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 모라토리엄 (2) >
첫번째 시운전 차량은 최연호 대표의 오래된 벤츠였다.
그릴과 사이드 스커트, 범퍼 등에 필터를 설치했다.
이어서 직원들이 가지고 있는 차량들과 회사 차량 세 대에 필터를 붙이고 몇 주 동안 전 직원이 돌아가며 업무시간에 차를 몰았다.
최연호 대표가 업무의 일종으로 ‘한강 드라이브’를 넣어주었기 때문이다.
“제가 돈 받으면서 드라이브 할 줄은 진짜 몰랐어요.”
김수철이 조수석에서 조잘거렸다.
“그러게. 근데 수철 씨, 내 차 타기 전에 담배 피우지 마세요. 담배 냄새 배는 거 질색이니까.”
송지현이 엑셀을 밟으며 말했다.
“저 담배 냄새 나요?”
“아뇨. 그냥 혹시나 해서.”
“오케이. 알았습니다. 근데 송 박사님 차 좋네요. 역시 류 박사 다음 가는 인재라 그런가……. 셀리큐어 때 얼마나 벌었어요? 송 박사님은 자사주 많았으니까 엄청 많이 벌었을 것 같은데. 이것도 그때 산 거죠?”
"음......."
사실 산 게 아니다. 류영준하고 같이 찍은 사진이 언론에 한참 떠다니던 시절 협찬으로 받았다.
류영준은 이미 너무 커져 있었고, 후발주자로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송지현의 유명세에 기대려는 전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송지현은 민망해서 그걸 얘기하지는 않았다.
“우리 필터에 먼지 얼마나 찼을까요?”
김수철이 물었다.
“대표님이 일주일 몰고 필터 다 채우셨으니, 이 차도 슬슬 필터 갈아야 할걸요.”
송지현이 말했다.
“아. 송 박사님. 오늘 대표님 산업통상자원부랑 미팅하러 가셨죠?”
“맞아요.”
송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데이터들이 충분히 성공적이기 때문에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실시하는 신재생 에너지 정책이랑 같이 맞춰서 국가 사업으로 확대 시킬 거예요. 아마 되지 않을까요? 이 정도로 좋은 아이템인데.”
“그러게요. 기대됩니다 이번 자사주는 얼마나 대박 날지 흐흐.”
김수철이 웃음을 터뜨렸다.
-다음 뉴스입니다.
라디오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운전하면서 수다를 떠느라 여태 하나도 듣지 않았지만 다음 순간 두 사람은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정적 속에서 아나운서가 말했다.
-에이젠바이오가 애트목스와 소송전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허찌엔칭 박사 측으로부터 류영준 대표에 대한 폭로가 들어왔습니다.
-중국 동부 해안가를 따라 대규모의 산업 지대가 준설되고 있는데, 이게 모두 완공되면 한국을 향해서 엄청난 양의 미세먼지가 날아올 수 있다고 합니다. 허찌엔칭 박사는 이에 대해 류영준 대표에게 경고했으나, 류영준 대표가 소송전에 관심이 모두 쏠려 있어서 국민 건강은 뒷전으로 취급했다는 주장입니다.
-허찌엔칭 박사가 보내온 폭로 문서에는 현재 준설되고 있는 공장들의 설비와 그 규모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포함되어 있는데, 전문가들은 이 정도의 산업 지대가 완공되면 서울의 미세먼지 양이 세제곱미터당 1,000 마이크로그램이 넘어갈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정윤대 환경공학과의 이윤송 교수님 인터뷰를 들어보겠습니다.
-네, 이윤송입니다. 공장 지대의 굴뚝들이 모두 높고, 그 규모가 상당히 큰데다가 대부분 알루미늄 채굴과 가공을 위한 발전소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인근 지역에 석탄 매장량이 높고, 중국의 경우에는 동부 해안가에 석탄을 조달할 수 있는 루트가 잘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대부분 화력 발전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아마 서울 수도권은 70년대 이전보다 더 심한 스모그로 뒤덮힐 가능성이 높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허찌엔칭 박사는 이런 점에 대해서 한국 시민들에게 경고했습니다. 동시에 류영준 대표가 GSC 멤버로서 자국의 국민의 보건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등한시했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시민들의 반응은 엇갈리고 있습니다. 크게 둘로 나누면 ‘류영준이 왜 그것까지 신경을 써줘야 하냐, 이건 정부가 할 일이지 않냐’는 반응과, ‘그래도 류영준의 위치를 고려할 때 최소한 우리 정부에 경고라도 해주어야 했다.’ 는 입장입니다.
