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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화. < 미세먼지 (4) > (44/301)

188화.  < 미세먼지 (4) >

거대한 암흑 속으로 류영준의 정신은 빠르게 침전하고 있었다.

로잘린의 시각으로 파고드는 공간은 깊이 350미터 정도의 지하.

이 땅속 세계에는 광물뿐만 아니라 석유와 천연가스, 메탄 등의 바이오매스가 다량 존재한다.

보통 생명체가 살 수 없을 것 같은 극한의 환경.

하지만 생명의 신비은 이곳에서조차 미생물들을 진화시켰다. 그들은 다양한 바이오매스를 먹거나 생산하면서 이곳에 생존한다.

슈도모나스 (Pseudomonas) 속의 질산 환원균과 플라보박테리움 (Flavobacterium) 계통의 발효균들.

방향족탄화수소를 분해하고 질산과 염소산, 황산 이온을 전자 받개로 이용하며 에너지를 생산하는 경이로운 생물체들이 그곳에 있다. 이제는 류영준의 시각에 뚜렷하게 잡혔다.

그들은 세포 내에 포낭이라는 작은 저장 공간을 가진다.

이곳의 pH를 조절하면서 질산염이나 황산염을 보존한다.

‘찾았다.’

류영준은 들고 있던 노트에 빠르게 펜으로 무언가를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이형민의 발표를 듣던 셀리제너의 과학자들이 그를 쳐다보았다.

사각사각사각

적막 속에 류영준의 펜이 내는 소음만이 미팅룸 안에 울려퍼졌다.

이번 동기화 모드는 유전자 몇 개를 살펴본 게 아니라 미생물들의 소기관을 통째로 뜯어본 것이다.

머릿속의 이미지가 흐려지기 전에 빨리 이 통찰의 결과물을 정리해서 남겨야 했다.

‘……. 대체 뭘 쓰고 계신 거야?’

류영준의 옆에 앉은 김수철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의 노트를 힐끔 살폈다.

-Pseudomonas Nitrolis

-Flavobacterium SulIfosis

4.000 rpm centrifuge

cell lysis w/ CodonPlus-RIL buffer.

7.000 rpm centrifuge sup collect

FPLC.

포낭을 다공성 탄소 페이퍼에 도포. 37C 50min. Inverting

‘와 이게 뭐야?’

실험 프로토콜 (Protocol)이었다.

젤 위에 있는 둘은 미생물 종의 이름으로 보였다.

하지만 지금 연구는 기획 수준에 머물러 있는 상태다.

이런 구체적인 실험 방법을 계획할 만한 시기가 아니다.

‘이게 대체 무슨…….'

“필터는 이렇게 개발하면 됩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일반 공학용 다공성 탄소 페이퍼에 미생물 기반 포낭을 도포하는 겁니다. 그 다음엔 별도의 처리를 하지 않아도 포낭에 질산염과 황산염이 포집될 거예요. 나중에 그걸 물에 한번 담그기만 하면 질산과 황산을 물에 녹여내서 모을 수 있습니다.”

그가 방금 쓴 쪽지를 앞에 앉은 송지현에게 내밀었다.

"......."

송지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쪽지를 받아들어서 읽고는 최연호 대표에게 전해주었다.

“서울 시내에 승용차가 300만 대라고 할 때, 각 차량마다 적어도 열 장 이상의 필터를 부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한 장에 1킬로그램까지 질산염과 황산염을 포집할 수 있을 거예요.”

류영준이 말했다.

“100 킬로미터 정도 주행하면 질산염과 황산염이 2 킬로그램 정도 모일 테고요. 그럼 한 대가 1,000 킬로미터 정도 주행했을 때 20 킬로그램을 모으는 셈인데.”

"......."

“문제는 20 킬로그램의 비료 가격이 얼마 안 한다는 거예요. 그걸 팔기 위해서 셀리제너까지 차를 몰고 오는 운전자는 없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죠. 이 필터들을 주유소에 보냅시다.”

“주유소요?”

최연호가 물었다.

“어떤 차든 주유소는 반드시 들리게 되어 있으니까요. 우리는 전국 각지의 주유소에 필터를 무상 공급하는 겁니다. 주유소를 중간 유통업체로 만드는 거예요.”

“주유소 직원들이 주유하면서 고객 차량에 필터를 붙여주고 다 된 필터를 구매해서 보관했다가 우리한테 판다는 건가요?”

송지현이 물었다.

“맞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필터들을 물에 한 번씩 담가서 질산과 황산을 빼내고 다시 주유소로 보내면 돼요.”

류영준이 말했다.

