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 세균전 (4) >
“아아악!”
윤보현의 비명소리가 병실에 울려퍼졌다.
그는 박살난 코와 광대를 움켜쥐고 주저앉았다.
“비켜.”
바하둘은 그의 어깨를 붙잡고 거칠게 끌어당겼다.
와당탕 소릴 내면서 쓰러진 윤보현의 손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좌르륵
작은 주사기 하나가 깨끗하게 관리된 병실 바닥에 미끌어져 굴러갔다.
팔레스타인 인민해방 전선의 군인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다.
-무슨 소리예요?
닥터 레프가 물었다.
“주사기입니다. 이 남자가 가지고 있었어요.”
-주사기?
“그러고 보니 제가 막 들어왔을 때 수액 팩에다 주사를 꽂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의료진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
닥터 레프는 잠깐 생각을 고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그녀는 몇 초간 호탕하게 웃다가 말했다.
정확한 발음의 한국어였다.
-거기 있는 사람. 윤보현이거나 윤보현이 보낸 사람입니까? 솔직하게 대답해요. 내가 당신을 살려줄 수도 있으니까.
"......."
윤보현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바하둘과 전화기를 쳐다보았다.
“마……맞습니다. 윤보현입니다.”
-하하하! 정말 웃기는 상황이네. 김현택의 정맥으로 탄저균을 주입하고 그걸로 류영준을 살인죄로 엮어 넣으려고 했나요?
"......."
-하찮은 잔꾀야 정말.
닥터 레프가 말했다.
-진짜 한심하군요. 아프리카에서 유행하는 탄저균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아직도 모르는 건가? 이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당신 빼고 이제 다 알고 있을 것 같은데.
“무……무슨 소릴……."
-게다가 당신이 가지고 있는 에이젠의 탄저균 개발용 샘플은 이미 DNA가 모두 파괴된 상태라서 김현택의 몸에 주입해도 검출되지도 않아. 머저리 같은 놈. 내가 이런 것한테 잠깐이나마 기대를 걸어봤다니.
"......."
-바하둘이 GSC나 병원에서 탄저 가스를 살포하는 게 실패했다고 했어. 대충 상황이 짐작이 돼. 류영준이 방어하는 데 성공한 거야. 구체적인 전략은 모르겠지만.
“타, 탄저 가스를 살포해……?”
윤보현이 잔뜩 몸을 웅크리며 물었다.
-그래. 당신이 류영준을 잡아보겠다고 기세 좋게 움직이는 걸 보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 실패했네.
"......."
-당신은 자신이 류영준을 잡을 수 있는 전략가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그냥 이 게임판 위에서 굴러다니는 말 중에 하나 였어. 이제 주제 파악이 좀 되나?
"......."
-말 나온 김에 좀 알려주지. 윤보현. 당신은 안전하고 풍요로운 선진국에서 돈 많은 재벌 가문의 독자로 태어났어. 엘리트의 교육을 받고 에이젠 같은 대기업을 물려받기 위한 후계자로 길러졌어. 그래서 항상 남들보다 우월하다 느끼고 자신의 계획으로 모든 걸 컨트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고, 제3 세계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나 질병은 그저 돈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했을 거야. 그러니까 탄저균 샘플을 남수단 반군에게 보내면서 류영준을 부러뜨리려는 계획을 세웠겠지. 그 잔인함은 내 입장에서도 용서가 안 돼. 그런데 말이야.
닥터 레프가 말했다.
-죽음이라는 건 신분을 가리지 않아.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평등을 추구하는 특성이지. 그리고 모든 과학자가 싸워온 유일한 인류의 적이야.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절대 불변하는 명제와 싸워왔다고. 과학은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의 한계를 넘기 위해 지금까지 분투해온 거야. 넌 그런 건 조금도 모르겠지. 그깟 푼돈 조금, 경영권 지분 한 조각을 위해서 일해왔으니까. 넌 과학자가 아니야.
"......."
-그리고 그 때문에 넌 목숨을 걸어본 경험이 없어. 생물 안전 4등급 실험실에 우주복을 입고 들어가서 에볼라를 만져본 사람은 아무리 멀리 떨어진 제3 세계의 국가를 표적으로 하더라도 생물 무기를 쉽게 건넬 수 없지. 하지만 이제는 너도 전장 속에 있다. 윤보현. 남의 목숨을 노릴 때는 너도 목숨을 걸어야 해.
“무슨……. 무슨 소리야. 당신은 대체 누구……."
닥터 레프는 대답하는 대신 아랍어로 바꾸어 명령을 내렸다.
