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 로잘린 (8) >
“양혜숙 의원을?”
박주혁이 물었다.
“응.”
류영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주혁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안건 통과되는 거 그렇게 어렵지 않을 거야. 오래 걸리지도 않을 테고. 굳이 네가 발의자를 만날 필요는 없어.”
“그런 거 아냐. 다시 만나보고 싶은 분이라서 그래.”
“알았어. 그럼 나랑 계속 컨택하고 계시니까 한번 얘기해볼게.”
박주혁이 말했다.
“아니야. 연락은 내가 할게. 사적인 거라서. 네가 전화해서 우리 대표님이 만나고 싶어합니다, 이러면 좀 웃길 거야. 그 분하고 나는 사제지간이라구.”
“오. 알았어. 양혜숙 의원 연락처도 알아?”
“연락처는 네가 줘야지.”
류영준이 말했다.
양혜숙은 류영준이 대학을 다닐 때 신세를 진 은사 중 하나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정윤대생명공학과 신입생 류영준은 가난에 허덕이며 피해의식과 낮은 자존감으로 날이 서있었다.
정윤대 같은 명문대는 진학하는 학생들 중 절반이 돈 많은 유학파다.
부유한 집안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최고급 사교육을 받으면서 외국 물 먹고 들어온 학생들.
점심 먹고 공강 시간에 쇼핑하러 백화점에 가서 카드를 쓱쓱 긁는 친구들이었다.
류영준은 자격지심을 느꼈다.
점심 먹으러 가는 친구들 무리에서 바쁜 일이 있다며 빠져나온 다음, 편의점에 숨어서 컵라면을 먹으며 끼니를 때운 적도 많았다.
‘그때는 꽤 힘들었지.’
류영준은 10여 년 전의 회상에 잠겼다.
아르바이트를 동시에 두 개씩 했다.
살인적인 수준의 등록금과 생활비.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갔다.
그때 도와준 사람이 양혜숙 교수였다.
단순히 위로나 격려 정도가 아니라 아예 금전적인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다.
***
“졸업 전에 한번 찾아뵈려고 했는데, 연락처도 바뀌었고 과사무실에서 연락처를 알려주지도 않아서요. 메일도 보냈는데 답장을 안 주셔서 바쁘신가보다 했어요.”
류영준이 말했다.
그는 양혜숙의 개인 오피스텔 근처의 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는 아마 정계에 막 입문했을 때일 거야. 그래서 워낙에 경황이 없었지. 과사무실에는 내가 연락처 유출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나왔고.”
양혜숙이 말했다.
“정계로 들어갈 때 학교랑 여전히 관계되어있으면 괜히 뒷 말이 나올 수 있으니까.”
“그렇군요. 저도 그 후에는 대학원에 들어가고 너무 바빠져서 쭉 잊어버리고 있었네요. 근데 갑자기 국회의원이 되어서 나타나시는군요. 정말 놀랐어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하셨네요.”
“하하. 너만하겠니.”
양혜숙이 웃으면서 말했다.
“등록금을 못 내서 아르바이트 두 개씩 하고 밥도 굶고 쩔쩔매던 애가 세계 최대 기업 오너가 되어서 나타나다니. 너야말로 진짜 몰라 보게 성공했어.”
“감사합니다.”
류영준이 빙긋 웃었다.
“내가 그때 영준이한테 푼돈 지원해주지 말고 아예 차용증을 써주는 거였는데. 그럼 지금 수익률 엄청날 텐데 그치?”
“푼돈이라뇨. 저한테 얼마나 큰 도움이 됐었는데요.”
류영준이 말했다.
“결국 돈 마련 못하고 등록 안돼서 강제 휴학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과사무실에서 등록됐다고 연락와서 얼마나 놀랐던지. 그때 일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요.”
“학생들 가르치면서 하나씩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힘든 사정 있는 애들이 보이니까.”
양혜숙이 말했다.
“너는 나랑 상담도 했었고 말이야.”
류영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양혜숙의 도움으로 휴학 없이 학업을 이어간 류영준은 이후 장학금을 받고 학교를 졸업했다.
“원래 제가 교수님 연구실로 들어가려고 했잖아요.”
류영준이 말했다.
