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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화. < 미세먼지 (5) > (45/301)

189화.  < 미세먼지 (5) >

허찌엔칭의 ‘인체 실험’이 어느 정도 양해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허찌엔칭이 태아의 CCR5를 조작했을 때 초래되는 부작용을 몰랐다는 것.

이쪽은 아마 거의 확실하다.

CCR5라는 유전자는 에이즈의 감염 경로로 유명해졌는데, 자연계에 돌연변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이미 많이 있다.

선천적으로 돌연변이를 가진 사람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에 허찌엔칭은 비교적 안전한 타겟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미 에이바이오가 CCR5 조작을 통해 에이즈를 치료하고 있지 않았는가. 비록 발생 단계에 있는 태아한테 한 건 아니지만. 또 하나의 조건은 시중에 유통되는 ‘CCR5 블라커’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이번에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아기들에게 다른 선택지가 험난한 경우를 말한다.

‘이 부분은 사실 나도 정확히는 몰랐지.’

류영준은 박주혁이 보낸 자료를 사무실에서 열었다.

총 33개의 소송 관련 서류들.

이들은 애트목스라는 대만의 제약회사에서 과거에 판매하던 글락소비록 (Glaxoviroc) 이라는 치료제의 임상에 관련된 건이다.

이 치료제를 투여할 경우 산모의 에이즈 바이러스가 태아에게 전달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성공률은 100%라고 보고되어 있지만 비교적 최근에 실패한 사례가 등장했다.

류영준은 소송 문헌들을 찬찬히 읽다가 박주혁을 불렀다.

갖은 법 용어들을 해석하는 데는 로잘린 힘도 통하지 않았으니까.

“아직 대법 판결이 진행중인 건이야. 1심에서는 애트목스 쪽의 과실을 인정해서 손해배상이 떨어졌고, 2심에서는 그게 뒤집어졌어.”

박주혁이 설명했다.

“이 임상에서는 약물의 농도와 투여 횟수 등이 기존의 글락시비록과 다른 거지?”

류영준이 물었다. 박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임신 5주차부터 일주일 간격으로 1회씩 계속 투여해야하는 약이래.”

박주혁이 말했다.

“하지만 저 임상 건에서는 애트목스가 글락소비록의 새로운 투여법을 개발했고, 그걸 애트목스가 소유한 병원에서 환자한테 임상을 했다는 거야. 애트목스 측은 환자의 동의를 충분히 구했고, 환자도 모든 걸 이해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상황이고.”

“동의를 구하고 일주일에 한번씩 투여해야하는 치료제를 임신 기간 내내 전혀 쓰지 않다가, 끝에 가서 10배 용량으로 출산 직전 3주 동안 투여했다?”

“뭐, 애트목스 측 입장은 그게 합당한 절차에 따른 임상시험이었다고 주장하는 거야. 그렇게 해도 성공할 거라고 예측했는데 실험에 실패한 것뿐이라는 거지.”

애트목스는 기존에는 임신 기간 동안 꾸준히 투여해야하는 약을 출산 직전에만 투여하는 방식으로 바꾸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연구의 방향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

약물의 투여 횟수가 줄어드는 것은 환자 입장에서 항상 바람직하다. 병원에 덜 가도 되고, 약물 부작용의 가능성도 더 줄어들 테니까.

그리고 처음 시도되는 신약이라는 것은 모두 실패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글락소비록의 새로운 투여법이 실패하는 건 참담한 일이지만 그 자체로 제약사를 비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환자가 글락소비록의 안전한 구버전 투여법을 알고 있었느냐는 거지.”

류영준이 말했다.

“맞아. 그 부분에 대해서 피해자와 애트목스 측의 진술이 달라지고 있어. 피해자는 아무런 설명을 못 들었다는 입장이야. 자기 애 목숨이 달렸는데 일부러 임상 모험을 하는 미친 산모가 세상에 어딨냐는 식이지. 물론 애트목스는 전부 설명했다고 얘기하고 있고.”

“임상 시험 동의서가 있을 거 아냐?”

“동의서에는 환자가 직접 사인했대. 하지만 그 동의서라는 게 온갖 의학 용어로 점철해서 환자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서류였고, 그걸 구두로 설명해줄 때는 다른 투여법이 있다거나 하는 설명은 안 했다는 거지.”

“피험자가 이해하지 못한 임상은 불법이야.”

류영준이 말했다.

