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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화. < 세균전 (6) > (40/301)

184화.  < 세균전 (6) >

윤대성의 갑작스런 등장에 에이바이오 정문에서부터 직원들이 술렁였다.

지금까지의 일련의 소동 중에도 윤대성은 건강을 핑계 삼으며 쭉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에이젠도 아닌 에이바이오에 나타난 것이다.

다른 임원이나 수행원을 대동하지도 않은 채.

표정은 비참했고 몸에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사방의 수군거림을 뚫고 윤대성은 조용히 무거운 걸음을 옮겨서 류영준의 사무실 앞에 이르렀다.

“대표님. 윤대성 대표님 오셨습니다.”

유송미 비서가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녀 역시 윤대성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약간 얼어 있었다.

류영준이 문을 열어주자 윤대성은 방 안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입니다. 건강이 안 좋으시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십니까?

류영준이 물었다.

“솔직히 얘기하면 그 동안은 건강은 괜찮은 편이었는데 이제 급속히 나빠졌습니다.”

윤대성은 쓰게 웃었다.

“아드님 때문에요?”

류영준이 물었다.

"......."

윤대성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못난 놈입니다.”

그가 말했다.

“류 박사님. 윤보현이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고 계시지요?”

“네."

류영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설치도록 일부러 내버려두셨던 건가요?”

“국내로 넘어올지도 모르는 테러에 대응하는 게 최우선이었습니다. 신경 쓸 여유가 없었어요.”

“그랬군요."

윤대성이 말했다.

“저는 그 애한테 어릴 때부터 과학을 가르쳤습니다. 항상 논리나 이성을 중요시하고, 감정적인 것들을 멀리하게 했죠."

"......."

“사실 그 애는 어릴 땐 시인이 되고 싶어 했어요. 어울리지 않게 시집을 좋아했죠.”

“정말 안 어울리는군요.”

류영준이 피식 웃었다. 윤대성도 따라 미소지었다.

“제가 못 읽게 했습니다. 돈벌이도 안 되는 데다가, 사회에 더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일을 하라고 했죠."

"......."

“다 제 탓이에요.”

윤대성은 눈을 감았다.

에이젠의 힘이 아직 미약하던 때, 윤대성이 자신의 아버지를 도우면서 함께 회사를 일으키던 시절.

윤대성은 당시에 한국에서 매우 드물었던 명문대 유학파 박사이자 엘리트 과학자였다.

유학하면서 친분이 깊어진 김현택을 연구소장으로 데리고 와서 본격적인 연구들을 진행했다.

매출은 하나도 없고 벤처 캐피털로부터 다음 시리즈 펀딩을 받기 위해 분투했지만 실패했다.

“조금만 더 연구하면 좋은 아이템이 됩니다. 이건 국제 시장에서도 경쟁력 있는 항암제예요! 세포 실험에서 상당히 좋은 결과들이 나왔고 동물 실험 데이터도 좋습니다.”

윤대성의 아버지는 벤처 캐피탈 투자자들에게 무릎까지 꿇었다.

젊은 윤대성은 바로 곁에서 그걸 모두 지켜보았다.

“그래도 임상은 어떨지 모르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당신들은 기초 연구에 너무 많이 힘을 써요.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건 가시적으로 상품의 전망이 보이는 겁니다.”

캐피탈의 부장은 딱 잘라 거절했다.

“과학을 하는데 기초 연구 없이 어떻게 진행을 합니까?”

“기초 연구 그런 건 학교에 맡기셔야지. 돈을 만들어야 할 회사가 이런 데 힘 빼면 어쩝니까?”

“국내의 어느 대학도 그만한 수준이 못 됩니다! 우리 나라가 과학을 제대로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요? 기초 연구 시설도 인력도 전부 다 모자란단 말입니다.”

“그럼 그 인프라 성장에 투자해야 할 때네요. 기업이 아니라.”

“그때는 늦어요! 지금 생물학이 의학의 최신 트렌드로 부상하기 시작한 이 시점에 20년, 30년씩 미래를 기약할 순 없습니다. 지금 당장 미국 같은 강대국의 제약사들을 따라가야 해요! 기초 연구가 모자란다면 그것부터 우리 손으로 해야 해요!”

“그렇게 얘기해봤자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아니 그리고 그렇게 장기적인 일. 정부에서도 당신들한테 펀딩을 안 해주잖아요? 어떻게 민간 벤처 캐피탈에게 그렇게 요구하십니까?”

“정부는……."

“할 말이 없죠?”

