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 미세먼지 (9) >
앨리스는 통역을 멈췄다.
‘아직까진 허찌엔칭한테만 분노했다.’
여차하면 그 분노의 대상에 중국 정부까지 포함시킬 수도 있으니 지금 말조심을 하라는 뜻이었다.
앨리스는 이걸 정말 전해도 되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류영준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굴지의 제약계 대기업 대표에 천재 과학자라고 해도 한 명의 민간인이다.
이쪽은 미국과 어깨를 견주는 강대국의 정책 총괄자 중 하나가 아닌가?
‘이거 통역하고 나서 나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앨리스는 침을 꼴깍 삼켰다
“전해주세요. 괜찮으니. 아무 문제없을 겁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앨리스는 긴장한 표정으로 통역했다.
“후우……."
신 마오 장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류 박사님. 허찌엔칭 박사랑 적이 되지 마십시오. 우리는 중국 최고의 과학자를 보호해야만 하는 입장입니다.”
“제가 장관님이라면 당장 그 사람을 버리겠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곧 그 사람의 모든 명성은 산산이 박살날 겁니다. 그리고 모든 국제 사회가 중국을 지탄할 거예요. 그렇게 되기 전에 중국에서 먼저 처벌하십시오. 그리고 제가 발표할 모라토리엄을 채택해서 입법하세요. 그것만이 중국 정부가 국제적 망신을 막는 유일한 길입니다.”
"......."
장관은 골치 아픈 듯 이마를 움켜쥐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그렇게 말씀을 하십니까? 유전자 조작을 했기 때문에?”
“그 배경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궁금하십니까? 연구 윤리 위반 정도의 일이 아닙니다.”
류영준은 가방에서 서류철 하나를 꺼냈다.
“제가 지금까지 조사한 내용입니다. 애트목스와 글락소비록에서부터 시작된 이 사태의 전말입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곧 세계 주요 외신들에 의해 보도될 내용이기도 하고요.”
"......."
장관은 서류를 천천히 읽었다.
애트목스는 글락소비록의 매출 급감에 위기를 느끼고, 허찌엔칭과 모종의 합의를 맺었다.
GSC라는 이름을 앞세워 글락소비록의 용법 변화 임상 허가를 따낸 다음, 작은 병원에서 날림으로 임상을 진행했다.
이제 이 산모로부터 태아에게 에이즈가 유전될 가능성은 매우 높다.
몇 개월 살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시민들은 구체적인 용법 변화 같은 데는 관심없다. 글락소비록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정보. 그 두려움만 있으면 된다.
유전자 조작 아기는 과학자들에게 보여주는 한 편 논문이 아니라 지구촌 전체의 시민들의 흥미를 끌어모을 사건이 될 테니까.
이후에 벌어질 따분한 윤리 논쟁들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그들을 아군으로 만들어야 한다.
대중의 과학에 대한 몰이해는 글락소비록의 임상 실패와 CCR5 조작을 자연스럽게 연결해줄 것이다.
빨리 결과를 보고 싶어 조바심이난 허찌엔칭은 또 하나의 임상을 곧바로 진행했다.
에이즈에 감염된 산모들을 모집한 후 유전자 조작 태아의 출산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산모들은 어떤 설명도 제대로 듣지 못했으며 그게 유전자 조작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추가로 허찌엔칭은 몰랐을 테지만 CCR5 조작은 발생 중인 태아의 텔로미어 감축을 초래하고 상대적으로 단명할 수 있다.
게다가 허찌엔칭의 유전자 조작은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았고, 아기의 건강은 현재 매우 나쁘다.
“하아……."
신 마오 장관은 길게 한숨을 뱉었다.
‘허찌엔칭 이 자식 정말.’
나쁜 짓을 할 거면 제대로라도 하지.
“류 박사님 . 허찌엔칭 박사를 처벌하길 원하십니까?”
신 마오가 물었다.
“유전자 조작 자체는 관련 법이 없었다고 쳐요. 하지만 피험자에게 설명을 하지 않은 것, 부실한 전임상을 토대로 글락소비록의 용법 변화 임상을 함부로 진행한 것 등은 분명히 불법입니다.”
류영준이 답했다.
“곧 세계 주요 외신들이 이걸 대대적으로 보도할 겁니다. 저는 이미 유전자 조작 아기의 혈액을 확보해서 에이젠바이오로 보냈고, 그곳에서 유전자 분석을 한 데이터를 확보했습니다.”