-일부에서는 이 미세먼지가 국가 외교 문제로 번지면서 중국의 GSC 멤버인 허찌엔칭 박사와의 소송전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습니다. 또한 류영준 대표 역시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소송을 서둘렀고 한국 정부에는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는 음모론도 제기 되고 있는 실정…….
“우리 대표님한테 전화 좀 해볼래요?”
송지현이 물었다.
“지금 미팅 끝났을 거예요. 산업통상자원부랑 우리가 같이 기자회견 한번 하죠.”
“네."
김수철이 휴대폰을 들었다.
“두 회사 합병에, 중국에선 모라토리엄에, 국제 소송까지 진행중인 사람인데 이 정도 일은 우리가 알아서 처리해주자고요.”
송지현이 말했다.
***
“델타32 말고 다른 돌연변이가 있다고?”
세미나실에 충격이 감돌았다.
류영준은 화면에 띄워놓은 피험자 미미의 유전자 데이터를 설명했다.
“CCR5 유전자의 델타32가 일어난 지점이 바로 이곳입니다.”
그가 DNA 구조의 한 부분을 짚었다.
“하지만 이 뒤에는 DNA가 암호 서열 TTTGG로 시작되어야 하는데, 지금 이 아기의 혈액에서 확인된 DNA 서열은 앞의 TT가 사라진 TGG로 시작됩니다. 다섯 개 염기쌍에 오류가 발생한 거죠.”
류영준이 말했다.
“이는 유전자 가위로 표적을 자른 후 DNA 템플레이트 (Template)를 재결합시키는 과정에서 생긴 결손입니다. 네 개의 염기쌍이 삭제 되면서 이 같은 결과물이 발생한 거예요. 그리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미미의 건강은 현재 매우 나쁩니다. 그 애는 감염에 아주 취약하여 무균실에서 생활하고 있죠.”
류영준은 천천히 강단을 걸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가 말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갓난아기는 산모의 항체를 물려받고 태어납니다. 이후 산모의 모유를 먹으면서 항체를 추가로 공급 받죠. 아기의 몸이 아직 생산하지 못하는 항체들을 말입니다. 그래서 아기는 산모와 거의 동일한 면역력을 갖게 돼요. 그런데 왜 무균실에서 생활해야 할까요? 그 아기의 산모는 건강한데 말입니다.”
"......."
“CCR5는 면역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직까지 과학계가 몰랐던 사실이죠. 이 유전자는 델타32가 발생했을 때는 노년에 감염을 조심해야 한다는 정도의 주의 사항이 생깁니다. 그러지 않으면 기대 수명이 줄어들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아예 유전자 자체가 작동하지 않은 경우. 이 같은 사태가 벌어집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그 아기는 선천적 면역 결핍 상태예요. 허찌엔칭 박사가 델타32를 도입함으로써 막고 싶어했던 에이즈와 비슷한 상태죠.”
"......."
“오히려 그보다 더 나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에이즈 바이러스는 치료제들이 많이 확보되어 있지만 이 유전 변이는 그렇지 않으니까요.”
류영준은 말을 마치고 허찌엔칭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특별히 화를 내거나 폭언을 쏟지 않아도 그의 기분이 느껴졌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침착하지만 거대한 분노.
허찌엔칭은 태어나 처음으로 간이 쪼그라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날 때부터 뛰어났던 두뇌를 한껏 발휘하며 살아왔던 그는 세상 모든 인간이 자기 발 아래 있다고 믿었다.
우월한 인간. 더 뛰어난 진보한 인간으로서 자신과 어깨를 견줄 만한 과학자들은 세상에 몇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 탄저균 테러를 막아내는 걸 보면서 류영준을 자기 머리 위로 올리긴 했지만, 여전히 자존감은 강력했다.
류영준과 지적인 차이가 나도 미미한 수준이고, 오직 본인만이 류영준의 친구이자 동료로 적합한 유일한 인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아니다.
이 사람은 독보적이다. 그의 지식과 천재성 앞에서 다른 모든 인간은 개미 같은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
“여러분.”
류영준이 말했다.
“제2의 피해자가 나오기 전에, 부탁드립니다.”
