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3화. < 세균전 (5) > (39/301)

183화.  < 세균전 (5) >

-저 말하는 건가요?

로잘린이 류영준에게 물었다.

‘그런 거 같은데.’

-하지만 어떻게?

류영준은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쳐다보았다.

-지금은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한텐 이 이름이 더 익숙하니 이대로 얘기할게요. 어차피 누굴 말하는 건지 알 테니까.

닥터 레프가 말했다.

류영준은 휴대폰을 힐끔 살폈다.

경찰한테 닥터 레프의 전화에서 신호를 추적해달라고 요청했다.

좀 더 시간을 끌어야 한다.

-내가 질문을 한 가지 하죠. 생물학 질문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답을 찾아내지 못할 유일한 질문이죠.

“얘기해 보세요.”

-세상의 대부분의 고등 생물은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성별이 있는 것’의 장점이 무엇일까요?

닥터 레프가 말했다.

“유전적 다양성. 어이가 없군. 이런 걸 질문이라고……."

류영준이 대신 대답했다.

일반생물학 때 배우는 가장 기본 지식 중 하나다.

생물체의 제일 간단하고 효과적인 번식 방법은 박테리아처럼 이분법으로 증식하는 것이다.

그러면 굳이 성관계 같은 활동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성별을 갖고 성관계를 할 경우, 부모의 유전자를 반씩 섞은 자손을 만들 수 있다. 결과적으로 유전적 다양성이 높아진다.

“그 다양성이 환경의 변화에 적응할 힘을 줍니다.”

-맞습니다.

닥터 레프가 말했다.

-그럼 로잘린. 왜 성별은 남성과 여성, 두 개가 존재하는 걸까요?

"......?"

류영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모든 개체가 모든 개체와 관계해서 유전자를 섞을 수 있을 때 유전적 다양성을 가장 극대화될 겁니다. 성별을 둘로 나누는 것은 절반의 개체와 유전자를 섞을 기회를 포기하는 일이죠.

"......."

-유전적 다양성의 증진이라는 목적과도 멀어지고, 미생물의 증식처럼 효과적이지도 않아요. 왜 이런 비합리적인 방식이 탄생했을까요?

로잘린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로잘린. 당신은 모든 생명 현상의 정답을 전부 알지만 이건 모릅니다. 그 이유는.

닥터 레프가 말했다.

-당신은 생명체가 아니기 때문이죠.

"......."

-생명 현상의 대원칙은 ‘자기 복제’예요. 모든 생물은 자손을 만들고 싶어합니다. 물론 매력이 떨어진다거나, 태어날 때부터 불구라거나, 다양한 이유로 실패할 수 있죠. 하지만 그 욕망 자체는 모든 생명의 핵심이에요.

닥터 레프가 물었다.

-로잘린. 당신에게 그런 게 있습니까?

로잘린의 표정이 굳었다.

-당신은 류영준의 몸의 일부가 되었을 뿐. 별개의 생명체가 아니에요. 가장 단순한 미물인 바이러스조차도 라이틱 싸이클 (Lytic cycle)에 들어가면 숙주로부터 벗어나서 독립적인 생활을 하는데 말이에요.

라이틱 싸이클이란 바이러스가 숙주의 DNA로부터 탈출해서 생체 물질로 몸을 감싸고 세포 밖으로 나가는 걸 말한다.

-당신은 불완전합니다.

닥터 레프가 말했다.

-나한테 오세요. 내가 당신을 완성시켜줄 수 있습니다. 난 생명창조에 있어 세계 최고의 전문가거든요.

"......."

“닥터 레프. 다 끝났습니다.”

바하둘이 주사기를 챙겨들며 말했다.

-수고했습니다. 복귀하세요.

닥터 레프가 아랍어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바하둘 일행은 전화기를 둔 채 문밖으로 튀어나갔다.

하지만 그들은 탈출할 수 없었다.

복도 끝에서 경찰특공대와 마주쳤기 때문이다.

류영준은 로잘린과 공유된 시각에서 그들이 올라오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당신의 부하들은 체포될 겁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의 통화도 추적되고 있죠. 이제 다 됐다고 메시지가 왔군요.”

류영준이 휴대폰에 떠오른 문자를 보면서 말했다.

“당신은 끝났어요.”

-그래요. 탄저 살포에 실패 했을 때 이미 안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바하둘 한텐 미안하지만.

닥터 레프가 말했다.

-안 되면 별 수 없지. 다음 기회를 찾는 수밖에.

찰칵.

통화가 끊어졌다.

류영준은 문밖으로 나섰다.

로잘린의 시야를 살폈다.

복도 저 끝, 아래로 내려가는 비상 계단에서 팔레스타인 인민해방 전선의 군인들이 모두 체포되어 있었다.