“정부는 우린 진즉에 포기했어요. 하지만 벤처 캐피탈은……."

“그만. 이제 돌아가세요.”

힘 빠진 걸음으로 회사를 향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윤대성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 나라는 과학을 할 만한 나라가 아니다.’

윤대성도 김현택도 그걸 느꼈다.

그리고 자금난으로 회사의 임직원들의 월급이 밀린지 세 달.

“돈을 좀 끌어올 방법이 하나 있는데.”

지광만은 윤대성과 김현택을 은밀하게 불러서 말했다.

“탄저균 무기를 개발하는 겁니다. 미군이 이 사업을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어요.”

“미친 소릴! 그건 국제 협약 위반이야! 들통나면 회사가 문 닫는 정도가 아니라 감옥에 간다고!”

김현택이 역정을 냈다.

“그러니 우리끼리 조용히 처리하자는 겁니다. 누가 뭐래도 지금 한국 최고의 과학자 두 분 아니십니까? 미국 명문대에서 유학하고 네이처에 논문 실은 생물학자가 한국에 지금 몇이나 있다고? 우리의 실력은 충분해요. 그걸 못 알아보고 바이오 기초 연구의 중요성을 직시 못하는 이 나라가 문제지.”

지광만이 말했다.

"......."

“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 이 나라는 에이젠 같은 기업을 키울 능력이 없어요. 민간도, 정부도, 과학의 트렌드를 읽을 눈이 없습니다. 대학들은 모두 선진국에 비해 20년씩 뒤처져있고요.”

"......."

“하지만 지금 에이젠을 성장시키지 않으면 이 나라는 국민 건강을 선진국에 담보 잡힌 국가가 되고 맙니다.”

“하지만……. 탄저균 무기 같은 건 어떤 대량 살상을 일으킬지 모르는 거야. 어찌 보면 핵무기보다 위험해.”

윤대성이 말했다.

“그건 저도 압니다.”

“그건 세균이야. 인류의 적들 중 하나라고. 그런 걸 개발하면서 우리가 과학을 발전시키는 데 무슨 의미가 있지?”

“……. 윤 박사님. 아니, 대성 형님. 애들만 생각합시다.”

지광만이 말했다.

"......."

“세균이라고 하셨죠? 말 나왔으니 말인데, 전에 형님 댁에 갔을 때 보현이가 컴퓨터로 세균전이란 게임을 하더군요. 지금 우리 상황이 그거랑 똑같아요.”

지광만이 말했다.

“딱 한 번의 과감한 수를 둠으로써 지금의 모든 위기를 우리의 자산으로 색칠할 수 있습니다.”

"......."

“방법이 이런 것밖에 없다는 게 너무 한스럽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이대로 회사를 파산시키고 형수랑 보현이 데리고 길거리에 나앉을 겁니까?”

“좋아. 생각이 바뀌었어. 나는 찬성이야.”

김현택이 말했다. 윤대성은 깜짝 놀라면서 그를 돌아보았다.

김현택이 말했다.

“세균전 말 잘 했네. 지금 우리 어깨에는 단순히 벤처 회사 하나가 아니라 국민 건강도 달려 있어. 슈마틱스 같은 기업들이 후진국 상대로 약값을 후려치는 거 알잖아? 한국에는 한국의 빅파마가 있어야 해. 최소한 복제약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인프라라도 갖춰야 한다고. 탄저균은 안전 장치를 충분히 걸어두면 괜찮을 거야. 암수를 나눈다거나.”

"......."

윤대성은 한참 고민했다.

하지만 쉽게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내일까지 확답을 주지.”

집으로 돌아간 윤대성은 윤보현이 하는 게임을 지켜보았다.

픽셀 그래픽 게임이다. 오목처럼 두는데 상대의 세균을 가로 세로 또는 대각선으로 감싸면 내 것으로 변해버리는.

내 세균은 하나뿐이고 상대는 세 개가 있다 해도, 내가 상대방 세균들의 반대편에 한 수를 두면 다섯 개를 모두 가질 수도 있다. 금세 상황이 역전되는 것이다.

[LOSE]

“에이.”

여덟 살 윤보현은 게임에서 지자 컴퓨터를 꺼버렸다.

그는 뒤에 앉아있던 윤대성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재밌니?”

윤대성이 물었다.

“별로. 그냥 심심하니 하는 거지.”

윤보현이 투정부리듯 말했다.

“근데 아빠. 엄마가 그러는데 우리 이사가야 할수도 있대.”

"......."

