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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화. < 로잘린 (3) > (84/301)

228화.  < 로잘린 (3) >

정윤대 근처의 한 고급 아파트.

삐리릭.

현관의 도어락이 짧은 신호음과 함께 열렸다.

류영준은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중국에서 돌아온 후 집에는 거의 처음 돌아온다. 밀린 업무들을 처리하느라 집까지 올 시간조차 없었다. 회사 근처 호텔이나 대표 사무실에서 숙식을 다 해치우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정신적인 피로가 장난이 아니라 어쩔 수 없었다.

“나 왔어.”

류영준이 거실로 이동하면서 말했다.

“앗!"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류지원이 화들짝 놀라면서 일어났다.

“오, 오빠? 갑자기 어쩐 일이야 연락도 없이.”

“내 집에 오는데 연락을 해야 하냐?”

류영준은 류지원 옆에 앉아있는 남학생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 안녕하세요.”

남학생이 어색한 표정과 얼어붙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아는 얼굴인데……, 누구였죠?”

류영준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저, 지원이 동기 양동욱입니다. 전에 지원이 이사할 때 짐 옮기는 거 도와주러 왔었는데……."

“아, 맞아. 기억났어. 우리 말도 놨었죠?”

“넵!”

“놀러 왔나보네. 근데 엄마 아빠는?”

류영준이 류지원에게 물었다.

“……그……. 얼마 전에 여행 가셨어.”

“그래?”

류영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동욱이가 와있구나. 집 비어서. 사권 지 얼마나 됐니?”

“으악, 아니에요.”

“아냐!"

두 사람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사귄다고 내가 뭐라 하냐? 동욱이 입술에 지원이 립스틱 묻어서 빨갛게 칠해놨네.”

“……죄송합니다……."

양동욱이 입술을 닦아내며 말했다.

“이제 한 달 됐어……. 아빠한텐 비밀이야.”

류지원이 말했다.

류영준은 피식 웃었다.

“그래. 애들도 아니고 대학생인데 뭐. 예쁘게 잘 만나라. 난 지금 약간 피곤해서. 조금 잘게. 무슨 일 있으면 깨우고."

류영준은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고 침대에 쓰러졌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류지원이 양동욱을 힐끔 쳐다보았다.

“왜 저렇게 힘 빠져있지?”

류지원이 말했다.

“그래?”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나?”

***

침대에 드러누운 류영준 옆으로 로잘린이 다가왔다.

“엘시가 해준 얘기들, 넌 어떻게 생각하니?”

류영준이 물었다.

-모르겠어요.

로잘린이 류영준의 옆에 드러누웠다.

류새이만한 소녀가 눕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세포 하나였기 때문에 침대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저는 그동안 당신 곁에서, 과학을 오용하는 과학자들을 많이 보긴 했어요.

"......."

-셀리큐어를 없애버린 김현택이나, 녹내장 치료제를 없애버리려고 의료 사고를 일으킨 슈마틱스. 그리고 제이미 앤더슨 같은 사람도 노벨상 때문에 하이퍼프로그레션의 위험이 있는 치료제를 함부로 임상에 쓰곤 했죠.

로잘린이 말했다.

-신장 지역에서 300만 명의 위구르인이 수용되어 있는 시설을 보았을 때, 저는 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건 극도의 부자연스러움과 비효율이 집약된 모습이었어요.

“네가 그렇게 충격을 받는 모습은 처음 봤어.”

-저는 인간이 불완전하고 미숙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옛날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평가예요. 인간은 본질적으로 충동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물입니다. 그래서 실수도 저지르는 거죠. 지광만이 깡패들을 부려서 당신을 살해하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에요.

로잘린이 말했다.

-그리고 과학의 수준이 높을수록 실수했을 때 피해도 커져요. 순간적인 감정 충돌을 조절하지 못해 실수로 돌을 던지던 게 핵미사일 버튼을 누르는 걸로 변할 수 있죠.

"......."

-인간의 과학은 어쩌면 통제되어야 할지도 몰라요. 제가 모든 인류를 감염시킬 수 있다면 그걸 할 수 있을 겁니다. 미국 같은 나라에서 총기 규제를 하려는 것과 비슷한 거예요. 지적 수준과 도덕성을 평가하고 그걸 기준으로 제가 직접 과학을 차등 지급하는 겁니다.

“그럼 학교에서 과학 교육을 하는 것도 막을 거야?”

