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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화. < 로잘린 (6) > (87/301)

231화.  < 로잘린 (6) >

로잘린은 병원체의 파편들을 좀 더 가까이에서 관찰했다.

-시뮬레이션에서 독성이 높아서 검은 색으로 보였죠.

로잘린이 말했다.

“응.”

-지금도 새까매요. 그 시뮬레이션 색처럼 말이에요. 모든 빛을 다 흡수하는 반타블랙의 색깔이에요.

로잘린은 조심스럽게 파편을 헤집었다.

-줄기세포를 이 뇌실하대에 주입해서 재생시킬 때 이게 걸리적거리지 않게 하려면 지금 치워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렇게 할 수 있어?”

-그 어떤 미지의 생물이라도 결국 구성성분을 피코미터 수준에서 관찰한다면 결국 비슷비슷합니다. 전부 원자 단위에서 이해할 수 있는 물질에 불과하니까요.

로잘린이 말했다.

-그리고 이 병원체의 파편은 단백질과 지질과 미량의 핵산으로 구성된 물질들입니다.

[ 라이페이즈 (Lipase)) 과발현 180%]

[프로티에이즈 (Protease) 과발현 227%]

-그렇다면 몇 개의 유전자를 작동시켜서 제 세포막 바깥으로 뿜어내는 걸로 잘게 파괴할 수 있죠.

로잘린이 말했다.

-전에 했던 게 퍼포린을 이용해서 구멍을 숭숭 뚫어놓은 거라면 이번엔 믹서에 갈아버리는 거예요.

라이페이즈와 프로티에이즈가 로잘린의 세포 내에서 만들어져 분출되었다.

그것들은 병원체의 표면에 달라붙어서 화학 반응을 일으켜 매우 작은 모노머 (Monomer) 단위로 분해하기 시작했다.

“무리하지 마.”

류영준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잘 돌아가고 있…….

픽!

-.......

파괴된 병원체에서 핵산이 튀어올라 로잘린의 세포막을 뚫고 들어왔다.

그건 마치 날카로운 바늘이 비누거품에 구멍을 내는 것과 비슷해 보였다.

“로잘린!”

-괜찮아요.

로잘린이 말했다.

그는 엔도좀 (Endosome)을 생성해서 병원체의 핵산을 부드럽게 감쌌다.

엔도좀은 세포 내를 천천히 움직여서 핵 내부의 구석진 위치에 들어가 멈추었다.

-예상 밖의 움직임이라 좀 놀랐지만 제가 통제할 수 있습니다.

로잘린이 말했다.

-이 핵산을 제 세포 내에 보관할 거예요.

“없애버리지 않고?”

-핵산은 DNA가 포함된 물질이에요.

로잘린이 말했다.

-약간 리스크가 있지만, 본래 제가 탄생할 때 나눠진 조각이라면 제 손 안에 두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써먹을 데가 있을수도 있고.

지이이잉!

류영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카펜티어]

“카펜티어?”

류영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카펜티어입니다. 류 대표님, 시간 나실 때 통화하고 싶습니다.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하나 진행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재밌는 프로젝트?’

통화버튼을 누르려던 류영준의 등 뒤에서 이미숙의 목소리가 들렸다.

“류 박사님!”

그녀는 환하게 웃으면서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휴, 아직 안 가셨네요. 다행이에요. 이거 하나 드시고 얘기 조금만 하다가 가요.”

이미숙은 선물용 음료 상자를 뜯어서 오렌지 주스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류영준이 주스를 받았다.

“그동안 계속 류 대표님을 찾아가서 사과하고 싶었어요.”

이미숙이 말했다.

“근데 류 대표님은 너무 바쁜 사람이라서 한 달에 절반은 해외에 계시고, 국내에 계실 때도 선약 잡지 않고 불쑥 찾아가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죠.”

"......."

“그렇다고 사과하려고 약속을 잡으려니까, 이게 또, 바쁘신 분한테 성가시게 구는 거 같아서 그게 더 민폐 끼치는 느낌이고요.”

“별로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참 인생이란 게 기구하죠?”

이미숙이 말했다.

“저는 전업 주부라 잘 모르지만, 제 남편이 셀리큐어를 없애고, 류 박사님이 따지고 드니까 생명창조부서인가 어디로 좌천시켰다고 들었어요.”

“그랬죠.”