***

“엘시한테 메일을 보냈지만 아직 답장은 못 받았습니다.”

천지명이 말했다.

“그래요.”

류영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을 꼭 만나보고 싶은데 방법 없을까요?”

“출장 내주시면 제가 미국으로 가서 찾아보죠.”

“그러실 수 있나요?”

“옛날에 그 사람 집에 가본 적 있습니다. 미국에 학회를 갔을 때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류영준이 말했다.

천지명 박사가 나간 후 류영준은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로잘린이 전에 없던 우울한 분위기로 앉아 있었다.

“로잘린.”

류영준은 로잘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 사람은 틀렸어요.

로잘린이 말했다.

-저는 왜 성별이 둘로 나뉘어졌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건 일종의 진사회성 (Eusociality)이에요. 출산이라는 거대한 생존 페널티를 특정 개체군에게 몰아줌으로써 나머지 개체군의 활동성을 높이고 그로 인해 집단 경쟁력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겁니다.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진사회성이에요.

"......."

-그리고 성별이 두 개일 때 오히려 유전적 복잡성은 더욱 높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절반의 파트너를 버리는 대신 다른 절반을 찾기 위해 더 장거리를 이동하게 되기 때문이에요. 지역적인 분리로 인한 유전적 다양성의 한계를 넘을 수 있죠.

로잘린이 말했다.

-그 사람은 엉터리예요.

“그래.”

-감히 그 하찮은 지식으로 날 가르치려고 들다니. 아무것도 모르면서. 기껏해야 원시 수프의 자손 중 하나인 주제에.

로잘린은 주먹을 꾹 쥐었다.

-그 사람은 아무것도 몰라요!

로잘린이 류영준을 홱 돌아보며 외쳤다.

-그 사람이 김현택의 혈액을 가져가려고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어요! 그 안에 있었던 병원성은 제가 이미 전부 파괴했다고요. 그건 가져가도 아무 쓸모없는, 그냥 김현택의 피예요!

"......."

-생명 창조는 46억 년에 한번 간신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에요. 제가 탄생한 건 전부 우연의 일치였어요. 그 사람한텐 생명체에 대해 전지한 힘이 없어요.

“그렇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고작 수십 년간 그 보잘 것 없는 대뇌 피질과 해마에 축적한 한 줌 지식으로 감히 나한테 그딴 소릴……. 류영준은 피식 웃었다.

“신경쓰지 마.”

그가 로잘린에게 말했다.

“네 말대로 그 사람은 엉터리야. 난 확신할 수 있어.”

-.......

“과학은 인류를 견인하는 선한 힘이지, 누가 독점할 수 있는 과실 같은 게 아니야. 왜냐면 우리 모두는 거인의 어깨 위에 있기 때문이지.”

-거인의 어깨?

“뉴턴이 한 말이야. 과학자가 남들보다 멀리 볼 수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이 눈이 밝아서가 아니라 ‘이전의 과학’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가서라고.”

-……솔직히 당신은 이전의 과학이 아니라 제 능력으로 보는 건데요.

“하하. 그렇지.”

류영준이 작게 웃었다.

“넌 특별하지. 그러니까 마음 쓰지 마.”

-……근데 저는 자기 복제의 욕망이 없어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도 하고요. 그건 사실이에요.

“글쎄, 아직 어려서 그런 건 아닐까? 레벨이 좀 높아지니 이젠 내 몸을 떠나서도 30분씩 생존할 수 있잖아?”

-.......

“더 자라면 어떨지 모르지.”

같은 시각, 로잘린만큼 우울한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닥터 레프였다

“센 척 했지만 솔직히 괴롭네.”

그녀는 앞에 잔득 늘어놓은 술병들을 옆으로 와르르 쏟아버렸다.

양주 하나를 새로 땄다.

병째로 입에 대고 꼴깍꼴깍 마시고는 책상에 풀썩 쓰러졌다.

“왜 그래?”

그녀의 옆자리에서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남자가 물었다.

“로잘린이 거기 있는 것 같아.”

닥터 레프가 말했다.

“예상하고 있었던 거잖아?”

남자가 물었다.

“그래.”

“당신이 그랬잖아. 닥터. 류영준이 하는 일들을 볼 때, 저건 로잘린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맞아 하지만 대체 어떻게 성공했지?”

닥터 레프가 고개를 번쩍 들며 물었다.

“난 수백 번, 수천 번을 실패했어! 내가 만든 로잘린들은 전부 사멸해버렸단 말이야. 짧으면 몇 분, 아무리 길어도 사흘 내외로.”

“진정해.”

“진정? 내가 지금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그동안 내 곁에서 죽어나간 로잘린들을 지켜보는 게 어떤 고통이었는지 알아? 난 지금."