“원론적으론 그렇지. 하지만 상대는 꽤 거대한 제약사고 이쪽은 힘없는 시민이니까. 대법까지 끌고 가는 것 자체만으로도 피해자 입장에선 하루하루 지옥일걸.”

"......."

류영준은 컴퓨터를 켰다.

주소 검색창에 P를 찍었다.

그러자 곧바로 자주 들어갔던 웹사이트의 주소가 떠올랐다.

https://www.ncbi.nlm .nih.gov/m/pubmed/

펍메드 (Pubmed)라고 불리는 사이트다. 미국 국립생물공학정보 센터(NCBI)와 미 국립 보건원(NIH)에서 운영하는 곳.

이 사이트는 논문의 검색엔진이다.

전 세계 모든 학술지에 올라와 있는 모든 논문를 찾을 수 있다.

류영준은 펍메드에서 글락소비록을 검색했다.

새 버전의 투여법이 나왔다면 그것에 대한 논문도 분명 출판되었을 것이다.

어느 정도의 전임상 연구를 기반으로 이 임상 시험을 진행했는지 찾아보고 싶었다.

"앗......."

논문을 찾아 화면을 내리던 류영준의 손이 우뚝 멈췄다.

처음 보는 어느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 하나가 잡혔다.

[CCR5 blocker인 글락소비록의 새로운 용법으로 투여량과 횟수를 줄일 수 있다.]

교신 저자 : 허찌엔칭

"......."

류영준은 논문 파일을 열면서 잠깐 생각에 잠겼다.

허찌엔칭.

그냥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적어도 허찌엔칭은 과학자지 기업가가 아니다. 그가 애트목스에서 일한다는 얘긴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 논문은 애트목스의 펀딩으로 진행된 연구의 결과물이다.

에이즈와 CCR5 블라커를 두고 이렇게 주연들이 겹치는 경우는 우연이라기엔 좀 어색하지 않은가?

입술을 매만지던 류영준은 박주혁에게 말했다.

“하나만 더 확인해주라.”

“뭔데?”

“허찌엔칭 박사와 애트목스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

***

베이징으로 돌아온 허찌엔칭은 중국 공안의 심문을 받고 있었다.

“허찌엔칭 박사님 때문에 정부가 여러모로 난처합니다?”

공안청의 부총경감이 말했다.

“하하. 미안합니다. 하지만 과학이란 게 원래 이런 겁니다. 경감님. 차가 달리려면 연료는 어쩔 수 없이 불타서 희생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아기가 건강이 안 좋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죽거나 하면 국제 사회의 지탄을 받을 거예요. 그리고 그 경우 중국 정부는 당신을 보호하지 못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 실험을 우리가 허가해줬다고 하면 중국은 비인도적인 인체실험의 장이 되어버립니다. 그것도 자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곳이요. 우리는 관련 의혹은 전부 부인할 거고, 모든 문제는 허찌엔칭 박사. 당신 개인의 일탈이자 불법 연구였던 것으로 결론지어질 겁니다.”

“하지만 사실 공안청에선 더 끔찍한 짓도 하잖아요?”

탁.

경감이 경찰봉으로 허찌엔칭의 턱 아래를 눌렀다.

“말 조심.”

“경감님. 제가 입 다문다고 조용해질 일이 아니에요.”

허찌엔칭이 말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 하나 얘기해드리죠. 제 친구가 네이처 쪽에 논문을 한 편 실으려고 했는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뭡니까?”

“그 논문은 중국에서 장기 이식 수술을 받은 환자들의 수술 후 경과와 회복에 대한 의료 정보 데이터를 모은 논문입니다. 네이처 편집자들이 이걸 실어야 하나 고민 중이에요. 데이터는 끝내주게 훌륭한데도요. 그 이유는 바로.”

허찌엔칭이 말했다.

“중국 내의 사형수들의 장기가 무단 이식된 것이기 때문이죠. 그걸 의심하는 사람들이 좀 있습니다. 솔직히 저한테만 털어놔 보시죠.”

"......."

“정치범, 민주 운동가들 등을 포함하는 사형수들의 집행 날짜는, 중국 내 높으신 분들의 장기 이식 수술 날짜와 항상 겹친다던데.”

“……헛 소릴……."

“사전에 미리 수요 조사와 거부반응 가능성을 조사한 다음, 사형 집행장과 가까운 근처 병원의 수술실을 예약해놓고 사형 집행을 하자마자 바로 배 갈라서 장기를 꺼낸 다음, 산지직송으로 수술실로 전달하는 것 아닙니까? 그 이슈 때문에 네이처 편집자들이 그 논문을 싣지 못하고 있어요.”