“카본 페이퍼는 얇고 색깔도 조절할 수 있으니, 차량 외관상으로도 별로 티가 나지 않을 겁니다. 운전자한테는 아무런 부담이 없을 거예요. 그리고 운전자와 주유소, 셀리제너 셋 다 적지 않은 수익이 생기고 공기 질을 개선하는 사업이 되겠죠.”

"......."

“수익을 대강 모델링해봅시다. 20 킬로그램의 필터를 운전자한테 10,000원에 주유소가 구입해요.”

류영준이 말했다.

“휘발유 50리터를 채우면 8만 원 정도 드니까 그 중에서 만 원을 깎을 수 있으면 적은 금액이 아닙니다. 주유비에 허덕이는 대부분의 시민들은 기꺼이 할 겁니다.”

류영준은 다시 노트에 펜을 휘갈기며 수익 모델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 11,000원 정도에 셀리제너가 산다고 해봅시다. 하루에 1,000대의 차량이 들리는 주유소를 기준으로 할 때, 주유소 업주는 한 달에 3천만 원 정도의 수익이 추가로 발생합니다.”

“3천……!”

“그 정도의 차량이 지나지 않는 주유소라도 수익이 적어도 수십에서 수백은 되겠죠. 아마 이렇게 진행하면 주유소들이 앞장서서 홍보 하고, 필터를 붙이는 운전자들에게 주유비 할인 행사 같은 걸 해줄 가능성도 높습니다. 그럼 우리는 돈 한 푼 쓰지 않아도 운전자들을 유인하는 상당한 홍보 효과를 얻겠죠.”

류영준이 말했다.

“셀리제너에선 그 필터들을 모아서 물에 담가 질산염과 황산염을 빼고 2차 정제해서 비료로 바꿀 겁니다. 시중에서 20 킬로그램의 비료가 2만 원 정도에 거래됩니다.”

류영준은 미리 찾아보았던 자료를 가방에서 꺼냈다.

“그리고 국내의 연간 미세먼지 총량은 수백만 톤에서 천만 톤 이상으로까지 추정되는 상황이죠? 국내 농업 전체를 통틀어서 연간 비료 사용량은 얼마일까요?”

그가 말했다.

“50만 톤 정도밖에 안 됩니다.”

농업에서 쓰이는 양이 적은 게 아니다.

미세먼지가 너무 많은 것이다.

미세먼지는 그야말로 ‘미세’해서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그걸 한데 모으면 그 양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국내 등록 차량 대수가 2300만 대 정도 됩니다. 그 중 실제 운행하는 건 절반 이하라고 하더라도, 아마 셀리제너가 혼자서 그 50만 톤을 다 충당하고도 한참 남아서 해외로 팔아야 할 겁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오히려 농업의 비료 시장 붕괴라든지, 미세먼지가 ‘너무 없어져서’ 이 사업을 스스로 갉아먹어버리는 경우를 조심해야할 수도 있습니다. 그 위험성을 고려해서 기술 공급이나 필터를 붙이는 ‘혜택’을 받는 차량 수를 억제해야할 수도 있어요.”

"......."

“제가 지금 수익 모델을 짜드린 건 단순 계산이고, 이 부분을 고려해서 좀 더 안전한 접근을 해야 할 겁니다.”

류영준은 말을 마치고 직원들을 쳐다보았다.

"......."

미팅룸에 있는 셀리제너 직원들은 모두가 충격에 굳어 있었다.

김수철은 그야말로 황홀할 지경이었다.

그가 느끼기엔 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정도다.

운전자는 주유비의 10 퍼센트 이상 혜택을 보고, 주유소는 연간 수천만 원에 이르는 엄청난 부가수익을 올리고, 셀리제너는 기존 농업 비료 시장을 상회하는 생산량을 갖게 된다.

미세먼지를 모아서 비료를 만들자는 얘길 최연호 대표가 처음 할 때만 해도 이게 무슨 개소린가 싶었다.

‘근데 그걸 현실로 옮기는 사람을 만나니까 결과물이 완전 판타지잖아…….'

충격을 받은 것은 김수철만이 아니었다. 류영준과 오래 일을 한 송지현도 물론이고, 처음 아이디어를 주창한 최연호조차 놀랐다. 최연호는 숨을 꼴깍 삼키면서 류영준에게 말을 걸었다.

“이……이 쪽지에 있는 미생물 두 종은 어떤 겁니까?”

“질산염과 황산염을 이용하는 박테리아의 일종입니다. 그 박테리아를 직접 쓰는 건 아니고, 박테리아가 세포 내에 가지고 있는 포낭이라는 소기관을 분리하는 겁니다. 그 과정이 제가 드린 쪽지에 있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이 탄소 포낭 필터는 물에 담가서 황산염과 질산염을 빼내고 건조하면 사용 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갑니다. 거의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으니, 초기 투자만 좀 하면 돈 들 일은 그리 많지 않을 거예요.”