그가 모라토리엄 서류를 집어들었다.
“서명해주십시오.”
사각사각
사방에서 과학자들이 펜을 굴리는 소리가 났다. 허찌엔칭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에이젠바이오에서는 그 아기의 치료제를 개발했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질병이고, 유사한 모델의 동물조차 존재하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에 전임상이 좀 까다로운 상황입니다.”
그는 화면을 넘겼다. 캐스나인을 이용한 치료법에 관한 모식도가 나타났다.
“아기의 모든 골수와 모든 림프절 (Lymph node)에 캐스나인과 정상 CCR5를 집어넣는 어려운 실험 치료를 감행해야 합니다.”
캐스나인은 아기의 골수와 림프절에 있는 모든 세포로 들어가고, 그 안의 DNA에서 돌연변이가 삽입된 위치를 자른다.
DNA의 절단은 세포 입장에서 매우 치명적이기 때문에 자동으로 해당 DNA를 수리하는 세포 시스템이 작동하게 된다.
이때 정상 DNA 조각을 함께 넣어주면 일정 확률로 정상 DNA에 맞추어서 수리될 수 있다. 그럼 돌연변이가 제거되고 정상 유전자로 바뀌는 것이다.
절제 후 지지대를 삽입하여 봉합.
외과 수술과 비슷한 분자 세계의 메커니즘을 모든 골수의 조혈모세포와 림프절에서 진행해야 한다.
“이를 HDR (Homology Directed Repair)이라고 부릅니다. 본 임상에서는 이 방식으로 환아를 치료하고자 합니다. 모든 조혈모세포와 림프절의 DNA가 정상적인 구조로 치환되면 그로부터 생성되는 면역 세포들은 정상 작동할 것이고, 그럼 아기는 면역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서명을 마친 과학자들이 류영준을 쳐다보았다.
“캐스나인과 정상 DNA를 어떻게 세포 내에 도입할 겁니까? CCR5 조각은 작아서 금방 없어질 테지만 캐스나인을 발현하는 DNA는 바이러스를 쓸 경우 세포 내에서 생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어떤 부작용을 초래할지 모르는데요.”
크레이그 박사가 물었다.
“류 박사님은 전에 수지상세포를 이용해서 전달하는 방법을 쓰신 적 있는데 이번엔 그게 먹히지 않을 겁니다. 조혈모세포와 면역세포는 다르니까요. 다른 방법이 있나요?”
“그래서 이번에 캐스나인은 DNA 형태로 넣지 않습니다. 정제한 폴리펩타이드 (Polypeptide) 형태로 만들어서 슈퍼펙트 엑소좀 (Superfect-exosome)에 싸서 넣을 겁니다."
“효율이 충분한가요?”
“폴리펩타이드의 순도와 양을 컨트롤하면 됩니다. 약물 전달 부분은 이미 실험적으로 입증되었습니다.”
“흐음.”
기자들은 너무 빨리 지나가버린 전문 용어들을 받아적는 것도 버거웠으나 이곳에 모인 과학자들은 모두 저마다 한 가닥씩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득력 있는 얘기다.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역시 너무 거대한 작업이라 쉽게 엄두가 나지 않는다.
“전임상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누군가 말했다.
허찌엔칭은 뒤통수가 뜨거운 기분이었다.
전임상이 안 되는 이유는 허찌엔칭이 새로 만들어버린 질병이기 때문이다. 기존에 없던 것이라 동물 모델에서도 없다.
몇몇 과학자들은 혀를 차면서 허찌엔칭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이 최악의 상황의 해결안 역시 똑같은 과학의 힘에서 나왔다.
“기존에 존재하지 않는 동물 모델을 캐스나인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쥐 몇 마리를 배아 단계에서 유전자 조작하여, 쥐의 CCR5에 허 박사님이 만든 것과 동일한 돌연변이를 넣어서 키우고 있습니다. 그럼 미미와 비슷한 상태의 동물 모델이 되지요. 그 후에 그걸 교정하는 식으로 전임상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될지는 모릅니다.”
류영준은 현재 진척 상황을 화면에 띄웠다.
“만약 이 때까지 못 버티고 아기의 건강이 위험해진다면 전임상을 건너뛰는 각오도 하고 있습니다. 산모의 동의는 이미 받았고, 중국 보건부의 결재만 남아있는 상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