"......."

“물론 그건 네이처 놈들이 멍청이들이라서 그런 겁니다. 데이터 자체에 무슨 죄가 있습니까? 제 친구 역시 그 장기 이식하고 아무런 관련도 없습니다. 그냥 수술 환자들의 건강을 추적한 게 다죠. 그걸 학계에서 공유하면 의학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건데 사형된 놈들도 기뻐할 겁니다. 이왕 죽은 목숨인데요.”

“그 얘기 또 누가 압니까?”

“지금은 몇 명밖에 모릅니다. 네이처에서도 새 논문은 보안 사항이니 잘 감추고 있죠. 저야 뭐, 그 논문 저자랑 친분이 있으니까 직접 들은 것이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좀 있으면 사이언스가 본진인 과학자들 귀에까지 다 들어갈 걸요. 이 바닥이 생각보다 좁거든요. 물론 확인은 안 된 ‘소문’들이겠지만.”

허찌엔칭이 교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근데 저는 윤리 그런 데 관심 없습니다. 저는 연구를 하고 새로운 걸 알아낼 수 있으면 그걸로 만족해요. 경감님 정도 되시면 아시겠죠. 그거 사실이에요? 아니에요? 너무 궁금하더라고요. 그게 진짜면 제가 한 짓은 귀여운 수준 아닙니까?”

"......."

“만약 진짜라면 그 장기들, 조금만 저한테 연구용으로 기증해주실 순 없습니까?”

“뭣......!”

경감의 얼굴에 충격이 번졌다.

“거부 반응 여부가 항상 일치하는 환자가 존재하는 건 아닐 거 아닙니까? 사형수의 종류에 따라서 수요가 없어서 ‘남는 장기’도 있겠죠. 해보고 싶은 연구들이 있어서 그럽니다.”

“당신 미쳤는가!”

경감이 소리를 질렀다.

"GSC라고 지금 편의를 많이 봐주고 있는 거야. 시건방 떨지 마! 당신은 불법 펀딩과 불법 연구로 지금 이곳에 조사 받으러 와있는 거라고!”

“제가 약속하는데, 그 아기는 건강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 진짜 괴물 같은 과학자가 맡기로 했거든요. 누가 유전자 조작 건을 지탄하면, 그게 에이즈 유전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하면 됩니다. 글락시비록도 최근에 실패했다고요.”

“글락시비록?”

“에이즈 유전을 막는 치료제 중 하납니다. 뭐 용법 차이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사람들이 거기까지 파고들어 따지겠습니까.”

허찌엔칭이 말했다.

"......."

“뭐 이건 개인적인 부탁이기 때문에, 나중에 상황 봐서 천천히 해주시고요. 사례는 섭섭치 않게 해드릴 테니. 근데 저 이제 가봐도 됩니까? 보건부랑 행정관리총국 사람들하고 미팅이 있거든요.”

허찌엔칭이 말했다.

“미세먼지 때문에요.”

“미세먼지?”

“우리 국민들의 호흡기 건강을 위해서예요.”

허찌엔칭은 빙긋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국민 건강 발전을 위해서 이렇게 노력합니다.”

***

“말도 안 돼……."

류영준은 논문을 읽으면서 충격에 빠졌다.

이건 전임상이라 할 만한 데이터가 아니다.

실험에 사용한 동물의 마릿수는 너무나 적고, 약리 기전과 독성 테스트, 배출 여부의 검사는 모두 불명확했다.

허찌엔칭 정도 되는 사람이 이렇게 실험을 한다고?

이건 사기꾼들이 ‘과학 논문’ 이라는 표현을 빙자할 때 쓰는 일종의 학술 찌라시다.

그 마법의 표현만 하나 붙이면 온갖 유사 과학들도 신뢰도가 급격히 상승하니까.

게재된 학술지가 어느 곳인지, 논문이 정말 동료들의 검증을 거쳤는지 등은 일반인들이 알 수 없으니까.

“유 비서님.”

류영준은 유송미 비서에게 연락했다.

“중국 쓰천성 대학 병원 쪽에 방문 일정 좀 잡아주세요. 중국어 통역도 한 명 붙여주시고요.”

그가 말했다.

“방문 목적은 CCR5 조작 아기인 ‘미미’와 그 보호자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병원 측에 전달하고 보호자와 약속을 잡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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