖아요.”
류영준은 어색하게 웃었다.
-이래도 돼요?
로잘린이 물었다.
‘한국말 잘 못하는 척 해. 실수해도 무마시킬 수 있게.’
류영준이 말했다.
“그랬군요 ."
송지현은 의자를 하나 당겨와서 두 사람 옆에 앉았다.
“근데 이 시각에 애가 병원에는 어쩐 일로 온 거예요?”
"음......."
류영준은 머뭇거리다 답했다.
“제가 잠깐 맡아주기로 했거든요. 근데 집에 애 볼 사람이 없어서 여기까지 데리고 왔네요.”
“그럼 아까 여기 들어오셨을 때는 어디에 있었……."
“먹어도 돼요?”
송지현의 말을 로잘린이 자르면서 불쑥 끼어들었다.
그녀는 코코아를 손으로 가리켰다.
“어……."
송지현이 당황한 듯 류영준을 쳐다보았다. 류영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류영준이 허락하자 로잘린은 코코아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맙소사. 어느 자판기죠? 필터를 안 갈았군요. 용해액에 설탕 불순물과 박테리아의 펩티도글리칸 (Peptidoglycan)으로 구성된 세포벽의 파편……."
"악!"
류영준이 벌떡 일어났다.
“저 급한 일이 생각나서…….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송 박사님도 어서 퇴근하세요.”
류영준은 로잘린을 와락 안아들고는 병실 문을 열었다.
-왜 이래요?
‘우리 일단 집으로 가자.’
더 있었다간 분명히 뭔가 사고가 터진다. 방금 확신이 생겼다.
류영준은 송지현에게 인사하고 얼른 밖으로 나섰다.
그에게 들려서 나가는 로잘린을 송지현은 가만히 쳐다보았다.
정말 기묘한 애다.
송지현은 더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아쉬움을 뒤로하고 그들에게 인사했다.
"조심히 가세요."
***
카펜티어 교수는 아침 이른 시각에 병실을 찾았다.
미구엘 교수와 함께였다.
그들은 fMRI의 뇌혈류 기록을 확인했다.
연수 부분에서 막대한 혈류량이 확인되었다.
전임상의 비글과 똑같은 진행 양상이다.
“류 박사님을 부르겠습니다. 심박 기능이 돌아왔을 것 같군요."
미구엘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