“근데 지금 이 사람은 병실에 누워있고, 셀리큐어는 항암시장에서 승승장구하는 약이 됐고, 류 박사님은 에이젠의 오너가 되셨네요."

"......."

이미숙은 음료를 조금 마시다가 류영준을 힐끔 쳐다보았다.

“제가 남편을 보내지 않고 여기 계속 데리고 있는 거. 솔직히 말하면 류 박사님 때문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전 뇌사자가 살아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류 박사님이라면 언젠가 뇌사자를 회복시키는 방법도 알아내실 거라고 믿어요."

"......."

“제가 좀 교활한가요? 염치도 없이 숨어서, 이 사람 숨만 이어가면서……. 이 사람 때문에 제일 큰 피해를 보신 류 박사님한테, 이 사람을 살려주길 기대한다는 게 참……."

이미숙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저한테는 이 방법밖에 없어요. 류 박사님. 이 사람이 나쁜 사람이었다는 것도 알아요. 쓰러졌을 때 천벌 받았다는 소리 들었던 것도 알고요.”

“천벌 같은 게 아닙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아직 의학이 이해하지 못한 병원체일 뿐이에요.”

“……그렇군요.”

이미숙은 가져온 음료를 조금 마시다가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며 주저하다가 결국 류영준에게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그녀가 말했다.

“사과가 늦은 것도 죄송하고요. 정말 죄송해요. 옛날에 있었던 일 전부 다……. 정말 죄송합니다.”

***

“좋아. 합시다.”

천지명이 말했다.

“송 박사님. 우리 팀이 에이젠바이오에서 그동안 했던 연구들 중에 뭐 하나 별나지 않은 게 없지만 이건 진짜 크레이지 아이디어예요. 근데 우린 그런 거 좋아합니다. 해봅시다.”

송지현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젠바이오가 알츠하이머 치료에 성공한지도 꽤 됐잖아요? 줄기세포로 뇌신경을 재생하는 데 기술력이 상당히 올라가있고, 이 시장을 가장 선도하는 그룹이니까 한번 도전해볼만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기안 올리겠습니다. PI (principal investigator, 연구 책임자)는 아이디어 제공자인 송 박사님으로 하고요.”

“이 프로젝트의 PI는 따로 있어요.”

송지현이 말했다.

“누구요?”

“카펜티……."

지이이잉

송지현의 휴대폰이 울렸다.

[카펜티어]

“누구예요?”

박동현이 물었다.

“카펜티어 박사님이세요.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그 분도 제7 연구소 소속이잖아요?”

“맞아요.”

“근데 카펜티어 박사님하고도 아시는 사이세요?”

“카펜티어 박사님이 뇌신경학회 고문이시거든요. 에이바이오가 생기기도 전부터 저는 알고 있었죠. 자주 뵈었고요.”

“아, 하긴.”

천지명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카펜티어 박사님은 중추신경 재생의학 쪽에서 최고 전문가셨으니까.”

“사실……."

송지현이 약간 민망한 듯 말했다.

“여기로 오기 전에 이 프로젝트에 대해서 카펜티어 박사님한테 먼저 말씀을 드렸었어요. 제가 얘기한 방법으로 뇌간을 재생하는 게 가능할지 여쭤봤었죠.”

“될 것 같대요?”

“시도해보자고 하셨죠. 류 대표님한테 기안 올리겠다시며.”

송지현은 휴대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송 박사님. 카펜티어입니다.

카펜티어가 말했다.

-내일 퇴근 전에 잠깐 미팅하자고 했었잖아요? 그냥 오늘 뵙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 바쁘신 분이 지금 합류할 가능성이 있어서.

“바쁘신 분이요?”

-우리 대표님 말입니다.

***

류영준이 역분화 줄기세포를 만들기 전, 재생의학계의 정상에는 노벨상 수상자 카펜티어가 있었다.

그는 뇌신경 재생에 특히 매진했는데, 그 이유는 대학원을 다닐 때 약혼했던 여자 때문이었다.

그녀는 교통사고로 전신이 마비됐다. 의식이 있었고 오른쪽 눈동자를 움직일 수 있었지만, 그 외의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몸에 갇혀버린다는 의미의 ‘락 인 (Lock in) 신드롬’이라는 상태였다.

학회에서 카펜티어와 송지현이 처음 만났을 때, 두 사람은 깊은 동질감을 공유했다. 둘 다 강력한 뇌신경질환을 앓는 환자의 가족이거나 약혼자였기 때문이다.

