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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화. < 로잘린 (6) > (88/301)

232화.  < 로잘린 (6) >

“잠……깐만요.”

류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5분만 쉬죠.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류영준은 미팅을 중지하고 재빨리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대표 사무실을 향해 걸어가면서 나지막이 목소리를 내어 로잘린을 불렀다.

“로잘린.”

-.......

아무 반응이 없다.

심지어 상태창도 떠오르지 않았다.

‘망했네.’

대표 사무실에 들어가며 류영준 머리를 움켜쥐었다.

이건 분명 병원체 때문이다. 그게 뭔가 문제를 일으킨 거다.

‘내가 그래서 그냥 파괴해버리라고 했는데…….'

-파괴 안 할 거예요.

로잘린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로잘린!”

류영준이 소리쳤다.

“어디 간 거야? 괜찮아?”

-괜찮습니다. 약간 울렁거리는 기분이긴 한데.

로잘린은 류영준의 몸에서 퐁 하고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류새이의 모습이 되더니 곧바로 소파에 드러누웠다.

-굉장히 피곤하네요.

로잘린이 침대에 누운 채 발을 굴렀다.

-제가 옛날에 점점 당신을 닮아가면서 피곤함을 느끼게 되었고 수면욕이 생긴다고 했던 거 기억하세요?

“당연하지.”

-지금이 그래요.

로잘린이 말했다.

-강력한 독감 바이러스 같은 것에 감염돼서 고열을 앓으며 침대에 쓰러져 기절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에요.

“네가 흡수했던 병원체랑 관련 있는 건가?”

-네.

로잘린이 말했다.

-저도 처음 알았네요. 저도 병원체에 감염될 수가 있군요.

“……. 지금에라도 그 유전자 뱉어버리는 게 어때?”

-음.......

로잘린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정확히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 유전자는 마치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처럼 로잘린에게 꼭 맞아떨어졌다.

본래 로잘린의 일부였기 때문일 것이다.

-제가 갖고 있는 게 좋겠어요.

로잘린이 말했다.

“그래?”

-옛날에 저는 류새이의 트라우마 속을 헤맨 끝에 한 단계 크게 성장할 수 있었어요.

“그때부터 내 몸 밖을 돌아다니는 게 가능해졌지. 새이 모습으로.”

-이번에도 잘 하면 그때처럼 성장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로잘린이 말했다.

-저한테 조금만 시간을 더 주세요. 이걸 소화해볼 테니까.

'.......'

-그리고 저 또 잠들 수도 있어요. 그래도 놀라지 마시고요.

류영준은 눈살을 찌푸린 채 로잘린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보세요?

로잘린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약간 걱정돼서.”

-네? 제가요?

“괜히 무리하다가 다치면 어떡해……."

-후후, 제가 사라지면 당신도 앞으로 연구하는 데 중대한 차질이 생기긴 하겠죠.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은 이미 보통 인간하고는 사고 방식이 많이 달라졌어요. 생물학의 근간을 읽는 눈이 생겼으니까요.

“그런 게 아냐.”

류영준이 말했다.

“벌써 1년 넘게 한 몸을 같이 써왔는데……. 넌 나랑 가장 가까운 친구야. 어쩔 땐 완전 어린애 같아서 딸 낳으면 이런 느낌일까 싶기도 하고. 새이 모습을 하고 있으니 걔가 살아 돌아온 거 같기도 하고. 그래서 동생 같기도 하고.”

-.......

“무리하지 마. 제발. 다치지 말고. 꼬맹아.”

류영준은 피식 웃으며 로잘린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 치는 시늉을 냈다.

그는 미팅룸으로 돌아갔다.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갑자기 생겨가지고요. 다 처리하고 왔습니다. 우리 어디까지 했죠?”

류영준이 물었다.

“임상시험 관련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것까지요.”

송지현이 말했다.

“아. 그렇죠.”

류영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희 법무팀을 통해서 진행해보겠습니다.”

약 두시간 후.

미팅이 끝났다.

“자료 스터디 좀 해서 다음 주 이 시간에 다시 한 번 모이죠. 오늘은 이만 해산이에요. 다들 저녁 맛있게 드시고 퇴근하세요.”

류영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바깥으로 나가는 그를 송지현이 붙잡았다.

“류 박사님 . 같이 식사나 하실래요?”

그녀가 물었다.

뒤에서 그 말을 들은 박동현이 불쑥 나섰다.

“오, 좋죠. 저희도……. 억.”