“그…… 아직 에이젠바이오랑 수익 분배에 대해서 확정 짓지 않았는데……."

최연호가 말했다.

“이렇게 중요한 아이템을 계약서 작성 전에 저희한테 주셔도 되는 겁니까?”

“사실 수익이 많이 나봤자 비료 산업 수준인데, 저한테는 그리 큰 돈은 아닙니다. 제가 그 정도로 많은 일을 여기서 한 것도 아니고요.”

류영준이 말했다.

“수익을 에이젠에게 나눠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 일은 셀리제너에서 독자적으로 진행해주세요.”

“수익을 안 가지신다고요!”

최연호가 경악했다.

다른 과학자들도 헉 소릴 내며 입을 틀어막았다.

“오랫동안 같이 일한 파트너 기업에 대한 선물이라고 생각해주세요. 저도 셀리제너……. 정확히는 송 박사님의 도움을 그동안 꽤 받았고, 앞으로도 많이 받을 생각이니까요. 하지만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류영준이 말했다.

“필터 디자인에 에이젠바이오의 제7 연구소 마크를 달아주십시오.”

“제7 연구소요? 에이젠에 일곱 번째 연구소도 있었습니까?”

“아뇨. 만들 겁니다. 사실 아직 상표도 없습니다. 하지만 곧 제작해서 보내드릴 테니, 그 상표를 거기 박아서 써주세요. 셀리제너 상표를 같이 써도 됩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이 사업을 이용해서 에이젠바이오의 제7 연구소의 출범을 본격적으로 홍보할 생각이거든요. 앞으로 거기서 세상을 바꾸는 아이템이 많이 나올 겁니다.”

***

‘달리는 미세먼지 저감 필터’의 생산법은 그리 까다롭지 않다. 웬만큼 실험에 숙련된 과학자라면 쉽게 해낼 수 있는 프로토콜이다.

셀리제너에서 필터를 제작하는 과정은 빠른 속도로 착착 진행되었고, 불과 며칠만에 시제품이 나와서 차량에 달고 주행 테스트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류영준은 에이바이오의 구 사옥 실험실에서 간단한 실험을 하고 있었다.

‘우리 대표는 진짜 일에 미쳤어…….'

그 모습을 본 과학자들은 저마다 혀를 내둘렀다.

실험실 이사와 합병 및 체제 개편으로 인해 다들 어수선한 시점이다.

류영준 본인이 연구자들한테 2주간 실험 프로그레스가 나오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각자의 새 연구소, 새 포지션으로 자리를 옮기는 과정에서 누락되는 데이터나 중요 실험 샘플의 분실 등의 문제들을 방지하기 위한 배려였다.

근데 류영준은 거기에 더해 기업 합병을 직접 진행하는 대표이사직에 있으면서도, 그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쪼개 실험을 또 한다.

“제가 개인적으로 하는 일이니까 신경쓰지 마세요.”

혹시나 직원들이 눈치를 볼까봐 류영준은 실험실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게 일하라는 무언의 압력이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류영준은 그냥 직접 시키는 타입이지, 빙빙 돌리면서 눈치 주는 건 본인이 귀찮다고 질색할 테니까.

하지만 이곳은 류영준만한 괴짜들이 꽤 득실대는 곳이다.

“어, 제이콥, 이번주는 실험 안 해도 되는데요.”

원심분리기를 돌리던 류영준은 옆자리에서 DNA를 정제하는 제이콥을 보고 말했다.

“저도 개인적으로 하는 겁니다. 확인해보고 싶은 아이디어가 하나 있어서요.”

"......."

류영준이 게슴츠레하게 쳐다보자 제이콥이 말했다.

“진짜예요. 이건 근무 수당 안 주셔도 돼요. 지난 주말에도 나와서 잠깐 했던 거예요.”

“그래요?”

“저만 하는 것도 아니고요. 다른 분들도 이 때다 싶어서 옛날부터 호기심에 해보고 싶었던 것들, 실험 잘못돼도 밑져야 본전이라고 테스트하고 있는걸요.”

“그렇군요.”

“시험 재료 좀 낭비하는 건 이해해주십쇼. 근데 어차피 이사하면 소모품들 싱당수는 새로 살 테니까요.”

-그 대표에 그 직원이군요. 끼리끼리 논다더니.

로잘린이 말했다.

류영준은 머리를 긁적이며 수고하라고 제이콥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연구로 돌아갔다. CCR5 유전자 조작의 해법을 찾는 일이다.

지이이잉.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박주혁이었다.

[전에 요청한 자료 준비했다. 첨부 파일 열어봐. -CCR5 블라커 신약 임상 실패 건에 대한 소송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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