“대뇌 전두엽의 운동령이 죽어서 수의 운동을 조절하고 골격근 수축을 통제하는 능력이 상실된 상태였죠.”

카펜티어는 담배를 태우면서 말했다.

“치료방법이 없어서 라일라는 1년을 고통 받다가 조용히 숨을 거뒀습니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은,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질병 중에서 그게 가장 최악이라는 겁니다. 암보다 더 심해요. 치매보다도 사악합니다. 자기 자신의 몸에 영혼이 유배된다는 것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해요.”

카펜티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뇌신경을 재생시켜서 락 인 신드롬이나 PVS (Persistent Vegetative State, 식물인간) 상태에 있는 환자를 회복시키고 싶었습니다. 벌써 30년이 넘은 꿈이에요.”

거의 포기했던 그 꿈에 갑자기 가능성이 보여서 에이바이오로 왔다.

그리고 이제 카펜티어는 뇌에서 수의운동 능력이 죽은 락 인 신드롬이나, 의식까지 죽어버린 PVS보다 훨씬 큰 것에 도전하게 됐다.

아예 뇌 전체가 기능을 소실해버린, 사망에 준하는 상태 ‘뇌사’를 표적으로 삼게 된 것이다.

“뭐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였죠?”

류영준이 당황해서 물었다.

카펜티어에게 연락했더니 생명창조 팀원들에 송지현까지 나타났다.

“도움 될 만한 사람들 있으면 더 부르라고 하셨잖습니까?”

카펜티어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야 그렇죠. 유비서한테 소회의실로 잡아 달라 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큰 곳으로 잡을걸 그랬네요.”

“괜찮습니다.”

박동현이 말했다.

“좋아요. 그럼 우리 간단히 미팅 좀 해볼까요?”

류영준이 말했다.

“으흠!”

송지현이 스크린에 연구 전략 자료를 띄웠다.

“환자의 체세포로부터 역분화 줄기세포를 만들고, 뇌신경으로 분화시키기 위한 유전 물질들을 트랜스펙션한 다음 제4 뇌실 아래의 뇌실하대에 찔러 넣습니다.”

“뇌실하대요?”

류영준이 물었다.

“네."

송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에 여기에 도파민과 노르에피네프린을 10 mg만큼 녹여서 주입해줍니다.”

"......."

류영준은 턱을 괸 채로 실험 방법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류영준의 옆에는 로잘린이 둥둥 떠있는 채로 함께 송지현의 프레젠테이션을 듣고 있었다.

-대단하군요.

로잘린이 말했다.

‘정말 그래. 송지현 박사가 똑똑한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이건 네가 세운 전략이랑 거의 똑같잖아?’

류영준이 시선을 모니터에 고정한 채 말했다.

-약간 달라요. 저 방법으로 하면 치료될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회복에 시간이 더 걸릴 거예요.

로잘린은 류영준과 생각으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적절한 후속 조처가 잘 취해지지 않으면 식물인간 상태에서 멈출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 정도만 해도 엄청난 거지. 뇌사자는 사망자지만, 식물인간은 살아있는 사람이야.’

-인간의 기준에서는요.

‘옛날 로잘린도 저 치료법을 분석해내진 못했는데, 그 어려운 난제를 혼자 머리 굴려서 아이디어를 냈다니.’

-확실히 옛날에 제가 한번 실패하긴 했지만 피트니스만 약물로 늘리고 했어도 성공했을 거예요. 그때는 동기화를 깊이 돌릴 만한 피트니스가 모자랐을 뿐이라고요.

‘자존심 상하니?’

류영준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인간하고 경쟁하면서 자존심을 세운다는 게 진짜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내 생각엔 송지현 박사가 닥터 레프보다 더 실력이 좋은 것 같아.’

-옛날 로잘린보다도 나을 정도니까요.

로잘린이 톡 쏘아붙였다.

‘삐지지 마. 나한텐 네가 최고야.’

-.......

‘로잘린?’

로잘린의 대답이 없자 류영준은 고개를 힐끔 돌렸다.

‘로잘린……?’

바로 옆을 떠다니던 로잘린이 사라지고 없었다.

‘뭐야? 어디갔어? 로잘린? 내가 장난 친 거야. 당연히 네가 송 박사보다 훨씬 잘났지. 나보다도.’

류영준은 눈을 굴려 주위를 살폈다.

어디에도 로잘린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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