정혜림이 박동현의 어깨를 살짝 꼬집어 말을 막았다.

“저희는 오랜만에 팀 회식이 있어가지구요.”

정혜림이 헤헤 웃으면서 박동현을 끌고 나갔다.

“오늘은 대표님은 안 끼워줍니다.”

천지명이 장난스럽게 툭 던지며 그 뒤를 따라 나갔다.

“노벨상 수상자는 끼워주고요.”

배선미가 카펜티어를 데리고 나가면서 말했다.

류영준은 그 모습을 보면서 어이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저쪽은 회식 간다 치고. 우린 어디로 갈까요?”

류영준이 물었다.

“여기 앞에 한식당 새로 생긴 거 있어요. 거기로 갈래요?”

“……아직 정윤대 쪽에 사시죠?”

류영준이 물었다.

“네."

“그럼 옛날에 우리 같이 갔던 이자카야는 어때요?”

“이자카야?”

“우리 거의 처음 만났을 때 갔던 곳 있잖아요. 심야 식당 키요이?”

“아!"

송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

류영준과 송지현이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들은 정윤대 사거리의 룸 술집에서 같이 술을 마셨다.

“그 후로 같이 술 마시는 건 거의 처음인가요?”

류영준이 물었다.

“아뇨. 우리 같이 식사하면서 와인 시킨 적도 있고, 에이바이오 암 연구소 건설 이후에 자축 파티에서도 한 잔 했어요."

송지현이 말했다.

“다만 류 대표님은 거의 술을 항상 안 드셨죠.”

“음……. 그랬군요. 사실 제가 술 먹으면 자꾸 잔소리하는 애가 있어서.”

“근데 오늘은 드세요?”

류영준이 술잔을 들자 송지현이 물었다.

류영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애가 오늘은 자고 있을 거예요.”

“잔다고요?”

“이상한 거 잘못 먹고 배탈 나서 약 먹고 잠들었거든요. 그러니 오늘은 마셔도 될 겁니다.”

-저 안 잡니다. 마시지 마세요.

로잘린이 메시지를 보냈다.

류영준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는 조용히 술잔을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그냥 콜라나 마셔야겠어요.”

“누군지 궁금하네요.”

송지현이 말했다.

“잔소리하는 친구요?”

“네. 혹시…… 여자친구?”

“하하, 아닙니다. 절대.”

류영준이 손사래를 쳤다. 송지현은 약간 마음을 놓았다.

“아까 바쁘다고 나가셨던 일은 잘 처리됐어요?”

그녀가 물었다.

“네, 뭐. 원만하게 끝났죠. 제가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진 않았죠?”

“네. 완전 사색이 돼서 나가시기에 큰일 난 줄 알았거든요. 미팅 중지라고 생각하고 다들 정리하려고 했어요. 근데 생각보다 빨리 돌아오셔서 오히려 놀랐죠. 무슨 일이었어요?”

송지현이 물었다.

“사실 그거 걱정돼서 류 대표님한테 저녁 같이 먹자고 부른 거거든요."

"......."

류영준은 콜라를 몇 모금 마셨다.

로잘린에 대해서 뭘 설명할 수는 없다. 송지현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생물학에 전지전능한 천재 세포가 몸속에 기생한다는 소리가 얼마나 황당하게 들릴지 걱정되니까.

그래서 류영준은 다른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이 대화를 흘렸다.

“송 박사님.”

류영준이 말했다.

“송 박사님은 과학을 오용하는 과학자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화제를 바꾸려고 한 거였는데 물어보고 나니 진짜로 궁금해졌다.

로잘린하고 이 문제로 한 바탕 했지만 아직 서로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했던 것이다.

“과학을 오용하는 과학자요?”

“그러니까, 제가 에이젠바이오를 운영하면서 항상 느꼈던 딜레마가 그런 거예요. 예를 들어서 이번에 천슈에 주석 같은 사람 말이에요.”

류영준이 말했다.

“결국 차세대병원에서 인공심장을 이식받고 돌아갔잖아요? 중국 내에서는 양군위 성장을 중심으로 정권이 바뀌려는 분위기인 모양이지만, 그건 둘째 치고. 아무튼 건강한 사람을 납치하고 살해하고 장기를 적출하는 미친 짓을 저지른 주석은 살았어요.”

“그렇죠.”

“제가 개발한 기술로 말이에요.”

류영준이 말했다.

“그리고 신장 지역에 퍼졌던 바이러스 있잖아요?”