“이사 가면 내 방도 없어질 수 있대. 진짜야?”

윤대성은 아들의 눈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이사 가기 싫어?”

윤대성이 물었다.

"응......."

“엄마가 다른 말은 안 하셨어?”

“이사 가면 학교도 옮겨야 할지도 모른다고……."

“아빠도 회사 옮겨야 할지도 몰라.”

“왜?”

윤보현이 물었다.

“지금 아빠 회사가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우리 나라 사람들이 잘 모르거든.”

“왜 몰라?”

“그러게. 나도 모르겠다.”

유학을 마치고 엘리트 과학자가 되면, 연구 능력이 있으면 회사의 성장은 일사천리일 줄 알았는데.

“세상은 증명된 것에만 관심이 있을뿐, 잠재력에는 투자하지 않더라.”

윤대성은 아들을 꼭 안았다.

“그리고 진짜 필요한 것보다 당장 눈앞의 돈만 보더라고.”

윤보현은 전혀 이해 못한 듯 눈을 멀뚱거렸다. 윤대성은 피식 웃었다.

“보현아. 너는 무슨 일을 하든 항상 네가 얼마나 잘하는지, 사람들이 감히 의심을 못할 정도로 똑똑히 보여줘라. 누가 네가 하는 일에 토를 달지 못할 정도로. 너보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널 평가하고 네 인생을 좌우하게 두지 마.”

"......?"

“누가 네 걸 빼앗아가려고 하면 모든 수를 써서 물리치고 지켜내.”

"응......."

“그리고 우리 이사 안 갈 거야.”

윤대성이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윤대성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어제 WHO에 보고되어 공개된 류 박사님의 자료를 봤습니다. 거기에 아프리카 탄저균의 정보가 다 나와 있더군요.”

“맞습니다.”

“저랑 김 소장이 옛날에 개발한 것하고는 달랐고요.”

“네."

“보현이가 김 소장 병실에 갔던 것 알고 계십니까?”

“압니다.”

“……. 그 애가 그곳에 주사기를 흘렸는데 국과수가 조사한다더군요.”

“하지만 거기서 탄저균의 DNA는 나오지 않을 겁니다. 그 DNA는 모두 파괴된 상태거든요.”

“정체를 알 수 없으면 국과수가 류 박사님한테 조사해 달라고 의뢰할까요?”

“그럴 수도 있죠.”

“류 박사님은 거기서도 새로운 방법을 써서 탄저균을 검출해내실 수 있죠?”

“네."

윤대성은 빙긋 웃었다.

“역시 그렇군요.”

그는 차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모든 게 제 탓입니다.”

그가 말했다.

“제가 부족해서 보현이가 그렇게 자랐어요.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우리가 만든 물건이 그 누구도 해치지 않은 것은 전부 류 박사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멸균을 잘 하셨기 때문이죠.”

“하마터면 진짜 테러 무기의 죄목을 모두 덮어쓸 수도 있었으니까요.”

"......."

“그리고 병원에서는 보현이를 구해주기도 하셨죠. 류 박사님한테는 항상 빚만 지는군요.”

“옛날에 미국 학회에서 제이미 앤더슨하고 부딪힐 때. 니콜라스 기술 이사님하고 같이 직접 찾아오셔서 절 지원해주셨죠."

류영준이 말했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그리고 저는 대표님이나 윤보현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류영준이 말했다.

“연구 윤리는 다른 문제입니다. 용서나 친분 같은 걸 떠나서 그 생물 무기의 개발은 밝혀져야 하는 사실이에요. 미군에게 책임 소재가 있다면 미군까지도 지탄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항상 그렇듯이 구멍이 없으시군요.”

윤대성이 빙긋 웃었다.

“류 대표님이 제게 베풀어주신 선의도 이제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오래 기다리셨죠.”

윤대성이 말했다.

"......."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윤대성이 말했다.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저는 이제 류 박사님을 믿고 에이젠을 떠날 겁니다. 보현이와 함께 저희 각자의 몫의 벌을 받으러 가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윤대성은 류영준에게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으로 나가는 그의 발에는 약간의 기운이 회복되어 있었다.

“가지."

회사 정문에 윤대성보다 약간 늦게 도착해서 쭉 기다려온 니콜라스가 말했다.

그는 윤대성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김현택도 지광만도 사라졌다.

하나뿐인 아들은 몸과 마음 모두에 큰 타격을 입고 무너졌다.

니콜라스와 함께 리무진에 오르는 윤대성의 모습은 이제 결심을 굳혀 편안했지만 쓸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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