-수십 년을 공부해도 얻기 힘든 지식들을 선별된 사람들에게 일순간 제공한다면, 공부를 하려고 하지 않을걸요.

로잘린이 말했다.

-학교는 과학 교육 대신 윤리와 도덕에 대한 교육을 더 강화할 테고, 과학은 당신처럼 충분히 도덕적인 인물들에 의해서 선도되어 더욱 건설적이고 안전한 방향으로 나아가겠죠.

“GSC에 대해서도 생각이 같니?”

-저는 인간을 싫어하진 않지만 적어도 GSC 같은 집단이 그 능력에 비해 과분한 자격과 권위를 갖고 있다는 데는 동의합니다. 그들은 인간이니까요. 저개발 국가에서 단순히 그들의 이름값만 보고 정책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문제가 있어 보이는군요.

“……그럼 넌 인류의 과학을 직접 독점하고 관리하고 싶어?”

-그건 모르겠어요.

로잘린이 말했다.

-지금까지 제가 얘기한 건 능력 차원의 얘기입니다. 욕망하고는 달라요. 능력적으로는, 닥터 레프가 얘기한 것처럼 제가 모든 인류를 감염시키고 지배한다면 저는 잘 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렇겠지.”

-제가 옛날에 독감을 멸종시키는 방법을 알려드린 적 있었죠?

“병증이 적은 감기바이러스에 독감 유전자를 집어넣어서 세계에 퍼뜨리자고 했지.”

-이제 그렇게 과격한 길을 고를 생각은 없어요. 극단적인 효율만 추구하던 옛날의 제가 아닙니다.

로잘린이 말했다.

-저는 당신한테 생명 윤리를 배웠어요. 당신은 어떤 인간도 수단이나 희생양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제가 그동안 분석한 당신의 행동 패턴의 기준입니다.

"......."

-그 원칙에 철저한 인간들만 선별해서 상황에 맞게 과학을 주면 됩니다.

로잘린이 건조하게 대답했다.

로잘린은 조금의 감정도 섞이지 않은, 객관적인 사실 그 자체만을 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류영준도 알 수 있었다.

로잘린은 정말로 그만한 지능과 지식이 있다. 만약 닥터 레프가 말한 것처럼 한다면 정말로 잘 해낼 것이다.

‘어쩌면 내가 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하지만 욕망은 다른 문제죠. 저한텐 그런 욕구가 없습니다.

로잘린이 말했다.

“그러니?”

-앞으로는 몰라도 지금까진 그랬어요. 저는 당신의 욕망을 욕망했어요.

로잘린이 자리에서 고개만 들더니 류영준을 쳐다보았다.

-제가 그렇게 태어난 존재일까요? 제 욕망이 따로 없도록?

“……. 너 ATP 좋아하잖아. ATP 맞고 싶은 것도 욕망이지 뭐.”

-그런 거 말고요.

“글쎄.”

-아무튼 그래서 아까 엘시의 얘기, 닥터 레프의 생각은 좀 낯설었어요.

“닥터 레프는 네가 나한테서 독립하길 원해. 내 뜻대로 움직이는 과학 자판기 같은 게 아니라, 직접 세상을 지배하는 강력한 힘이 되길 원하는 거야.”

-하지만 저는 당신의 몸을 떠나서 생존할 수 없는데요.

"......."

옛날에 닥터 레프는 로잘린에게 ‘번식의 욕구가 없는 불완전한 생물’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오면 완성시켜주겠노라고 했다.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요.

로잘린이 류영준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쳐다보며 말했다.

“바이러스학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바이러스 입장에서는 ‘감염’이 곧 ‘번식’이지.”

류영준이 말했다.

“네가 다른 사람을 감염시킬 수 있다면 그것 자체로 넌 번식을 하는 셈이야. 네가 바이러스적 특성을 가진 최초의 생명체라면 말이야.”

-맞아요.

로잘린이 말했다.

-저는 번식의 능력도 없고 번식에 대한 욕망도 없는 셈이네요.

"......."

로잘린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정말 생물일까요?

로잘린이 말했다.

-이런 생물체는 없어요. 어쩌면 저는 바이러스보다 더 무생물적인 존재가 아닐까요? 저 자신에 대해서 항상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로잘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많은 게 변했습니다. 류영준. 제가 잠을 자고 싶다고 얘기했던 것 기억하시나요?

“그랬지.”

