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 로잘린 (9) >
“상속법이요?”
“그래. 예를 들어서 어떤 돈 많은 졸부가 양자로 새 아들을 들이자마자 교통사고로 뇌사가 왔다고 치자. 양자로 들어가는 과정이 변호사 손에서 아직 덜 처리돼서 그 아들의 상속 권한이 며칠 지나야 발동하는데, 그 집안에 있었던 친아들은 상속되는 재산을 나누기 싫어서 자기 아버지를 빨리 보내려 한다고 생각해봐.”
양혜숙이 말했다.
"......."
“생명유지장치를 달고 사망 진단을 며칠이라도 늦춰보려는 양아들하고, 빨리 사망 진단을 내리고 싶은 친아들 둘 다 ‘뇌사자의 임상 시험’을 고려할 수 있어. 양아들은 임상시험 중이니 아직 사망 진단을 내리지 말라고 방어할 명분이 생기고, 반대로 확실한 죽음을 원하는 친아들은 임상시험을 빌미로 심폐사를 유도할 수도 있지. 심폐사가 오면 이제 사망선고를 의사 임의로 며칠이라도 조절할 여지조차 없고 끝이니까. 그래서 대리인의 동의보다 본인의 동의가 더욱 중요해지는 거야.”
“하…….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같은 일이 꼭 한번씩 벌어지는 법이지. 그래서 법을 더 다듬어서 빈틈없게 만들어도 또 틈새를 비집고 뭔가가 생겨. 우린 그런 게 최대한 없도록 법을 제정하는 게 직업인 사람들이고. 그러니 최대한 보수적으로 가는 거야.”
양혜숙이 말했다.
“그럼 그냥 뇌사자를 살아있는 걸로 확정짓고 아예 임상시험 법 안에 포함시켜버리죠. 그럼 보호하기 쉽잖아요?”
류영준이 물었다.
“그 안에 포함시키려면 뇌사자가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전제해야 하는데, 그건 네가 이번 실험으로 증명해야하는 ‘가설’ 단계에 아직 머무르는 상태지.”
“아니, 그럼 어떻게 해야한다는 겁니까? 뇌사자한테 동의를 받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아마개정 법안은 ‘뇌사 상태에서 뇌간 등의 일부 중추신경 기관의 기능의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의학적 시험에 ‘사전에’ 동의한 뇌사자.’로 대상을 한정짓게 될 가능성이 높아.”
양혜숙이 말했다.
“사전에요?”
“장기기증도 사전에 동의하잖아.”
류영준의 표정이 약간 구겨졌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법안이 알려지는 데도 시간이 소요되고, 동의자가 충분히 늘어나야 하는데다가, 그 사람들이 심폐 손상 없이 뇌사 상태에 빠져야 해요. 심지어 그렇게 해서 살려내도 진짜 뇌사였냐고 따지고 드는 과학자들이 있을 겁니다.”
양혜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인데, 영준아. 내가 머리를 좀 써봤어. 우리 이번 일은 개정법안을 밀고 들어가는 대신 특별법으로 추진하자.”
“특별법이요?”
류영준이 물었다.
“응. 너는 반 년째 뇌사 상태인 김현택한테 임상시험을 하고 싶은 것 아니니? 그 사람한테서 성공하면 뇌사가 사망이 아니라 치료 가능한 질병적 상태라는 것을 주장하기가 훨씬 수월해지니까.”
양혜숙이 물었다.
맞는 말이다.
이틀 전에 뇌사가 온 환자를 살려내봤자 미심쩍은 시선들이 한번에 사라지진 않는다.
수없이 많은 임상이 누적되면 결국 다들 믿게 되겠지만, 만약 한번만에 확실한 증명을 할 수 있다면 굳이 돌아갈 필요는 없다.
김현택은 무려 반 년 넘게 뇌사 상태다.
벌써 수없이 많은 의사들이 그의 몸 상태를 체크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생명유지장치로 목숨을 연장한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리고 뇌사 상태가 길어진만큼 뇌간의 기능이 영구적으로 손실됐음이 증명된 케이스다.
그게 아니면 반 년이나 되는 시간 동안 이미 뇌파 등에서 회복의 가능성을 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맞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연구의 진행 속도와 결과 달성의 가능성을 볼 때 김현택이 최선의 선택이고, 저는 거기에 자신이 있어요.”
“그렇지. 그러니까 김현택 같은 원수한테 굳이 시험을 하려고 하겠지.”