“유전자 조작 아기라는 게 지금 세계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이슈이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고 있는지는 장관님도 잘 아실 겁니다. 그 연구의 진행 배경에서 일어난 비밀들, 그리고 심지어 그 유전자 조작에 허찌엔칭 정도 되는 과학자가 실패해서 아기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사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모을지는 장관님도 잘 아실 겁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유전자 조작에 반대하는 모든 보수적인 단체들, 종교 집단 등이 신나서 이번 유전자 조작을 물어 뜯을 것이고 중국 과학의 이미지는 심각하게 손상될 겁니다.”
신 마오 장관은 아랫입술을 질근질근 씹었다.
안 그래도 지금 사형수들의 장기 이식 건이 이슈가 되어 떠오를 조짐이 보인다.
허찌엔칭과 보건부 장관 등이 그 문제를 경고했었다.
그런 마당에 이런 사고까지 터진다면?
“좋아요.”
신 마오 장관이 말했다.
“허찌엔칭 박사는 중국의 규제당국의 법률로 처벌하겠습니다.”
“공정한 법 집행을 기대하겠습니다. 모두가 지켜볼 겁니다.”
“류 박사.”
장관이 말했다.
“네."
“중국으로 올 생각 없습니까?”
“중국으로요?”
“우리는 류 박사님이 한국 같은 조그만 국가에 있기에는 너무 큰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래가 어떻게 시냇물에서 살겠습니까?”
“죄송하지만 제 연구 기반이 모두 한국에 있습니다.”
“시설은 최고급으로 새로 지어줄 수 있어요.”
신 마오가 말했다. 하지만 류영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해주시더라도 지금 에이젠바이오에 있는 인력들을 데려가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겠죠. 그 중엔 미국인들도 많습니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이 안 열리는 건 어떻게든 참아내더라도 구글이 안 열리면 속 터져서 퇴사하고 귀국할 겁니다.”
"......."
“그리고 저희 회사에 있는 중국인 과학자들에게 얘길 들어보면, 중국에선 인터넷에 대한 규제 때문에 논문 한 편 읽을 때도 프록시 프로그램을 써서 아이피를 우회한다더군요. 특히 젊고 돈 없는 과학자들 중에서 그런 경우가 많다던데.”
“음.”
“논문 강독은 과학자의 가장 기본입니다. 이건 제가 개인적으로 드리는 조언인데, 그 규제들을 풀어주는 게 좋을 겁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과학은 커뮤니케이션이에요. 다른 과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30분간 읽는 것만으로 수년의 연구를 단축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 거대한 부자유의 페널티를 가지고 국제 무대에서 지금까지 해낸 것도 중국 특유의 저력 덕이지만 앞으로는 어떨지 모릅니다.”
“……류 박사는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과학에는 국경이 있어요. 류 박사는 과학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순진하게 말할 수 있는 거요. 국책 사업을 총괄하는 담당자의 입장에 서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에이젠과 합병하기 전, 에이바이오의 연구원은 80 퍼센트가 외국인이었습니다. 지분 구조가 아니라 인력풀 자체가 그야말로 다국적인 기업이었죠.”
류영준이 말했다.
“에이바이오의 급성장은 저 혼자 이뤄낸 원맨 쇼가 아니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모여준 그 인물들이 힘을 보태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죠. 장관님. 과학에는 국경이 없습니다.”
신 마오 장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류영준이 말했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연구하는 허찌엔칭 같은 인물은 모르겠지만,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순수하게 진실을 탐구하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려고 분투하는 사람들은 모두 동의할 겁니다.”
류영준은 자리에서 일어 났다.
“저는 자료를 전해드렸고, 하고 싶었던 이야기도 다 했으니 그만 가보는 게 좋겠군요.”
“류 박사님.”
신 마오가 붙잡았다.
“허찌엔칭은 중국 정부에 그동안 상당히 많은 연구정책 자문을 해주었던 인물입니다. 정, 재계에 허찌엔칭과 연이 닿는 인물은 엄청나게 많아요.”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저 말도 안 되는 임상시험들도 죽죽 통과되어 진행했겠죠. 아마 그 관계자들까지 처벌하셔야 할 겁니다.”
“중국 정부의 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시게 될지도 모릅니다. 류 박사를 걱정해서 하는 얘기에요.”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류영준은 부드럽고 완고하게 거절했다.