양혜숙은 이후에도 연구학생으로 류영준을 고용한 다음, 공부를 시키고 아르바이트보다 약간 나을 정도의 급여를 챙겨주었다.
생활비로 쓰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랬지. 네가 내 밑으로 왔으면 지금쯤 파이저나 콘슨앤커슨도 인수해버렸을 텐데.”
“하하!”
“반두일 교수처럼 순진한 사람 밑으로 가니까 안된 거야.”
“그래도 반 교수님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절 많이 도와주셨고요. 제가 옆 연구실……. 그, 누구더라. 박형범 교수님! 그쪽 대학원생이랑 좀 마찰이 생긴 적도 있었거든요. 그게 박 교수님하고 싸움으로까지 갔었는데.”
“박 교수님하고 싸웠어?”
양혜숙이 깜짝 놀랐다.
“그게 좀 상황이 복잡했어요. 그 대학원생이 연구동에 한 개 있는 울트라 센트리퓨즈를 제 앞에 예약해놨는데, 다 쓰고 샘플을 안 꺼내고 장비에 락을 걸어놓은 거예요. 저는 당연히 제 거 아니니까 건드릴 수가 없잖아요?”
류영준이 말했다.
“그래서 그쪽 연구실에 연락했는데 그 학생이 없대요. 어딨냐니까 미친……. 너무 충격이라 지금도 기억나는데, 뭐랬는지 아세요?”
“뭐라던데?”
“박형범 교수님의 딸이 결혼하는데 거기 주차요원 하러 갔다는 거예요.”
“푸하하하!”
양혜숙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웃을 일이 아니에요. 처음에 듣고 진짜 경악했어요. 그쪽 연구원들 전부 다 그 결혼식 가서 사진 찍어주고 박수 쳐주고 하객 알바 정도가 아니라 예식장 알바를 했어요 그것도 무상으로. 교수가 시키니까 거부도 못하고요.”
류영준이 말했다.
“이러니까 같은 업계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대학원 욕하는 말이 나오지.”
“사람이 잘못하면 감옥에 가고 대학생이 잘못하면 대학원에 간다?”
“하하! 그래, 그거. 옛날에 학과 게시판에 자보도 붙었지.”
“그때 그 학생들도 갑자기 연락 받고 끌려간 거라서 장비 돌려놓은 거 챙기지도 못했던 거래요. 뭐 다른 건 둘째 치고, 저도 급한 실험이었는데 그거 때문에 차질 생기니까 빡쳐가지고 그 학생한테 그래도 샘플 빼놓고 가야하지 않냐고 따지다가 박형범 교수가 연구실 들어오면서 무슨 일이냐기에……."
“그래서 박 교수님까지 들이받았구나?”
“네. 완전 난리 났었어요. 얘기하다가 서로 언성 높아지고……. 그 교수님도 성격 괄괄하잖아요. 너무 화가 나서 이제 석사 과정에 있는 애송이가 자기한테 큰 소리 친다면서 건방지다고, 거의 저를 주먹으로 때리려고 하셨거든요?”
“때렸으면 영준이 성격에 고소도 했을 텐데.”
“그랬겠죠. 아무튼 주위에서 말리고 난리였는데, 그때 반 교수님이 들어오셔서 상황 정리를 딱 해주신 거예요. 저는 그래도 교수한테 소리치면서 싸운 건 제 잘못도 있으니까, 절 혼내실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디펜스해주셨어?”
“네. 이건 박 교수님이 잘못하신 거라면서 딱 잘라 말하시는 거예요. 우리 학생이 잘못한 거 없다면서요. 그래서 너무 감동 받았죠.”
양혜숙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 교수님 진짜 좋은 사람이지. 원칙주의자고.”
“그리고 박교수님은 미친 사람이에요. 어떻게 자기 제자를 자기 딸 결혼식에 불러다가 주차요원 하라고 시킬 수가 있는지……. 그 연구실 애들 항상 눈 퀭해가지고 좀비처럼 연구동 배회하고 그랬잖아요.”
“불쌍한 대학원생들 인권 챙겨주는 것도 좀 해봐.”
양혜숙이 웃으며 말했다.
“국회에 계신 분이 해야하는 일 아닙니까?”
“법은 느리고 둔해서 그 조그만 왕국 같은 연구실들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교수들을 잡는 데는 한계가 있지.”