성공해도 살아나는 건 복잡한 악연으로 얽힌 적이고, 실패하면 류영준 신화의 첫 균열로 이미지 타격이 크다.
차라리 개정 법안을 통과시킨 다음에, 법에서 제시하는 안전한 뇌사 임상 동의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게 나을 것이었다.
“특별법으로 추진하면 보호자 동의만으로 김현택한테 임상시험을 할 수 있습니까?”
류영준이 물었다.
“특별법은 일반법에 상회하는 법이야. 특정 인물과 상황과 맥락에 구속되는 한정적인 법안이고. 아마 할 수 있을 거야.”
양혜숙이 말했다.
“내 생각은 이래. 먼저 김현택 특별법으로 네가 보호자 동의만 구한 후 김현택을 비롯한 지정된 뇌사자들에게 임상시험을 수행해. 이 시험의 목적은 ‘뇌사자의 몸에서 뇌간의 기능을 회복시키는 것.’이야. 김현택 한 명한테서만이라도 성공하면 그걸로 오케이.”
그녀는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 시험 결과물을 네가 주면, 난 그걸 가지고 임상시험법이 아니라 의료법의 개정을 타겟으로 잡을 거야. 아예 뇌사자를 사망자로 보지 않도록 법을 개정하는 거지.”
“그럼 자동으로 임상시험법의 경계 안에 들어가게 된다는 거군요.”
“그렇지. 물론 임상시험법의 하위법으로 뇌사자에 대한 임상시험의 진행 절차를 다루는 법안을 추가로 마련해야겠지만.”
"흠......."
류영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럼 그 특별법은 언제 발의되는 건가요?”
“언제든 할 수 있어. 특별법의 장점이 하나 더 있는데, 일반법처럼 본회의에 상정되고 통과되기까지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는다는 거야.”
양혜숙이 말했다.
“아주 빠르면 2주 안에도 가능해.”
“그거 좋군요.”
“대신 본회의 심사 때 한번에 통과하기 위해서 의원들을 설득해야 해.”
양혜숙이 말했다.
“그걸 위해서 네가 아마 국회에 출석해야 할 거야.”
“국회에요?”
류영준이 놀라서 물었다.
“당연하지. 특별법이 명시하는 권리 주체가 특정 사기업 단체인 경우는 상당히 드물어.”
양혜숙이 말했다.
“게다가 의료법 전반을 뒤흔들만한 중대한 실험인데다 생명윤리하고도 깊이 얽힌 일이야. 이 정도면 분명 공청회가 열릴 거고, 수많은 전문가들이 초대돼서 토론을 할 거야. 당연히 너희 사측에서도 회사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 직접 출석해서 이 법안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하고 반박 논리들을 파괴해야 해.”
“알겠습니다.”
류영준이 답했다.
“날짜 확정되면 알려주십시오. 제가 가겠습니다.”
“좋아.”
양혜숙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았다.
“네가 이렇게 큰 걸 보니 흐뭇하다.”
그녀가 말했다.
“전 교수님이 의원이 되셔서 좀 놀랐는데 지금은 다행이란 생각입니다.”
“다행?”
“교수님이 안 계셨으면 이런 식으로 진행하기 어려웠을 것 같아서요.”
양혜숙은 와인을 조금 마셨다.
“내가 볼 때 21세기는 과학자가 정치를 해야 해.”
“그래요?”
“최소한 하드 사이언스 (Hard science)를 훈련받은 사람이어야 해. 우리 나라 정치가 이렇게 개판인 이유는 과학을 몰라서야. 통계와 논리, 실용, 실증성에 기반을 두지 않고 정책을 펴기 때문에 이런 거야.”
양혜숙이 말했다.
“과학은 오랫동안 너무 그들만의 리그로 놀았어. 사회에서 이해할 수 없는 너드 집단으로 동떨어져서 고인물이 됐다고. 하지만 그러면 안 돼.”
"......."
“과학은 엘리트들의 빌딩블록이 아냐. 더 정치 참여적이어야 하고, 소시민들이 세상을 이해하는 창구여야 해. 동네 식당 아주머니나 파지 줍는 할아버지도 생물학의 센트럴 도그마 (Central Dogma)나 주기율표 정도는 달달 외울 수 있어야 한다구.”
“아니 그건 너무 가시지 않았나요?”
“하지만 생각해 봐. 어느 기사에서 황당한 통계를 내놨을 때 시민들이 티 테스트 (T-Test)를 해서 신빙성을 조사할 수 있는 세상. 이런 사회에서 과학적 사고에 특화된 정치인이 정책을 입법하면 사회가 얼마나 잘 돌아가겠니.”