***
“뭐가 어째요?”
허찌엔칭은 경악한 표정으로 외쳤다.
“방금 말한 그대로야. 류 박사가 연구 윤리 협약에 대한 국제 모라토리엄을 발표할 거라고 하네. 우리보고 거기 사인하래. 그리고 허찌엔칭 자네를 엄벌에 처하랬어.”
“이 미친 자식이!”
허찌엔칭이 소리쳤다.
“중국 내에서도 날 건드리는 인물은 몇 없는데 감히 소국의 한 과학자가.”
“그렇게 치부하기엔 너무 큰 인물이긴 해. 자네도 그랬잖아. 차원이 다른 과학자라고.”
“머리 좋으면 몸도 좋답니까? 그 놈 아직 중국에 있죠?”
허찌엔칭이 물었다.
“제가 몰래 처리해버리겠습니다.”
“미친 짓 하지 마!”
신 마오 장관이 식겁하며 막았다.
“류 박사 옆에 경호팀도 잔뜩 있고, 그 경호팀을 포함해서 전부 다 공안청의 보호를 받고 있어.”
“공안이 왜 한국 민간인을 보호해요?”
“류 박사가 직접 공안의 보호를 요청했어. 한국 정부에서도 대사를 통해서 류 박사 경호를 요구했고. 어느 나라든 국빈 대접 받을 인물인데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지금 류 박사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외교 문제로 번지고 공안청은 박살 나.”
"......."
“그리고 지금 공안청 부총경감님이 자네 안 좋아하는 거 알지?”
"으......."
“내가 자꾸 여기저기 로비하면서 법 넘어다니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 부총경감님이 계속 벼르고 있었는데 이번 일 크게 터뜨리실 수도 있어.”
“젠장!”
허찌엔칭은 책상을 발로 쾅 걷어찼다.
“공장들 굴뚝 다 높여요! 동부 해안가에 알루미늄 생산 지대 추가 준설해요! 개자식이 진짜……."
“알루미늄 지대 공장 준설 부분은 자네가 뭐라고 하든 그렇게 진행할 생각이었어. 아무튼 그건 내가 맡을 테니 자넨 맘의 준비를 하고 있어.”
“장관님도 아셨잖아요!”
그가 소리쳤다.
“장관님도 제가 그 연구 진행하는 거 아시지 않았습니까?”
“난 몰랐는데.”
“거짓말! 임상등록부에 써서 올렸습니다. 과학기술대학교에서는 학교 차원에서 연구비를 쓰는 내역들을 위에 보고해서 올리도록 돼 있어요. 분명 행정관리총국에도 그 문건이 올라갔을 겁니다!”
“내 손에서 결재된 건 없어.”
“……장관님이 저를 이렇게 버리겠단 말입니까?”
“허 박사. 좀 진정해. 내가 손 닿는 데까지는 힘 써볼 테니까.”
신 마오가 말했다.
“좀 고생은 해야할 테지만, 구속해서 적당히 분위기 가라앉을 때 꺼내줄 거야. 그 때까지만 버티다가 나와.”
***
그러나 신 마오 장관은 다음 날 아침에 신문을 보고 충격에 말을 잃었다.
“이게 무슨……."
[거대 제약사 에이젠바이오, GSC 멤버십 과학자인 허찌엔칭과 애트목스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
박주혁의 법무팀이 애트목스와 허찌엔칭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걸었다.
에이젠과 에이바이오의 통합으로 세계 정상의 제약계 초거대기업이 된 게 불과 일주일 전.
지금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류영준이 오너다.
직접 연구를 지휘하면서 이곳에서 앞으로 도대체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전 세계의 시민들이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첫 행보가 소송이다.
게다가 그 액수가 경악할 만한 수준이다.
[청구액은 무려 100억 달러에 이르렀다.]
“백 억!”
신 마오는 몇 번이고 문장을 다시 읽었다.
[……이 천문학적 액수는 에이젠바이오 내부에서 캐스나인을 이용한 이후 연구들에 대해 발생할 제동과 기업의 이미지 손상을 고려한 액수다…….]
충격을 받은 장관은 신문을 넘겼다.
그 다음 페이지에는 모라토리엄 얘기가 나와 있었다.
[에이젠바이오 대표 류영준, 중국 베이징의 세인트레지스 호텔에서 국제 생물학 모라토리엄 개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