“네."

“그거 중동 테러리스트들이 개발한 건데, 그 바이러스를 제작할 때 유전자 조작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선 아마 캐스나인을 썼겠죠. 가장 편리한 유전자 가위니까요.”

류영준이 말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캐스나인은 제가 개발한 거예요. 게다가 허찌엔칭 같은 사람은 그 유전자 가위로 사람 유전자를 조작해서 면역 결핍 아기를 태어나게 하기도 했죠.”

“죄책감을 느끼세요?”

송지현이 물었다.

“아뇨. 꼭 그런 건 아닙니다. 하지만……."

“찝찝하신 거죠?”

“네."

송지현은 술을 조금 마셨다.

“그게 찝찝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류 박사님이 윤리적인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세상에 류 박사님 같은 사람만 과학을 하면 얼마나 좋겠냐만, 현실은 그렇지 않죠.”

"......."

“지금으로부터 한 10년 쯤 전에 영국 정부의 수석 과학 자문역에 있는 과학자가 ‘과학자들의 보편 윤리 강령 (Universal Ethical Code for Scientists)’이라는 걸 발표했어요.”

“보편 윤리 강령?”

“의사들의 히포크라테스 선서 같은 게 과학자한테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발표한 거였죠. 근데 별로 영향력은 없었어요.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요.”

송지현이 말했다.

“보세요. 세계 최강 윤리 과학자인 류 박사님도 모르시잖아요.”

"......."

류영준의 귀가 약간 붉어졌다.

“왜냐면 과학자들이 그런 윤리 강령 같은 것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아서 그래요. 솔직히 과학자들은 대부분 성격이 오만한 편이고 윤리에 대해서는 좀 무디죠.”

송지현이 말했다.

“하지만 류 박사님.”

송지현이 몸을 약간 기울였다.

“류 박사님이 베이징에서 모라토리엄을 발표하기 위해 컨퍼런스를 열었을 때는 학계 전체가 술렁였어요. 아세요? 정상급 과학자들이 그곳에 우르르 몰려갔고, 세계 곳곳에서 모라토리엄의 후속 선언들이 나왔죠.”

"......."

“심지어 그건 연구 속도를 조절하겠다는 선언이었는데도, 다들 생명 윤리의 맥락에서 동의하고 류 박사님을 따라나선 거예요. 류 박사님은 그동안 기술에서만 진보를 일으킨 게 아니에요.”

송지현이 말했다.

“학계는 지금 크게 바뀌고 있어요. 그동안 류 박사님이 싸워온 전선은 인류와 질병의 전장만이 아니에요. 과학자와 비윤리의 전장도 있었죠. 그리고 류 박사님은 그쪽에서도 상당히 많은 승리를 거뒀다고 생각해요.”

“그런가요……."

“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송지현은 류영준의 잔에 술을 조금 따라주었다.

“건배할까요? 윤리적이고 진보적인 과학의 미래를 위해서?”

송지현은 자기 잔을 들다가 우뚝 멈췄다.

“아, 술 안 드신다고 했죠?”

-한 잔만.

로잘린이 메시지를 보냈다.

-한 잔만 봐줄게요.

“한 잔만 하죠.”

류영준이 피식 웃으며 잔을 들었다.

***

“너는 변호사 괴롭히는 데는 진짜 도가 튼 놈이야.”

박주혁이 짜증을 부렸다.

“세상에 시체한테 임상시험을 하게 해달라고 국회에 법개정을 요구하는 제약사는 여기밖에 없을걸.”

“미안하다. 조금만 수고해줘.”

류영준이 말했다.

“내년쯤엔 어디 외계인이라도 납치해와서 임상시험하게 해달라고 할 거냐?”

“그건 생각 못했는데 정말 좋은 아이디어야.”

“미친……."

“그래서 어떻게 돼가?”

류영준이 책상에 등을 기대며 물었다.

“뭐, 일단 의원들 중에서 약사법 개정안을 발의하고 추진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고 있어. 양혜숙 의원이라는 사람이 대표 발의를 할 거야.”

“양혜숙?”

“응. 정윤대에서 생명공학 교수직 하던 사람이야.”

“잠깐만. 나 아는 분 같은데?”

류영준의 눈이 커졌다.

“교수직 그만두고 국회로 들어가신지 얼마 안 되셨으니 당연히 알겠지. 너 학위할 때 계셨을걸.”

박주혁이 말했다.

“아....... 나 한번 만나봐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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