“흐음. 글쎄요. 과학이란 게 우리 같은 괴짜들 아니면 따분하게 여기는 것이지 않습니까.”
“후후. 두고 봐. 내가 천재 제자를 키운 덕분에 과학이 민주화되는 세상을 볼 것 같으니까. 난 국회에서 그걸 앞당기는 데 더 애쓸 거고.”
양혜숙이 말했다.
“아무튼 그때까지 잘 부탁해. 다음에 국회 공청회에서도 잘 해주고.”
***
에이젠바이오의 법무팀은 셀리제너와 협력 연구 계약서를 썼다.
연구에 들어가는 자원은 모두 에이젠바이오에서 지급하기로 했다. 대신 특허권과 제품화했을 때의 수익도 에이젠바이오에서 더 많은 몫을 가져간다.
세포 수준 실험들은 각 회사의 연구실에서 독자적으로 진행하며 주 1회의 미팅 시간에 교류한다.
다만 동물 실험 종류는 모두 에이젠바이오의 제7 연구소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셀리제너도 그동안 빠르게 성장해서 이젠 제법 큰 실험실들을 갖추었지만, 아직 그 규모나 장비의 고급성에 있어 에이젠바이오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특히 실험의 난이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아서 더더욱 고급 장비와 연구지원 시스템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불이 켜져 있잖아?”
양혜숙을 만나고 밤 늦은 시각에 제7 연구소를 찾아온 류영준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3층의 연구원실에 누군가가 앉아서 논문을 보고 있었다.
송지현이었다.
“집에 안 가십니까?”
류영준이 안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앗. 안녕하세요.”
송지현이 논문을 내려놓았다.
“누가 보면 에이젠바이오 직원인줄 알겠어요. 이 시간까지 여기 남아계시다니.”
“스터디 조금만 더 하고 가려고요.”
“무슨 논문이에요?”
류영준이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예일대에서 작년에 출판된 논문이에요. 도축된 돼지의 뇌를 분리하고 약물 처리를 통해서 일부 뇌세포들을 재활성화하는 데 성공했다는 얘기죠.”
“읽어본 거 같군요.”
“하지만 우리는 일부 세포만이 아니라 뇌간의 기능을 완전히 수행할 수 있는 조직(Tissue)을 회복시켜야 해요.”
류영준이 말했다.
“맞아요. 그래서 다들 분투하고 있지만 쉽지 않네요.”
송지현이 쓰게 웃었다.
“어떤 부분이 막히나요?”
류영준이 물었다.
“전임상 실험이요. 쥐나 비글에서 줄기세포를 뇌간 옆 뇌실하대에 주입한 다음, 미세 주사기로 도파민과 에피네프린을 주입했는데 뇌간의 회복이 쉽지 않아서요.”
“지금 실험중입니까?”
류영준이 물었다.
“네. 오늘 쓴 비글 둘은 아마 이대로 새크리파이스 (Sacrifice, 실험 동물의 투약을 중지하고 해부해서 약효의 성능을 확인하는 작업) 해야할 것 같아요.”
“한번 봅시다.”
류영준은 송지현을 데리고 성큼성큼 이동했다.
“앗, 네!”
놀라운 행동력에 송지현은 깜짝 놀라면서도 재빨리 뒤따랐다.
류영준은 그대로 아래층의 동물실험실에 들어갔다.
커다란 비글 두 마리가 누워있었고, 구속 장치와 모니터 장비들이 연결돼있었다.
“비글의 뒤통수 두개골 일부를 제거하고 그쪽으로 약물을 투약해서 전뇌 기능을 소실시킨 거예요.”
송지현이 말했다.
“그렇군요.”
류영준은 비글의 머리 곳곳에 스티커가 붙어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 스티커들은 전선이 이어져있었다.
삑삑 소리가 났다.
하지만 모니터의 시그널은 고요하다.
“뇌파 측정기예요. 보통 알파파와 델타파가 나오는데 지금은 뇌사 상태로 만들었기 때문에 아무 시그널이 없는 것이고요."
송지현이 설명했다.
“대충 알겠군요.”
류영준은 서랍에서 주사기를 꺼내고 냉장고에서 갈색 약병을 꺼냈다.
[ATP]
“그건……. 악!”
놀란 송지현이 비명을 질렀다.
약품을 주사기로 3밀리리터만큼 빨아들인 류영준이 비글의 뒤통수에 거침없이 꽂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