그녀가 울컥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자식을 뺏긴 기분이야……."

"......."

“그것도 불임으로 오래 시달린 끝에 간신히 얻은 아이를 뺏긴 기분이라고.”

“이 바닥에서 스쿱 (Scoop) 당하는 거 흔한 일이잖아.”

스쿱은 과학계의 은어다. 연구하고 있는 주제로 성과를 발표하기 직전에 다른 팀이 논문을 내서 선수를 쳐버리는 경우를 뜻한다.

“닥터. 네가 더 오래, 네 어머니 때부터 연구했다고 해도 류영준이 먼저 완성시킬 수 있어. 그리고 그건 그 사람의 잘못이 아냐.”

닥터 레프는 남자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래. 그 말이 맞지.”

그녀는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목걸이의 로켓을 열었다.

그 안엔 엘시의 사진이 있었다.

닥터레프는 그걸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하지만 난 아직도 그걸 따라잡지 못하겠어. 내 어머니 때부터 연구를 했는데도. 김현택의 피를 얻으면 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했는데 결국 류영준이 방해했고.”

“다른 방법들을 생각해보자.”

남자가 말했다.

“로잘린한테 진사회성을 암시해줬어. 어쩌면 이 세계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시 생각할지도 몰라. 류영준이 시키는 대로 착실하게 행동하는 일벌이 아니라 새 세계를 만들 수 있는 여왕벌이라는 걸.”

닥터 레프가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당신한테 올까?”

“몰라. 그건 차세대 생명체야. 우리 같은 원시적인 지성체들이 예측할 수 있는 게 아냐. 그리고 내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그녀가 말했다.

“어쩌면 아직 류영준의 몸을 떠나서는 살지도 못할걸.”

닥터 레프는 답답한 듯 술을 들이켰다.

***

[한국을 향한 생물 테러. 그 아찔한 위기와 과학자들의 대처.]

며칠째 특집 방송이 수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류영준 박사는 질병관리본부와 협력하여 일반인의 그랜드하얏트호텔 이용을 모두 차단한 후, GSC 국제회의를 진행시켜 생물 테러의 미끼를 자처했습니다.

-볼케니움이라는 극호열성 박테리아를 이용해, 공기 중에 살포된 탄저균을 모두 제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동안 류영준 박사가 침묵했던 이유는 테러범들이 잡힐 때까지 이쪽이 방심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류영준 박사는 이미 에이젠에서 대량의 탄저균 감염 치료제를 확보해둔 상태였으며, 유사시에 이를 국민들에게 공급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잠잠했던 뉴스는 폭발적으로 쏟아져나왔다.

-에이젠 사는 이미 치료제의 절반이 아프리카로 전달되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고 있으며, 이번 테러를 안전하게 방어했기 때문에 아프리카에 전하는 비율을 높이겠다고 전했습니다.

류영준이 이전에 달성한 위업들은 모두 사람들의 찬양과 축하를 받았지만 이번에는 훨씬 강렬했다.

같은 시점에 국과수의 수사 결과도 나타났다.

-국과수는 김현택 연구소장의 몸에서 탄저균과 관련된 그 어떤 증거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더욱 결정적인 증거가 터졌다.

-류영준의 살인 혐의와 생물 무기 개발 혐의를 주장했던 윤보현 씨가, 지난 테러 사건 때에 김현택의 중환자실에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병실에서는 윤보현 씨의 지문이 묻은 주사기가 발견되었습니다. 윤보현 씨가 국과수 조사를 앞두고 왜 그곳에 있었는지에 대해 경찰이 조사하고 있습니다.

-윤보현 씨는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을 뻔 했으며, 다행히 류영준 대표의 도움으로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부상으로 인해 경찰의 조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입니다.

“대승인데 왜 표정이 썩어있냐?”

박주혁이 물었다.

“뭐가 대승이야.”

류영준이 의자에 앉아서 발을 까딱거리며 대꾸했다.

“요즘 분위기 어떤지 알아? 너 안티들 전부 버로우 탔어. 트위터 읽어줄까?”

박주혁이 휴대폰을 꺼냈다.

-와 진짜 빛 그 자체다 이제……. 하다하다 이제는 테러를 막네

-잠깐이나마 의심했던 과거를 회개합니다. 용서해주세요.

“그만해. 낯 간지럽다.”

류영준이 말했다.

“그보다 주혁아. 특별히 볼일 없으면 그만 가봐. 나 손님 오기로 돼있어.”

“손님? 아!”

박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 끝나면 불러.”

“당연하지.”

박주혁은 바깥으로 나가 복도 창문으로 회사 정문을 내려다보았다. 리무진 한 대에서 중년의 남성이 내렸다.

그건 지난 두어달 사이에 20년은 늙어버린 듯한 윤대성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