-처리해요. 바하둘.
픽.
바하둘은 품속에서 예리하게 다듬어진 군용 나이프를 뽑았다.
윤보현은 아랍어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이제 어떤 일이 전개될지 알고 있었다.
“우아아악!”
공포에 질린 윤보현은 출입문을 향해 달아났지만 바로 코앞에서 나세르에게 붙잡혔다.
쾅!
나세르는 윤보현을 움켜쥔 채 바닥에 내리꽂았다.
쩍 소리와 함께 뒤통수에서 피가 흘렀다.
"......."
윤보현은 눈이 풀려서 그대로 축 처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 그의 가슴팍을 향해 바하둘이 칼을 역수로 쥔 채 내리 꽂았다.
깡!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휴대폰 하나가 날아와서 바하둘의 얼굴을 찍어버렸다.
고통으로 칼이 빗나갔다.
하지만 윤보현은 여전히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출입문 입구에 류영준이 서있었다.
“경찰을 불렀다. 움직이지 마. 셋 다.”
류영준이 영어로 말했다.
_이 사람들은 영어를 못해.
전화기에서 닥터 레프가 말했다.
"......."
바하둘은 코를 문지르면서 일어났다.
“침입자가 하나 더 나왔습니다. 죽일까요?”
-목소리를 보니 류영준 같은데, 건드리지 마세요. 바하둘. 전화기를 책상 위에 세워놓고 김현택의 혈액을 채취해요. 이제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윤보현은요? 아직 살아있을 수도 있습니다.”
-죽이려고 하면 류영준이 막겠죠. 상관없어요. 윤보현 같은 피라미는 무시하세요. 혈액 채취가 최우선입니다.
“알겠습니다.”
바하둘은 전화기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가방에서 주사기를 꺼냈다.
-류영준. 드디어 우리가 대화를 하게 됐군요.
닥터 레프가 전화기 너머에서 한국어로 말했다.
“당신은 누굽니까?”
-난 닥터 레프. 물론 가명입니다. 그리고 이번 테러를 뒤에서 조작하고 윤보현을 이용한 사람이에요.
류영준은 전화기를 가만히 쏘아보았다.
“당신의 본명이 엘시입니까? 생명창조 부서에 옛날에 있었던.”
-.......
닥터 레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정말 놀랍군요. 거기까지 추측했다니. 하지만 아닙니다.
“왜 테러를 일으키려고 했죠?”
-김현택 연구소장의 혈액을 채취하기 위해서였죠.
"......."
류영준은 바하둘을 쳐다보았다.
그는 주사기로 김현택의 혈액을 뽑고 있었다.
“사람 피 하나 뽑아가기 위해서라고 하기엔 너무 큰 스케일로 일을 벌였다고 생각되는데요.”
-이 정도는 해야 당신의 시선을 다른 데에 묶어놓을 수 있었을 테니까요.
“김현택 소장의 피를 왜 가져가려는 겁니까?”
-이 안에는 로잘린이 탄생하면서 만들어진 병원성 물질이 있을 테니까.
"......."
[와, 이 여자 뭐예요?]
로잘린이 옆에서 놀란 표정으로 류영준을 쳐다보았다.
‘나도 모르겠다.’
류영준은 전화기를 가만히 쏘아보았다.
일단 잡아떼볼까.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요.”
류영준이 말했다. 하지만 닥터 레프는 코웃음을 쳤다.
-하하. 평생 정직하게만 살아와서 그런가, 연기에는 별로 소질이 없으시네요. 국어책 읽는 줄 알았네.
"......."
로잘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류영준.
닥터 레프가 말했다.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두고 영토 분쟁이 벌어진 국가예요. 뭐 자세한 사정은 위키피디아나 두들겨보세요. 잘 사는 강대국의 똑똑한 시민들이 정리해놓은 게 나와 있을 테니까.
"........"
-한 가지 내가 알려주고 싶은 것은 백린탄이라는 무기에 대해섭니다.
“백린탄?”
-포스포러스 믹스처 (Phosphorus mixture)와 벤진 (Benzine)을 물로 나누어놓은 폭약이에요. 발화점이 60도 정도로 매우 낮고 한 번 발화하면 격렬한 화학 반응을 일으키면서 대량의 독성과 열을 발생시키죠.
"......."
-한번 불이 붙으면 물을 덮어써도 쉽게 꺼지지 않아요. 운 좋게 불을 끈다 해도 백린이 그대로 지방에 녹아서 신체에 흡수되어 화학 독성으로 사망시키죠.
닥터 레프가 말했다.