“그렇긴 하죠.”
“학생한테 연구비를 월급으로 아예 연구재단이 직접 지급하도록 법을 만들어도, 그 월급을 다시 뺏어가는 교수가 있을 정도니까.”
“그거 금품 갈취 아닌가요……. 그런 사람이 있어요 정말?”
“네가 몰라서 그렇지, 꽤 많아. 주차요원 시키는 박 교수가 인격자로 보일 정도인 교수들도 있어. 나도 그런 썩은 물에 환멸 느끼고 나온 사람 중 하나고.”
“……. 한번 알아봐야겠네요. 다른 학교들까진 몰라도 최소한 제 모교에서 제 후배들만은 그런 피해를 보는 건 싫으니까요.”
“그래. 너 정도 되는 위치면 학생수준까지 신경써줄 의무가 있다고 봐.”
양혜숙이 말했다.
“너는 그냥 기업가나 과학자가 아니라 이 사회의 선지자고 지식인이거든.”
“에이. 그 정도 아녜요.”
“아무튼 이 얘긴 이쯤하고. 영준아, 이번에 하는 연구 말이야. 그거 뇌사 상태를 회복시키는 거니?”
그녀가 물었다.
“그걸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흐음……."
양혜숙은 스테이크를 조금 썰어서 먹으며 류영준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연구는 많이 진행됐니?”
그녀가 물었다.
“셀리제너와 협업하고 있는데, 송지현 박사가 상당히 공격적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카펜티어 교수님과 저희 팀원들도 다들 굉장한 실력자라서 성과가 빠르게 쌓이고 있고요.”
류영준이 답했다.
“아마 몇 주 이내에 전임상을 마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다음에는 뇌사자에게 임상시험을 진행할 겁니다.”
“지금 내가 대표 발의자로 개정 법안을 추진하고 있어.”
양혜숙이 말했다.
“하지만 이 개정안이 통과돼도 뇌사자에게 임상시험을 바로 하진 못할 거야.”
“김현택이라는 뇌사자가 있습니다. 무려 반 년 넘게 아직도 생명유지장치를 붙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가족의 동의를 구했습니다.”
“네 명성 때문에 동의해준 거지.”
양혜숙이 지적했다.
“네?”
“하지만 임상시험의 절대 원칙은 ‘환자 본인의 동의’야. 알지?”
"......."
임상시험은 환자 본인의 동의를 받는 게 원칙이다. 본인의 인지 능력이 극단적으로 상실되어 직접 이해하고 동의할 수 없는 경우에는 대리인이 대신 동의할 수 있긴 하다.
하지만 이때에도 피험자의 인지능력이 닿는 선까지 최대한 많은 정보를 피험자 본인에게 이해시켜야 한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자필 서명과 날짜 기재까지 받아야 한다.
“하지만 식물인간 같은 경우에는 보호자의 동의만으로도 임상시험이 진행되지 않습니까?”
“그거랑 달라. 식물인간은 PVS (Persistent Vegetative State) 상태의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치료법으로 임상시험의 종류가 한정되어 있고,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임상시험법의 보호를 받잖아. 하지만 뇌사자는 현행법상 사망자이기 때문에, 뇌사자를 대상으로하는 의학 연구를 허가할 때는 어떤 과학자들이 막 죽은 신선한 시신을 이용해서 자기들이 원하는 다양한 세포생물학 실험을 수행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할 가능성도 있다는 게 고려돼야해.”
“아니 그게 무슨……. 임상시험이니까 환자 본인의 동의를 엄격하게 받아야 한다면서, 사망자니까 임상시험법 적용은 못한다는 거예요?”
“아니. 임상시험법의 보호를 받는 살아있는 사람의 경우에도 본인의 동의에 엄격한데, 임상시험법의 보호를 못 받는 시체라면 그 문제에 더욱 엄해진다는 거야.”
“이해가 안 되네요. 시체 취급이라면 모호한 존엄성 말고 생명력이 없는 상태라는 뜻인데, 그것에 법률이 더 엄하다고요?”
“막 죽은 인간은 법적인 중요성이 굉장히 높아.”
“어째서요?”
“죽는 시점에서 상속법이 발동되니까.”
양혜숙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