-요즘은 좀 견디기 어렵다고 생각될 정돕니다. 특히 중국 신장에서 홍채를 재현해서 문을 하나 따줬을 때, 피트니스를 꽤 많이 썼거든요. 그 후로 줄곧 피곤함을 느꼈습니다.

로잘린이 말했다.

-어쩌면, 만약 제가 불완전하다면, 그 이유로 예상되는 게 하나 있긴 합니다.

“뭔데?”

로잘린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김현택 소장을 감염시켜서 뇌사에 이르게 했던 병원체 기억나시나요?

류영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당시는 에이젠의 과거 탄저균 생물무기 개발 건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김현택은 에이젠 제6 연구소를 찾아왔다가 생명창조 부서에서 미지의 병원체에 감염되어 쓰러졌다.

그 병원체는 로잘린의 시뮬레이션 모드에서 마치 반타블랙처럼 새까맣게 보이는 것이었는데, 에이즈나 탄저균, 에볼라 같은 것과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독성이 높은 물질이었다.

로잘린은 김현택을 그것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서 직접 그의 몸속으로 들어갔는데, 퍼포린을 발현시켜서 병원체를 파괴했다.

-그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절 공격하려고 했었어요. 그리고 제가 그걸 파괴해서 없애버렸을 때 어떤 화학 물질들이 튀어나왔죠.

“화학 물질?”

-프레드니솔론Prednisolone과 펜톡시필린Pentoxifylline이라는 물질들이었습니다.

“그게 뭐야? 왜 거기서 나오지?”

-뭔지 모르겠어요?

류영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듣는데. 생물학자들은 화학물질은 쓰는 것 말곤 잘 모른다구.”

로잘린은 류영준의 눈앞에 손가락을 딱 튕겼다.

<로잘린 Lv. 22>

-전이 상태 : 심장 (9%), 간 (47%), 뇌 (12%), 신장 (15%), 척수 (9%)

-동기화 : 33%

-세포 피트니스 : 20.5

로잘린은 상태창 아래의 [메시지창으로] 버튼을 쿡 눌렀다.

-동기화 모드 발동 : 인공 장기 관찰.

.......

가장 최근에 사용했던 메시지들이 나타났다.

좌르르르륵

로잘린은 스크롤을 아래로 확 내려버렸다.

......

-시뮬레이션 모드 : 광둥성의 모기 번식

......

-동기화 모드 : 이윤아의 상태 진료

-동기화 모드 : 6단계 알츠하이머 치매 분석하기 . 피트니스 소모 : 0.7/1초

“어디까지 내려가는 거야?”

-조금만 기다려요.

로잘린이 메시지를 계속 내렸다.

.......

-본 메시지와 상태창은 인공 세포가 대뇌 신경피질을 조작하여 발생시키는 것으로, 해마의 기억 정보를 분석하여 당신이 가장 친근하게 느끼는 UI 디자인을 토대로 제공됩니다.

-당신이 생명체를 창조하는 순간을 상기시켜 드리겠습니다.

“거의 처음이잖아?

-맞아요. 제일 앞으로 가야해요.

"무슨......."

뭘 찾으려는 거냐고 물으려던 류영준의 표정이 굳었다.

-인공 세포가 경구 투여된 신약을 분해하기 시작합니다.

-Prednisolone 30 mg을 분해했습니다.

-Pentoxifylline 400 mg을 분해했습니다.

......

-인공 세포가 당신의 신체를 복구했습니다.

"......."

-제 이름이 생기기도 전의 일입니다. 제가 탄생하던 시점. 그때 당신은 알코올 중독으로 간염이 왔고 병원에서 간염 치료제를 받아서 복용하고 있었어요. 당신의 혈액 속에는 이 물질들이 흐르고 있었죠.

“맙소사 이게 지금…….

-로잘린 V4.87의 샘플을 관찰하다가 손가락을 유리 파편에 찔러서 피를 흘렸을 때, 당신의 ATP에 의해서 제가 발생하던 그때에도 말이에요.

로잘린이 말했다.

-그 혈액 안에는 저 간염 치료제가 들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저 화학물질들이 김현택을 뇌사로 만들어버린 병원체 안에 들어있었다고?”

-저 간염 치료제는 자연계에서 발생하지 않는 화학 물질들이었어요. 생물학은 미시 세계에선 화학 반응입니다. 제가 태어나던 시점의 화학 반응에 간염 치료제들이 어떤 방식으로 간섭했다면.

로잘린이 말했다.

-거기서 제가 분열되었을 수도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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