-직접 닿지 않는다 해고 발화하면서 나오는 독성 가스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해요. 포스포러스 펜톡사이드 (Phosphoms pentoxide)라는 가스죠. 피부나 점막에 노출되면 살이 녹아 내리는 엄청난 고통을 초래하고 그 자체로도 죽을 수 있어요.
"......."
-지금은 살상용으로 사용되는 게 금지된 국제 무기지만, 그런 제네바 협약 따위 말장난에 불과해요. 난 실제로 그 백린탄에 희생당한 가족의 딸이니까.
“백린탄에 희생당했다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분쟁이 있었다고 했죠? 이스라엘은 155mm 백린 포탄을 UN이 설립한 민간인 학교와 그 인근 지역에 떨어뜨렸습니다.
"......."
-내 친구들과 가족들은 모두 죽었고, 어린 나도 심각한 부상을 입었죠. 전신에서 작렬하는 화상통과 콧속과 폐를 갈가리 찢는 듯한 통증. 잿더미가 되어버린 사람들. 불이 붙은 채로 살려달라고 울부짖은 아이들. 그런 광경은 직접 체험해보지 않으면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그 느낌이 전달되지 않아요. 그리고 또 한 가지 놀라운 점.
닥터 레프가 말했다.
-당시 이스라엘 시민들은 산에 올라가서 맥주를 마시면서 그 광경을 구경하며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고 축제를 벌였다는 거예요. 마치 폭죽놀이라도 보는 것처럼.
"......."
-먼 과거에는 인간이 전쟁을 벌여도 기껏해야 칼로 누굴 찌르는 정도였습니다. 더욱 과거에는 돌로 후려치는 수준이었죠. 하지만 보세요. 류영준. 이 세계의 그 어떤 생물이 인간처럼 대량 학살을 벌이고 그걸 즐기는지?
닥터 레프가 말했다.
“B급 영화에 등장하는 매드싸이언티스트가 할 만한 설교가 아닙니까? 그런 게 당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봤자 당신은 그저 테러범입니다.”
-후후. 이런 설교가 혈리우드에서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찍는 픽션 오락 영화에서 악역의 철학으로 소비되는 것도 지긋지긋하고 환멸이 나요. 당신조차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군요. 그게 오락거리가 되는 것이야말로 정말 끔찍한 부분인데 말이죠.
"......."
-그리고 한 가지 더. 난 백린에 희생당해서 그 복수심으로 움직이는 테러범이 아니에요. 난 이미 그들을 용서했거든요.
“용서했다고?”
-왜냐면 그게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이에요. 인간은 본래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고 사디즘적인 성질이 있거든요. 이건 옳다 그르다하는 가치 판단이 아니에요. 실제로 인간이란 동물이 그렇게 생겨먹었다는 거죠.
"......."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과학은 대중의 것이 되어선 안 돼요.
닥터 레프가 말했다.
-보세요. 당신이 아무리 뛰어난 약을 만들어도 누군가는 사람 눈에 종양을 심으려고 하고, 누군가는 이프리카에 탄저 무기를 공급해서 전쟁을 유도하려 하잖아요?
"......."
-총 한 자루를 소지하는 데에도 정부에서 휴대 허가를 받아야 하는 세상이에요. 하지만 왜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지식의 핵심은 대중에게 오픈 소스로 공개되죠? 심지어 규제를 하는 와중에도 허찌엔칭 같은 머저리가 사람들 눈을 피해서 CCR5를 조작한 인간을 탄생시켰는데도?
닥터 레프가 말했다.
-무기 제조사들이 아프리카에 무기를 팔아먹고 전쟁을 부추기는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과학은 대중의 것이 되면 안 됩니다. 그건 당신 같은 소수의 윤리적인 엘리트가 독점한 채로, 그 산물을 자애롭게 무지몽매한 시민들에게 나눠줘야 하는 거예요. 과학은 그런 힘입니다.
"......."
-그래서 난 당신을 해치지 않은 거예요, 류영준. 당신은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윤리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당신의 사상이 어떻든, 목적이 무엇이든, 그 수단으로 생물 테러를 저지른 시점에서 당신은 범죄 조직 테러범일 뿐입니다. 당신은 대중의 자격을 평할 수 없어요.”
-참 좋겠어요, 그렇게 선악을 분명하게 나눌 수 있어서.
닥터 레프가 말했다.
-류영준. 아니, 로잘린에게 직접 얘기하지. 지금 거기서 듣고 있죠?
로잘린이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동그래진 눈으로 류영준을 쳐다보았다.